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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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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0.2.6 주일설교 |
요4:7; 5:6; 눅10:26;36
한국교육현실과 교회 현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앞날이 캄캄해지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창조적 질문도 없고, 활기찬 사랑실천도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국 교육의 현실에 주목해 봅시다. 그곳에는 일방적 교육은 있으나 열린 배움은 없다시피 합니다. 배움이 있다해도 깊은 깨달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일방적인 암기는 강요되지만, 쌍방적인 의사소통이나 대화는 별로 없습니다. 학생들은 빈병이거나 백지와 같은 객체로 여겨집니다. 스스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구도자로 보지 않습니다.
지난 천년을 빛낸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살았지만 대체로 한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가 당시 관례 또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새로운 발상을 가지고 참신한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제시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남들이 당연시하는 관례의 세계에 대해 창조적인 질문을 끈질기고 용기있게 쏘아댄 분들이였습니다. 구텐베르크,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컬럼버스, 뉴튼,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등이 그러합니다. 천재는 기발하고 때로는 전복적인(subversive) 질문을 조용히, 그러나 거침없이 쏘아대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지난 천년간 값비싼 대가를 치루면서도 인간 삶의 질을 더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한국교육은 이들의 창조적 끼(氣)를 원천적으로 꺾는 교육입니다. 이들을 교도소에 보내거나,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교육입니다. 이들을 왕따 시키거나 추방하는 닫힌 교육입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비록 수능시험 성적이 월등하다 하더라도, 그 점수가 인류문화의 질을 높이는데 공헌할 수 없습니다. 그 점수가 천재의 끼, 창조적 끼를 나타내는 지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의 참 모습을 새삼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 현실은 어떠한가요? 한마디로 창조적 질문, 호기심 어린 질문을 근본적으로 억압하거나 기피하게 하는 현실입니다. 질문은 곧 의심을 뜻하며, 의심은 곧 不信仰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저 를 강조합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질문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가르칩니다. 이같은 닫힌 교회 현실은 그릇된 신학적 이해와 무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라는 개신교 신학이 낳은 역설적 결과라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Sola fide)는 주로 개신교 교리를 암기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를 소중히 여깁니다. 율법준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교회가 강조하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른다는 점을 소중히 여깁니다. 여기 믿음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와 동떨어지게 됩니다. 사랑실천이라는 예수의 삶을 체험하는 일 보다 니케아회의 이후 굳어진 기독교 교리를 암기하고 지키는 것이 더 기독교다운 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기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도전적 질문은 금물로 여겨지게 되었고 역사적 예수의 삶을 탐구하는 것 조차도 불경한 것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니 교리가 예수님 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숭상되었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상을 파괴했던 예수님을 교리의 우상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해 온 셈이지요.
(Sola Gratia)도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가 율법 준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증을 얻을수 있을 것이다. 예수 사랑 실천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동반하기도 하기에 그리스도의 영적 능력에 호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곧 그리스도)의 영적 능력에 힘입어 예수사랑 실천을 해낼수 있어야 합니다.
는 자칫 잘못 값싼 기복신앙을 부추길 수 있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최선을 다하려는 윤리적 결단, 그것도 사랑실천의 결단을 경시하도록 부추길 위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는 게으른 신앙생활, 값싼 축복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은근히 조장시키기도 합니다. 뿐이겠습니까. 윤리없는 한국교회를 양산하기까지도 합니다. 그리고 질문의 기세를 가 꺽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를 슬프게 하는 온갖 기독교인들의 몰윤리적 행태(沒倫理的 行態)를 보면서 우리는 새삼 예수님의 사랑주기, 희망주기의 활동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질문하시면서 새로운 결단으로 이끄시는 위대한 스승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 거기서 다시 한번 우리가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질문의 기세를 꺽으셨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질문을 던지시고, 대화자로 하여금 질문을 하도록 정중하게 권장하셨을까요? 한마디로 예수님은 스스로 질문 던지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고, 질문한 사람들의 도전적 기세를 크게 북돋와 주셨으며, 쌍방향 대화를 통해 질의자와 함께 진리에 도달하기를 즐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실천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어떤 뜻에서 예수님은 실천으로 안내해 주시는 위대한 대화자(the great communicator)였습니다. 이제 본문의 상황으로 잠시 옮겨봅시다 세가지 상황에 주목해 봅시다.
