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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2:2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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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민영진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1994년 9-10월에 몽골에 다녀왔습니다. 그 방문은 몽골 성서공회의 구약 번역과 신약 개정에 관한 자문을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두 주 동안 그곳 서울인 울란바타르에 머물면서 일을 보았습니다.
저의 몽골 방문은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몽골은 지도 위의 거리로는 서울에서 지척에 있지만, 우리에게는 북한과 함께 이념적으로 아주 먼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몽골 방문은 저 자신으로서도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몽골은 그 대부분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그 나라 서울인 울란바타르에서 며칠을 지내고, 또 그곳에서 맞이한 첫번 주일에는 울란바타르에서 서북쪽으로 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몽골의 제2의 도시 다르항에 다녀왔고, 두 번째로 맞이한 주말에는 그 곳 한국인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울란바타르 서쪽에 있는 위락 시설을 갖춘 한 마을을 다녀왔는데 자동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곳을 다녀 온 다음부터는 몽골 땅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에는 한국인 선교사가 한 스무 명이 있고, 연세대학교에서 세운 연세친선병원이 있어서 거기에도 한국인 의사가 4사람이나 있습니다. 한국인들을 만나고, 그들이 일하고 있는 여러 곳을 오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면서, 몽골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서서히 가지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한 편으로는 크게 뉘우친 바도 있고,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 질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구약의 호세아서 2장 21-2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 인용합니다.
21. 그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을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이 무슨 뜻인지 잘 파악이 안될 수도 있겠지만, 또 독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의 의미가 심오하게 감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할 것입니다. 이 본문의 뜻이 난해하게 여겨지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산문이 아니라 시(詩)입니다. 시이기 때문에 이것은 직접적인 사실 묘사가 아니라 통찰과 상상력에서 나온 결과를 축약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응답하시고, 하늘이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이스라엘의 곡창지대인 이스르엘에 응답한다고 할 때, 여기 하나님과 하늘과 땅과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과 곡창지대인 이스르엘이 모두 의인화되어 등장하는 것이라든지, 더욱이 이러한 의인화된 인물들이 한 무대에 함께 등장하는 것 등이 구약에서는 예사로운 경우가 아닙니다. 또 이 다섯 등장 인물이 서로 요청과 호응관계에 있다는 통찰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단계적으로 요청하거나 응답한다고 할 때 무엇에 어떻게 응답한다는 말인지 그 응답 내용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독자의 의문은 이해가 됩니다.
이 본문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읽으면 읽을 수록 시원한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확 트여 있고 뭔가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곡식과 술과 기름과 사람 사이에 막힘이 없습니다. 갈등이 없습니다. 이 짧은 본문 안에 "요청에 응답한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요청에 응답하시고, 하늘은 땅의 요청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요청에 응답하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사람의 요청에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먹을거리와 사람 사이에 아무런 막힘이 없는 농경사회의 이상적인 조화, 농민의 희망, 농경사회의 희망 같은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필요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다 응답되는 우주적 순환을 여기에서 봅니다.
저는 몽골에서 두 주간 남짓 머물면서 농업 정착민의 이상이 담긴 이 본문을 유목 문화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몽골에서 몽골 유목민의 시각으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몽골에 가기 전에 저는 몽골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책방을 뒤지며 몽골에 관한 책을 찾다가, 조선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펼쳐진 "한민족 뿌리 찾기" 몽골학술기행문인 {바람의 고향, 초원의 말발굽}이라고 하는 학술조사단의 기행문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이 학술보고를 통해서 몽골에 대한 입문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몽골에 들어간 다음에는 몽골인들이 쓴 몽골 안내책들 곧, 그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몽골안내}와,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서 