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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영

에스겔 길희성............... 조회 수 2181 추천 수 0 2008.04.02 09: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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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겔37:1-15 
설교자 : 길희성 교수 
참고 : 새길교회 
개나리 진달래와 함께 봄꽃들이 활짝 피고 있습니다. 봄은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희망의 계절이며 만물이 기지개를 피며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꿈틀거리는 계절입니다. 얼어붙었던 굳은 땅을 헤치고 어느새 파릇파릇한 풀들이 돋아나는가 하면 죽은 것 같던 앙상한 나무에 화사한 꽃이 피고 연한 순이 돋아나 우리들로 하여금 생명의 신비, 생명의 강인함을 새삼 느끼게 해줍니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은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며 또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세계는 참으로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살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봄은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의 계절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어느 해 어느 달에 부활했는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교회에서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부활절을 지키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구정을 지키는 것이 악습이라 생각했었는데, 요즈음 저는 새삼스럽게 구정을 지키는 것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 사람들은 구정을 춘절이라고 하는데 봄이 시작되는 때라는 뜻이겠지요. 사실 올해는 봄이 좀 일찍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특히 춘절로서의 구정이 참으로 계절적으로도 잘 맞는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동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음력에 따라 이 춘절을 기준으로 하여 적당한 때에 부활절 축제를 벌리는 것이 어떻겠는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봄이 우리 앞에 연출하고 있는 장관인 만물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특수한 사건의 진리를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생명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다만 인간에게 주어지는 이 또 다른 생명은 자연과는 달리 나고 죽음을 무한히 반복하는 -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 윤회 - 자동적인 주기적 순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해 주는 봄과 더불어 부활절이 찾아왔건만 우리들의 마음은 예년과는 달리 침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봄이고 부활절이고 모두 실감이 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피는 꽃이 반갑기는커녕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현실은 썰렁하고 을씨년스럽기만 합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가장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한 경제 위기만은 아닙니다. 나는 한 마디로 말해 우리 사회가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고, 기대할 수 있는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에 나라가 지향점을 상실하고 흔들리고 방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근대화의 기치 아래 오로지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온 국민이 질주했으며, 전두환· 노태우 시대에는 민주화의 봄을 기다리며 고난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쟁취한 민주화가 우리에게 실망만 안겨주게 되니,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두가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민주의 꽃이 필 줄 알고 기뻐했더니 어느새 문민독재의 덫에 걸려버렸고, 이제 그 본색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 폐해가 나라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속았구나 하는 분한 마음에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기가 막힌 것은, 그리고 현 정부의 최대 죄악은, 어떤 구체적인 잘잘못을 떠나서, 국민 모두의 기대를 배반했다는 배신행위이고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희망의 상실입니다. 우리가 구호에 속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그래도 이번만은 무언가 다르겠지 하는 기대를 걸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민주를 가장한 독재, 도덕성을 가장한 부도덕한 정권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무엇을 기대하랴는 냉소주의, 어느 누가 나와도 별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과 패배주의가 우리사회에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불행한 국민, 불쌍한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다 경제위기까지 휘몰아쳐 더욱더 우리를 주눅 들게 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경제를 살리겠다고 100일 경제니 뭐니 하고 호들갑을 떨더니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정부패로 망쳐 놓았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놔두기나 하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희망을 되찾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누구에게서 이러한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 주겠습니까? 국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정치인들입니까? 