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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고집

예레미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12 추천 수 0 2008.09.18 14:06:40
.........
성경본문 : 렘19:1-1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3.8.17 
예레미야의 위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은 예언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스승들이며, 철학자들이며, 일종의 역사학자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사자(使者)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거의 종교적인 업무만 주어졌지만 예언자들에게는 사회를 비판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윤리적,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는 기능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언자들은 정치 지도자들과 대중들에게 밉보이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에 몸담은 사람은 싫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듯하게 서기보다는 그 시대 정신과 영합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예언자라고 하드라도 자기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과 대중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피곤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가능한대로 피하려는 건 당연합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보다는 대중들이 원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요즘 설문조사 기관의 활동이 두드러진 이유는 역시 정치 지도자들이 대중들의 눈치를 많이 보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일종의 대중추수주의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을 선포한 예레미야는 민중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철저한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얼마나 듣기 싫어했는지 오늘 말씀의 바로 앞부분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백성은 수군거립니다. '예레미야를 없애야겠는데 무슨 좋은 계책이 없을까? 이 사람이 없어도 법을 가르쳐 줄 사제가 있고 정책을 세울 현자가 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이자를 그가 한 말로 때려잡자. 이자의 말마디마다 조심하여 듣자'고 합니다."(렘 18:18).
자칫 몰매 맞아 죽을지도 모를 매우 살벌하고 음흉한 순간이었습니다만 예레미야는 예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예레미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옹기장이 집에서 질그릇을 하나 샀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을 대표하는 장로 몇 사람과 제사장 몇을 데리고 가까운 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이 질그릇을 부수었습니다. 흡사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 질그릇 부수듯이 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선포되는 야훼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옹기그릇이 부서져 다시는 주워 맞추지 못하게 된 것처럼 나는 이 백성과 이 도읍을 그렇게 부수리라. 마침내 사람 묻을 자리가 없어 이 도벳에 마저 무덤을 쓰게 되리라."(렘 19:10, 11).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신 백성에게 이렇게 재앙을 내리시는 야훼 하나님의 마음을 예레미야는 읽었습니다. 그 야훼 하나님의 마음이 곧 자신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영혼은 늘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야훼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재앙의 이유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파괴되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 예레미야의 예언이 선포된 다음 얼마 있지 않아서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예레미야를 제외한 그 어떤 예언자들도 이런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기는 했지만 짐짓 외면하거나, 또는 모든 상황을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한 정치 지도자들과 민중들의 요구에 굴복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재앙이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옹기 항아리 사건에 이어서 성전뜰로 돌아와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만군의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고집이 세어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 이제 이미 말하였던 온갖 재앙을 이 도읍과 여기 딸린 모든 성읍에 내리리라."(렘 19:15). 하나님의 재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앞부분에서 여러 번 거론되었습니다. 4,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 백성이 선조 때부터 백성들도, 임금들도 모르던 딴 신들에게 이 자리에서 분향을 올리며 나를 저버린 죄벌이다. 이곳을 남의 나라처럼 만든 죄벌이며, 이 곳에서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린 죄벌이다. 바알에게 제단을 쌓고 저희 자식들을 불에 살라 번제로 바친 죄벌이다." 여기에 거론된 항목만이 재앙이 내린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그 핵심은 이 진술에 담겨 있습니다.

다른 신을 섬김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딴 신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죄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십계명 첫 항목에도 나오듯이 야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이스라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 한눈을 팔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을 섬겼습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를 접하는 독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직접 내려주시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큰 기적을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하나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요즘 자신들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을 내리셨으면 다른 데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면 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요즘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나타낸 적은 없습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온갖 기적들도 역시 성서기자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 마치 영화를 보듯이 하나님이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확신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신탁을 바르게 전하지 못하는 예언자 집단이 무수했기 때문에 민중들은 자기의 기호에 맞는 말을 하는 예언자만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나가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나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힘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욕망이라는 자리에 놓아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가려고 하는데, 인간은 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만을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토대에 놓으려고 하기 때문에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만 참된 생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을 성취하는 데서 생명을 얻어보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결국 바알 신 앞에서 가서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다산과 생산성의 신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풍년이 들 수만 있다는 그들은 자기 자식들을 불에 살라 번제로 바치기도 했습니다.(5절). 잘 살게만 된다면 그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코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아무리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해도 그 말씀이 들리지도 않았고 더욱이 따를 수는 결코 없었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흘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없는 사람의 피를 많이 흘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
런 무죄한 자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절대권력이 생긴 이후로 계속된 현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해방 이후, 그리고 6.25전쟁 이후 남북 상호간에 얼마나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지난 봄, 이라크에서도 어린이를 비롯해서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가족을 잃었습니다.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오늘의 현대 문명은 무죄한 자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만해도 일년에 수천 명이 자동차 사고로 죽고 장애인이 됩니다.
왜 이스라엘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렸을까요? 생명을 파괴하는 힘이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힘은 모두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들입니다. 만약 어떤 절대권력이 자기의 권력을 행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렸다면 결국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과 이 세계의 생명을 파괴하는 문명이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마성적 힘입니다. 고대 사회인 이스라엘에서 무죄한 이들이 피를 흘렸다는 것은 거의 정치적인 절대권력에 의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절대권력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내리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오늘 우리도 진리라고 믿습니다.

