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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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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겔22:2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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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득훈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한 집단이 자신의 정확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라인홀드 니이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란 책에서 잘 지적했듯이 집단의 경우 이성과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기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전 세계 양식 있는 국가와 국민들은 대(對)이라크 전쟁을 통해 나타난 미국의 부도덕성을 명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미국 정치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심각한 위기의식이나 문제의식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한국교회도 자기진단에 있어서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이스라엘을 반면(反面)교사로 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에스겔은 왜 이스라엘이 곧 바벨론을 통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짚어 주고 있습니다. 이를 한국교회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체크리스트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은 멸망 직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그 멸망을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한국교회의 병든 모습을 가슴 깊이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멸망을 막아낼 사람을 찾으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23-29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23 예루살렘아, 너는 비가 오지 않는 땅이 되리라.
내가 분노를 퍼붓는 날, 소나기 한 번 오지 않으리라.
얼마나 끔찍한 말씀입니까? 늘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보며 살아야 했을 당시의 농부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이 갖는 심각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4절부터 29절까지 에스겔은 이렇게 이스라엘이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땅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계각층에 두루 퍼져있는 총체적 부패였습니다.
첫째, 수령들(25절) 즉 왕실가족들의 범죄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선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더 믿을만한 사본에 의하면 수령이란 번역이 더 적절하다고 합니다. 이들과 비슷한 정치적 권력을 누리면서 부패에 찌들어 있는 계층은 방백들(28절) 즉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고관들입니다. 수령들은 꼭 짐승을 잡아 물고 뜯으면서 으르렁거리는 사자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들의 재산과 패물을 갈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애꿎은 과부만 늘어갔습니다. 예컨대 나봇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왕상 21:1-16). 이런 식의 비극이 당시 비일비재했던 것 같습니다. 수령들보다는 하급 지위에 있었던 고관들 역시 짐승을 잡아 찢는 늑대 같았습니다. 사자보다 힘이 약했을 뿐 연약한 백성들의 것을 빼앗아 삼키는 짓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권력형 부패입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부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하에서 자행된 권력의 노골적 폭력행위는 더 이상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참여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의 신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듯 권력형 부패는 다양한 모습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합법적인 제도와 구조를 통해서 권력층이 빈부의 차를 강화시켜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체인구 중 상위 20%에 해당하는 부자들이 전체 부의 80%를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형국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과 기업가 그룹들은 여전히 “나누어 가지려면 먼저 파이를 크게 해야 한다”며 현재의 불공평한 경제정책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곧 한국경제를 침체시키는 좌파라며 매도당하고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한국의 권력층이 이렇게 자기 배를 더 많이 채우려고 하는 동안 한번 실패한 중산층이나 서민들은 다시 제기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퇴출당해야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합법적인 갈취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더 슬픈 일은 한국교회 지도층 상당수의 부패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수령을 선지자로 번역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들 중엔 자신과 가족의 명예와 호화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성도들의 돈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경우가 한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도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유사한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지적하면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한탄하시는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겔 5:7).
... 너희는 주위에 있는 민족들보다 더 나에게 반항하여
내 규정을 따르지 않고, 내 법대로 살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에 있는 다른 민족들이 지키는 법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세상법 마저 지키지 않는 한국교회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대표적인 초대형교회 담임목사가 30여억 원 규모의 교회재정 횡령 및 배임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엔 교회 일의 특수성을 빙자해서 세상법 마저 너무 쉽게 어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서울의 한 대표적인 교회 담임목사는 재정담당 측근과 결탁하여 자기 아들 목사가 담임할 교회건물 신축을 위해 불법적으로 최소한 80여 억 원을 교회재정에서 지출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일들이 공개되어도 양심에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6월 2일 노동부는 한 동안 곤혹스러워 하다가 전국기독교회노조를 정식인가 했습니다. 정부 당국이나 사법부가 교회의 사안을 다룰 때 점점 엄격해지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기본적 상식수준에도 못 미치는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는 5000만 원에서 수억에 이르는 연봉을 챙겨가면서 전도사는 파트 타임으로 채용해서 풀타임처럼 부려먹습니다. 그리고 고작 월급이 60여만 원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힘들게 사는 담임목사님들께는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냉정하게 살펴보자면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둘째,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한 것과 정한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안식일도 무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절기도 지키고 제사도 드리고 안식일도 열심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사들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씀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공동체적 삶에 거룩함이나 정결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은 못 본 척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 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이 역시 한국교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떠받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계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속의 성공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과 신앙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교회 사이에 진정한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이 돈을 밝히면 교회도 돈을 밝힙니다. 세상이 화려한 건물과 장식에 홀리면 교회도 홀립니다. 세상이 성공을 추앙하면 교회도 그러합니다.
