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삭개오 집에 임한 구원

미가 김경재 목사............... 조회 수 2155 추천 수 0 2008.04.02 09:37:44
.........
성경본문 : 미19:8-10 
설교자 : 김경재 목사 
참고 : 새길교회 
1) 미가 예언의 핵심 메시지

인류가 경험한 "거룩한 구원의 길들" 중에 그 유형이 독특하고 뚜렷한 세 가지 길들이 있으니, 학자들은 그 길에 이름을 붙여 말하기를 인도계의 신비종교의 길, 중국계의 성인종교의 길, 셈족계의 예언종교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예언종교는 종교의 기원과 목적이 인간 내면 종교성에서 울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초월자의 뜻에서부터 기원하며 말씀으로 강림함을 강조합니다. 듣고 난 후 그 말씀의 뜻과 거룩한 목적에 순종하는 것을 통하여 구원을 경험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봉독한 미가서 6장 8절은 전형적인 예언자종교의 진수가 그 가장 순수한 형식 속에서 표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전 6세기 예언자 미가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선포는 인간에게 언제나 심판의 말씀이면서 구원의 말씀이라는 양날을 지닌 능력이 됩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순명(順命)하면 구원이요, 불순명하면 멸망이 됩니다. 말씀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구원지식에 관한 정보전달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요 구원의 샘물이 됩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너, 사람아"라고 부르는 이 부름 소리 속에서 우리는 저 창세기 에덴동산 설화 속에서 "아담아,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회상하게 됩니다.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부름의 소리를 듣습니다.
귀를 막고, 시침 뚝 떼고서 마치 못 듣는 귀머거리나 된 양 딴 청을 부리는 현대판 아담들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 입을 통하여 "아담아, 사람아"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변명하는 아담에게 가치혼동사회 속에서 판단중지, 행동중지를 하고 최소한 밀폐된 내 영혼 방안으로 칩거하여 문을 굳게 닫고서 나 자신을 지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라고 변명하는 아담들에게, 미가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아니야, 무엇이 착한 일인지, 무엇이 선한 일인지를 이미 내가 말했다고 예언자는 잘라 말합니다.
다양하고 지극히 상대적인 현대 사회적 삶 속에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절대자의 뜻이란 인간사회집단이 만들어 낸 상대적 가치규범일 뿐인데 무슨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고 우리들 지성은 비판적 거부자세를 지닙니다. 도덕적 선악이란 인간중심주의적 윤리체계일 뿐, 하나님에게 무슨 선악이 있으며, 사랑과 미움이 있으며 겸손과 오만이 있느냐고 초탈한 사람인양 처신하는 사람에게 주께서 너,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고 예언자 미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람이 항상 좇고, 그 길을 걸으며, 그 길 안에서 영생을 경험하는 선한 길, 곧 구원의 길 세 가지를 단순 명료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줍니다.
첫째는, 오로지 공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 둘째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 즉 인자, 어진 마음과 자비심을 잃지 않고 실천하는 것, 셋째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히브리적 경건의 본질이요, 예언자 종교의 핵심이요, 성서적 신앙의 유형적 특징이자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 인류와 한 민족이 멸망과 혼란의 길에 들어섰다면 그 이유는 위에서 제시한 구원의 길, 곧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떠나서 삶의 정도를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남고 구원받기 원한다면 그 본래적인 사람의 길, 하나님이 요구하는 길로 되돌아와 바르게 걸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공의를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소위 한보사건이라는 정경유착의 스캔달을 헤집어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공의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질서에 위배되는 삶을 살아가는 죄적인 공동체인가를 절실하게 느낍니다. 명색이 청문회를 한다는 공개방송 앞에서,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백주에 위증과 거짓말을 밥먹듯이 합니다. 좋은 머리로 법학을 전공하여 고시를 합격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정의를 위반하는 거짓말하기 자문 역으로 당당히 증인석 옆에 앉아 위증을 교사합니다. 정의, 공의는 성서적 종교, 예언적 종교의 강렬한 특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 갑니다. 공의는 사회적 인간 공동체의 척추 뼈와 같고 척추중심부에서 뻗어나간 중추신경과 같습니다. 척추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둘째, 정의가 사람들의 척추 뼈와 같다면 인자, 인내는 혈관을 흐르는 싱싱한 혈액과 같습니다. 혈행의 피돌기가 혈관이 좁아지거나 피가 혼탁해져 원활하지 못하면 생명에 적신호가 옵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 같은 동포끼리 어려울 때 서로 돕고 감싸안는 인애를 멀리한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북쪽은 북쪽대로 가부장적 정치우상숭배로 온 나라가 50년간 절단이 날 대로 나게 되었는데도, 수령론이니 주체사상이니, 우리식 사회주의니 하면서 광명천지 21세기가 동트는 지금 이때까지 국민을 세계사 동향에 까막눈이 되도록 철권정치, 폐쇄정치를 지속하고 마침내 주민 전체를 아사 직전까지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100만 이상의 붉은 군대를 보유 강화하면서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군부의 광기가 언제 폭발할는지 알 수 없는 정황에 놓여 있습니다.