첫째, 누가복음 10장 26절과 36절로 돌아가 봅시다. 여기에 예수님과 한 질의자(율법학자)간의 대화가 나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못된 뜻을 품고 예수께 도전적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예수님은 이 질문자의 속뜻을 꿰뚫어 보셨겠지요. 불쾌했겠지요. 허나 예수님은 그를 나무라시거나 그 질문자의 끼(氣)를 꺽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전문지식을 존중해 주시면서 이렇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학자인 질문자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먼저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먼저 한국식 표현 방식에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은 반말로 질문합니다. 율법학자는 정중하게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30 조금 넘으신 것으로 본다면 우리말 표현은 예수님을 대단히 건방진 젊은이로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지요. 하기야 한국말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은 모두 반말로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더 높이시기 위해 짐짓 그렇게 표현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물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좀더 자유롭게 풀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되물으셨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율법학자시니까 율법을 잘 아시겠는데, 과연 율법에는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선생님께서 주관적으로는 어떻게 그 기록을 해석하십니까?"
자기를 함정에 빠트릴 율법학자의 실력을 인정해 주신 주님의 따뜻한 대화자의 마음은 이와 같이 겸손하게 되물으셨을 것입니다. 악의에 찬 질의자를 선의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열린 태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질문자, 비록 못된 마음을 품고 있는 질문자라 할지라도 그의 질문을 무례하게 꺽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자가 예수의 정중한 되물음에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흔쾌히 그의 정답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습니다. 곧 "그 대답을 실천하십시오" 실천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에 관한 교리적 또는 신학적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행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교리적 대답은 정답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온갖 세상의 구조적 不義와 부패와 부정에 휘말리면서도 교리적 정답을 해내면 훌륭한 기독교 신자로 행세하는 우리의 잘못된 신앙풍토와 교회풍토를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바로 이같은 예수님의 열린 대화에서 성서에서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이요, 뜻이 깊은 비유, 곧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또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선생님의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정답을 회피할 수 없도록하는 권위를 지닌 정중한 질문이였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도 감히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다고 대답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이웃 노릇을 했기 때문이지요. 비록 그 율법학자가 그토록 경멸했던 사마리아인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최소한의 논리를 갖춘 분이라면, 이 예수님의 질문에 하나밖에 없는 정답을 내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아픔을 함께 한 사람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십시오. 귀하께서도 이와 같이 실천하십시오"
역시 실천에 무게를 두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소중한 예수 이미지를 우리 한국교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에 이르기까지 정중하게 계속 질문하시면서 열린 대화를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참된 스승의 모습입니다.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스스로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시는 위대한 대화자 스승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질문을 불신앙으로 경원하면서 사랑실천 보다 교리신앙에 더 몰입하는 한국교회에게 엄숙하게 질책하시는 예수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교회, 레위인의 교회로 전락해 버린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비록 제사장과 레위인의 신앙은 없다하더라도 쌍놈 불신자 사마리아인 처럼 행동하라라고 주님은 오늘도 한국 교회를 질책하시는 듯 합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4장 7절에 나타난 질문자 예수 모습을 똑똑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에서는 도저히 서로 대화해서는 안될 사람들간의 대화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대화의 테두리, 그 규범적 테두리를 무시하시면서 한 여인을 진리로 안내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금기(禁己)를 깨시면서 대화에 나서십니다. 당시 점잖은 유대인은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종교적으로 불결한 금기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갔는데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쉬고있었습니다. 이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으러 왔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과는 도무지 대면해서는 안됩니다. 질문하거나 말을 걸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는 당시의 관례를 깨고 물을 좀 달라고 감히 요청했습니다. 이때 이 여인의 응답은 너무나 경악했을 것입니다. 놀라고 불쾌해서 이렇게 쏘아부쳤습니다.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9절)
이 말 속에는 희롱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있는 듯 합니다. 하여튼 여기서 이 여인과 예수간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는 계속 공세로 나옵니다. 영생의 물에 대해서도 언급했고, 이 여인과 동거하는 남편들에 대한 얘기도 하면서 이 여인으로 하여금 참 예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의 말씀은 짧고, 핵심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통찰력은 대단합니다. 그는 긴 연설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점 공자왈, 맹자왈 식의 깨우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질문이나 문제제기 자체가 관례를 뒤집어 엎는 효과를 자아냈습니다. 그에게는 계급과 성, 인종과 종교가 단단히 갈라놓은 경계의 장벽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경계를 자유롭게 뛰어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대화는 단순한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실천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정중하게 진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위대한 커뮤니케이터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질문은 절망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 희망을 현실로 바꿔주는 인도자 노릇을 합니다. 요한복음 5장 6절에 보면, 안식일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으로 가시지 않고 온갖 절망을 씹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만이 모여있었던 절망의 장소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중병환자, 지체장애자, 소외된 자, 그러면서도 극한의 경쟁의식을 갖고있던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시어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던 한 환자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는 38년간 중병을 앓고 있던 외로운 인간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여, 낫고 싶습니까?"
