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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진리, 빛

아모스 서공석............... 조회 수 1942 추천 수 0 2008.03.17 21: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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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암5:21-26 
설교자 : 서공석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하면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악한 일을 일삼는 사람과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을 대립시켜서 말합니다. 행실이 악한 사람은 어둠을 더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복음서의 서론에서부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생명이고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4). 그리고는 이어서 "빛이 어둠 속에 비친 것이지만 어둠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5)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우리 삶의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생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흔히 하느님에게 신뢰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은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예수가 우리에게 주어진 구세주라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일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리고 교리들을 믿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삼위일체를 비롯하여 예수의 하느님이심과 사람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의 실천은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을 잘하는 것 정도로 요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예수가 구원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고 각 교회가 요구하는 바를 지키고 돈을 바쳐서, 바친 것 이상으로 은혜를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세에서는 행복의 은혜, 죽어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다', '빛으로 나아간다' 등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믿고 지키고 바쳐서 은혜를 받는 것으로 요약되는 이런 신앙은 철저히 우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고, 그분의 말씀이나 계명을 우리가 지키고, 우리가 바쳐서, 우리 자신을 위한 최대의 혜택을 받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군주사회나 봉건사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군주나 영주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고, 그들이 내리는 명령들을 잘 지켜서, 그들로부터 최대의 혜택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런 사회에서 살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요약하면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별 볼일 없는 군주와 같습니다. 지킬 것을 주어 놓고 심판하려고 보고 계시는 구차스런 하느님입니다. 신앙인은 철저하게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다 얻고, 그리고도 부족한 것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또 더 얻어서 더 잘 살아 보겠다는 것이 신앙인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잘살아 보세' 하던 옛날 새마을 운동 정신에다 하느님을 등장시켜 더 큰 실효를 내는 초자연적 새마을 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의 언어 안에 예수의 죽음은 어떻게 표현되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도 우리 위주고 우리의 이익을 도모하는 해석이 되고 맙니다. 예수는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갚기 위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운명이 높은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왕이 전쟁을 일으키면, 백성은 전쟁에 참여하고 전화(戰禍)에 휘말리는 운명이었습니다. 원님 한 사람의 심보가 고약하면 그 고을의 모든 사람이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여건에서 예수가 죽어서 우리 죄를 대신 갚았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 것이 옛날 사람들입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좌우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다릅니다. 우리 현대인은 각자 다양한 정보를 받으면서 각자 자유스럽게 자기 인생을 삽니다. 각자 자기 삶에 대해 각자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들도 '내 마음이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오늘의 세상입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가 자기의 죄를 대신 갚았다고 말하면 이 사람들은 전혀 납득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한 선택 앞에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슈퍼마켓, 부훼식당, 비디오 장치, 다양한 관광 안내 등이 우리 앞에 펼쳐진 선택의 다양함을 말해 줍니다. 각자의 자유 행사는 우리 생활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내가 선택할 여지도 없이 예수와 하느님 사이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말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자유 선택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것은 확인의 언어가 아닙니다. 호적등본을 확인한 결과도 아니고 친자확인(親子確認) 절차를 거치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전하는 그분 삶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아야 예수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삶의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우리가 알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같은 복음서 안에서 예수의 모습 몇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요한복음 5장은 벳쎄다 못에서 예수가 어떤 병든 이를 고쳐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그 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누어 있었습니다. 38년간이나 병으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예수는 그 사람을 고친 다음 "아직까지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며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5:21)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고치는 일을 하시는 분이고, 예수도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가 많은 군중을 먹이셨다고 말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과연 먹였는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늘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말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서 안에 먹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설교 안에 하느님은 새들을 먹이시고 꽃들을 입히시는 분입니다(마태 6:25-31).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시오...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다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6:31-32)는 말씀도 곁들여 있습니다. 