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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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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혜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1999.12.12] 주일설교 |
새 천년을 앞에 둔 시점에서, 저는 살아온 반세기를 돌아보며, 앞으로 오는 새로운 시대를 기독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000년이 된다는 것이 Y2K의 문제만 아니라면,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 없다고들 하지만, 그러나 분명히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때일 뿐 아니라,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중요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과거의 시간이 슬픔과 고통의 옛것이라면, 미래의 시간은 이 모든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새 시간, 약속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런 조망을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power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서 신앙을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1) 강압적인 힘, 벌주시는 하나님
저는 전쟁의 와중에서 태어났고, 구제품을 먹고 입으며 미국의 파워를 느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과 5남매가 함께 사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습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저는 5남매 중 4째로, 그것도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다는 것, 그리고 여자라는 것 때문에 주눅들어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 받았고, 군사정권 아래 엄격한 규율과 정부시책에 따라 학교가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배우고, 수동적으로 국가적 행사에 동원되곤 했습니다. 대학시절은 걸핏하면 위수령, 계엄령으로 학교도 제대로 가지도 못한 채 배운 것도 없이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최루탄과 전경, 정보부, 보안사, 고문이란 어휘들을 일상언어로 사용하면서 살았습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냉전체제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상, 그리고 군사정권, 가부장적인 가정은 모두 저에게 강압적인 힘으로 작용했고,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우울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 경험했던 전체적이고 제도적인 힘들은 우리의 선택이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들의 힘을 빼앗는 힘(power over)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가 교회를 다니며 만났던 하나님 역시 강압적인 힘을 행사하는 `벌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예수 사랑하심은"을 열심히 노래했지만, 교회와 어른들이 저에게 주입했던 하나님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그리고 대통령보다 더 무서웠으며, 저는 벌이 두려워서 교회를 다녔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교회를 다녔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2) 힘의 매력, 복 주시는 하나님
세상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전체적이고 제도적인 힘은 이제 별로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구제품으로 연명하던 우리가 이제는 먹을 것이 남아 음식찌꺼기를 어떻게 버리느냐를 고민하게 되었고,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살 빼기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쌀밥을 먹느냐가 아니라 이제는 삶의 질을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반공의 구호가 무색해졌고,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대학생들은 독재, 정부에 대한 항거대신, 좀더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해, 남보다 개성을 발휘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남녀차별도 많이 완화되었고, 여성들도 가사노동에서 많이 해방되어,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보내고 자아를 실현할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20세기가 `나, 자아'가 화두로 등장한 세기였다고 정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것도 자아를 찾기 위해서였겠지요. 자아실현이란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개발하고 삶에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아감이란 남의 눈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형성해 가는 것이기에, 자아실현이나 삶의 의미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사회가 인정해 주는 것과 연결시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자아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사회가 인정해주는 힘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힘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쉽게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굽실거리면서도 약한 자와 함께 있을 때에는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듭니다. 힘이 있으면, 우리들은 그것이 가짜든 진짜든 타인들의 존경의 표현을 받을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남의 손을 빌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신 형제님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자기 밑에 졸병이 있는 것과 자신이 졸병인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자매님들은 아랫동서가 생겼을 때 시댁에서의 입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까지도 힘을 가지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특성들을 길러야 이 환경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최만자 자매님의 말씀증거에서 앞으로의 세계는 20%의 사람들이 80%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 아이들이 20% 안에 들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맞고 들어오기보다는 때리고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80%의 잉여인간이 되어서는 자아를 실현하거나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돌이켜 보면, 평소에 별로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도, 힘을 추구하고 경쟁에 이기고자 할 때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경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지위를 갖고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것 아니냐는 식의 기도였습니다. 이 때의 기도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구를 정당화시키면서 내 생각을 하나님에게 강요하는 기도였습니다. 마가복음 11:24의,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했고, 내 욕심을 위해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신앙은 힘을 가지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는 많은 노력들 중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힘을 추구하고 있을 때, 나의 시선은 위로만 향했고, 그래서 나에게 보이는 사람은 나보다 잘나고 힘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보다 아래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이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3) 힘의 희생자, 위로하시는 하나님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겠다"고 매주일 되뇌면서도 이유 없이 지속되는 고난 속의 사람들을 생각하기엔 너무 바빴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경쟁에서 항상 이길 수만은 없는 것이지요. 저도 좌절을 겪을 때, 몸이 아파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권력이 없다는 것 때문에 쉽게 풀릴 일이 어그러질 때, 여자라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겪을 때, 이렇게 내가 바로 힘의 희생자가 될 때 불현듯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두 살배기 아기가 의붓어머니에게 맞아 온몸이 멍들고 할퀸 자국 투성이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기는 사람들을 피하고 정신장애 증상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아기는 아버지가 바람피워 낳아 데리고 왔기 때문에 학대를 당한 것입니다.