역시 몽골인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외국인을 위한 몽골안내}, 그리고 울란바타르 시내 지도 등을 읽으면서 몽골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몽골에서 맞이한 첫 번째 주일날 이른 아침에 그곳 수도 울란바타르를 떠나서 그곳의 제2의 도시라고 하는 다르항이라는 곳에 정오에 도착하여 그곳 몽골 교회에서 설교를 하며 함께 예배드리고 오후 4시쯤 길을 나서서 울란바타르에는 밤 10시경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본 것이라고는 아침 햇살에 비치는 몽골 서북부의 대초원과 그 드넓은 초원 그리고 거기에 흩어진 흰 양떼와 검은 염소떼, 방목되는 소떼와 자동차 길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말의 무리들, 군데군데 보이는 몽골 유목민의 천막집 "게르", 말을 타고 달리는 몽골인과 야생마를 길들이는 긴장감 도는 장면, 해거름의 순하디 순하게 뻗어나가는 그림 같은 야산의 실루엣과 광야의 대낮이 칠흑 같은 광야의 밤으로 바뀌는 신비한 변화를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여섯 명의 일행이 모두 몽골인 남녀 청년들이었으므로 흥미 있는 것들은 무엇이거나 주저함 없이 묻고 이야기하고, 가고 오는 여덟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몽골 땅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러했겠고 또 영원히 그러할 파랗고 맑은 하늘, 끝없이 이어지는 야산과 평원,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흐르는 강들, 철 따라 색깔이 바뀌는 산,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해발 4,000여 미터가 넘는 산맥들, 산 그림자 짙게 깔린 깊은 계곡, 드넓은 평원, 사하라사막과 같은 고비사막, 맑은 공기, 맑은 물! 광야에 혼자 서서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을 바라보면서 영혼까지 맑아지는 것 같아서 내가 서 있는 그 광야가 거룩한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기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보다는 그러한 곳에 살고 있는 몽골인들이 생태학적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가까이 살고 있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더 밀착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연의 99퍼센트가 오염과는 무관하다는 유엔의 보고서가 나와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구 200만명 중에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100만명의 사람과 2,000만 마리의 가축도 오염과는 무관한 것 같았습니다.
몽골인들이 소개하는 몽골 안내서는 다른 나라의 안내서들과는 달리 몽골인들이 기르고 있는 집짐승들과 들이나 깊은 산 속에 사는 들짐승들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짐승들이 몽골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을 주는가 하는 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깨끗한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몽골 사람들에게서 배운 바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쓴 여행 안내책자의 한 대목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몽골사람들은 가축을 단순한 짐승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 받고 잘 살라고 보내주신 복을 베푸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필자들이 몽골인들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70여년 동안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온 몽골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으로서의 동물"(god-blessed animals)이라고 하여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놀랍고(비록 God이 아니고 god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 의외였고, 더욱이 이 동물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의 복지를 위해 허락해 주신 것이라는 동물 이해는 자본주의가 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단순한 이용거리로만 본 것보다 얼마나 더 신앙적인가 하는 것에 착안해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축이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타와 말과 소와 양과 염소입니다.
낙타는 한해에 적어도 5 킬로그램의 낙타 털을 사람에게 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따뜻한 낙타 털 담요를 다섯 장이나 만들 수가 있다고 합니다. 낙타의 고기는 식용으로 쓰이고, 암낙타가 내는 젖 역시 식용으로 쓰일 뿐만 아니라 배 아픈데 먹는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낙타는 사막과 광야 지역에서 수송과 운송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말은 여러 나라에서 승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힘찬 말을 보면 우리도 힘이 마구 솟구치는 충동을 느낍니다. 예로부터 화가들은 말의 힘찬 모습이나 달리는 말의 속도감을 시각화시켜 화폭에 담기를 즐겼습니다. 현대전의 탱크부대가 발휘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과거에 발휘했던 것이 바로 기마병이었습니다. 13세기에 몽골이 아시아에서 유럽을 걸쳐 세계를 제패했던 것도 바로 이 지칠 줄 모르게 달리는 말의 힘에 힘입은 바 컸을 겁입니다. 말고기는 프로테인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좋은 식용 고기라고 합니다. 암말은 질 좋은 젖을 사람에게 준다고 합니다. 몽골인들은 이것으로 더할 나위 없이 맛좋은 "아일락"이라는 음료와 술을 만들기도 한다고 합니다. 몽골에서 거행되는 전통적인 말달리기 경주는 사람들에게 호연지기를 길러주고 몸을 튼튼하게 해주고 말과 사람과의 일체감을 길러준다고 합니다.