얼핏 듣기에 참으로 싱거운 질문 같습니다. 38년간 앓고 있던 이 사람에게 너무 뻔한 질문 같지 않습니까? 그가 낫고 싶은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런 싱거운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던 사람이 과연 낫고자 하는 의지, 곧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희망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주님께서는 짐짓 그렇게 물으셨을 것 같습니다. 꺼져가는 등불같은 희망이라도 이 38년간 상한 갈대처럼 꺾여 살아온 사람이 과연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왜? 환자의 병 나음은 환자의 희망과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희망의지는 병 낫는데 필요한 종교적 조건은 아닙니다. 특히 율법주의 적인 필요요건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조건이나 객관적인 조건과 관계없이 그의 의지를 알아보신 것입니다. 종교적 규례를 지켜서 비로소 낫는 것이 아니라, 환자 속에 아직도 꺼지지 않고 희미하게 나마 살아있는 희망의 불씨가 낫게하는 힘임을 깨닫게 해주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환자가 다른 모든 환자들 중에 가장 불쌍한 환자, 가장 고독한 환자임을 그 환자의 대답(7절)에서 확인하시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죽이지 않고 살려온 그 과 을 보시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 일어나시오. 당신의 자리를 들고 걸어나가시오"
나는 이 명령의 깊은 뜻을 오늘 해명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대화가 단순히 깨달음, 즉 인지적(認知的) 각성으로 우리를 이끌 뿐만 아니라, 꿈의 실현, 병 나음, 행복한 삶의 구현과 같은 실천으로 이끌어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질문, 그것도 관례를 깨는 창조적 질문도 있고, 그의 체휼(體恤)의 실천도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체로 중환자를 낫게 하신 후 주님께서는 방금 낫게된 환자를 향해,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하신 것입니다." 라는 환자 주체 선언을 선포하셨습니다. 환자로 하여금 나음의 기쁨을 스스로 끊임없이 재생산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심으로, 그 새로 찾은 건강이 참으로 오래 견딜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치유자에 대한 환자들의 병적 의존심을 아예 처음부터 버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감동스러운 나음의 주체적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대화는 항상 현실 변혁적인 효과를 내는 듯 합니다. 그것은 사변적이거나 관념적 대화가 아닙니다. 형이상학적 담론에 그치는 그러한 고답적인, 학술적인 대화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은 상대방의 진부한 발상을 뒤집어 엎으면서, 문제의 뿌리를 새롭게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서, 질의자 속에 깊숙히 감추어져 있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내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기존의 문화와 전통의 잘못을 창조적으로 깨고 새롭게 세우는 변혁의 효과를 내게 합니다. 이것은 곧 진리 깨달음과 윤리실천 행위를 동시에 이룩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한국 크리스쳔과 교회는 그 삶에 있어서 몰윤리성(沒倫理性)과 교조적 신앙상태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것도 와 의 이름으로 개미 쳇바퀴 도는 듯한 위선의 삶을 반복하면서도 예수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특히 저는 호기심 어린 질문을 믿음 없음 또는 믿음 부족함으로 낙인찍는 교회 풍토를 개탄합니다. 요리문답이나 신조암기에는 뛰어나지만 정의실천, 사랑실천에는 뒤지는 한국기독교 신자들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에는 맹렬하고 예수 이름으로 선교시장 확장이라는 마케팅 활동에는 더욱 맹렬하면서도 특히 역사적 예수의 삶과 말씀 실천하기에는 게을리하거나 무시하는 한국교회 풍토를 슬퍼합니다.