개들을 칸막이가 있는 방에 넣고 전기쇼크를 주면 칸막이를 뛰어 넘게 됩니다. 그러나 칸막이를 넘었는데도 전기쇼크가 오고, 다시 칸막이를 뛰어 넘어도 전기쇼크가 계속되면, 개는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으므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냥 전기쇼크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 개는 다른 환경에 들어가서도 어떤 행동도 시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학습된 무력감입니다. 개도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이유 없이 맞고 할퀴어졌던 그 아기는 무엇을 학습했겠습니까?
매맞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른바 `성역'이라는 폐쇄적인 가정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매를 맞는 여성들은 자존심이 최하의 상태에 놓여서, 자신이 무언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다고 스스로를 자책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느라 자신이 가진 능력에는 주의를 돌릴 틈도 없습니다. 그들 중엔 자기의 잘못 때문에 남편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남편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자기 스스로를 비하시킬 때, 그들이 가진 잠재력은 잠자게 되고, 자기 이행적으로 정말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의존적이 되어서,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이들에겐 자기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 힘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라는 믿음만 커져 갑니다. 그리고 외부적인 힘에 의해 자기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으며, 자기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며, 비굴하게 눈치를 보게 됩니다.
저도 제 노력과는 무관하게 좌절을 겪을 때에는,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무력해지곤 했습니다. 내 인생이 내 계획과 의지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느낄 때 무언가를 새로 시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심했기에 이웃을 돌아볼 여력도 없었습니다. 그럴 때 내게 복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도 해 보았지만, 결국 제가 만났던 하나님은 피란처로서의 하나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때 나를 위로하시던 하나님은 큰 힘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으로 나를 품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위로와 배려의 힘입니다. 시편 71편의 시인처럼, "주님,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보호하여 주시고, 나를 도우시고, 건져 주십시오. 주님은 내가 어느 때나 찾아가서 숨을 반석이 되어 주시고, 나를 구원하는 견고한 요새가 되어 주십시오."하고 매어 달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가 파워와 관련하여 만났던 하나님은 나에게 벌이나 복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신앙은 그저 눈치를 보거나, 보살핌을 받거나, 피하는데 머물게 하는 수동적인 신앙이었고,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런 "나 중심", 개인 중심적인 수준의 신앙은 "살아 축복, 죽어 천당"으로 이어지고, 크리스찬들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수준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사회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 건설은 요원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4) 새천년의 삶, 힘과 신앙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무척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신앙형태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우리를 압제했던 힘이 은밀하고 숨기고 속이는 것이 가능했었다면, 이제는 인터넷의 도움으로 모든 것들이 노출되는 사이버 시대입니다. 정보는 전파를 타고 세계 도처로 퍼져 나가고, 사람들은 더 똑똑해져서 과거처럼 몇 사람만의 강압적인 힘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하여, 어떤 한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거장의 시대는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세계는 파워를 나누어 가지는 시대가 되었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하리라고 전망되며,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들이 파워를 갖는 수단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을 추구하려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기회에 열려 있습니다. TV의 `좋은 세상 만들기' 프로에 나오는 촌로들도 개성 있는 자신을 표현하려 합니다. 책의 제목도 내용과는 상관도 없이 눈을 끄는 것으로 달기도 합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눈을 끌기 위해 점점 기이한 옷을 입고, 기이한 색깔로 머리 물을 들이고, 기이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제 자기를 표현하려 하지 남의 말, 남의 표현에 귀기울이기 어려워졌습니다. 동창회에 가보면, 각자 자기 말만을 떠드는 친구들로 시끌벅적합니다. 학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발표자 외에는 청중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내 말만 떠들지 하나님의 은밀한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 바빠서 내 말만 얼른 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대하지 않는 각자의 특성 표현은 때론 혼란스럽고, 자기 말만 하는 만남은 허전하고 무의미합니다. 각 개인들이 연대하지 않고 자기를 표현할 때는 윤리적인 결함도 드러납니다. 