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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겔37: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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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권진관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은 4·19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은 이 4·19를 통해서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 전부가 생명력을 잃고 무기력해졌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썩어도 너무 깊게 썩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정부는 이러한 뿌리 깊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IMF가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심한 경쟁체제로 우리 모두를 몰아갈 때에만 겨우 구조가 개혁되고 조정될 수 있지, 우리 스스로의 자발적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스스로를 제어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패해진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지구당 위원장이 말하기를 과거에는 지역의 유지들이 흔쾌히 돈을 내주곤 해서 넉넉하게 지구당을 꾸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정권이 바뀌고 나서는 돈이 전연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전기사를 내보내게 되었고 지금은 자가용도 팔아버리고 버스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유지들에게 아무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돈을 갖다 주었는데, 요즘은 전화를 해서 눈치를 챌 수 있도록 말을 해도 전연 알아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특히 돈 있는 사람들, 권력자들, 공직자들이 얼마나 썩었는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체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여 하나님께서는 IMF를 시켜서라도 이 고질병을 뜯어고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새로운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조 하에 모든 것을 시장원리에 맡겨 해결하려 하고, 그리하여 모든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겠다 합니다. 금융 실명제를 폐지한 것에 이어 토지 공개념의 개념마저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비전문가로서 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저는 단지 빠른 시일 내에 이러한 정책과 조치들이 성과가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의 공직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바르고 진실 되고 정의롭게 일을 맡아서 모든 것을 처리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바라고 있습니다. 특히 새정부의 공직자들이 국민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시장경쟁의 원리라고 하는 외부적 원리로만 국민의 생활을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당리당략적인 싸움만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금 민중들은 자살하고 죽어가고 있는데, 정치권에서는 자기들의 배가 부르다고 싸움만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권력과 돈이 얽힌 곳은 어디든지 부정이 자행되고 있고, 말단 공직자로부터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부패한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교육계의 비리도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제2, 제3의 4·19가 일어나서 민족 전체가 거듭나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IMF를 보내고서도 안되면 더 큰 시련을 보내서라도 우리가 안으로부터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원하실 지 모릅니다. 새로운 혁명은 이전처럼 겉으로 피를 흘리는 혁명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으로 회개의 피눈물이 흐르는 보다 지독한 혁명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주일로 지냈습니다. 부활은 이전의 몸이 죽었다가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은 부활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희망이 아주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 골짜기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절망상태에 빠져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다 죽어 넘어져서 이제 뼈가 흐트러지고 아주 마른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처지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지난주간에는 우리를 절망케 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었습니다. 전기료나 아파트 관리비를 못 내서 전기가 끊기는 가정이 늘고 있는가 하면, 죽은 엄마 옆에서 열흘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어야만 했던 탈진한 3살 짜리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목을 매 자살한 아들의 시신을 8일 동안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누워있어야만 했던 중풍환자인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삼천오백만원의 빚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 모두를 살해하고 실직자인 자신도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또 돈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천 여만 원의 빚 때문에 50대의 가장이 죽은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오늘날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들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입니다. 옛날 고대 이집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람세스와 같은 파라오들에게 혹은 영웅들에게만 붙여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지위의 고하,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만큼 구약성서는 보통사람들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성서는 모든 사람들이 왕이요, 람세스이며, 태양이요, 신적인 존재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도 이것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보이셨던 것입니다. 