대권주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지만, 이미 우리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준 구정치인, 아니면 전혀 검증되지 않은 불안한 인물들, 그리고 더 한심한 것은 과거의 행적을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5, 6공 인사들, 아니 3공의 잔당들, 원리도 원칙도 없이 이합집산을 일삼는 우리 정치인들에게서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렇다고 나라 경제를 이끌고 간다는 경제인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합니까? 국가경제를 볼모로 잡다시피 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실기업을 확장하다가 나 몰라라 자빠지고는 자기 먹을 것은 챙기고 도망가는 파렴치한 기업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규제나 일삼고 끗발만 부리고 앉아 있는 부패한 관료들, 눈치나 보는 검찰, 권력 주위를 맴도는 교수집단들, 촌지 챙기기에 바쁜 교사들, 선동과 왜곡보도를 밥먹듯 하는 무책임한 언론인들 - 어느 누구도 우리가 희망을 걸만한 집단이 못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장사 해 먹는 종교지도자들에게서 입니까?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아직도 건전하게 자신의 위치를 충실히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나마 나라가 당장 망하지 않고 견디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도덕적 불감증과 부정부패가 일반화되어 있으며, 내 자식 내 새끼주의에서부터 시작하여 끼리끼리 뭉치는 집단 이기주의와 배타주의, 사치와 낭비는 우리 모두의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교육비 20조원 - 얼마인지 아무도 모를 것 - 을 쓰는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며, 고려시대에 가는 곳마다 절만 지었다가 왕조가 망했듯이, 우리 사회도 발에 차이는 것이 학원이요 교회니 이것이 망할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 경제, 교육, 언론, 종교를 막론하고 아무리 보아도 앞이 보이지 않고 캄캄합니다. 실로 국가의 총체적 위기이며 이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집단이 없으니 더욱 위기입니다. 하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위기는 기회라고도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가, 그 비법이 무엇인가 입니다. 위기는 결코 저절로 기회로 전환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봄은 저절로 찾아오지만 사회의 봄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역전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는 그리스도교의 진리,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위기의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의가 불의에, 빛이 어둠에 패한 절망적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자기 백성을 돌이켜서 구하고자 했던 마지막 예언자, 한 의로운 인간 예수에게 자기 민족이 오히려 등을 돌리고 죄인의 누명을 씌워 처형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역사에는 정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스러운 절망과 고독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위기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기회의 순간으로 180도 바뀌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곧 부활사건입니다. 부활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소진되었을 때, 인간으로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온 기쁜 구원의 소식, 은총의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었습니다. 죽음의 역사가 생명의 역사로 전환되는 극적인 순간입니다. 사도 행전 2장, 3장에서 베드로는 이 부활 사건의 역전성을 누차 극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셔서 메시아로, 주님으로 되살리셨다는 얘기입니다.

이 부활 사건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의 행하심입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예수가 스스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죽은 그를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총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체는 예수가 아니라 그를 살리신 의로우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한 일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역사를 키워나가시는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힘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를 깊은 위기의 수렁에서 건져주고 우리를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부활의 영뿐입니다. 백약이 소용없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이 부활의 영만이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부활은 먼 옛날 팔레스타인 한 구석에서 어느 목수의 아들에게 일어난 과거의 한 기적적인 사건만이 아니며, 먼 훗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에게 일어날 미래적 사건만도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움직일 때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며, 지금 여기서도 일어날 수 있는 기적입니다. 부활의 영은 허탈해하고 무기력하게 된 우리들, 우리 사회와 민족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창출하는 힘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오늘 저는 부활절 말씀의 본문으로서 에스겔서 37장을 선택하였으며 이 말씀을 형제자매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되고 유대백성이 조국을 등지고 바빌론으로 유배당하는 기원전 587년을 전후로 해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사제였습니다. 