소는 우리도 잘 알다시피 고기와 젖과 가죽과 털을 줍니다. 운송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쇠고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보르트"(Borts) 역시 영양 좋은 먹을거리라고 합니다. 지금 그들은 이 보르트를 개발하여 전세계 사람들이 좋아할 국제적인 먹을거리로 수출할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양은 우리에서 키우지 아니하고 방목하기 때문에 그 털이 희고 깨끗하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양이 사람에게 주는 혜택 또한 적지 않다고 합니다. 양이 식용 고기가 되는 것 말고도, 한 마리당 한 해에 1-2킬로그램의 양털을 내고, 몽골 사람들은 이것으로 그들의 천막집 "게르"를 덮는 덮게도 만들고 "게르" 안에 까는 깔게도 만들어 추위를 막는다고 합니다. 양털로는 만드는 것이 많습니다. 양털 코트나 조끼, 양가죽 코트나 자켓이 다 이 양에게서 나옵니다. 현대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다 고급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나오는 줄로만 압니다. 좀 더 벗어난다면 기껏해야 어느 회사의 제품인 것만을 알뿐입니다. 이런 것이 자연의 혜택, 짐승의 혜택인 줄 알기까지는 한참 생각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생각해도 도시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염소는 좀 기르기가 까다롭다고 합니다. 결코 더러운 물을 마시지 않으며, 오염된 물인지 아닌지를 그렇게도 잘 알아 조금이라도 오염된 물은 절대로 마시지 아니하며, 더러운 풀밭이나 땅 바닥에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소가 사람에게 주는 혜택 역시 크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것이 가볍고 따스한 케슈미어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케슈미어가 섞인 양복 윗저고리를 비싼 값에 산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염소에게서 나오는 줄은 거기 가서야 알았습니다. 마리당 한 해에 200-300그램밖에 내지 못하지만, 전국적으로 5백 50여만 마리가 내는 케슈미어는 그 나라의 외화 획득의 큰 자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축의 혜택도 하늘과 땅이 도와주니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 그 곳의 사정이라고 합니다. 5월부터 7월 사이의 여름에 비가 오지 아니하면 가뭄이 들어 그 드넓은 초원에는 목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그런 해에는 모든 가축들이 다 영양 실조에 걸려 여윈다고 합니다. 고기도 젖도 털도 빈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연의 재난은 겨울철에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눈이 너무 많이 내리면, 날씨가 너무 추워져 가축들이 먹을 목초가 모자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눈이 적게 내리면, 가축들이 마실 물이 모자라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가뭄이 들거나 눈이 적게 내리는 해는 가축 떼에게는 크나큰 재난이 아닐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재난의 그 다음 피해자들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 나라에 가서 보니까 사람에게 필요한 온갖 것이 다 가축에게서 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사람의 필수품은 가축이 제공합니다. 가축에게 필요한 먹이는 푸른 초원이 내어 줍니다. 푸른 초원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적절한 강우량과 적설 양은 하늘이 결정합니다. 하늘에게 적절한 비와 눈을 내리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거기에서, "그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 먹을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 라고 하신 성서말씀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여기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은 농경정착문화를 반영합니다. 몽골에는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 대신에 유목사회 특유의 "가축과 말 젖으로 빚은 '아일락' 술과 각종 낙농제품"이 있습니다. 호세아서의 본문에 나오는 "곡식"을 여기 몽골에서는 "가축"으로 대입시켜 읽어보면서 이 본문이 지닌 의미를 음미해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의 본문에서 두 가지를 착안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축과 땅과 하늘이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와 쓸거리를 생산해 내는 유목민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청한다는 사실입니다. 팔레스타인의 환경을 몽골의 환경으로 바꾸어서 제가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낙타, 말,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이 땅과 하늘과 더불어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와 쓸거리를 만들어 내는 유목민을 위하여 저희들끼리 간청하고 그 최종 단계에서는 하나님께 간청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목민 자신이 먹을거리나 입을 거리나 쓸거리를 달라고 하나님에게 "직접"기도하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라든가 입을 거리라든가 쓸거리를 주시는 하나님과 그러한 것들을 생산해 내야 하는 유목민 사이에 중간 매체로서 "하늘과 땅과 가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중간매체를 거쳐 최종적 생산자인 유목민과 교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이 포함된] 자연(自然)이라고 하는 중간 매체를 통하여 사람과 친교를 나누십니다. 중간매체인 하늘과 땅과 가축이 모두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와 쓸거리를 생산해 내는 유목민을 위해 단계적으로 간청을 합니다.
사람은 먹을 고기와 낙농제품과 추위를 막을 옷과 이불과 수송과 운송 수단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유목민이 생산한 것으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유목민이 좋은 생산품을 만들어 줄 것을 유목민들에게 빕니다.