만일 역사적 예수께서 오늘 한국에 오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실까요? 예수님께서 과연 교회 다니실까요? 가신다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교 중 어느곳에 가실까요? 특히 거대한 부자 교회에 가실까요? 오히려 그러한 교회에 가서 너무나 생소한 당신 모습을 보시고 정말 하시고 한탄하시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지난 천육백년간 당신의 이름으로 교회가 저질러온 온갖 만행과 反인륜적 범죄, 이를테면 마녀사냥, 화형, 종교재판, 십자군 강행 등을 보시고 게세마네에서의 피땀 흘린 기도 보다 더 처절한 기도를 드리시지 않으실까요? 당신의 이름이 이렇게 더럽혀진 역사 현실을 보시고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분노하시어 떨지 않으시겠습니까?
게다가 , 를 외치면서 예수를 단단하게 닫힌 교리틀 속에 가두어 두면서 신자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닫힌 교회풍토를 보시고 억울해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듯이 또 한번 눈물을 흘리시지 않을까요. 오히려 예수님을 들먹거리지 않는 보통의 한국사람들이 자기의 성심껏 노력하여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태도(盡人事待天命)를 더 아름답게 보시지 않을까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비기독교 신자들을 더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새 천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그 닫힌 풍토와 그 굳어버린 신앙양태를 근본적으로 재성찰을 하고 심각한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교회 모습을 보시고 라고 항변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과연 를 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살기 하지 않는 기독교 신자는 껍데기 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껍데기는 가야합니다. 새 천년에는 사라져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한국교육현실과 교회 현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앞날이 캄캄해지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창조적 질문도 없고, 활기찬 사랑실천도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국 교육의 현실에 주목해 봅시다. 그곳에는 일방적 교육은 있으나 열린 배움은 없다시피 합니다. 배움이 있다해도 깊은 깨달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일방적인 암기는 강요되지만, 쌍방적인 의사소통이나 대화는 별로 없습니다. 학생들은 빈병이거나 백지와 같은 객체로 여겨집니다. 스스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구도자로 보지 않습니다.
지난 천년을 빛낸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살았지만 대체로 한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가 당시 관례 또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새로운 발상을 가지고 참신한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제시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남들이 당연시하는 관례의 세계에 대해 창조적인 질문을 끈질기고 용기있게 쏘아댄 분들이였습니다. 구텐베르크,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컬럼버스, 뉴튼,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등이 그러합니다. 천재는 기발하고 때로는 전복적인(subversive) 질문을 조용히, 그러나 거침없이 쏘아대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지난 천년간 값비싼 대가를 치루면서도 인간 삶의 질을 더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한국교육은 이들의 창조적 끼(氣)를 원천적으로 꺾는 교육입니다. 이들을 교도소에 보내거나,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교육입니다. 이들을 왕따 시키거나 추방하는 닫힌 교육입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비록 수능시험 성적이 월등하다 하더라도, 그 점수가 인류문화의 질을 높이는데 공헌할 수 없습니다. 그 점수가 천재의 끼, 창조적 끼를 나타내는 지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의 참 모습을 새삼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 현실은 어떠한가요? 한마디로 창조적 질문, 호기심 어린 질문을 근본적으로 억압하거나 기피하게 하는 현실입니다. 질문은 곧 의심을 뜻하며, 의심은 곧 不信仰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저 를 강조합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질문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가르칩니다. 이같은 닫힌 교회 현실은 그릇된 신학적 이해와 무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라는 개신교 신학이 낳은 역설적 결과라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Sola fide)는 주로 개신교 교리를 암기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를 소중히 여깁니다. 율법준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교회가 강조하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른다는 점을 소중히 여깁니다. 여기 믿음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와 동떨어지게 됩니다. 사랑실천이라는 예수의 삶을 체험하는 일 보다 니케아회의 이후 굳어진 기독교 교리를 암기하고 지키는 것이 더 기독교다운 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기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도전적 질문은 금물로 여겨지게 되었고 역사적 예수의 삶을 탐구하는 것 조차도 불경한 것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니 교리가 예수님 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숭상되었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상을 파괴했던 예수님을 교리의 우상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해 온 셈이지요.