특히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는 포르노와, 미확인 출처의 거짓정보들이 제공되고, 무례하고 폭력적인 언어들이 여과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힘이 해체되었다고 하여도, 개인 각자가 모두 자기 말만하면서, 힘을 과시하려고 한다면, 여전히 힘의 희생자,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줄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 제도나 절대 권력자가 힘의 희생자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힘의 희생자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이기적인 자폐증을 보이고 있을 때, 우리 이웃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인간의 소리보다 반복적인 기계 음을 더 좋아하고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것이나, 청소년들이 테크노 춤에 빠져 이웃과 친구들을 잊고 반복적인 동작들을 통해 머릿속을 비우고(무뇌상태) 자기세계로만 몰입해 들어가는 자폐 증상은 왜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인천화재사건은 14-5세 난 가출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불장난을 하고, 호프집 주인은 불난 가게에서 손해보지 않고 술값을 받겠다고 문을 잠갔기 때문에 50여명의 청소년들이 숨졌습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막가파, 지존파, 영웅파들이 저질렀던 끔찍한 범죄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괴물로 세상에 태어났던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그런 범죄를 저지르도록 구조화되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이웃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아무도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압제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잘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자신을 보다 잘 표현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고, 엇나가지 않도록 하고, 함께 성장해 가야 할 것입니다. 세계가 이웃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들이 서로를 보살펴 힘을 나누어 가지지 않을 때는 `나'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연대하고, 어떤 힘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는 예수님의 운동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공부에서 배웠듯이 예수님께서 벌이셨던 하나님나라 운동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사는 공동체운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셔서 스스로 힘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38년 동안 누워있던 환자가 치유의 능력이 있는 물에 스스로 들어갈 수 없기에 그대로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고통 당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power to, empowering).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부귀, 영화와 관련된 곳에 사용하지 않으셨고, 권력을 추구하지도 않으셨으며, 강압적인 힘을 행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히려 힘을 부여해 주시므로, 수동적 상태에 머물지 않고 이 세상을 이겨내는 능력을 갖게 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치유하시는 능력, 남에게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초능력조차 나누어주시려고 애쓰셨습니다. 마태복음(17:14-20)에서, 예수님은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16: 1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며, 뱀을 집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12:31)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개인수준의 신앙에 머무는 것을 경고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이웃을 딛고 일어서려 하지 말고, 그들에게 네가 가지고 싶은 힘을 가지도록 도와주어라"라는 말도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는 자아를 추구하고,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이란 나 혼자서만 자아를 추구하여 힘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아를 추구하도록 도와주어, 함께 성장하여 힘을 나누어 가지라는 의미겠지요. 서로 나누어 갖는 힘, 성장시키는 힘(empowerment)의 강조입니다.
우리가 새길교회를 평신도 교회로 만들고 좋아하는 이유는 이 공동체가 서로를 억압하거나 서로의 힘을 뺏지 않고, 서로에게 힘을 불러 넣어주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령에 따라 일하기보다는 스스로 교회에서 필요한 일을 찾아합니다. 한완상 형제님이 바쁘신 중에도 성경공부를 가르쳐 주시기에 우리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성경공부에 일소회의 어른들께서 일찍 나오셔서 반겨 주시고 함께 정돈을 하시는 데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힘을 얻습니다. 머리 허연 형제님들께서 쓰레기를 치우시고, 여러 형제님들이 설거지에 동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은 마르다 노릇에서 조금 놓여나 마리아 노릇을 할 힘을 얻고, 즐거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잘못 부르는 "할렐루야"를 부르면서도 기죽지 않고 즐거울 수 있는건 이남수 형제님이 우리를 참아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불러 일으켜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와 같은 부족한 사람이 나와서 말씀 증거를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러나 기쁨으로 참으실 수 있는 것도, 예수님처럼 저에게 힘을 일으켜 성장시키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공동체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모두 왕같은 제사장으로 성장해 가기 위함이 아닙니까?