그런데 이 모든 필수품을 유목민을 통해 사람에게 제공해 주는 것은 바로 가축입니다. 가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복의 매개체입니다. 그래서 유목민은 또 유목민대로 자기들이 기르고 있는 가축이 잘 자라주기를 가축을 향해 빕니다.
가축은 가축대로 잘 먹고 잘 자라고 새끼 많이 낳고 양질의 젖을 넉넉히 내고 제때 제때 털갈이 잘하여 늘 새털을 갈아입고, 이렇게 잘 살기를 원합니다. 가축은 땅을 딛고 서 있고, 땅만 보고 기어다니고, 땅에서 먹이를 얻고, 땅에서 쉴 곳을 찾기에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땅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땅을 향해 요청하는 것입니다. 또 땅은 땅대로 생명을 가꾸는 비옥한 땅이 되고자 합니다. 가축과 들짐승과 온갖 생물이 땅 위에서 아쉬움 없이 흡족하게 먹고 마시고 쉬고 사귀고 생명을 누리는 터전이 되고자 합니다. 그런데,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적절한 비와 눈이 없다면 메마른 죽음의 땅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땅은 하늘을 향해 햇빛과 공기와 철따라 부는 바람과 적절한 비와 눈과 안개와 이슬과 서리를 요청합니다. 또 하늘은 하늘대로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리고 이슬도 내리고 서리도 내려 만물이 하늘 밑에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께 생명의 젖줄이 되는 온갖 기온 변화의 조화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시어서 피조물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구원의 날은 하나님과 자연이 특히 사람과 함께 사는 가축인 집짐승이 유목민의 요청을 들어주고, 그리하여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굶지 않게 된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에게서 보는 구원의 날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또 유목민들은 결국 먹을거리와 쓸거리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전체 백성들에게 먹을거리와 쓸거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전체 백성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이 배부르게 먹고 추위를 막고 더위를 피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굶주린 백성들의 절규, 먹을거리를 달라는 아우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외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것이 하나님께 들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계약시대(신약시대!)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새 계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시기로 약속하신 도움을 주심에 있어서 그 전제되는 조건으로 종교성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 여러분께서 착안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명이 밝아오는 구원의 날은 탄식하는 모든 간구가 응답되는 날이지 종교적인 기도들만이 응답되는 날은 아닙니다." 여기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하는 예배 때의 기도만이 응답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물론 다행스럽게도 교회는 이러한 특권을 부여받지도 않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천지창조 이래 지금까지 자연은 자연대로, 인류는 인류대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고통 당하며 부르짖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신음과 절규와 탄식과 울부짖음이 하나님께 들리지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물론이려니와 우리가 남을 위해서 하는 중보의 기도마저도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간구를 다 반영하지는 못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위해서는 거의 아무런 것도 빌지 못한 것이 우리의 기도인데 우리의 이러한 부족한 기도만이 하나님께 들려지고 그것만이 응답되는 것이라면 피조세계는 창조 이전의 혼돈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경건한 기도만이 하나님께 들려지는 것이 아니고, 식물과 짐승과 땅과 하늘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진다는 것, 더욱이 인간이 전혀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도 아닌데도 그 비명이 인간의 이웃인 식물과 동물과 땅과 하늘과 같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 들리고, 또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은 성서적 신앙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통찰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경건하게 드리는 기도의 무용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한계성을 겸허하게 인정하고자 함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울부짖음과 비명은 유목민과 함께 사는 가축이나 유목민이 밟고 돌아다니는 땅이나 그들이 이고 사는 하늘을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전달되고 그리고 응답된다는 희망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유목민의 희망이자 유알(UR)의 위협을 받고 있는 농민의 희망이며 우리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차마 저 미물인 짐승의 본능적인 욕구가 우리 사람을 위한 기도가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땅과 하늘의 간구, 곧 땅과 하늘이 주고받는 우주적 대화가 결국 우리를 위한 기도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거기 그 땅 몽골에 가서야 사람 곧 유목민과 함께 사는 "동물"이 "땅"에게 간구하고 땅은 "하늘"에게 간구하고 하늘은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덕택으로 "사람"이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이웃으로서의 자연의 실재를 다시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몽골 땅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을 이렇게 읽어보았습니다.