물론 성서에서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기도 합니다마는 이 죄인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형상 이후에 생긴 개념이기 때문에 부차적인 개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어떠한 조건하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 성서의 기본명제입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결정적으로 성선설을 지지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에서 보아야지 죄인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사태를 잘못 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환난 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힘주어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야 부부사이에서도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되고, 이웃과 동료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으며, 자녀들에게도 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존재인지도 모르는 채 낙담하고 절망에 빠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저는 우리 학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구로 지역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서 어떤 여성 노동운동가와 장시간 동안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난 20여 년 동안 노동 운동에 몸바쳐 온 이제 40을 막 넘긴 분입니다. 그는 17살 되던 해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올라와서 공장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70년대는 우리 나라의 산업노동자들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장시간 노동하던 때였습니다.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덕분으로 산업이 급격하게 발전되던 시기입니다. 이 때에 이 사람은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감시 대상 명단에 올랐기 때문에 한 번 해고되면 재취업이 어려웠고, 취직되면 곧 해고되었습니다. 마지막에 가까스로 얻은 직장이 얼마 안 있어 수출지원 금융을 못 받아 문을 닫게 되어 그는 노동조합과 함께 그 회사를 살리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식 있는 학생, 청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관계된 여러 사람들과 토론하며 함께 활동하면서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일들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장을 떠나서도 노동운동에 계속 종사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도와주는 활동비로 생활하면서 80년대를 노동운동에 몸바쳤습니다. 그 동안 6차례 해고를 당했고, 감옥도 수차례 들어가서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오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이 활동했던 구로 지역에서는 이전의 노동집약적인 공장들이 지방으로 떠나거나 없어지고, 새로운 첨단산업이나 유통산업이 들어섰습니다. 노동자들의 수는 줄어들고, 주변에는 중산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동료 노동자들과 운동가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의 동지들이 제 살길을 찾아 떠나고 홀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배들이 최고참으로 받들어 모셔서 지역운동의 대표 자리에 앉혀는 놓았지만, 외롭고 생활도 궁핍하고 고달프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견딜 수 있었던 고통이었는데 최근 들어 이것이 부쩍 아프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상황의 변화를 읽어야만 한다는 자각이 어렴풋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전문적인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민노총과 같은 노동운동단체도 현역이 아니라고 받아주지를 않고, 그렇다고 참여연대와 같은 지식인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할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는 노동자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이 사회의 변혁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최선을 다했고, 자신과 같은 노동자들이 사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정치세력을 형성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그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의 개인적인 생활로 돌아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책에서 읽은 한 여자 영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 화무란이라고 하는 농부의 딸로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아이는 7살 되던 해에 도를 닦고 무예를 배우러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소녀는 그 산에서 한 늙은 부부를 만났는데, 이들은 산신령들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그 부부로부터 15년 동안 무적의 전사(戰士)가 되기 위하여 온갖 훈련을 받게 됩니다. 15년이 지난 후 이 소녀는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하여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악한 지배자에 의해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돌아온 이 젊은 여자 무사를 위하여 그 부모들이 예식을 올리게 되는데, 그 예식은 고통을 이기는 과정을 가진 예식이었습니다. 먼저 그 어머니는 자기 딸을 조상들을 모셔놓은 제단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곧 웃옷을 벗으라고 지시합니다. 어머니는 15년 동안 떨어졌던 이 딸을 마치 지금까지 자기가 직접 키운 아이처럼 그녀를 다루면서 등을 씻었습니다. 이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너의 등에다가 복수의 말을 적겠다. 네 등에다가 복수의 맹세와 이름들을 적겠다."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어디를 가고,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지, 사람들은 우리들의 이 희생예식을 알게 될 것이며, 또 너도 이것을 잊지 않게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는 만약에 이 영웅이 여기에서 죽게 되면, 사람들이 그 시체를 가지고 무기를 삼아 싸우려고 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먼저 붓으로 글자를 한자 한자 써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글자를 새기기 시작하는데, 가는 선과 점들은 작은 칼날로, 굵은 획은 큰 칼날로 살을 팠습니다. 옆에서 돕고 있던 어머니는 흐르는 피를 술에 담근 차가운 수건을 가지고 닦아냈고, 상처난 곳을 소독했습니다. 아주 강한 통증이 왔습니다. 살을 후벼내는 것도 아팠지만 알코올은 차가웠고 그것은 다시 뜨거운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 여자는 무릎을 꽉 잡고 이를 악물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15년간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땅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 . 계속 복수의 맹세의 말들이 새겨졌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말이 새겨졌을 때 이 여자는 앞으로 거꾸러졌습니다. 이 부모들은 자기들이 적은 글자들을 읽어 본 후 이 딸을 쉬도록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너의 등이 다 나을 때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해줍니다.