한국교계 지도자들은 은혜라는 미명하에 거룩함과 속됨을 구별하는 것을 포기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의 차이를 드러내는 일도 접은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 이명박 시장이 밤새 진행된 청년연합집회에 참석해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사를 낭독하였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참 마음이 슬펐습니다. 서울의 기독청년들이 모여 1907년의 대부흥이 그 백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 서울과 한국에 다시 한번 임하기를 바라며 밤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자체는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 모임을 주도한 지도그룹들의 면모입니다. 이명박 시장은 앞서 말한 대로 아들 목사를 위해 교회재정을 불법적으로 사용한 교회 장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또 봉헌사 낭독 순서를 처음 제안하고 봉헌사를 직접 작성한 목사는 수년 전 담임목사직 세습을 한 초대형교회의 부목사로서 당시 가장 앞장서서 정당화의 논리를 펼친 분입니다. 주도적으로 청년연합기도회에 참여한 한 초대형 선교단체는 2003년 초에 사위에게 대표직을 세습한 단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장로 시장까지 동원하여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고 2007년의 대부흥을 주도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그리고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서로 뒤범벅이 되어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다.
셋째, 선지자들은 정치지도자들의 죄를 예리하게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앙적으로 보이는 각종 수단을 총동원해서 그들의 죄를 덮어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때로는 허황된 환상을, 때로는 거짓된 점을 그리고 때로는 듣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한국교회지도층에는 어둡고 부패한 시대를 향해 진정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은 권력층의 부당한 행위와 비리를 신앙적인 언어와 수단들을 이용해 덮어주거나 정당화해주는 일에 앞장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고 김선일 씨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 지도층은 그 진상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고 김선일 씨가 “죽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며 마지막으로 남긴 절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의 절규 속에서 이라크 침략전쟁과 테러의 잔인성과 기만성을 폭로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회의 가장 연약하고 억울한 자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음성을 들으며 미국의 부도덕성과 기만성을 폭로하며 진정한 평화의 길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국군파병의 부당성과 비겁성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국에서 일부 양식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교회지도층은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고 김선일 씨의 장례를 주도한 모 교회 목사는 그를 추도하는 기도시(詩)를 발표했습니다. 그의 죽음이 이라크의 선교의 문을 여는 영광스러운 죽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국민들이 어떤 경우에도 테러에 굴복하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바로 파병철회는 곧 테러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정치권의 논리와 그 맥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지도층 목사는 고 김선일 씨가 예수를 증거하며 당당하게 죽지 못했다고 설교시간에 나무라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모두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시대와 사회의 죄악을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계 지도자들은 선지자적 사명을 포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반 백성들의 타락을 하나님은 지목하고 있습니다(29절). ‘이 땅 백성’은 권력층이거나 부유층은 아니더라도 땅은 소유한 사람들, 지금으로 말하자면 중산층 정도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보다 강한 사람들의 억압을 받으면서도 그들에 대해 항거하기보다는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갈취하였습니다. 정글의 세계처럼 냉혹한 먹이사슬을 형성함으로써 억압적 구조를 고착화시켜나가는 데 일조하였던 것입니다. 이 또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반영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자화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한국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2. 교회의 멸망을 막아낼 사람을 찾고 계신 하나님(30, 31절)
하나님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땅을 위하여 무너져 가는 성을 다시 쌓을 사람”, “성의 무너진 틈에 서서 하나님을 가로막음으로써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불행하게도 이런 사람을 찾지 못해 이스라엘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멸망을 막아내려면 우리는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작업에 우리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운동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를 구체적으로 세워나가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비판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양심은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교회를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비판은 머리만 웬만큼 좋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은 우리 삶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한완상 총장님이 늘 말씀해 오셨듯이 예수믿으미에서 예수따르미로 성장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따라만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는 왜곡된 교회지상주의 혹은 물량적 개교회 성장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 구석구석 하나님나라를 펼쳐 가는 진정한 선교사명을 감당해갈 수 있도록 튼튼하게 키워내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예배와 교육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양식을 풍성하게 먹고 함께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성도들 간의 경제적 나눔의 삶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며 성도들은 몸의 지체입니다. 다른 교회의 문제는 사실 내 몸의 문제입니다. 다른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나도 결코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를 세워나가기 원한다면 뜻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서로 연대를 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어둠을 물리치는 빛과 부패를 막아내는 소금의 역할에 충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삶을 살아가려면 두 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는 학개서에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하나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입니다(학 1:2).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루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때가 따로 없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문익환 목사님을 깊이 존경합니다. 그 분은 한 시를 통해서 통일운동이란 서울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 만큼이라도 남북관계가 진전되었음을 우리는 지금 깨닫고 있지 않습니까?