그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낙타와 말과 소와 양과 염소에게 응답하고
또 낙타와 말과 소와 양과 염소는 몽골백성에게 응답할 것이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저의 몽골 방문은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몽골은 지도 위의 거리로는 서울에서 지척에 있지만, 우리에게는 북한과 함께 이념적으로 아주 먼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몽골 방문은 저 자신으로서도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몽골은 그 대부분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그 나라 서울인 울란바타르에서 며칠을 지내고, 또 그곳에서 맞이한 첫번 주일에는 울란바타르에서 서북쪽으로 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몽골의 제2의 도시 다르항에 다녀왔고, 두 번째로 맞이한 주말에는 그 곳 한국인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울란바타르 서쪽에 있는 위락 시설을 갖춘 한 마을을 다녀왔는데 자동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곳을 다녀 온 다음부터는 몽골 땅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에는 한국인 선교사가 한 스무 명이 있고, 연세대학교에서 세운 연세친선병원이 있어서 거기에도 한국인 의사가 4사람이나 있습니다. 한국인들을 만나고, 그들이 일하고 있는 여러 곳을 오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면서, 몽골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서서히 가지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한 편으로는 크게 뉘우친 바도 있고,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 질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구약의 호세아서 2장 21-2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 인용합니다.
21. 그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을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이 무슨 뜻인지 잘 파악이 안될 수도 있겠지만, 또 독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의 의미가 심오하게 감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할 것입니다. 이 본문의 뜻이 난해하게 여겨지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산문이 아니라 시(詩)입니다. 시이기 때문에 이것은 직접적인 사실 묘사가 아니라 통찰과 상상력에서 나온 결과를 축약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응답하시고, 하늘이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이스라엘의 곡창지대인 이스르엘에 응답한다고 할 때, 여기 하나님과 하늘과 땅과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과 곡창지대인 이스르엘이 모두 의인화되어 등장하는 것이라든지, 더욱이 이러한 의인화된 인물들이 한 무대에 함께 등장하는 것 등이 구약에서는 예사로운 경우가 아닙니다. 또 이 다섯 등장 인물이 서로 요청과 호응관계에 있다는 통찰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단계적으로 요청하거나 응답한다고 할 때 무엇에 어떻게 응답한다는 말인지 그 응답 내용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독자의 의문은 이해가 됩니다.
이 본문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읽으면 읽을 수록 시원한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확 트여 있고 뭔가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곡식과 술과 기름과 사람 사이에 막힘이 없습니다. 갈등이 없습니다. 이 짧은 본문 안에 "요청에 응답한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요청에 응답하시고, 하늘은 땅의 요청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요청에 응답하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사람의 요청에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먹을거리와 사람 사이에 아무런 막힘이 없는 농경사회의 이상적인 조화, 농민의 희망, 농경사회의 희망 같은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필요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다 응답되는 우주적 순환을 여기에서 봅니다.
저는 몽골에서 두 주간 남짓 머물면서 농업 정착민의 이상이 담긴 이 본문을 유목 문화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몽골에서 몽골 유목민의 시각으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몽골에 가기 전에 저는 몽골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책방을 뒤지며 몽골에 관한 책을 찾다가, 조선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펼쳐진 "한민족 뿌리 찾기" 몽골학술기행문인 {바람의 고향, 초원의 말발굽}이라고 하는 학술조사단의 기행문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이 학술보고를 통해서 몽골에 대한 입문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몽골에 들어간 다음에는 몽골인들이 쓴 몽골 안내책들 곧, 그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몽골안내}와,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서 역시 몽골인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외국인을 위한 몽골안내}, 그리고 울란바타르 시내 지도 등을 읽으면서 