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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렘31:3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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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경숙 교수 |
참고 : |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새길교회 2007.3.18 주일설교 |
오늘은 수난절을 맞이하여 최근에 당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수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최근 난데없이 김용옥 교수가 구약 폐기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기독교계의 반발이 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새삼스럽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관계에 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혹시 여러분들도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에 관해 어떤 관계에 있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조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구약학도로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문제가 제 관심을 끌고 있고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문제가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74년도에 독일에 구약성서를 공부하러 갔을 때 구약성서학계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독일 에르랑겐 대학교의 구약교수였던 포러 교수가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을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인이었다가 유대교로 개종을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 심정은 이해할만 하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공부하면 할수록 더구나 신약성서를 보면 볼수록 구약성서와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구약을 전공하니까 폐기되면 직장이 염려되어 그러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고, 기독교인들의 어이없는 절대적 우월주의와 오만이 싫어서 한번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기원을 잘 점검하고 겸손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기 원해서입니다.
두 성서의 상호관계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만족할 만큼 설명되지는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설명도 하고 시도도 하고 했지만 답변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크게 말씀드리면 상호관계 설명은 3가지 유형으로 시도되었습니다. 첫째는 구약은 폐지되고 기독교 경전에서 빼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구약성서는 유대 민족적이고 유대교의 경전인 만큼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 중에도 이런 견해를 가지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 입장은 아주 오래된 입장인데 주후 2세기의 마르시온의 입장입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이 세상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고, 복수의 하나님이고, 전쟁의 하나님이고, 위협과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이 세상 밖의 낯선 하나님이고, 구원자이시고,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입니다. 율법적인 공의의 하나님은 복음을 가지고 온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관련 있는 성서 구절을 모두 빼고 누가복음 일부와 바울서신 일부만 가지고 경전을 새로 꾸며서 따로 교회를 설립하고 사적 교회를 144년에 세웠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의 내용에서 구약을 인용하거나 반영하고 있는 본문들을 대폭 삭제한 그런 성서를 만든 것이지요.
교회는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약을 앞으로 집어넣고 신약을 뒤에 넣었으며 유대 어휘를 그대로 두고 구약성서를 포기할 수 없는 기초=바탕이라고 선언합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이 유대경전에 기초해서만 성립된다고 선언한 것이지요. 이 점은 로마서 11:17-18에서 바울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서 분명해 집니다.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를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라.”
이후 구약성서는 이단종파에서만 거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국에서 구약성서 폐기론이 등장하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1933년 나치즘에 동조했던 “독일 기독교도”들도 구약 거부의 논리를 넘어서서 독일 나치즘의 민족사회주의에 근거한 반유대주의로 이어지는 구약 거부의 논리를 폈습니다. 게르만의 역사와 문화가 구약성서를 대치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두 번째 유형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속해 있는 유형입니다. 대조모델입니다. 옛 것-새 것, 유대인-예수, 법-복음, 보복-은총, 그리고 나아가서는 레아-라헬, 사라-하갈 등으로 대조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 유형에 속하는 많은 학자들은 구약성서를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복음이 그와 대립해 있는 구약성서의 율법을 통해서만 뚜렷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잘 아시는 루돌프 불트만도 이 모델에 속합니다. 그는 약간 다르기는 해도 계약,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의 개념을 분석하면서 이스라엘이 좌절되는 과정 속에서 종말론적 희망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좌절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과 아주 유사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동일한 하나님을 말하며 구약성서도 복음이 나타나 있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살아 있고 시편에는 증거한다는 식이지요. 그 다음에는 구약성서는 어린이를 위한 교과서라면 신약성서는 어른들을 위한 성서라고 보기도 합니다. 또 발전론적으로 보아서 구약은 신약을 위한 예비적 서술이고 신약은 계시의 완성이자 실제라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둘째 유형에서는 구약성서는 긍정적이지만 신약성서의 그늘에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모델에 속해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그러나 이들과는 대조됩니다. 주로 80년대 이후 독일의 진보적인 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의 주장은 다릅니다. 두 번째 모델도 기독교 우월주의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대한 특정한 이해에 근거해서 구약성서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이런 의도 없이 읽는다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폭넓은 관련성들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구약성서를 신약성서에서 얼마나 왜곡했는가를 밝힙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약을 읽어 보면 분명히 드러나는바 구약이 신약을 위해서 써진 것이 아니고, 신약이 구약으로부터 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이 구약의 빛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여태까지 그리스도가 구약에 의해 증거되고 예언된 것만 말했지, 구약 즉 율법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그 반대의 증거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론적으로 말해 구약의 위치를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그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약성서에 보면 구약은 유일한 경전으로 높은 권위와 질을 지녔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신약은 자신들의 권위와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구약성서를 인용했습니다.