두 번째 장벽은 현재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낙심입니다(학 2:3). 교회부패세력은 너무 막강하고 우리가 세워 가는 일은 너무 미약해서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작은 일을 통해서 큰일을 마침내 이루어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한 셋방에 갇혀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은 얼마나 미미한 것입니까? 그러나 역사가 누가는 그것이 바로 로마의 역사를 뒤집고야 말 사건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행 28:30-31). 그리고 그것은 역사 속에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작게 보여도 우리는 큰 기대와 꿈을 가지고 우리가 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을 가로막아 서서 한국교회를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막아서는 것은 결코 무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인물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런 인물은 모세와 같은 존재입니다(출 32장).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신들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열정적인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너무나 분노하셔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 역사를 펼쳐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매달려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달라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그렇게 애원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을 살려주지 않으려면 차라리 자기를 하나님이 손수 쓰신 기록에서 자기 이름을 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을 가로막아 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한 멸망에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출 32:30-31). 바울 역시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동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괜찮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그 맥이 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사정없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감내하시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눅 23:34) 예수님도 하나님을 가로막으신 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신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인물입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자기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각오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일 만큼은 피하고 싶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길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도저히 우리 힘만으론 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의 품에 안겨 그 분의 도움을 의지한다면 우리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맺음말
우리는 한국교회가 얼마나 중병을 앓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널리 알려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에만 머물지 말고 교회를 다시 건강하게 세워나가는 일에 우리 몸을 아낌없이 던져야 합니다. 멸망해 가는 한국교회를 마치 암에 걸린 내 부모나 자식을 껴안고 울며 부르짖듯 우리 품안에 끌어안고 울며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해야 합니다. “하나님, 한국교회를 버리지 마소서! 용서하소서! 기회를 다시 한번 주소서!”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한국교회의 멸망을 막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서울 강남구 대치동 889-5 샹제리제센터 A동 808호(135-280)
전화: 555-6959 e-mail: tosaegil@empal.com
한국교회도 자기진단에 있어서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이스라엘을 반면(反面)교사로 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에스겔은 왜 이스라엘이 곧 바벨론을 통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짚어 주고 있습니다. 이를 한국교회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체크리스트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은 멸망 직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그 멸망을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한국교회의 병든 모습을 가슴 깊이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멸망을 막아낼 사람을 찾으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23-29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23 예루살렘아, 너는 비가 오지 않는 땅이 되리라.
내가 분노를 퍼붓는 날, 소나기 한 번 오지 않으리라.
얼마나 끔찍한 말씀입니까? 늘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보며 살아야 했을 당시의 농부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이 갖는 심각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4절부터 29절까지 에스겔은 이렇게 이스라엘이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땅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계각층에 두루 퍼져있는 총체적 부패였습니다.
첫째, 수령들(25절) 즉 왕실가족들의 범죄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선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더 믿을만한 사본에 의하면 수령이란 번역이 더 적절하다고 합니다. 이들과 비슷한 정치적 권력을 누리면서 부패에 찌들어 있는 계층은 방백들(28절) 즉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고관들입니다. 수령들은 꼭 짐승을 잡아 물고 뜯으면서 으르렁거리는 사자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들의 재산과 패물을 갈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애꿎은 과부만 늘어갔습니다. 예컨대 나봇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왕상 21:1-16). 이런 식의 비극이 당시 비일비재했던 것 같습니다. 수령들보다는 하급 지위에 있었던 고관들 역시 짐승을 잡아 찢는 늑대 같았습니다. 사자보다 힘이 약했을 뿐 연약한 백성들의 것을 빼앗아 삼키는 짓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권력형 부패입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부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하에서 자행된 권력의 노골적 폭력행위는 더 이상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참여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의 신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듯 권력형 부패는 다양한 모습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합법적인 제도와 구조를 통해서 권력층이 빈부의 차를 강화시켜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체인구 중 상위 20%에 해당하는 부자들이 전체 부의 80%를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형국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과 기업가 그룹들은 여전히 “나누어 가지려면 먼저 파이를 크게 해야 한다”며 현재의 불공평한 경제정책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곧 한국경제를 침체시키는 좌파라며 매도당하고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한국의 권력층이 이렇게 자기 배를 더 많이 채우려고 하는 동안 한번 실패한 중산층이나 서민들은 다시 제기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퇴출당해야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합법적인 갈취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더 슬픈 일은 한국교회 지도층 상당수의 부패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수령을 선지자로 번역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들 중엔 자신과 가족의 명예와 호화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성도들의 돈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경우가 한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도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유사한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지적하면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한탄하시는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겔 5:7).