세기 말의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몸에 품으셨던 마리아처럼, 우리들도 우리 속에 예수님을 담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 예수님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천년을 맞으면서 기독인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예수를 닮아, 서로에게 힘을 불러 일으켜 주고 힘을 나누어 가지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시간은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결단을 통해서, 우리의 능동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도래한다고 믿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1) 강압적인 힘, 벌주시는 하나님
저는 전쟁의 와중에서 태어났고, 구제품을 먹고 입으며 미국의 파워를 느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과 5남매가 함께 사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습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저는 5남매 중 4째로, 그것도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다는 것, 그리고 여자라는 것 때문에 주눅들어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 받았고, 군사정권 아래 엄격한 규율과 정부시책에 따라 학교가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배우고, 수동적으로 국가적 행사에 동원되곤 했습니다. 대학시절은 걸핏하면 위수령, 계엄령으로 학교도 제대로 가지도 못한 채 배운 것도 없이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최루탄과 전경, 정보부, 보안사, 고문이란 어휘들을 일상언어로 사용하면서 살았습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냉전체제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상, 그리고 군사정권, 가부장적인 가정은 모두 저에게 강압적인 힘으로 작용했고,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우울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 경험했던 전체적이고 제도적인 힘들은 우리의 선택이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들의 힘을 빼앗는 힘(power over)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가 교회를 다니며 만났던 하나님 역시 강압적인 힘을 행사하는 `벌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예수 사랑하심은"을 열심히 노래했지만, 교회와 어른들이 저에게 주입했던 하나님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그리고 대통령보다 더 무서웠으며, 저는 벌이 두려워서 교회를 다녔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교회를 다녔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2) 힘의 매력, 복 주시는 하나님
세상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전체적이고 제도적인 힘은 이제 별로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구제품으로 연명하던 우리가 이제는 먹을 것이 남아 음식찌꺼기를 어떻게 버리느냐를 고민하게 되었고,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살 빼기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쌀밥을 먹느냐가 아니라 이제는 삶의 질을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반공의 구호가 무색해졌고,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대학생들은 독재, 정부에 대한 항거대신, 좀더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해, 남보다 개성을 발휘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남녀차별도 많이 완화되었고, 여성들도 가사노동에서 많이 해방되어,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보내고 자아를 실현할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20세기가 `나, 자아'가 화두로 등장한 세기였다고 정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것도 자아를 찾기 위해서였겠지요. 자아실현이란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개발하고 삶에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아감이란 남의 눈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형성해 가는 것이기에, 자아실현이나 삶의 의미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사회가 인정해 주는 것과 연결시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자아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사회가 인정해주는 힘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힘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쉽게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굽실거리면서도 약한 자와 함께 있을 때에는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듭니다. 힘이 있으면, 우리들은 그것이 가짜든 진짜든 타인들의 존경의 표현을 받을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남의 손을 빌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신 형제님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자기 밑에 졸병이 있는 것과 자신이 졸병인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자매님들은 아랫동서가 생겼을 때 시댁에서의 입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까지도 힘을 가지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특성들을 길러야 이 환경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최만자 자매님의 말씀증거에서 앞으로의 세계는 20%의 사람들이 80%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 아이들이 20% 안에 들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맞고 들어오기보다는 때리고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80%의 잉여인간이 되어서는 자아를 실현하거나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돌이켜 보면, 평소에 별로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도, 힘을 추구하고 경쟁에 이기고자 할 때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경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지위를 갖고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것 아니냐는 식의 기도였습니다. 이 때의 기도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구를 정당화시키면서 내 생각을 하나님에게 강요하는 기도였습니다. 마가복음 11:24의,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했고, 내 욕심을 위해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신앙은 힘을 가지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는 많은 노력들 중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힘을 추구하고 있을 때, 나의 시선은 위로만 향했고, 그래서 나에게 보이는 사람은 나보다 잘나고 힘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보다 아래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이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3) 힘의 희생자, 위로하시는 하나님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겠다"고 매주일 되뇌면서도 이유 없이 지속되는 고난 속의 사람들을 생각하기엔 너무 바빴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경쟁에서 항상 이길 수만은 없는 것이지요. 저도 좌절을 겪을 때, 몸이 아파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권력이 없다는 것 때문에 쉽게 풀릴 일이 어그러질 때, 여자라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겪을 때, 이렇게 내가 바로 힘의 희생자가 될 때 불현듯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두 살배기 아기가 의붓어머니에게 맞아 온몸이 멍들고 할퀸 자국 투성이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기는 사람들을 피하고 정신장애 증상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아기는 아버지가 바람피워 낳아 데리고 왔기 때문에 학대를 당한 것입니다.