물론 의식주(衣食住)를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인생의 최대 보람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넘어서 하느님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가 많은 군중을 먹이셨다는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먹이시는 분이라 예수도 먹이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유대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죽이려 하고 예수는 그 여인을 살려 놓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소외시키고 죽이지만 예수는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살리신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는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는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하듯이 고상한 직업이 아닙니다. 밤을 세워 양떼를 돌보는 천한 직종입니다. 그리고 11장에서는 예수가 라자로를 살리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전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이 최후만찬을 전하는 자리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모습을 전하면서 "주요 또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었다면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알려 줍니다. 예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신 분입니다. 예수는 사람들을 살리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안에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느님의 생명은 고치고, 살리고, 배고픈 이를 먹이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을 용서하며, 겸손하게 이웃을 위해 주고, 그것을 위해 자기 스스로 내어 주는 생명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하느님 생명이 발생시키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진리이며, 이것이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들이 당신들을 자유롭게 하면 당신들은 참으로 자유로워진다"(요한 8:36)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런 실천을 따라 사는 사람은 참다운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죽게 하는 것은 우리의 소홀함이나 우리의 이익 추구 또는 우리의 미움이 하는 일입니다. 어떤 것에 노예가 되었거나 우리의 자유가 퇴색했을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것이 참으로 인간다운 자유를 행사하는 길입니다. 남은 손해 보게 하면서 자기 스스로는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것이 참다운 자유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먹게 하기 위해 자기 것을 나누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과거에 얽매여 그 사람을 외면하고 미워하는 것은, 과거에 그로부터 얻은 인상이나 상처에서 치유되지 못한 자유스럽지 못한 행동일 것입니다.
믿음은 이런 자유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실천들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스승이 제자를 위해 하는 실천입니다. 믿음은 교회 안에서 하는 예배와 헌금이 아닙니다. 믿고 지키고 바쳐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큰 혜택을 얻어내는 길이 아닙니다. 헌금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또 이웃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바를 하는 것입니다. 바쳐서 많이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기쁘게 던지는, 그야말로 희사(喜捨)하는 관대한 마음의 실천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성서를 듣고 예배하는 것은, 그것이 목적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 진행되는 우리의 삶 안에 예수로 말미암은 새로운 실천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 안에서 끝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 안에 보였던 하느님의 생명, 곧 우리를 위한 진리를 교회 밖 우리의 삶 안에 실천하는 데에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아모스 예언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성전 안의 예배가 역겹다는 말씀입니다. 성전 밖에서 정의와 서로 위로하는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하는 정의는 하느님의 베푸심입니다. 하느님이 베풀고 살리시는 분이라 그것을 실천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해타산적(利害打算的)입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의 아성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밖에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흔히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이런 것이 오늘의 복음이 말한 어둠일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섬겨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르시오"(요한 12:26)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배워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실천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손짓입니다. 예수 안에 보이는 이런 삶을 실천하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되라는 초대의 손짓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행복들 안에 쉽게 갇혀 버립니다. 돈이 조금 있으면 그것이 우리 삶의 보람이라 생각합니다. 내 것이니까 나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국내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소비의 작태들은 모두 이 원칙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조그마한 자리를 하나 얻어서 명예와 이득이 있으면 그것을 고수하기 위해 비굴하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권력은 사람을 쉽게 눈멀게 합니다. 어떤 권한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일이 돌아가야 한다고 쉽게 망상합니다. 여기서 횡포들이 발생합니다. 교회 밖에서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횡포들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도 쉽게 그렇게 하면서 말입니다. 요사이 大盜無聞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큰 도둑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 주변의 일들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은 도둑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어둠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작은 행복들 안에 갇혀서 착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말은 작은 행복들이 주는 착각에서 깨어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아성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변하게 하여 사람이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고, 예수 안에 보여진 진리를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용하는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허공에 던져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실천이 있는 곳에, 우리가 실천하는 그분의 진리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입니다"(요한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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