남한은 남한대로 냉전이데올로기에 꽁꽁 묶여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몰인정한 비인간적 삶을 지속하도록 국민을 반공이념으로 윽박질렀습니다. 최근 안기부와 치안당국의 곱지 않은 눈길과 음성적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 각계 각층에서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동포를 이념을 초월하여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자각이 확산되어 북한 어린이와 동포의 식량 돕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실천 준행하는 것은 인간 양심의 발로로 이 시대 신앙인의 지상명령이며 신앙 고백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 겸손한 신앙은 동양의학적으로 말한다면 기맥과 같습니다. 사람의 기와 맥은 보이지 않고 가볍고 투명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영물스럽게 하는 가장 귀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일에도 특히 종교인들은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정의를 실천하고, 인애와 자비심을 가지고 사랑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거늘, 교세를 확장하고 교회당과 법당을 더 크고 더 많이 짓고 늘쿠는 데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종교간의 상호 이해나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하는 일에 협동하기보다는, 어쭙잖은 우월감, 경쟁과 상호 비방행위로 비종교인들로부터 비판과 조롱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일들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일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삭개오의 기쁨을 우리에게도

진정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죄 많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심판밖에 기다릴 것이 없는 백성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정의, 인애, 겸허한 신앙을 모두 배반한 죄 많은 백성이요, 그 죄의 진흙탕 속에서 살고있는 구성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 19장 삭개오의 이야기 속에서 한 가닥 구원의 빛이 우리에게 비춰오고 있음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삭개오가 누구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지체부자유자로서 태어난 난쟁이 삭개오는 로마제국의 식민치하에서 각자 요령 것 살아가되, 그 시대 속에서 그는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취직시켜주는 사람도 없고 사람 대접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지가 성한 사람, 머리 좋은 영리한 사람도 살아가기 힘든 그 시대 속에서 삭개오를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희생자요, 동족으로부터 소외된 자였습니다. 율법과 성전도, 서기관과 바리세파 사람들도 그를 사람으로 대접하거나 끼워주지도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자살하지 않고 모진 생명을 지속해 갈 수 있는 유일한 호구지책의 길 하나가 있었습니다. 식민통치권자의 권력을 배경으로 하고 피식민지 국민의 세금징수를 대행해주고 그 일부를 대가로 받는 세리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세리와 창기는, 조선시대 갖바치나 백정보다도 더 사람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는 직업 아닌 직업이었지만, 삭개오는 이를 악물고 반평생을 그 일에 종사하면서 모진 생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직위가 세리장이 되고, 여리고라는 교통무역 중심 도시의 세관장까지 되어 제법 재산도 모을만치 모아서 부자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세상이 자기에게 그렇게 험하게 구니, 자기가 살아남는 길은 그렇게 모질고 냉혹하게, 오로지 돈의 힘만을 믿고 사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세리장이의 그 자리를 넘보는 경쟁자와 모함자도 많으니, 모든 재산을 가지고 적당히 로마총독부 고급관리들에게 로비도 열심히 해둬야 했습니다. 재산이 꾀 많이 모여져서 부자가 되고, 로마 총독부 관리들과 이십여년 간 쌓아온 인맥으로 인하여 이제는 함부로 삭개오를 대놓고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인심은 참 간사하고 약삭빠른 것이어서, 삭개오를 대하는 세상사람들의 폼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뒤돌아서는 더러운 세리놈 삭개오라고 욕을 하더라도 그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아부하는 유대지도자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그러한 이중인격자들의 사람됨을 속으로 비웃어주면서 세상은 그런 것이려니 하고 신바람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 마음 깊은 곳이 늘 허전하고, 참 사람이 그리웠습니다. 자기를 참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사람으로 대해주는 진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위 모든 사람들, 사회관습, 편견, 사회 정치적 제반조건, 종교 정치적 이념의 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멀리서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라는 랍비가 여리고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랍비를 꼭 한 번 보고싶었습니다. 군중에 가리워 보이지도 않았고 접근하기도 어려웠던 랍비 예수가 놀랍게도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어 지켜보던 그 나무 아래에 오더니, "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그대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너무 기뻤습니다. 집으로 예수님을 급히 모시니 갑자기 집안은 귀한 손님, 랍비 선생님을 모시는 기쁨으로 분주하였습니다. 밖에서는 마음 차갑기가 뱀 비늘처럼 차가워진 사람들이 예수가 용서 못할 죄인 세리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대고 입방아를 찧고 있었습니다.