에스겔서 1-24장은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그가 자기 백성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들을 주로 담고 있으며 에스겔 선지자의 초기 활동에 속하고, 25-32장은 유대 땅을 점령하고 괴롭히는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서 그의 중기 활동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33-48장은 그의 말기 활동에 속하는 부분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간 조국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절망에 빠져 있던 백성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과 환상에 근거하여 성전이 재건되며, 백성들이 그리운 고국으로 다시 돌아갈 날이 올 것이며, 분단된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통일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37장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메시지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준 환상과 비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끌려 들판 한 가운데로 나아가서 즐비하게 널려 있는 마른 뼈다귀들을 보게 됩니다. 포로기의 유대 백성들의 모습이 마치 들판에 뒹굴고 있는 아무 희망도 없는 마른 해골들과도 같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하고 하나님이 물으셨을 때, "오 주 하나님, 주께서는 아십니다"라고 대답하면서 하나님만이 그 열쇠를 쥐고 계신다고 에스겔은 그의 믿음을 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명하기를 이 죽은 뼈들을 향해 예언을 하라고 하시자 에스겔은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뼈들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힘줄이 뻗치고 살이 붙고 살갗이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명의 생기가 없더니, 하나님의 명에 따라 에스겔은 사방의 바람으로부터 생기를 불러 모아서 뼈들에게 불게 했더니 뼈들이 모두 마치 군사들처럼 벌떡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이 말하기를: "우리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여기서 '생기'란 말은 숨, 바람을 뜻하는 말이며, 만물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하느님의 생명의 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혹은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한다"는 말은 이 하나님의 영이 생명의 힘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 생명의 영은 창세기 1장에 태초의 물위에 움직이던 하나님의 영이기도 합니다. 신약 성서에서도 성령의 영을 뜻하는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도 마찬가지로 바람, 영, 생기란 뜻으로서 역시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며,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의 영인 것입니다. 바로 이 부활의 영이 우리에게 불어 올 때 앙상한 가지에 새싹이 돋아나듯 아무런 소생의 가망이 없이 죽어 있던 마른 뼈들에 살이 돋아나고 생기가 돌아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유대 백성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을 때, 에스겔은 이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세차게 불어와 자기 백성을 소생시키는 장엄한 비전을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보았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환상을 본 이후 곧 이어서 37장 15-28절까지는 에스겔이 본 또 다른 환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막대기 두 개를 에스겔에게 명하여 가져오게 하고는 그 둘이 에스겔의 손안에서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환상입니다. 이것은 곧 분단된 두 왕국이 다윗왕의 시대와 같이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어 번성할 것이라는 비전이었습니다. 마른 뼈를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생명의 영, 부활의 영은 분단의 역사를 통일의 역사로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이 비전은 물론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인해 바빌론의 압제에서 풀려남으로써 일단 현실화되었지만,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수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에스겔의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영은 세차게 활동하기 시작하여 인간을 거듭나게 하고 만물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부활과 더불어 온 인류와 온 우주에 부활과 다시 태어남의 새로운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 부활의 영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일 때 육에 속한 우리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들의 죄악의 몸 안에서도 새로운 생명력이 꿈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우리들의 겉 사람은 부패하여가나 속 사람, 즉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생명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육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먼저 활동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희망을 주고 새 생명을 산출하는 부활의 영이 바람처럼 불어와서 앙상한 뼈에 힘줄이 뻗게 하고 살이 붙게 하려면 먼저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 십자가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아픔이 있어야 부활의 영광과 새 생명의 기쁨이 있는 법입니다. 죽음의 계절인 추운 겨울이 있어야 새 생명의 계절인 봄이 오듯이 생명을 창출하는 부활의 영, 부활의 바람이 불려면 먼저 우리 모두가 죽음의 고통, 절망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마른 뼈들처럼 처참하게 죽어야 부활의 영이 바람처럼 불어올 수 있는 법입니다. 참다운 생명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 준 이것이 진리입니다.