몽골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몽골에서 맞이한 첫 번째 주일날 이른 아침에 그곳 수도 울란바타르를 떠나서 그곳의 제2의 도시라고 하는 다르항이라는 곳에 정오에 도착하여 그곳 몽골 교회에서 설교를 하며 함께 예배드리고 오후 4시쯤 길을 나서서 울란바타르에는 밤 10시경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본 것이라고는 아침 햇살에 비치는 몽골 서북부의 대초원과 그 드넓은 초원 그리고 거기에 흩어진 흰 양떼와 검은 염소떼, 방목되는 소떼와 자동차 길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말의 무리들, 군데군데 보이는 몽골 유목민의 천막집 "게르", 말을 타고 달리는 몽골인과 야생마를 길들이는 긴장감 도는 장면, 해거름의 순하디 순하게 뻗어나가는 그림 같은 야산의 실루엣과 광야의 대낮이 칠흑 같은 광야의 밤으로 바뀌는 신비한 변화를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여섯 명의 일행이 모두 몽골인 남녀 청년들이었으므로 흥미 있는 것들은 무엇이거나 주저함 없이 묻고 이야기하고, 가고 오는 여덟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몽골 땅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러했겠고 또 영원히 그러할 파랗고 맑은 하늘, 끝없이 이어지는 야산과 평원,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흐르는 강들, 철 따라 색깔이 바뀌는 산,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해발 4,000여 미터가 넘는 산맥들, 산 그림자 짙게 깔린 깊은 계곡, 드넓은 평원, 사하라사막과 같은 고비사막, 맑은 공기, 맑은 물! 광야에 혼자 서서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을 바라보면서 영혼까지 맑아지는 것 같아서 내가 서 있는 그 광야가 거룩한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기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보다는 그러한 곳에 살고 있는 몽골인들이 생태학적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가까이 살고 있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더 밀착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연의 99퍼센트가 오염과는 무관하다는 유엔의 보고서가 나와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구 200만명 중에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100만명의 사람과 2,000만 마리의 가축도 오염과는 무관한 것 같았습니다.
몽골인들이 소개하는 몽골 안내서는 다른 나라의 안내서들과는 달리 몽골인들이 기르고 있는 집짐승들과 들이나 깊은 산 속에 사는 들짐승들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짐승들이 몽골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을 주는가 하는 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깨끗한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몽골 사람들에게서 배운 바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쓴 여행 안내책자의 한 대목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몽골사람들은 가축을 단순한 짐승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 받고 잘 살라고 보내주신 복을 베푸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필자들이 몽골인들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70여년 동안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온 몽골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으로서의 동물"(god-blessed animals)이라고 하여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놀랍고(비록 God이 아니고 god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 의외였고, 더욱이 이 동물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의 복지를 위해 허락해 주신 것이라는 동물 이해는 자본주의가 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단순한 이용거리로만 본 것보다 얼마나 더 신앙적인가 하는 것에 착안해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축이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타와 말과 소와 양과 염소입니다.
낙타는 한해에 적어도 5 킬로그램의 낙타 털을 사람에게 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따뜻한 낙타 털 담요를 다섯 장이나 만들 수가 있다고 합니다. 낙타의 고기는 식용으로 쓰이고, 암낙타가 내는 젖 역시 식용으로 쓰일 뿐만 아니라 배 아픈데 먹는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낙타는 사막과 광야 지역에서 수송과 운송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말은 여러 나라에서 승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힘찬 말을 보면 우리도 힘이 마구 솟구치는 충동을 느낍니다. 예로부터 화가들은 말의 힘찬 모습이나 달리는 말의 속도감을 시각화시켜 화폭에 담기를 즐겼습니다. 현대전의 탱크부대가 발휘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과거에 발휘했던 것이 바로 기마병이었습니다. 13세기에 몽골이 아시아에서 유럽을 걸쳐 세계를 제패했던 것도 바로 이 지칠 줄 모르게 달리는 말의 힘에 힘입은 바 컸을 겁입니다. 말고기는 프로테인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좋은 식용 고기라고 합니다. 암말은 질 좋은 젖을 사람에게 준다고 합니다. 몽골인들은 이것으로 더할 나위 없이 맛좋은 "아일락"이라는 음료와 술을 만들기도 한다고 합니다. 몽골에서 거행되는 전통적인 말달리기 경주는 사람들에게 호연지기를 길러주고 몸을 튼튼하게 해주고 말과 사람과의 일체감을 길러준다고 합니다.