집밖에서 들려오는 世人들의 조롱과 야유와 시샘엔 아랑곳하지 않고, 삭개오 집안에서는 만찬 상이 급히 준비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식탁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년처럼 다소 흥분한 말투와 홍조 띤 얼굴로 선생님 예수를 향해 말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부정한 세금 늑탈한 것을 회개하고 착한 일 좀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더러 세리장직을 내일 당장 그만두라고 직업전환을 요청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삭개오의 마음에 쌓이고 쌓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그 염원과 그 갈증과 그 바램에 조용히 친구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맑고 바른 눈동자로 보고 대면해준 것뿐입니다. 20-30년 동안 차가운 풍진 세상의 냉혹한 먼지 비바람에 굳어지고 지쳐버린 삭개오의 마음이 예수님을 만나고 집안에 모시기만 했는데, 그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녹아지고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피눈물나게 모았던 재산도 그 날 그 밤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인가 착하고 아름다운 일,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맘을 보시고 속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삭개오의 이 행동으로 삭개오만이 아니라, 삭개오 집안 전체에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이란 다름 아니라 사람다운 건강한 얼굴,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서 빛나는 얼굴, 정의를 추구하고 인애를 실천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긍지를 지닌 얼굴을 다시 되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세리장이 삭개오와 같은 존재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세계 열강들의 말발굽에 치여 남북한은 삭개오처럼 그 심령이 안으로 안으로 굳어져서 병든 인간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여 맘에 깊은 열등의식과 자기과시 의욕과 비뚤어진 사대사상으로 우리 혼이 그만 깊은 병이 들어버렸습니다. 겉치레 치장과 전시효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지 않으면, 밀 쭉정이 껍질보다 더 덧없고 가벼운 자기 실존이 받는 無의 위협을 견디어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돈과 권력만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믿을 수 있는 현실적 힘이라고 확신하는 세속적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남북한 국민이 삭개오의 맘처럼 다시 녹아지고, 자발성과 사람됨의 환희로 다시 약동하는 구원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번 북한 식량돕기운동을 민족을 되살림 받는 하나님의 치유의 기회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밥 한끼 정도의 모금으로는 부족합니다. 삭개오처럼 자신의 재물을 절반까지 나누어주지는 못할망정, 정부미 한가마니 값, 옥수수 일톤 값씩은 가정경제가 좀 무리된 듯 싶어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는 결단적으로 결행하여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새길교회, 그 이름이 아름답고 좋다고 느껴졌습니다. 새길은 무엇이 새길일까요? 묵은 길, 낡은 길, 구태의연한 길을 걷지 않겠다는 다짐이겠지요. 항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은 것 같은 싱그러움과 구원의 첫 감격을 지니고 살겠다는 다짐이겠지요. 새길교회가 무슨 새로운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고 믿는 신앙공동체라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새길교회의 의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길이 단지 구원이라는 목표점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라, 실천을 동반한 길이 곧 구원임을 믿고 체험하는 신앙공동체라는 의미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 따로 실천 따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교회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지니 내 계명을 지키는 자를 나도 사랑할 터이요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칼 바르트 목사는 하나님의 형상이 창발적으로 구현되는 필요충분조건으로서 네 가지를 말했습니다. 서로 사람과 사람간에 같은 동등한 자리에서 마주 바라보는 봄의 사건이 일어날 것, 서로 말을 건내고 말을 귀담아 듣는 언어의 사건이 지속될 것, 서로 필요한 것을 도와주고 도움 받는 주고받음의 상부상조가 실현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이 의무이거나 율법의 계명 때문이 아니라 신바람나는 기쁜 자발성에서 울어난 일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일 것.