(Sola Gratia)도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가 율법 준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증을 얻을수 있을 것이다. 예수 사랑 실천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동반하기도 하기에 그리스도의 영적 능력에 호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곧 그리스도)의 영적 능력에 힘입어 예수사랑 실천을 해낼수 있어야 합니다.
는 자칫 잘못 값싼 기복신앙을 부추길 수 있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최선을 다하려는 윤리적 결단, 그것도 사랑실천의 결단을 경시하도록 부추길 위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는 게으른 신앙생활, 값싼 축복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은근히 조장시키기도 합니다. 뿐이겠습니까. 윤리없는 한국교회를 양산하기까지도 합니다. 그리고 질문의 기세를 가 꺽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를 슬프게 하는 온갖 기독교인들의 몰윤리적 행태(沒倫理的 行態)를 보면서 우리는 새삼 예수님의 사랑주기, 희망주기의 활동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질문하시면서 새로운 결단으로 이끄시는 위대한 스승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 거기서 다시 한번 우리가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질문의 기세를 꺽으셨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질문을 던지시고, 대화자로 하여금 질문을 하도록 정중하게 권장하셨을까요? 한마디로 예수님은 스스로 질문 던지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고, 질문한 사람들의 도전적 기세를 크게 북돋와 주셨으며, 쌍방향 대화를 통해 질의자와 함께 진리에 도달하기를 즐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실천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어떤 뜻에서 예수님은 실천으로 안내해 주시는 위대한 대화자(the great communicator)였습니다. 이제 본문의 상황으로 잠시 옮겨봅시다 세가지 상황에 주목해 봅시다.
첫째, 누가복음 10장 26절과 36절로 돌아가 봅시다. 여기에 예수님과 한 질의자(율법학자)간의 대화가 나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못된 뜻을 품고 예수께 도전적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예수님은 이 질문자의 속뜻을 꿰뚫어 보셨겠지요. 불쾌했겠지요. 허나 예수님은 그를 나무라시거나 그 질문자의 끼(氣)를 꺽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전문지식을 존중해 주시면서 이렇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학자인 질문자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먼저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먼저 한국식 표현 방식에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은 반말로 질문합니다. 율법학자는 정중하게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30 조금 넘으신 것으로 본다면 우리말 표현은 예수님을 대단히 건방진 젊은이로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지요. 하기야 한국말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은 모두 반말로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더 높이시기 위해 짐짓 그렇게 표현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물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좀더 자유롭게 풀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되물으셨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율법학자시니까 율법을 잘 아시겠는데, 과연 율법에는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선생님께서 주관적으로는 어떻게 그 기록을 해석하십니까?"