소는 우리도 잘 알다시피 고기와 젖과 가죽과 털을 줍니다. 운송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쇠고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보르트"(Borts) 역시 영양 좋은 먹을거리라고 합니다. 지금 그들은 이 보르트를 개발하여 전세계 사람들이 좋아할 국제적인 먹을거리로 수출할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양은 우리에서 키우지 아니하고 방목하기 때문에 그 털이 희고 깨끗하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양이 사람에게 주는 혜택 또한 적지 않다고 합니다. 양이 식용 고기가 되는 것 말고도, 한 마리당 한 해에 1-2킬로그램의 양털을 내고, 몽골 사람들은 이것으로 그들의 천막집 "게르"를 덮는 덮게도 만들고 "게르" 안에 까는 깔게도 만들어 추위를 막는다고 합니다. 양털로는 만드는 것이 많습니다. 양털 코트나 조끼, 양가죽 코트나 자켓이 다 이 양에게서 나옵니다. 현대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다 고급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나오는 줄로만 압니다. 좀 더 벗어난다면 기껏해야 어느 회사의 제품인 것만을 알뿐입니다. 이런 것이 자연의 혜택, 짐승의 혜택인 줄 알기까지는 한참 생각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생각해도 도시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염소는 좀 기르기가 까다롭다고 합니다. 결코 더러운 물을 마시지 않으며, 오염된 물인지 아닌지를 그렇게도 잘 알아 조금이라도 오염된 물은 절대로 마시지 아니하며, 더러운 풀밭이나 땅 바닥에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소가 사람에게 주는 혜택 역시 크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것이 가볍고 따스한 케슈미어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케슈미어가 섞인 양복 윗저고리를 비싼 값에 산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염소에게서 나오는 줄은 거기 가서야 알았습니다. 마리당 한 해에 200-300그램밖에 내지 못하지만, 전국적으로 5백 50여만 마리가 내는 케슈미어는 그 나라의 외화 획득의 큰 자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축의 혜택도 하늘과 땅이 도와주니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 그 곳의 사정이라고 합니다. 5월부터 7월 사이의 여름에 비가 오지 아니하면 가뭄이 들어 그 드넓은 초원에는 목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그런 해에는 모든 가축들이 다 영양 실조에 걸려 여윈다고 합니다. 고기도 젖도 털도 빈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연의 재난은 겨울철에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눈이 너무 많이 내리면, 날씨가 너무 추워져 가축들이 먹을 목초가 모자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눈이 적게 내리면, 가축들이 마실 물이 모자라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가뭄이 들거나 눈이 적게 내리는 해는 가축 떼에게는 크나큰 재난이 아닐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재난의 그 다음 피해자들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 나라에 가서 보니까 사람에게 필요한 온갖 것이 다 가축에게서 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사람의 필수품은 가축이 제공합니다. 가축에게 필요한 먹이는 푸른 초원이 내어 줍니다. 푸른 초원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적절한 강우량과 적설 양은 하늘이 결정합니다. 하늘에게 적절한 비와 눈을 내리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거기에서, "그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 먹을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 라고 하신 성서말씀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여기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은 농경정착문화를 반영합니다. 몽골에는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 대신에 유목사회 특유의 "가축과 말 젖으로 빚은 '아일락' 술과 각종 낙농제품"이 있습니다. 호세아서의 본문에 나오는 "곡식"을 여기 몽골에서는 "가축"으로 대입시켜 읽어보면서 이 본문이 지닌 의미를 음미해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의 본문에서 두 가지를 착안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축과 땅과 하늘이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와 쓸거리를 생산해 내는 유목민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청한다는 사실입니다. 팔레스타인의 환경을 몽골의 환경으로 바꾸어서 제가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낙타, 말,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이 땅과 하늘과 더불어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와 쓸거리를 만들어 내는 유목민을 위하여 저희들끼리 간청하고 그 최종 단계에서는 하나님께 간청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목민 자신이 먹을거리나 입을 거리나 쓸거리를 달라고 하나님에게 "직접"기도하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라든가 입을 거리라든가 쓸거리를 주시는 하나님과 그러한 것들을 생산해 내야 하는 유목민 사이에 중간 매체로서 "하늘과 땅과 가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중간매체를 거쳐 최종적 생산자인 유목민과 교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이 포함된] 자연(自然)이라고 하는 중간 매체를 통하여 사람과 친교를 나누십니다. 중간매체인 하늘과 땅과 가축이 모두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와 쓸거리를 생산해 내는 유목민을 위해 단계적으로 간청을 합니다.
사람은 먹을 고기와 낙농제품과 추위를 막을 옷과 이불과 수송과 운송 수단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유목민이 생산한 것으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유목민이 좋은 생산품을 만들어 줄 것을 유목민들에게 빕니다.