며칠 전 캘리포니아의 한 종교 집단에 속한 39명이 초연하게 집단 자살을 해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아직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아 확실한 것은 얘기하기 어렵지만, 사교집단에서 보이는 일반적 현상인 사회에 대한 강한 배타성이나 증오가 보이지 않고 어떤 강압성도 별로 없는 것 같았으며, 모두가 컴퓨터로 밥을 벌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겁고 부패한 육신의 짐을 훌훌 벗어버리고 이 무의미한 지구상에서의 삶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삶, 천국의 문을 갈망하는 종교적 갈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집단의 가장 큰 문제는 참다운 영생의 길, 천국의 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천국의 문은 무슨 UFO나 타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자살 대신 사랑의 죽음만이 영생의 문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죽음과 자기부정을 통한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영생의 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사랑의 실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로 보지 못한 가장 명백한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서 자기 백성을 구하고 살릴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는 마당에 어디 엉터리 같은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나타나서 식민지 통치의 억압 속에서 죽겠다고 신음하고 있는 비참한 백성들에게 위로는 못해 줄 망정 원수를 사랑하라느니,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주라느니, 용서 해야한다는 등, 죽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스스로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죽은 자가 메시아라 하니 실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고 백성들을 우롱하는 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런 미치광이 그리스도인들을 그냥 놔둘 수 없다하여 앞장서서 그들을 괴롭히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고꾸라진 체험을 한 그는 십자가가 곧 부활이요, 죽음이 곧 생명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그의 인생이 180도 회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역설의 극치를 고린도 전서 1장 22-25절에서 지혜와 어리석음, 강함과 약함의 역설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역설의 진리를 모른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참다운 생명을 위해 죽음을 감수할 자도 없으며, 모든 것이 남의 탓이지 아무도 죽으려는 자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쩌면 일제 30년의 고통이 모자라서, 그리고 해방 50년의 방황과 시련이 부족하기나 한 듯,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이 민족은 어쩌면 또 한 번의 50년간의 바빌론 포로기를 겪어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 아니 우리 종교계의 근본 문제는 죽음 없이 살기를 구하고 자기희생 없이 부활을 구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철저히 죽지 못했다는 데, 철저히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철저히 아픔을 겪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고, 남북분단의 이데올로기를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아직도 똑 같은 후진국형 사고가 연달아 반복되어 일어나고, 똑 같은 부정부패가 자행되고, 똑 같은 정치적 파행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흥청망청 쓰면서 경제위기를 외쳐봤자 누가 믿겠습니까? 세계의 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입니다. 구악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하지 않고서 어떻게 새로운 한국이 만들어지겠습니까? 경제도 새로 태어나려면 망할 기업은 망하게 하고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부패의 고리로 얽혀 있으니 누구 하나만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길은 우리 모두가 구습과 구태를 얼마나 철저히 벗을 수 있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거품경제, 허황된 것, 분수 이상의 짓들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해야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만을 벗어버리고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높이려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입니다. 사실 이 한 마디에 부활의 비밀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예수 자신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낮아지셨던 것이며, 그럼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는 이기는 것만 알았지 지는 것을 몰랐으며, 강한 것만 알았지 약한 것이 강할 수 있다는 역설의 진리를 몰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만하기 그지없어서 대통령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줄 알았고, 자신을 낮추어야 높아진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가 살길은 오직 사즉생, 죽으면 살리라는 것이라고 그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과연 그가 정말로 철저히 마음을 비우고 죽음을 감수할지는 두고 보아야 합니다. 공연히 살려고 잔꾀만 부리다가는 정말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그와 현철씨를 둘러싼 모든 비극의 근본은 한 번 잡은 권력을 영속화시키려는 야심, 포기하지 않고 죽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여야만 사는 세상에서 죽어야 산다는 말은 참으로 믿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죽이는 자만 있고 죽는 자는 없는 사회, 그 사회는 정말 망할 사회, 죽을 사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이유는 죽어야 사는 사회에서 죽는 자로서 부활과 생명의 역사를 일구어 내는 데 있습니다.

