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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예레미야 양명수 목사............... 조회 수 1924 추천 수 0 2007.12.18 20: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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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8:5-6 
설교자 : 양명수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여러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는 듣지 못했어도 이러한 공동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요즈음 교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역할을 잘하지 못하고 또 상식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많아지는 마당이라서인지 이런 공동체에 대해서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주보에 있는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을 보니 참으로 좋았고, 상당히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새길교회에 마땅한 말씀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즈음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꼭 나보고 하는 말씀 같다 하는 생각이 들고 또 우리 교회를 향해서, 교회를 보고 하는 얘기 같다는 그런 확신이 들어서 제가 받은 은혜를 정리해서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예레미야서 8장의 말씀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누구나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예루살렘 백성은, 왜 늘 떠나가기만 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마들처럼 떠나갔다."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마들처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휩쓸려서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지 않으면 목숨이나 걸린 것처럼 우르르 몰려가는 이러한 성경의 말씀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마치 저의 심령 또 어떻게 보면 교회의 모습을 보고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이 구속되는 사태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삼풍의 사건도 그 책임자가 교회의 안수집사라고 하며 어떤 신문사의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자기도 그 교회에 나가고 있으며, 지금 교인들이 굉장히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은 그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다 알려져 있는 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라며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 얼마 전에 구속된 어떤 장관 되는 분도 저하고 같이 어떤 총회 쎄미나에서 그분은 교회 장로로서 나와서 강연을 했던 그런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당하면서 믿음이 좋다는 게 무엇인가, 믿는다는 게 무엇인가, 교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됩니다. 그분들 개인을 비난한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현상들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그러한 모습이 아닌가, 그러한 사건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또 두려운 마음으로 교회가 어떻게 해야되는가 라고 돌이켜 보게 됩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이 세상에서 지은 죄를 주일날 한번 오면 정당화해주는 그런 곳인가? 교회는 분명히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 곳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느끼는 곳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의 용서함을 받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값싸게 받는 것인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깊이 느낄수록 자신의 죄가 두려워서 떠는 마음으로 우리가 교회에서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은혜를 느끼고 감격이 있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들지 않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과는 별개로 어떤 성공을 부추기면서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저지른 죄를 정당화해주는, 나 구원받았으니까 별일 없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 남들도 다 하기 때문에 같이 저지른 그런 잘못들을 교회는 별일 없는 곳으로 정당화해주는, 한번 교회에 왔다 가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그런 곳이 교회 모습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안 믿는 다른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 7장 3절부터 보면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 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살도록 하겠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탐욕은 우상숭배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늘날 이 세상의 욕심과 탐욕과 잡신들 즉 우상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관철하려고 하는 이런 교회의 현실을 두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배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땅위의 것을 더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닌지, 땅의 것을 영광으로 삼으면서 그 영광을 더욱 더 얻기 위해서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닌 지 그런 것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우리는 이미 죽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골로새 교회에서 바울이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은 밖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던지 간에 교회에 들어오면 우리는 죽고 새로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겉으로 보이는 생명 말고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 새로운 생명이 씨앗을 가지고 새롭게 피어 나가는 그런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성공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부추기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선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의로울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할 수 없을 뿐더러 선한 행위라고 하는 것 그 자체도 알고 보면 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행실로 의로워질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여김 받을 뿐입니다. "너는 나를 믿었으니 내가 의롭게 여기겠다." 마치 부모가 자식이 특별한 좋은 일을 해서 의롭게 착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부모를 믿어주는 그것을 보고 의인으로 생각하듯이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다고 해서 의로워 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구조적인 악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 자식이 정당하게 시험을 쳐서 대학 입시에 합격하면 감사헌금을 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데 그것은 귀한 마음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자를 만들면서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우리는 의로워 질 수 없고 오직 자식이 부모를 믿을 때 부모의 인정을 받듯이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바로 이야기하지 의인의 이야기를 뺍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정확하게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의로워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선한 행위로 의로움을 받는 사회입니까? 바울이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은 인간의 문화의 바탕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강한 자가 의인으로서 인정받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약하지만 선한 행위를 하는 자가 인정받는 것이 인간 문화의 바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문화의 바탕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선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인정을 받는 인류의 문화의 바탕 그것을 무너뜨려야 하나님을 인간이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악한 사람은 벌을 주고 선한 사람은 의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문화가 종속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문화로부터 도망가지는 않지만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문화의 바탕, 선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인정을 받는 그것마저도 무너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바울이 본 죄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선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인정받는 사회도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선한 행위를 한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야 믿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전달이 되는 데, 우리사회는 선한 행위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공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 속에는 그 성공을 정당화해주는 행위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공만 하면 그 사람의 인품까지도 다 정당화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교회는 그러한 것을 부추기고 있지나 않는지, 또 나도 그 흐름 속에서 마치 군마가 전쟁터로 몰려가듯이 그렇게 몰려가면서 살고 있지나 않는지, 하나님을 고독하게 만들고 있지나 않는지, 그런 생각을 우리는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서 해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 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세상에서 줄 수 없는 하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 살 때 때로는 예수 때문에 다른 사람만큼 성공할 수도 있는 데 성공하는 길을 포기했다고, 때로는 예수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니까 두려워서 다른 사람만큼 돈을 벌 수 있었는데 돈을 벌지 않았다고, 이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값아 주실 것이라고 우린 그렇게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자유한 길인지 또 얼마나 복된 길인지 그것을 체험하고 증거 하면서 사는 게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소수인 것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7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예레미야는 이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라. 