가장 분명한 예가 ‘동정녀 탄생설화’이고 또 세례 요한의 등장도 이사야 40:3을 왜곡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2:46에 예수가 12살 때 성전에서 선생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한지라”라고 랍비들에게 배우는 유대 남자 소년으로 그리고 있는데 반해 유럽 화가들은 언제나 가르치는 백인의 모습으로 예수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왜곡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루가 16:31에도 보면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 24: 25에도 부활한 예수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로 부활한 예수가 구약의 증언을 설명하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4: 44-49절에도 계속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이라고 구약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5:3에 보면 바울 선생도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구약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4에 보면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로마서 3장 31절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서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31:31-34은 “그 때에”라는 단어와 함께 종말의 기쁨을 논하고 있습니다. 31장 전체가 그런 종말의 기쁨을 논하는데 31-34절의 내용도 구약성서에 보면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언약도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이지 이방인들에게 세운 언약은 아닙니다. 이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 이유는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이 속에 두면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야웨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야웨의 말이니라”라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새 계약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새 계약이 기독교인들과 맺은 계약이라고 생각해서 신약성서의 명칭이 신약 즉 새 계약의 성서라고 칭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읽어 보면 야웨 하나님이 미래의 어느 날엔가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모두 용서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당신의 법을 쓰신다고 새로운 계약을 약속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집, 즉 이스라엘 민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언약의 말씀 즉 복음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이 복음은 예레미야 신학의 정점이고 성서 전체의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구절 중에 하나라고 평가됩니다. 따라서 옛 언약의 파기는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해당되고, 새 언약의 체결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라는 이분법은 이 본문의 의도와는 결코 맞지 않습니다.
새 계약의 주인공이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바울 선생은 이것을 마음의 내적 할례와 육체적 할례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내적 순종을 주는 능력은 옛 아담의 유한성을 폐기하는, 오직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내적 순종은 모세의 계약보다 오직 예레미야 예언자가 약속해 주었던 “새 계약”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영적 할례는 “육체의 몸을 벗고”, “손으로 하지 아니한” 영적 삶의 새로운 할례로 일어납니다(골 2:11-12). 한편 히브리서에서는 예수의 하늘에서의 제사장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히 8:7-13)
종합해 보면 구약에서도 새 언약은 완전히 하나님의 선물로서 율법의 이행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새 계약은 이스라엘 민족과의 계약이라는 한계를 지니지요. 물론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를 대표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을 총칭합니다만 그래도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등장해서 다른 이방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이 새 계약이 하나님의 선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직접 하신 약속으로 선물로 해석된 것은 우리에게는 복음이고 은총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믿는 것일 뿐 여기서 이스라엘인들은 파기된 옛 언약의 소유자들이고 기독교인들은 새 언약의 주인공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선생도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은 신약의 어머니이자 교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Hieronymus는 구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는데 옳다는 생각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대화 모델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구약성서를 읽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서로 다를 것이고 또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경전이나 종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해석이 문제입니다. 저는 바울 선생을 구약성서의 새로운 해석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설득력 있게 새롭게 해석해 낸 것이지요. 우리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남을 헐뜯고 끌어 내리고 박해하는 쪽에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 유대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구절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근거로 함부로 유대인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 유대인과의 논쟁으로 유대인 전체를 기독교의 적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이야말로 구약성서의 수난과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권력과 이익과 영광을 위해서 힘없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살해하는 모습이 기독교 역사 속에 너무나 분명히 들어 있으니까요. 