자기를 함정에 빠트릴 율법학자의 실력을 인정해 주신 주님의 따뜻한 대화자의 마음은 이와 같이 겸손하게 되물으셨을 것입니다. 악의에 찬 질의자를 선의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열린 태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질문자, 비록 못된 마음을 품고 있는 질문자라 할지라도 그의 질문을 무례하게 꺽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자가 예수의 정중한 되물음에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흔쾌히 그의 정답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습니다. 곧 "그 대답을 실천하십시오" 실천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에 관한 교리적 또는 신학적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행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교리적 대답은 정답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온갖 세상의 구조적 不義와 부패와 부정에 휘말리면서도 교리적 정답을 해내면 훌륭한 기독교 신자로 행세하는 우리의 잘못된 신앙풍토와 교회풍토를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바로 이같은 예수님의 열린 대화에서 성서에서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이요, 뜻이 깊은 비유, 곧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또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선생님의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정답을 회피할 수 없도록하는 권위를 지닌 정중한 질문이였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도 감히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다고 대답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이웃 노릇을 했기 때문이지요. 비록 그 율법학자가 그토록 경멸했던 사마리아인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최소한의 논리를 갖춘 분이라면, 이 예수님의 질문에 하나밖에 없는 정답을 내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아픔을 함께 한 사람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십시오. 귀하께서도 이와 같이 실천하십시오"
역시 실천에 무게를 두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소중한 예수 이미지를 우리 한국교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에 이르기까지 정중하게 계속 질문하시면서 열린 대화를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참된 스승의 모습입니다.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스스로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시는 위대한 대화자 스승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질문을 불신앙으로 경원하면서 사랑실천 보다 교리신앙에 더 몰입하는 한국교회에게 엄숙하게 질책하시는 예수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교회, 레위인의 교회로 전락해 버린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비록 제사장과 레위인의 신앙은 없다하더라도 쌍놈 불신자 사마리아인 처럼 행동하라라고 주님은 오늘도 한국 교회를 질책하시는 듯 합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4장 7절에 나타난 질문자 예수 모습을 똑똑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에서는 도저히 서로 대화해서는 안될 사람들간의 대화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대화의 테두리, 그 규범적 테두리를 무시하시면서 한 여인을 진리로 안내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금기(禁己)를 깨시면서 대화에 나서십니다. 당시 점잖은 유대인은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종교적으로 불결한 금기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갔는데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쉬고있었습니다. 이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으러 왔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과는 도무지 대면해서는 안됩니다. 질문하거나 말을 걸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는 당시의 관례를 깨고 물을 좀 달라고 감히 요청했습니다. 이때 이 여인의 응답은 너무나 경악했을 것입니다. 놀라고 불쾌해서 이렇게 쏘아부쳤습니다.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9절)
이 말 속에는 희롱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있는 듯 합니다. 하여튼 여기서 이 여인과 예수간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는 계속 공세로 나옵니다. 영생의 물에 대해서도 언급했고, 이 여인과 동거하는 남편들에 대한 얘기도 하면서 이 여인으로 하여금 참 예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의 말씀은 짧고, 핵심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통찰력은 대단합니다. 그는 긴 연설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점 공자왈, 맹자왈 식의 깨우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질문이나 문제제기 자체가 관례를 뒤집어 엎는 효과를 자아냈습니다. 그에게는 계급과 성, 인종과 종교가 단단히 갈라놓은 경계의 장벽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경계를 자유롭게 뛰어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대화는 단순한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실천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정중하게 진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위대한 커뮤니케이터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질문은 절망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 희망을 현실로 바꿔주는 인도자 노릇을 합니다. 요한복음 5장 6절에 보면, 안식일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으로 가시지 않고 온갖 절망을 씹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만이 모여있었던 절망의 장소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중병환자, 지체장애자, 소외된 자, 그러면서도 극한의 경쟁의식을 갖고있던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시어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던 한 환자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는 38년간 중병을 앓고 있던 외로운 인간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여, 낫고 싶습니까?"