고집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유는 '고집' 때문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이 백성은 고집이
세어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15절).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긴 것이나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린 일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고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집과 줏대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좀 다릅니다. 또는 고집과 주관도 다릅니다. 아무런 자기 철학도 없이 주변의 생각에 따라서 오락가락 하는 이 시대에 자기의 생각을 바르게 지켜나가는 것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나 고집은 그런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루터 성서에는 'halsstarrig'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목이 경직된'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집'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백합니다. 자기를 절대화함으로써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고집은 교만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만이 고집이 셉니다. 겸손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자기 주관이 철저하다고 하더라도 고집을 피우지는 않고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집이 세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로 묶은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고집을 부렸을까요? 사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기껏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잠시 반짝 하다가 그 후로는 늘 약소국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내세울 게 없는데도 그들이 고집을 피웠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역설적인 사실이지만 고집을 피우는 사람은 오히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자신들이 그것을 의식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고집을 피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열등감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확대시켜놓다가 당하게 되는 한계로 인해서, 또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축소시켜놓은 상태에서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데서 나오는 심리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작은 민족이었다는 사실이 그런 열등감의 기본 요소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주변 나라는 이미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만 이스라엘은 늘 그 뒤를 따라가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리적으로 늘 방어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에 신념을 갖고 밀고 나가는 게 아니라 정말 쓸데없는 일에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오히려 자신 만만한 것 같이 보입니다만 속으로 들어가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방어하는 논리로 살다보면 고집을 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성 없는 삶의 태도

'고집'이 세다는 예레미야의 이 진단에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더 본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특히 고집이 센 이스라엘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집은 자기 반성이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알려면 거울에 비추어보아야 하듯이 우리 삶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집이 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고집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참으로 고집이 셉니다.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반성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고집은 아주 심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약간의 반성도 없이 생산성과 발전만을 무조건적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만 반성해본다면 경제적 발전만이 우리를 구원시키는 힘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그런 것만을 따라갑니다. 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봅니다. 한편에서는 실업자가, 특히 젊은 실업자가 늘어난다고 아우성인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거나 연봉이 많은 일자리는 없는 반면에 힘들고 연봉이 적은 데서 일할 사람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젊은이들이 육체노동을 하는 중소기업에라도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대개의 실업은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은 죽어도 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내가 편하게 일하고 넉넉하게 쓰면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나쁘게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오늘 이런 시대 정신을 영적인 차원에서 반성해보고 교정해 나가려는 모습이 눈에 별로 많이 뜨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뿐입니다. 반성 없는 게 바로 고집이며, 그 고집은 하나님의 생명을 파괴하는 길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문제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미 절대 빈곤의 시기를 지나왔고 최소한 존재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교회 성장논리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외면적인 차원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것 같습니다만 그 말씀을 일종의 정보로만 취하지 우리를 반성하는 거울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 행태를 말씀에 반성시키고 있다면 이렇게 150 여개의 교파로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지 않을 것이며,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숙명적인 자세로 감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만족에 취해서 살아가는 고집이 센 사람들입니다.

악순화의 고리끊기

이스라엘이 고집이 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고집이 세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관계는, 즉 고집과 말씀은 상호적이며 동시에 일종의 악순환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를 통해서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집을 꺾든지, 아니면 그들의 고집이 더 이상 통용이 되지 않도록 모든 것을 파괴하든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끌어간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이 두 길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등 많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역사 등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안 일곱 부족을 비롯해서, 앗시리아, 바벨론 등 여러 크고 작은 나라들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쟁이 이스라엘 역사의 두 축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바람직 한 길은 이 시대와 국가와 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반드시 기독교의 가르침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생명 지향적인 모든 종교와 철학, 그런 이념을 포함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생명의 리얼리티로 믿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이 세계가 자신을 반성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스스로는 참된 것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진리를 깨달은 이들의 말씀을 되새기기도 하고, 진리의 영으로 활동하는 성령에게 내 마음과 정신을 맡김으로써 철저하게 나를 반성해나가야 합니다. 이는 곧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처럼 자기를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반성의 과정을 통해서 나는 고집불통의 사람이 아니라 생명소통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가 이런 반성의 길을 걷지 않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집불통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생명과 사랑을 본성으로 하는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일는지 우리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런 재앙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귀가 없을 것이다"(3절)는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두려운 심판이겠지요. 이미 우리의 마음에 허무와 불평과 무의미가 지배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놀라운 심판이기도 하지만, 훨씬 실제적으로 물리적인 사건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으로 돌아서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문명은 철저하게 파괴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이제 이미 말하였던 온갖 재앙을 이 도읍과 여기 딸린 성읍에 내리리라."(15절). 아직 우리에게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약간의 시간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짧은 시간과 기회가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200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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