너는 그들을 도와달라고 나에게 호소하거나 간구하지도 말고, 나에게 조르지도 말아라. 나는 이제 너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찌르는 말씀입니다. 꼭 오늘의 우리나라의 교회를 찌르는 말씀같이 저는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이 화가 난 것입니다. 성경을 구약부터 보면 이 세상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대로 산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을 보아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어떤 사람 때문에 그 백성을 다 살려 줍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보면 모세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그런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어떤 사람 그를 봐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백성을 위해서 하는 기도조차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아라. 그들은 자기의 우상을 성전 안에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내 앞에서 관철하려고 한다. 내 얘기를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내게 설득하려고 한다." 그것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는 죽고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태어나야 하는 데 자기를 더욱 더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애들을 씁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 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얘기를 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얘기를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황 속에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물론 고상한 기도만 하라는 그런 얘기는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이 급해지면 하나님 돈 좀 주십시오, 병을 좀 낫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아픈 사람은 병이 낫게 되는 게 최고의 구원입니다. 당장 쌀이 떨어지면 그런 사람에게는 쌀 좀 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도지요. 점잔 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상한 것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현실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기도겠지요. 또 때로는 내가 하는 사업과 내가 하는 일의 성공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철야기도도 할 수 있고, 산에 가서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의 성공을, 하나님의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 얘기를 할 때는 적어도 하나님의 큰 구속사 안에서 나의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내가 하는 사업, 또는 내 아들의 대학입시를 앞둔 이 문제가 하나님의 구속사업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의 역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때로는 굉장히 애매한 문제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끈임 없이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들어주셔야 그래야 하나님 되겠습니다 하고 내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성령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의미가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얘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들은 그렇지 않고 있다, 그러니 다시는 내게 대고 기도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다시 하신 말씀은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희생 제물을 갖고 오라고 하였느냐,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길로만 걸어가면, 너희는 잘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계획과 어리석은 고집대로 살고, 얼굴을 나에게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등을 나에게서 돌렸다. 너희 조상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로부터 오늘까지, 내가 나의 종 예언자들을 너희에게 보냈지만, 나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조상보다도 더 고집이 세고 약하였다."
전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 군데서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저희들이 언제 내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 나이가 늙었을 때에 백성들이 와서 자기들도 이제 이웃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왕이길 바라는 데 다른 왕을 세워달라고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졸랐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이제 내가 늙었으니까 저들이 나를 멸시한다고 마음이 슬퍼져서 하나님 앞에 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희가 언제 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저희가 너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저희가 언제 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성경에서 저는 이 얘기를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저희는 자기 고집대로만 살고 내 얘기를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냈건만 정말 내 얘기를 저희들은 들었느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예수님도 탄식하시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저는 이 말씀이 걸립니다. 제게 걸리고 또 이 사회를, 이 나라를, 우리 민족을 염려하는 사람으로서 이 말씀이 걸립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지으셨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11장까지는 인류의 죄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했는데 길이, 그 가능성이 너무 멀어졌습니다. 모든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에는 틀렸다는 것이 창세기 8장 노아 홍수 이후의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한 민족을 택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여러 민족들 중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나하고 얘기가 통하고, 내 말을 듣고, 내게 순종하고, 내가 바라는 바대로 하기를 바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12장의 아브라함을 택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순종의 역사가 아니라 배반의 연속이었습니다. 좀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찾고, 사정이 나빠지면 하나님을 찾고, 사정이 좋아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역사였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너무나 생생하게 그러한 역사가 계속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얘기를 들려주려고 했는데 예언자들의 소리는 너무 미약하고 대부분 군마가 달려가듯이 어뚱한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인류의 역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하나님이 그 죄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죄로부터 자유하고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 성경의 얘기입니다. 예언자들을 보냈는데 듣지 않았고 마지막 날에 믿음을 보겠는가? 하는 이 말은 누구든지 예수를 시인하고 따르면 구원을 얻을 것인데 그 누구든지 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보면 아무도 아닐 수도 있는 그런 무서운 말로 제게는 다가왔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또 학교에 있지만 그래서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러나 목회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짊어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오늘날 나로부터 시작한 우리나라의 교회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를 않았습니다. "누구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누구나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예루살렘 백성은, 왜 늘 떠나가기만 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마들처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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