그녀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을 때, 어머니는 두 개의 거울을 가지고 와서 빨간 색과 검정 색의 글자들로 가득 찬 등을 볼 수 있게 비쳐주었습니다. 여자는 그 글자들이 자기의 군대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글자들의 힘으로 적을 쳐부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 여자는 힘을 회복하게 되었고 적을 무찌르러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여자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적을 무찌르고 자기 나라와 마을을 해방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가 겪은 그 고통은 자기의 고통을 대신 겪은 것이라고 믿어 주었고, 이 여자야말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이 이야기의 후편을 제 나름대로 각색해 보려고 합니다. 화무란이라는 이 영웅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를 구한 후에 결혼을 해서 아들딸을 낳고 살게 되었다고 합시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더 이웃집의 보통 여성들처럼 아이를 키우고, 집안 일을 하며, 남편을 도와서 내조했습니다. 이른바 현모양처로 돌아간 것입니다. 나라가 평화로워지면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고, 결혼한 후에는 여자로서의 일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아이 낳고,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집안 치우고, 요리하는 것 . . . 이러한 것들이 화무란의 몫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영웅적인 활동과 역할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경력을 말해주는 등에 새겨진 단어들과 말들은 이전 시대에는 적절했지만 이젠 더 이상 현실과 관련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등의 글씨는 영웅적인 그녀의 영광된 과거를 말해주고 상징해 주고 있지만, 이제는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보기 흉한 흉터일 뿐이었습니다. 과거의 환호소리는 간데 없고 화무란에게 남은 것은 어려운 일상의 생활이었습니다.
아까 이야기로 소개 드렸던 어떤 여성 노동운동가와 전설적인 영웅 화무란의 처지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지난 시대의 영웅들이 철옹성과 같은 단단한 의지는 평범한 일상성이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눈 녹듯이 녹아 풀려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같은 처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능력 있는 여자들도 결혼만 하면 무기력해지는 것은 비슷한 현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실직 당하고 있은 많은 사람들은 70년대, 80년대의 산업화시대에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우리 나라를 산업화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산업화시대가 지나고 소위 탈산업화시대, 혹은 포스트모던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으면서 이전의 영웅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기력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틈새에 새로운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무기력증은 심지어 대학사회 속에도 깊숙이 파급되어서 졸업생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서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곳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인도로 들 바닥에 많은 뼈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랐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을 대언 했습니다.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그 말씀이 전해지는 동안 벌써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이 내려왔습니다.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이 때 숨이 불어왔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서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상징적 장면은 강력한 이미지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절망이라고 하는 전염병이 들불같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 시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은 이전의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상황과 다른 바벨론 포로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절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마른 뼈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지 오래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 모두를 상징합니다. 마른 뼈들은 일상성이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무기력해진 영웅 화무란과 같은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무기력해진 화무란은 새로운 전사 화무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숨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바람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들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생명의 바람이 내 속으로 불어 들어올 수 있게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이 생명의 숨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과 같은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영웅들이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절망하며 마른 뼈의 형상처럼 되어버린 이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이 불어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자신감을 가지고 이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다시 일어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절망하여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외칠 수 있게 되도록 우리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새로운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조 하에 모든 것을 시장원리에 맡겨 해결하려 하고, 그리하여 모든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겠다 합니다. 금융 실명제를 폐지한 것에 이어 토지 공개념의 개념마저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비전문가로서 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저는 단지 빠른 시일 내에 이러한 정책과 조치들이 성과가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의 공직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바르고 진실 되고 정의롭게 일을 맡아서 모든 것을 처리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바라고 있습니다. 특히 새정부의 공직자들이 국민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시장경쟁의 원리라고 하는 외부적 원리로만 국민의 생활을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당리당략적인 싸움만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금 민중들은 자살하고 죽어가고 있는데, 정치권에서는 자기들의 배가 부르다고 싸움만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권력과 돈이 얽힌 곳은 어디든지 부정이 자행되고 있고, 말단 공직자로부터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부패한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교육계의 비리도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제2, 제3의 4·19가 일어나서 민족 전체가 거듭나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IMF를 보내고서도 안되면 더 큰 시련을 보내서라도 우리가 안으로부터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원하실 지 모릅니다. 새로운 혁명은 이전처럼 겉으로 피를 흘리는 혁명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으로 회개의 피눈물이 흐르는 보다 지독한 혁명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주일로 지냈습니다. 부활은 이전의 몸이 죽었다가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은 부활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희망이 아주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 골짜기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절망상태에 빠져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다 죽어 넘어져서 이제 뼈가 흐트러지고 아주 마른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처지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지난주간에는 우리를 절망케 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었습니다. 