삭개오와 예수님 사이에 바로 그 네 가지 사건이 생기가 통하듯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자 삭개오 맘속에 잃었던 생기가 돌고 생명의 환희와 사랑하고픈 열정이 솟구쳐 나왔습니다. 삭개오가 맛본 기쁨이 우리들 가정에도 임하기를 기도하고 교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삭개오가 결행한 그 기쁜 구원의 길에 우리도 동참하여, 서로 빵을 나눌 때 홀연히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은혜의 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127 이사야 제자의 길 사50:4-9  박동현 목사  2008-07-13 1860
1126 요한계시 새로운 시작 계21:1-8  권진관 형제  2008-07-11 2188
1125 요한복음 유월절과 유대인의 신앙 요6:1-15  최창모 교수  2008-07-11 3081
1124 마태복음 교육방법으로서의 예수 스캔들 마11:2-6  천세영 형제  2008-07-11 1937
1123 요한복음 온전한 사람되기 : 예수 따르미 공동체 요5:1-9  한완상 형제  2008-07-11 2103
1122 마태복음 예수를 믿음과 따름 마25:14-30  한완상 형제  2008-07-11 1998
1121 누가복음 율법과 복음 눅16:16-17  이형수 목사  2008-07-09 1786
1120 누가복음 껍데기 신앙은 가라 : 위대한 대화자 예수 눅10:26;36  한완상 형제  2008-07-09 1934
1119 미가 사람 냄새 미6:6-8  유승원 교수  2008-07-09 2305
1118 마태복음 예수님의 뜻 마25:35-40  박옥진 자매  2008-07-09 3487
1117 요한계시 바벨론의 멸망 계18장  강종수 목사  2008-07-06 2137
1116 호세아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10:12  김남준 목사  2008-07-01 3975
1115 누가복음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눅19:46  김남준 목사  2008-07-01 2478
1114 마가복음 그리스도의 탄생 막1:9-15  길희성 형제  2008-06-30 1827
1113 요한복음 나누어 갖는 힘 요5:6-9  조혜자 자매  2008-06-30 1634
1112 빌립보서 예수는 나에게 누구였던가 빌2:6-11  한완상 형제  2008-06-30 2063
1111 예레미야 하나님의 뜻과 자원봉사 렘9:23-24  이강현 형제  2008-06-30 2451
1110 골로새서 복음의 소망에서 골1:15-23  성해용 목사  2008-06-30 2027
1109 말라기 하나님의 이름 말4:2  최성규 목사  2008-06-22 2753
1108 스가랴 여호와의 집을 건축하라 슥1:16-17  한태완 목사  2007-11-10 2185
1107 하박국 희망-하나님의 인간사 개입의 가능성 합3:17-19  최만자 원장  2004-02-12 2972
1106 하박국 없을지라도 합3:17-19  이재철 목사  2008-12-05 3031
1105 하박국 감사의 근거 합3:17-19  강종수 목사  2008-11-16 2552
» 미가 삭개오 집에 임한 구원 미19:8-10  김경재 목사  2008-04-02 2155
1103 미가 미3:5-8  장경동 목사  2008-03-10 2143
1102 미가 성탄을 바라보는 사람 미5:1-15  김필곤 목사  2008-02-06 2827
1101 미가 칼을 쳐서 보습으로-구약성서에서 본 참 평화 현실 미4:1-5  김이곤 목사  2007-12-13 2483
1100 요나 고난 당할 때 야웨를 생각하라 욘2:5-7  조용기 목사  2008-05-19 2339
1099 요나 솔로몬의 재판 하나님의 심판 욘4:1-11  한인섭 형제  2007-12-19 3137
1098 미가 삶으로서의 예배 미6:6-16  정용섭 목사  2008-10-19 2008
1097 요나 참과 거짓 (The Word of Life) 욘2:7-10  조용기 목사  2008-09-06 1764
1096 미가 예배의 영성 미6:6-8  김기동 자매  2008-09-02 1797
1095 아모스 인도주의의 빛 암1:3-10  최만자 원장  2008-04-11 1725
1094 아모스 생명, 진리, 빛 암5:21-26  서공석 형제  2008-03-17 1961
1093 아모스 한국교회에 하나님이 계신가? 암5:21-24  권진관 교수  2003-06-05 4595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150 세종시 보람1길12 호려울마을2단지 201동 1608호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