개들을 칸막이가 있는 방에 넣고 전기쇼크를 주면 칸막이를 뛰어 넘게 됩니다. 그러나 칸막이를 넘었는데도 전기쇼크가 오고, 다시 칸막이를 뛰어 넘어도 전기쇼크가 계속되면, 개는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으므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냥 전기쇼크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 개는 다른 환경에 들어가서도 어떤 행동도 시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학습된 무력감입니다. 개도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이유 없이 맞고 할퀴어졌던 그 아기는 무엇을 학습했겠습니까?
매맞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른바 `성역'이라는 폐쇄적인 가정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매를 맞는 여성들은 자존심이 최하의 상태에 놓여서, 자신이 무언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다고 스스로를 자책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느라 자신이 가진 능력에는 주의를 돌릴 틈도 없습니다. 그들 중엔 자기의 잘못 때문에 남편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남편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자기 스스로를 비하시킬 때, 그들이 가진 잠재력은 잠자게 되고, 자기 이행적으로 정말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의존적이 되어서,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이들에겐 자기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 힘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라는 믿음만 커져 갑니다. 그리고 외부적인 힘에 의해 자기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으며, 자기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며, 비굴하게 눈치를 보게 됩니다.
저도 제 노력과는 무관하게 좌절을 겪을 때에는,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무력해지곤 했습니다. 내 인생이 내 계획과 의지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느낄 때 무언가를 새로 시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심했기에 이웃을 돌아볼 여력도 없었습니다. 그럴 때 내게 복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도 해 보았지만, 결국 제가 만났던 하나님은 피란처로서의 하나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때 나를 위로하시던 하나님은 큰 힘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으로 나를 품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위로와 배려의 힘입니다. 시편 71편의 시인처럼, "주님,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보호하여 주시고, 나를 도우시고, 건져 주십시오. 주님은 내가 어느 때나 찾아가서 숨을 반석이 되어 주시고, 나를 구원하는 견고한 요새가 되어 주십시오."하고 매어 달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가 파워와 관련하여 만났던 하나님은 나에게 벌이나 복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신앙은 그저 눈치를 보거나, 보살핌을 받거나, 피하는데 머물게 하는 수동적인 신앙이었고,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런 "나 중심", 개인 중심적인 수준의 신앙은 "살아 축복, 죽어 천당"으로 이어지고, 크리스찬들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수준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사회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 건설은 요원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4) 새천년의 삶, 힘과 신앙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무척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신앙형태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우리를 압제했던 힘이 은밀하고 숨기고 속이는 것이 가능했었다면, 이제는 인터넷의 도움으로 모든 것들이 노출되는 사이버 시대입니다. 정보는 전파를 타고 세계 도처로 퍼져 나가고, 사람들은 더 똑똑해져서 과거처럼 몇 사람만의 강압적인 힘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하여, 어떤 한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거장의 시대는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세계는 파워를 나누어 가지는 시대가 되었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하리라고 전망되며,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들이 파워를 갖는 수단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을 추구하려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기회에 열려 있습니다. TV의 `좋은 세상 만들기' 프로에 나오는 촌로들도 개성 있는 자신을 표현하려 합니다. 책의 제목도 내용과는 상관도 없이 눈을 끄는 것으로 달기도 합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눈을 끌기 위해 점점 기이한 옷을 입고, 기이한 색깔로 머리 물을 들이고, 기이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제 자기를 표현하려 하지 남의 말, 남의 표현에 귀기울이기 어려워졌습니다. 동창회에 가보면, 각자 자기 말만을 떠드는 친구들로 시끌벅적합니다. 학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발표자 외에는 청중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내 말만 떠들지 하나님의 은밀한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 바빠서 내 말만 얼른 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대하지 않는 각자의 특성 표현은 때론 혼란스럽고, 자기 말만 하는 만남은 허전하고 무의미합니다. 각 개인들이 연대하지 않고 자기를 표현할 때는 윤리적인 결함도 드러납니다. 