전기료나 아파트 관리비를 못 내서 전기가 끊기는 가정이 늘고 있는가 하면, 죽은 엄마 옆에서 열흘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어야만 했던 탈진한 3살 짜리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목을 매 자살한 아들의 시신을 8일 동안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누워있어야만 했던 중풍환자인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삼천오백만원의 빚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 모두를 살해하고 실직자인 자신도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또 돈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천 여만 원의 빚 때문에 50대의 가장이 죽은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오늘날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들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입니다. 옛날 고대 이집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람세스와 같은 파라오들에게 혹은 영웅들에게만 붙여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지위의 고하,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만큼 구약성서는 보통사람들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성서는 모든 사람들이 왕이요, 람세스이며, 태양이요, 신적인 존재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도 이것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보이셨던 것입니다. 물론 성서에서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기도 합니다마는 이 죄인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형상 이후에 생긴 개념이기 때문에 부차적인 개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어떠한 조건하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 성서의 기본명제입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결정적으로 성선설을 지지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에서 보아야지 죄인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사태를 잘못 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환난 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힘주어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야 부부사이에서도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되고, 이웃과 동료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으며, 자녀들에게도 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존재인지도 모르는 채 낙담하고 절망에 빠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저는 우리 학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구로 지역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서 어떤 여성 노동운동가와 장시간 동안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난 20여 년 동안 노동 운동에 몸바쳐 온 이제 40을 막 넘긴 분입니다. 그는 17살 되던 해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올라와서 공장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70년대는 우리 나라의 산업노동자들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장시간 노동하던 때였습니다.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덕분으로 산업이 급격하게 발전되던 시기입니다. 이 때에 이 사람은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감시 대상 명단에 올랐기 때문에 한 번 해고되면 재취업이 어려웠고, 취직되면 곧 해고되었습니다. 마지막에 가까스로 얻은 직장이 얼마 안 있어 수출지원 금융을 못 받아 문을 닫게 되어 그는 노동조합과 함께 그 회사를 살리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식 있는 학생, 청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관계된 여러 사람들과 토론하며 함께 활동하면서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일들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장을 떠나서도 노동운동에 계속 종사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도와주는 활동비로 생활하면서 80년대를 노동운동에 몸바쳤습니다. 그 동안 6차례 해고를 당했고, 감옥도 수차례 들어가서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오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이 활동했던 구로 지역에서는 이전의 노동집약적인 공장들이 지방으로 떠나거나 없어지고, 새로운 첨단산업이나 유통산업이 들어섰습니다. 노동자들의 수는 줄어들고, 주변에는 중산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동료 노동자들과 운동가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의 동지들이 제 살길을 찾아 떠나고 홀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배들이 최고참으로 받들어 모셔서 지역운동의 대표 자리에 앉혀는 놓았지만, 외롭고 생활도 궁핍하고 고달프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견딜 수 있었던 고통이었는데 최근 들어 이것이 부쩍 아프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상황의 변화를 읽어야만 한다는 자각이 어렴풋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전문적인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민노총과 같은 노동운동단체도 현역이 아니라고 받아주지를 않고, 그렇다고 참여연대와 같은 지식인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할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는 노동자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이 사회의 변혁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최선을 다했고, 자신과 같은 노동자들이 사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정치세력을 형성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그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의 개인적인 생활로 돌아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책에서 읽은 한 여자 영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 화무란이라고 하는 농부의 딸로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아이는 7살 되던 해에 도를 닦고 무예를 배우러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소녀는 그 산에서 한 늙은 부부를 만났는데, 이들은 산신령들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그 부부로부터 15년 동안 무적의 전사(戰士)가 되기 위하여 온갖 훈련을 받게 됩니다. 15년이 지난 후 이 소녀는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하여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악한 지배자에 의해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돌아온 이 젊은 여자 무사를 위하여 그 부모들이 예식을 올리게 되는데, 그 예식은 고통을 이기는 과정을 가진 예식이었습니다. 먼저 그 어머니는 자기 딸을 조상들을 모셔놓은 제단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곧 웃옷을 벗으라고 지시합니다. 어머니는 15년 동안 떨어졌던 이 딸을 마치 지금까지 자기가 직접 키운 아이처럼 그녀를 다루면서 등을 씻었습니다. 이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너의 등에다가 복수의 말을 적겠다. 네 등에다가 복수의 맹세와 이름들을 적겠다."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어디를 가고,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지, 사람들은 우리들의 이 희생예식을 알게 될 것이며, 또 너도 이것을 잊지 않게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는 만약에 이 영웅이 여기에서 죽게 되면, 사람들이 그 시체를 가지고 무기를 삼아 싸우려고 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먼저 붓으로 글자를 한자 한자 써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글자를 새기기 시작하는데, 가는 선과 점들은 작은 칼날로, 굵은 획은 큰 칼날로 살을 팠습니다. 옆에서 돕고 있던 어머니는 흐르는 피를 술에 담근 차가운 수건을 가지고 닦아냈고, 상처난 곳을 소독했습니다. 아주 강한 통증이 왔습니다. 살을 후벼내는 것도 아팠지만 알코올은 차가웠고 그것은 다시 뜨거운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 여자는 무릎을 꽉 잡고 이를 악물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15년간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땅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 . 계속 복수의 맹세의 말들이 새겨졌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말이 새겨졌을 때 이 여자는 앞으로 거꾸러졌습니다. 이 부모들은 자기들이 적은 글자들을 읽어 본 후 이 딸을 쉬도록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너의 등이 다 나을 때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해줍니다.