우리의 과오를 뉘우치고 우리의 은총이 값없이 받은 것이라는 것, 우리의 희망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붙잡으며 하나님의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만이 부활한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고난 주간을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두 성서의 상호관계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만족할 만큼 설명되지는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설명도 하고 시도도 하고 했지만 답변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크게 말씀드리면 상호관계 설명은 3가지 유형으로 시도되었습니다. 첫째는 구약은 폐지되고 기독교 경전에서 빼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구약성서는 유대 민족적이고 유대교의 경전인 만큼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 중에도 이런 견해를 가지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 입장은 아주 오래된 입장인데 주후 2세기의 마르시온의 입장입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이 세상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고, 복수의 하나님이고, 전쟁의 하나님이고, 위협과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이 세상 밖의 낯선 하나님이고, 구원자이시고,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입니다. 율법적인 공의의 하나님은 복음을 가지고 온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관련 있는 성서 구절을 모두 빼고 누가복음 일부와 바울서신 일부만 가지고 경전을 새로 꾸며서 따로 교회를 설립하고 사적 교회를 144년에 세웠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의 내용에서 구약을 인용하거나 반영하고 있는 본문들을 대폭 삭제한 그런 성서를 만든 것이지요.
교회는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약을 앞으로 집어넣고 신약을 뒤에 넣었으며 유대 어휘를 그대로 두고 구약성서를 포기할 수 없는 기초=바탕이라고 선언합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이 유대경전에 기초해서만 성립된다고 선언한 것이지요. 이 점은 로마서 11:17-18에서 바울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서 분명해 집니다.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를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라.”
이후 구약성서는 이단종파에서만 거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국에서 구약성서 폐기론이 등장하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1933년 나치즘에 동조했던 “독일 기독교도”들도 구약 거부의 논리를 넘어서서 독일 나치즘의 민족사회주의에 근거한 반유대주의로 이어지는 구약 거부의 논리를 폈습니다. 게르만의 역사와 문화가 구약성서를 대치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두 번째 유형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속해 있는 유형입니다. 대조모델입니다. 옛 것-새 것, 유대인-예수, 법-복음, 보복-은총, 그리고 나아가서는 레아-라헬, 사라-하갈 등으로 대조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 유형에 속하는 많은 학자들은 구약성서를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복음이 그와 대립해 있는 구약성서의 율법을 통해서만 뚜렷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잘 아시는 루돌프 불트만도 이 모델에 속합니다. 그는 약간 다르기는 해도 계약,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의 개념을 분석하면서 이스라엘이 좌절되는 과정 속에서 종말론적 희망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좌절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과 아주 유사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동일한 하나님을 말하며 구약성서도 복음이 나타나 있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살아 있고 시편에는 증거한다는 식이지요. 그 다음에는 구약성서는 어린이를 위한 교과서라면 신약성서는 어른들을 위한 성서라고 보기도 합니다. 또 발전론적으로 보아서 구약은 신약을 위한 예비적 서술이고 신약은 계시의 완성이자 실제라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둘째 유형에서는 구약성서는 긍정적이지만 신약성서의 그늘에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모델에 속해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그러나 이들과는 대조됩니다. 주로 80년대 이후 독일의 진보적인 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의 주장은 다릅니다. 두 번째 모델도 기독교 우월주의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대한 특정한 이해에 근거해서 구약성서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이런 의도 없이 읽는다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폭넓은 관련성들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구약성서를 신약성서에서 얼마나 왜곡했는가를 밝힙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약을 읽어 보면 분명히 드러나는바 구약이 신약을 위해서 써진 것이 아니고, 신약이 구약으로부터 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이 구약의 빛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여태까지 그리스도가 구약에 의해 증거되고 예언된 것만 말했지, 구약 즉 율법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그 반대의 증거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론적으로 말해 구약의 위치를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그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약성서에 보면 구약은 유일한 경전으로 높은 권위와 질을 지녔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신약은 자신들의 권위와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구약성서를 인용했습니다.