그런데 이 모든 필수품을 유목민을 통해 사람에게 제공해 주는 것은 바로 가축입니다. 가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복의 매개체입니다. 그래서 유목민은 또 유목민대로 자기들이 기르고 있는 가축이 잘 자라주기를 가축을 향해 빕니다.
가축은 가축대로 잘 먹고 잘 자라고 새끼 많이 낳고 양질의 젖을 넉넉히 내고 제때 제때 털갈이 잘하여 늘 새털을 갈아입고, 이렇게 잘 살기를 원합니다. 가축은 땅을 딛고 서 있고, 땅만 보고 기어다니고, 땅에서 먹이를 얻고, 땅에서 쉴 곳을 찾기에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땅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땅을 향해 요청하는 것입니다. 또 땅은 땅대로 생명을 가꾸는 비옥한 땅이 되고자 합니다. 가축과 들짐승과 온갖 생물이 땅 위에서 아쉬움 없이 흡족하게 먹고 마시고 쉬고 사귀고 생명을 누리는 터전이 되고자 합니다. 그런데,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적절한 비와 눈이 없다면 메마른 죽음의 땅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땅은 하늘을 향해 햇빛과 공기와 철따라 부는 바람과 적절한 비와 눈과 안개와 이슬과 서리를 요청합니다. 또 하늘은 하늘대로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리고 이슬도 내리고 서리도 내려 만물이 하늘 밑에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께 생명의 젖줄이 되는 온갖 기온 변화의 조화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시어서 피조물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구원의 날은 하나님과 자연이 특히 사람과 함께 사는 가축인 집짐승이 유목민의 요청을 들어주고, 그리하여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굶지 않게 된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에게서 보는 구원의 날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또 유목민들은 결국 먹을거리와 쓸거리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전체 백성들에게 먹을거리와 쓸거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전체 백성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이 배부르게 먹고 추위를 막고 더위를 피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굶주린 백성들의 절규, 먹을거리를 달라는 아우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외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것이 하나님께 들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계약시대(신약시대!)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새 계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시기로 약속하신 도움을 주심에 있어서 그 전제되는 조건으로 종교성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 여러분께서 착안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명이 밝아오는 구원의 날은 탄식하는 모든 간구가 응답되는 날이지 종교적인 기도들만이 응답되는 날은 아닙니다." 여기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하는 예배 때의 기도만이 응답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물론 다행스럽게도 교회는 이러한 특권을 부여받지도 않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천지창조 이래 지금까지 자연은 자연대로, 인류는 인류대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고통 당하며 부르짖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신음과 절규와 탄식과 울부짖음이 하나님께 들리지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물론이려니와 우리가 남을 위해서 하는 중보의 기도마저도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간구를 다 반영하지는 못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위해서는 거의 아무런 것도 빌지 못한 것이 우리의 기도인데 우리의 이러한 부족한 기도만이 하나님께 들려지고 그것만이 응답되는 것이라면 피조세계는 창조 이전의 혼돈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경건한 기도만이 하나님께 들려지는 것이 아니고, 식물과 짐승과 땅과 하늘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진다는 것, 더욱이 인간이 전혀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도 아닌데도 그 비명이 인간의 이웃인 식물과 동물과 땅과 하늘과 같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 들리고, 또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은 성서적 신앙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통찰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경건하게 드리는 기도의 무용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한계성을 겸허하게 인정하고자 함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울부짖음과 비명은 유목민과 함께 사는 가축이나 유목민이 밟고 돌아다니는 땅이나 그들이 이고 사는 하늘을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전달되고 그리고 응답된다는 희망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유목민의 희망이자 유알(UR)의 위협을 받고 있는 농민의 희망이며 우리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차마 저 미물인 짐승의 본능적인 욕구가 우리 사람을 위한 기도가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땅과 하늘의 간구, 곧 땅과 하늘이 주고받는 우주적 대화가 결국 우리를 위한 기도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거기 그 땅 몽골에 가서야 사람 곧 유목민과 함께 사는 "동물"이 "땅"에게 간구하고 땅은 "하늘"에게 간구하고 하늘은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덕택으로 "사람"이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이웃으로서의 자연의 실재를 다시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몽골 땅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을 이렇게 읽어보았습니다.
그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낙타와 말과 소와 양과 염소에게 응답하고
또 낙타와 말과 소와 양과 염소는 몽골백성에게 응답할 것이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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