그녀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을 때, 어머니는 두 개의 거울을 가지고 와서 빨간 색과 검정 색의 글자들로 가득 찬 등을 볼 수 있게 비쳐주었습니다. 여자는 그 글자들이 자기의 군대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글자들의 힘으로 적을 쳐부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 여자는 힘을 회복하게 되었고 적을 무찌르러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여자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적을 무찌르고 자기 나라와 마을을 해방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가 겪은 그 고통은 자기의 고통을 대신 겪은 것이라고 믿어 주었고, 이 여자야말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이 이야기의 후편을 제 나름대로 각색해 보려고 합니다. 화무란이라는 이 영웅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를 구한 후에 결혼을 해서 아들딸을 낳고 살게 되었다고 합시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더 이웃집의 보통 여성들처럼 아이를 키우고, 집안 일을 하며, 남편을 도와서 내조했습니다. 이른바 현모양처로 돌아간 것입니다. 나라가 평화로워지면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고, 결혼한 후에는 여자로서의 일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아이 낳고,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집안 치우고, 요리하는 것 . . . 이러한 것들이 화무란의 몫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영웅적인 활동과 역할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경력을 말해주는 등에 새겨진 단어들과 말들은 이전 시대에는 적절했지만 이젠 더 이상 현실과 관련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등의 글씨는 영웅적인 그녀의 영광된 과거를 말해주고 상징해 주고 있지만, 이제는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보기 흉한 흉터일 뿐이었습니다. 과거의 환호소리는 간데 없고 화무란에게 남은 것은 어려운 일상의 생활이었습니다.
아까 이야기로 소개 드렸던 어떤 여성 노동운동가와 전설적인 영웅 화무란의 처지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지난 시대의 영웅들이 철옹성과 같은 단단한 의지는 평범한 일상성이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눈 녹듯이 녹아 풀려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같은 처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능력 있는 여자들도 결혼만 하면 무기력해지는 것은 비슷한 현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실직 당하고 있은 많은 사람들은 70년대, 80년대의 산업화시대에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우리 나라를 산업화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산업화시대가 지나고 소위 탈산업화시대, 혹은 포스트모던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으면서 이전의 영웅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기력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틈새에 새로운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무기력증은 심지어 대학사회 속에도 깊숙이 파급되어서 졸업생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서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곳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인도로 들 바닥에 많은 뼈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랐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을 대언 했습니다.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그 말씀이 전해지는 동안 벌써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이 내려왔습니다.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이 때 숨이 불어왔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서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상징적 장면은 강력한 이미지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절망이라고 하는 전염병이 들불같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 시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은 이전의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상황과 다른 바벨론 포로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절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마른 뼈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지 오래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 모두를 상징합니다. 마른 뼈들은 일상성이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무기력해진 영웅 화무란과 같은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무기력해진 화무란은 새로운 전사 화무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숨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바람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들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생명의 바람이 내 속으로 불어 들어올 수 있게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이 생명의 숨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과 같은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영웅들이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절망하며 마른 뼈의 형상처럼 되어버린 이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이 불어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자신감을 가지고 이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다시 일어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절망하여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외칠 수 있게 되도록 우리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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