... 너희는 주위에 있는 민족들보다 더 나에게 반항하여
내 규정을 따르지 않고, 내 법대로 살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에 있는 다른 민족들이 지키는 법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세상법 마저 지키지 않는 한국교회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대표적인 초대형교회 담임목사가 30여억 원 규모의 교회재정 횡령 및 배임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엔 교회 일의 특수성을 빙자해서 세상법 마저 너무 쉽게 어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서울의 한 대표적인 교회 담임목사는 재정담당 측근과 결탁하여 자기 아들 목사가 담임할 교회건물 신축을 위해 불법적으로 최소한 80여 억 원을 교회재정에서 지출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일들이 공개되어도 양심에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6월 2일 노동부는 한 동안 곤혹스러워 하다가 전국기독교회노조를 정식인가 했습니다. 정부 당국이나 사법부가 교회의 사안을 다룰 때 점점 엄격해지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기본적 상식수준에도 못 미치는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는 5000만 원에서 수억에 이르는 연봉을 챙겨가면서 전도사는 파트 타임으로 채용해서 풀타임처럼 부려먹습니다. 그리고 고작 월급이 60여만 원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힘들게 사는 담임목사님들께는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냉정하게 살펴보자면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둘째,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한 것과 정한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안식일도 무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절기도 지키고 제사도 드리고 안식일도 열심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사들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씀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공동체적 삶에 거룩함이나 정결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은 못 본 척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 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이 역시 한국교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떠받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계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속의 성공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과 신앙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교회 사이에 진정한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이 돈을 밝히면 교회도 돈을 밝힙니다. 세상이 화려한 건물과 장식에 홀리면 교회도 홀립니다. 세상이 성공을 추앙하면 교회도 그러합니다.
한국교계 지도자들은 은혜라는 미명하에 거룩함과 속됨을 구별하는 것을 포기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의 차이를 드러내는 일도 접은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 이명박 시장이 밤새 진행된 청년연합집회에 참석해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사를 낭독하였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참 마음이 슬펐습니다. 서울의 기독청년들이 모여 1907년의 대부흥이 그 백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 서울과 한국에 다시 한번 임하기를 바라며 밤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자체는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 모임을 주도한 지도그룹들의 면모입니다. 이명박 시장은 앞서 말한 대로 아들 목사를 위해 교회재정을 불법적으로 사용한 교회 장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또 봉헌사 낭독 순서를 처음 제안하고 봉헌사를 직접 작성한 목사는 수년 전 담임목사직 세습을 한 초대형교회의 부목사로서 당시 가장 앞장서서 정당화의 논리를 펼친 분입니다. 주도적으로 청년연합기도회에 참여한 한 초대형 선교단체는 2003년 초에 사위에게 대표직을 세습한 단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장로 시장까지 동원하여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고 2007년의 대부흥을 주도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그리고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서로 뒤범벅이 되어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다.