가장 분명한 예가 ‘동정녀 탄생설화’이고 또 세례 요한의 등장도 이사야 40:3을 왜곡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2:46에 예수가 12살 때 성전에서 선생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한지라”라고 랍비들에게 배우는 유대 남자 소년으로 그리고 있는데 반해 유럽 화가들은 언제나 가르치는 백인의 모습으로 예수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왜곡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루가 16:31에도 보면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 24: 25에도 부활한 예수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로 부활한 예수가 구약의 증언을 설명하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4: 44-49절에도 계속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이라고 구약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5:3에 보면 바울 선생도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구약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4에 보면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로마서 3장 31절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서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31:31-34은 “그 때에”라는 단어와 함께 종말의 기쁨을 논하고 있습니다. 31장 전체가 그런 종말의 기쁨을 논하는데 31-34절의 내용도 구약성서에 보면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언약도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이지 이방인들에게 세운 언약은 아닙니다. 이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 이유는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이 속에 두면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야웨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야웨의 말이니라”라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새 계약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새 계약이 기독교인들과 맺은 계약이라고 생각해서 신약성서의 명칭이 신약 즉 새 계약의 성서라고 칭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읽어 보면 야웨 하나님이 미래의 어느 날엔가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모두 용서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당신의 법을 쓰신다고 새로운 계약을 약속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집, 즉 이스라엘 민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언약의 말씀 즉 복음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이 복음은 예레미야 신학의 정점이고 성서 전체의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구절 중에 하나라고 평가됩니다. 따라서 옛 언약의 파기는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해당되고, 새 언약의 체결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라는 이분법은 이 본문의 의도와는 결코 맞지 않습니다.
새 계약의 주인공이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바울 선생은 이것을 마음의 내적 할례와 육체적 할례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내적 순종을 주는 능력은 옛 아담의 유한성을 폐기하는, 오직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내적 순종은 모세의 계약보다 오직 예레미야 예언자가 약속해 주었던 “새 계약”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영적 할례는 “육체의 몸을 벗고”, “손으로 하지 아니한” 영적 삶의 새로운 할례로 일어납니다(골 2:11-12). 한편 히브리서에서는 예수의 하늘에서의 제사장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히 8:7-13)
종합해 보면 구약에서도 새 언약은 완전히 하나님의 선물로서 율법의 이행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새 계약은 이스라엘 민족과의 계약이라는 한계를 지니지요. 물론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를 대표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을 총칭합니다만 그래도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등장해서 다른 이방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이 새 계약이 하나님의 선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직접 하신 약속으로 선물로 해석된 것은 우리에게는 복음이고 은총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믿는 것일 뿐 여기서 이스라엘인들은 파기된 옛 언약의 소유자들이고 기독교인들은 새 언약의 주인공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선생도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은 신약의 어머니이자 교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Hieronymus는 구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는데 옳다는 생각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대화 모델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구약성서를 읽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서로 다를 것이고 또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경전이나 종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해석이 문제입니다. 저는 바울 선생을 구약성서의 새로운 해석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설득력 있게 새롭게 해석해 낸 것이지요. 우리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남을 헐뜯고 끌어 내리고 박해하는 쪽에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 유대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구절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근거로 함부로 유대인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 유대인과의 논쟁으로 유대인 전체를 기독교의 적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이야말로 구약성서의 수난과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권력과 이익과 영광을 위해서 힘없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살해하는 모습이 기독교 역사 속에 너무나 분명히 들어 있으니까요. 우리의 과오를 뉘우치고 우리의 은총이 값없이 받은 것이라는 것, 우리의 희망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붙잡으며 하나님의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만이 부활한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고난 주간을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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