특히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는 포르노와, 미확인 출처의 거짓정보들이 제공되고, 무례하고 폭력적인 언어들이 여과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힘이 해체되었다고 하여도, 개인 각자가 모두 자기 말만하면서, 힘을 과시하려고 한다면, 여전히 힘의 희생자,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줄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 제도나 절대 권력자가 힘의 희생자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힘의 희생자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이기적인 자폐증을 보이고 있을 때, 우리 이웃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인간의 소리보다 반복적인 기계 음을 더 좋아하고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것이나, 청소년들이 테크노 춤에 빠져 이웃과 친구들을 잊고 반복적인 동작들을 통해 머릿속을 비우고(무뇌상태) 자기세계로만 몰입해 들어가는 자폐 증상은 왜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인천화재사건은 14-5세 난 가출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불장난을 하고, 호프집 주인은 불난 가게에서 손해보지 않고 술값을 받겠다고 문을 잠갔기 때문에 50여명의 청소년들이 숨졌습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막가파, 지존파, 영웅파들이 저질렀던 끔찍한 범죄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괴물로 세상에 태어났던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그런 범죄를 저지르도록 구조화되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이웃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아무도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압제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잘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자신을 보다 잘 표현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고, 엇나가지 않도록 하고, 함께 성장해 가야 할 것입니다. 세계가 이웃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들이 서로를 보살펴 힘을 나누어 가지지 않을 때는 `나'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연대하고, 어떤 힘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는 예수님의 운동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공부에서 배웠듯이 예수님께서 벌이셨던 하나님나라 운동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사는 공동체운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셔서 스스로 힘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38년 동안 누워있던 환자가 치유의 능력이 있는 물에 스스로 들어갈 수 없기에 그대로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고통 당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power to, empowering).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부귀, 영화와 관련된 곳에 사용하지 않으셨고, 권력을 추구하지도 않으셨으며, 강압적인 힘을 행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히려 힘을 부여해 주시므로, 수동적 상태에 머물지 않고 이 세상을 이겨내는 능력을 갖게 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치유하시는 능력, 남에게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초능력조차 나누어주시려고 애쓰셨습니다. 마태복음(17:14-20)에서, 예수님은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16: 1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며, 뱀을 집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12:31)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개인수준의 신앙에 머무는 것을 경고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이웃을 딛고 일어서려 하지 말고, 그들에게 네가 가지고 싶은 힘을 가지도록 도와주어라"라는 말도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는 자아를 추구하고,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이란 나 혼자서만 자아를 추구하여 힘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아를 추구하도록 도와주어, 함께 성장하여 힘을 나누어 가지라는 의미겠지요. 서로 나누어 갖는 힘, 성장시키는 힘(empowerment)의 강조입니다.
우리가 새길교회를 평신도 교회로 만들고 좋아하는 이유는 이 공동체가 서로를 억압하거나 서로의 힘을 뺏지 않고, 서로에게 힘을 불러 넣어주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령에 따라 일하기보다는 스스로 교회에서 필요한 일을 찾아합니다. 한완상 형제님이 바쁘신 중에도 성경공부를 가르쳐 주시기에 우리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성경공부에 일소회의 어른들께서 일찍 나오셔서 반겨 주시고 함께 정돈을 하시는 데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힘을 얻습니다. 머리 허연 형제님들께서 쓰레기를 치우시고, 여러 형제님들이 설거지에 동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은 마르다 노릇에서 조금 놓여나 마리아 노릇을 할 힘을 얻고, 즐거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잘못 부르는 "할렐루야"를 부르면서도 기죽지 않고 즐거울 수 있는건 이남수 형제님이 우리를 참아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불러 일으켜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와 같은 부족한 사람이 나와서 말씀 증거를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러나 기쁨으로 참으실 수 있는 것도, 예수님처럼 저에게 힘을 일으켜 성장시키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공동체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모두 왕같은 제사장으로 성장해 가기 위함이 아닙니까?
세기 말의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몸에 품으셨던 마리아처럼, 우리들도 우리 속에 예수님을 담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 예수님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천년을 맞으면서 기독인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예수를 닮아, 서로에게 힘을 불러 일으켜 주고 힘을 나누어 가지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시간은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결단을 통해서, 우리의 능동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도래한다고 믿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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