셋째, 선지자들은 정치지도자들의 죄를 예리하게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앙적으로 보이는 각종 수단을 총동원해서 그들의 죄를 덮어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때로는 허황된 환상을, 때로는 거짓된 점을 그리고 때로는 듣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한국교회지도층에는 어둡고 부패한 시대를 향해 진정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은 권력층의 부당한 행위와 비리를 신앙적인 언어와 수단들을 이용해 덮어주거나 정당화해주는 일에 앞장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고 김선일 씨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 지도층은 그 진상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고 김선일 씨가 “죽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며 마지막으로 남긴 절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의 절규 속에서 이라크 침략전쟁과 테러의 잔인성과 기만성을 폭로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회의 가장 연약하고 억울한 자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음성을 들으며 미국의 부도덕성과 기만성을 폭로하며 진정한 평화의 길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국군파병의 부당성과 비겁성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국에서 일부 양식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교회지도층은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고 김선일 씨의 장례를 주도한 모 교회 목사는 그를 추도하는 기도시(詩)를 발표했습니다. 그의 죽음이 이라크의 선교의 문을 여는 영광스러운 죽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국민들이 어떤 경우에도 테러에 굴복하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바로 파병철회는 곧 테러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정치권의 논리와 그 맥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지도층 목사는 고 김선일 씨가 예수를 증거하며 당당하게 죽지 못했다고 설교시간에 나무라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모두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시대와 사회의 죄악을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계 지도자들은 선지자적 사명을 포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반 백성들의 타락을 하나님은 지목하고 있습니다(29절). ‘이 땅 백성’은 권력층이거나 부유층은 아니더라도 땅은 소유한 사람들, 지금으로 말하자면 중산층 정도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보다 강한 사람들의 억압을 받으면서도 그들에 대해 항거하기보다는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갈취하였습니다. 정글의 세계처럼 냉혹한 먹이사슬을 형성함으로써 억압적 구조를 고착화시켜나가는 데 일조하였던 것입니다. 이 또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반영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자화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한국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2. 교회의 멸망을 막아낼 사람을 찾고 계신 하나님(30, 31절)
하나님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땅을 위하여 무너져 가는 성을 다시 쌓을 사람”, “성의 무너진 틈에 서서 하나님을 가로막음으로써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불행하게도 이런 사람을 찾지 못해 이스라엘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멸망을 막아내려면 우리는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작업에 우리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운동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를 구체적으로 세워나가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비판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양심은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교회를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비판은 머리만 웬만큼 좋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은 우리 삶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한완상 총장님이 늘 말씀해 오셨듯이 예수믿으미에서 예수따르미로 성장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따라만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는 왜곡된 교회지상주의 혹은 물량적 개교회 성장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 구석구석 하나님나라를 펼쳐 가는 진정한 선교사명을 감당해갈 수 있도록 튼튼하게 키워내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예배와 교육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양식을 풍성하게 먹고 함께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성도들 간의 경제적 나눔의 삶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며 성도들은 몸의 지체입니다. 다른 교회의 문제는 사실 내 몸의 문제입니다. 다른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나도 결코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를 세워나가기 원한다면 뜻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서로 연대를 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어둠을 물리치는 빛과 부패를 막아내는 소금의 역할에 충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삶을 살아가려면 두 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는 학개서에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하나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입니다(학 1:2).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루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때가 따로 없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문익환 목사님을 깊이 존경합니다. 그 분은 한 시를 통해서 통일운동이란 서울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 만큼이라도 남북관계가 진전되었음을 우리는 지금 깨닫고 있지 않습니까?
두 번째 장벽은 현재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낙심입니다(학 2:3). 교회부패세력은 너무 막강하고 우리가 세워 가는 일은 너무 미약해서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작은 일을 통해서 큰일을 마침내 이루어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한 셋방에 갇혀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은 얼마나 미미한 것입니까? 그러나 역사가 누가는 그것이 바로 로마의 역사를 뒤집고야 말 사건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행 28:30-31). 그리고 그것은 역사 속에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작게 보여도 우리는 큰 기대와 꿈을 가지고 우리가 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을 가로막아 서서 한국교회를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막아서는 것은 결코 무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인물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런 인물은 모세와 같은 존재입니다(출 32장).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신들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열정적인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너무나 분노하셔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 역사를 펼쳐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매달려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달라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그렇게 애원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을 살려주지 않으려면 차라리 자기를 하나님이 손수 쓰신 기록에서 자기 이름을 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을 가로막아 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한 멸망에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출 32:30-31). 바울 역시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동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괜찮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그 맥이 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사정없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감내하시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눅 23:34) 예수님도 하나님을 가로막으신 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신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인물입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자기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각오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일 만큼은 피하고 싶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길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도저히 우리 힘만으론 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의 품에 안겨 그 분의 도움을 의지한다면 우리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맺음말
우리는 한국교회가 얼마나 중병을 앓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널리 알려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에만 머물지 말고 교회를 다시 건강하게 세워나가는 일에 우리 몸을 아낌없이 던져야 합니다. 멸망해 가는 한국교회를 마치 암에 걸린 내 부모나 자식을 껴안고 울며 부르짖듯 우리 품안에 끌어안고 울며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해야 합니다. “하나님, 한국교회를 버리지 마소서! 용서하소서! 기회를 다시 한번 주소서!”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한국교회의 멸망을 막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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