봄이 와도 실감이 나지 않고, 부활의 소식이 들려도 먼 옛날의 얘기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금년 부활절에 오늘 다시 한 번 부활의 의미를 새겨 보았습니다. 부활은 먼 옛날의 얘기도 먼 훗날의 얘기도 아닙니다. 먼 옛날 예수에게만 일어난 얘기가 아니고 우리가 죽은 후 먼 훗날 경험할 미래적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새롭게 태어날 때 일어나는 현재적 기적입니다. 부활의 영은 오늘 세례를 받는 정소린, 이신우 자매에게도 활동하셔서 새로운 삶의 출발을 결단하게 만드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의 힘을 지금 여기의 삶에서 경험 못한다면 아마도 내세에서도 부활은 우리의 몫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부활의 영이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오늘의 우리 한반도에 세차게 불어와 부패한 역사를 쓸어버려서 나의 삶과 우리 사회에 새 살이 돋아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아니 나부터 뼈아픈 자기부정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 부활의 기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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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미가 성탄을 바라보는 사람 미5:1-15  김필곤 목사  2008-02-06 2797
1101 미가 칼을 쳐서 보습으로-구약성서에서 본 참 평화 현실 미4:1-5  김이곤 목사  2007-12-13 2451
1100 요나 고난 당할 때 야웨를 생각하라 욘2:5-7  조용기 목사  2008-05-19 2306
1099 요나 솔로몬의 재판 하나님의 심판 욘4:1-11  한인섭 형제  2007-12-19 3065
1098 미가 삶으로서의 예배 미6:6-16  정용섭 목사  2008-10-19 1981
1097 요나 참과 거짓 (The Word of Life) 욘2:7-10  조용기 목사  2008-09-06 1737
1096 미가 예배의 영성 미6:6-8  김기동 자매  2008-09-02 1784
1095 아모스 인도주의의 빛 암1:3-10  최만자 원장  2008-04-11 1713
1094 아모스 생명, 진리, 빛 암5:21-26  서공석 형제  2008-03-17 1942
1093 아모스 한국교회에 하나님이 계신가? 암5:21-24  권진관 교수  2003-06-05 4580
1092 호세아 이 명절에 무엇을 하려느냐? 호9:1-5  전원준 목사  2008-09-06 2054
1091 호세아 왜 믿느냐고 물으면 호1:8-10  류상태 형제  2008-08-26 1653
1090 호세아 하늘, 땅. 짐승, 사람 호2:21-23  민영진 목사  2007-12-18 2349
1089 다니엘 세상을 변화시킨 사람들 단6:25-27  김태욱 형제  2008-04-05 2341
1088 다니엘 옳은 길로 인도합시다. 단12:3  한태완 목사  2007-11-06 2765
1087 에스겔 다시 일어나라 겔37:1-15  권진관 형제  2008-05-28 2211
1086 에스겔 생수의 강 겔47:1-12  조용기 목사  2008-05-19 3296
» 에스겔 부활의 영 겔37:1-15  길희성 교수  2008-04-02 2181
1084 에스겔 부활의 신앙 겔37:1-12  김종일 형제  2005-02-16 2668
1083 에스겔 교회의 멸망을 막을 사람, 없는가? 겔22:23-31  박득훈 목사  2005-02-01 2298
1082 에스겔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라 겔33:1-9, 17  한태완 목사  2007-11-11 2938
1081 에스겔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겔20:1-3  한태완 목사  2007-11-10 2365
1080 에스겔 참된 지도자의 요건 겔11:1-13  한태완 목사  2007-11-09 1994
1079 예레미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 렘33:2-3  조용기 목사  2008-11-25 2797
1078 예레미야 수난 받는 구약성서 렘31:31-33  이경숙 교수  2008-10-15 1629
1077 예레미야 이스라엘의 고집 렘19:1-15  정용섭 목사  2008-09-18 1812
1076 예레미야 시위대 뜰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 렘33:1-3  조용기 목사  2008-06-20 3565
1075 예레미야 멈출 수 없는 일 렘29:1-14  최만자 원장  2008-02-15 2355
1074 예레미야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렘8:5-6  양명수 목사  2007-12-18 1928
1073 예레미야 하나님을 만나는 길 렘29:12-13  강종수 목사  2007-09-16 2549
1072 이사야 평화의 왕이시여 내게 임하소서,,,(성탄절 설교) 사 9:6-7  전원준 목사  2008-12-20 3129
1071 이사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할 수 없도다 사51:1-8  조용기 목사  2008-10-22 2023
1070 이사야 이사야의 구원신탁 사55:1-5  정용섭 목사  2008-10-19 1867
1069 이사야 나는 너희 예배가 싫다. 사1:11-20  류상태 형제  2008-10-15 1721
1068 이사야 여분에 의한 구원 사32:15-18  권진관 형제  2008-09-20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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