얼핏 듣기에 참으로 싱거운 질문 같습니다. 38년간 앓고 있던 이 사람에게 너무 뻔한 질문 같지 않습니까? 그가 낫고 싶은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런 싱거운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던 사람이 과연 낫고자 하는 의지, 곧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희망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주님께서는 짐짓 그렇게 물으셨을 것 같습니다. 꺼져가는 등불같은 희망이라도 이 38년간 상한 갈대처럼 꺾여 살아온 사람이 과연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왜? 환자의 병 나음은 환자의 희망과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희망의지는 병 낫는데 필요한 종교적 조건은 아닙니다. 특히 율법주의 적인 필요요건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조건이나 객관적인 조건과 관계없이 그의 의지를 알아보신 것입니다. 종교적 규례를 지켜서 비로소 낫는 것이 아니라, 환자 속에 아직도 꺼지지 않고 희미하게 나마 살아있는 희망의 불씨가 낫게하는 힘임을 깨닫게 해주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환자가 다른 모든 환자들 중에 가장 불쌍한 환자, 가장 고독한 환자임을 그 환자의 대답(7절)에서 확인하시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죽이지 않고 살려온 그 과 을 보시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 일어나시오. 당신의 자리를 들고 걸어나가시오"
나는 이 명령의 깊은 뜻을 오늘 해명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대화가 단순히 깨달음, 즉 인지적(認知的) 각성으로 우리를 이끌 뿐만 아니라, 꿈의 실현, 병 나음, 행복한 삶의 구현과 같은 실천으로 이끌어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질문, 그것도 관례를 깨는 창조적 질문도 있고, 그의 체휼(體恤)의 실천도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체로 중환자를 낫게 하신 후 주님께서는 방금 낫게된 환자를 향해,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하신 것입니다." 라는 환자 주체 선언을 선포하셨습니다. 환자로 하여금 나음의 기쁨을 스스로 끊임없이 재생산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심으로, 그 새로 찾은 건강이 참으로 오래 견딜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치유자에 대한 환자들의 병적 의존심을 아예 처음부터 버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감동스러운 나음의 주체적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대화는 항상 현실 변혁적인 효과를 내는 듯 합니다. 그것은 사변적이거나 관념적 대화가 아닙니다. 형이상학적 담론에 그치는 그러한 고답적인, 학술적인 대화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은 상대방의 진부한 발상을 뒤집어 엎으면서, 문제의 뿌리를 새롭게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서, 질의자 속에 깊숙히 감추어져 있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내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기존의 문화와 전통의 잘못을 창조적으로 깨고 새롭게 세우는 변혁의 효과를 내게 합니다. 이것은 곧 진리 깨달음과 윤리실천 행위를 동시에 이룩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한국 크리스쳔과 교회는 그 삶에 있어서 몰윤리성(沒倫理性)과 교조적 신앙상태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것도 와 의 이름으로 개미 쳇바퀴 도는 듯한 위선의 삶을 반복하면서도 예수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특히 저는 호기심 어린 질문을 믿음 없음 또는 믿음 부족함으로 낙인찍는 교회 풍토를 개탄합니다. 요리문답이나 신조암기에는 뛰어나지만 정의실천, 사랑실천에는 뒤지는 한국기독교 신자들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에는 맹렬하고 예수 이름으로 선교시장 확장이라는 마케팅 활동에는 더욱 맹렬하면서도 특히 역사적 예수의 삶과 말씀 실천하기에는 게을리하거나 무시하는 한국교회 풍토를 슬퍼합니다.
만일 역사적 예수께서 오늘 한국에 오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실까요? 예수님께서 과연 교회 다니실까요? 가신다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교 중 어느곳에 가실까요? 특히 거대한 부자 교회에 가실까요? 오히려 그러한 교회에 가서 너무나 생소한 당신 모습을 보시고 정말 하시고 한탄하시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지난 천육백년간 당신의 이름으로 교회가 저질러온 온갖 만행과 反인륜적 범죄, 이를테면 마녀사냥, 화형, 종교재판, 십자군 강행 등을 보시고 게세마네에서의 피땀 흘린 기도 보다 더 처절한 기도를 드리시지 않으실까요? 당신의 이름이 이렇게 더럽혀진 역사 현실을 보시고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분노하시어 떨지 않으시겠습니까?
게다가 , 를 외치면서 예수를 단단하게 닫힌 교리틀 속에 가두어 두면서 신자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닫힌 교회풍토를 보시고 억울해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듯이 또 한번 눈물을 흘리시지 않을까요. 오히려 예수님을 들먹거리지 않는 보통의 한국사람들이 자기의 성심껏 노력하여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태도(盡人事待天命)를 더 아름답게 보시지 않을까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비기독교 신자들을 더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새 천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그 닫힌 풍토와 그 굳어버린 신앙양태를 근본적으로 재성찰을 하고 심각한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교회 모습을 보시고 라고 항변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과연 를 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살기 하지 않는 기독교 신자는 껍데기 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껍데기는 가야합니다. 새 천년에는 사라져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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