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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음과 따름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1988 추천 수 0 2008.07.11 13: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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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5:14-30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0.2.27 주일설교 

본문에 나오는 달란트는 돈의 단위인데, 6000 드라크마가 되는 돈입니다. 성서에 작은 은전인 드라크마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그것이 6000개면 큰 돈인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을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 이유는 더 많이 가진 사람에게 적게 가진 사람의 것마저도 빼앗아서 준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고 하는 것을 극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두 달란트 가진 사람도 두 배로 늘렸고,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두 배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독식하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을 지구화 즉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시대라고 하는데,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잘 들어맞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지구화의 시대에는 버는 사람만 벌고 못 버는 사람은 직장을 잃고, 가진 것을 모두 까먹고, 결국은 알거지가 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말씀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어떻게 예수가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렇게 지독한 나라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입니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올 때 그것을 파내서 그대로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주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의 창조력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의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굉장한 능력을 가진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한다한들 주님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 사람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있는 것마저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은 달란트 즉 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는 이 비유에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벌 것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달란트를 비유로 사용하여, 무엇인가 다른 말씀을 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오늘 젊은 사람들이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를 졸업하는 정말 축하해야 할 시간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달란트에 관련된 말씀이 이번에 졸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달란트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달란트는 물질이 아닌, 다른 질적인 것을 가르킨다고 생각합니다. 달란트가 질적인 것, 창조적인 것을 지칭한다면, 그것은 어떤 창조성이냐 입니다. 저는 이것을 요즘 우리 교회가 처해 있는 컨텍스트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서는 역사적 예수를 알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먼저 생각해 보자면, 역사적 예수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역사적 예수는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왜곡되게 믿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반동으로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는 노력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란 바로 그리스도요, 메시야요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있고, 역사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 분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인 것입니다.

저는 한 달란트를 땅에서 파내는 것처럼 역사적 예수를 과거라고 하는 땅으로부터 다시 파내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고 그 분을 따르는 것은 역사적 예수를 아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오늘의 그리스도는 누구이고, 특히 나에게 있어서 누구이시고, 그 분은 나 개인에게서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신자들의 집단인 우리 교회에게서 무엇을 원하고 계시고, 또한 어떤 분이신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예수를 그대로 복사기로 복사해 떠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000년 전의 팔레스틴의 예수는 오늘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팔레스틴의 예수는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 분은 그 당시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문제의식과 오늘날의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찬들의 문제의식은 그 근본에 있어서 상통하겠지만, 구체적인 데에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당시에는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고, 유다 성전종교 지배질서 속에서의 갈등과 고민이 있었지마는, 오늘날은 다국적 기업, 국제자본의 지배 하에 있는 신자유주의와 지구화의 상황 속에서 우리들의 문제의식은 전연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리스도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내는 것이 슬기로운 종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역사적 예수의 세세한 삶을 발견해 내는 것은 묻었던 달란트를 땅에서 파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무엇인가 플러스, 더함이 없습니다. 그 달란트를 두 배로 늘리는 일은 그리스도가 오늘날 어떤 분인가를 믿고 따르는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곧 진정한 우리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아는 것과 연결됩니다. 고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추구하는 것은 상호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이 얘기되고 있는 영성은 우리와 신적인 것(그리스도,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나의 진정한 모습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동시에 나를 깊이 성찰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성은 나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가 처해 있는 상황과 우리를 억압하고 유혹하고 있는 문제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양심적인 삶인가를 그리스도를 믿음과 따름에 비추어서 묵상하는 것이 영성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비추어서 내가 누구이고, 우리 공동체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고난, 고통, 번민 속에서, 그리고 보다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한 창조적인 고민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과 문제제기가 없이는 그리스도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따름은 우리의 현실에 발을 디디고 따르는 따름이어야지, 추상적인 것이거나, 객관성을 빙자하여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경험, 우리의 집단적인 체험 속에서 발견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에 증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그리스도는 성서에 비추어서 오늘의 경험 속에서 발견되고 고백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성령이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은 오늘날 우리들과 함께 하시면서 우리들의 고난과 고민 속에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며, 그분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계신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늘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무엇을 원하고 계신가를 알게 하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구원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를 가르쳐 주시고, 오늘 우리의 상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유명한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마는, 그 중에 오늘 말씀과 관련한 것으로 “영과 문자”라는 글이 있습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내용입니다. 문자를 그대로 신봉한다는 것은 곧 죽음인데, 오늘의 탈란트의 비유에서는 땅에 묻어둔 것을 그대로 꺼내는 것은 문자를 따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고, 영을 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성령의 인도로 알고, 믿고, 그리고 따르는 것을 가르킨다고 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다섯 달란트를 더 만든 사람은 창조적이고 독립적이며, 자기 문제의식을 가지고 문제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어렵고 복잡하고 판단하기 어려우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상황인데, 다섯 달란트를 더 만든 사람은 그 속에서도 성령의 일깨우심에 응답하는 감수성을 가지고, 창조적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 고백은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항상 새롭게 고백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를 고백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새로운 인류인 두 번째의 아담으로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자연을 파괴하고 빈부의 격차를 넓히며, 민족간, 종교간의 새로운 전쟁을 부단히 일으키고 있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상황 속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을 성취한 분이었습니다. 구약의 출발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핵심은 이민족에게 억압받고 억울하게 고난 당하면서 고생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은 백성들의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생육하고 번성하여라”고 하신 창조주 야훼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일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정신적으로 이끈 것이 십계명과 계약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출애굽의 정신을 그 내용 속에 담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과 율법의 정신을 가장 분명하게 밝힌 것이 바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한 영원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희년법입니다. 레위기 25장에 있는 희년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61:1-2)을 인용해서 희년을 다시 선포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 4:18-19)


여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예수는 레위기 25장의 말씀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사야 61:1-2의 말씀도 그대로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아사야서에는 은총의 해, 즉 희년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사야의 말씀 뿐 아니라, 구약의 근본정신이 바로 희년정신인 것을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하시고 계약을 베푸신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성령의 도움으로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셨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바로 희년의 정신을 이룩하고자 하였던 것이며, 예수님은 희년의 정신을 구약에 나와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의 새로운 상황 속에서 보다 철저하게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운동은 희년 정신을 보다 래디칼하게 전개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위기의 희년정신을 더 철저하게 그가 살던 땅에서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비인간적인 전적인 경쟁의 상황 속에서 나에게 의미있는 그리스도는 이 희년운동을 철저하게 일으키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를 알게 하는데 도움이 된 것은 바로 나의 상황입니다. 나의 상황으로부터 오는 문제의식이 나로 하여금 희년을 생각하게 하였고, 그 희년의 정신을 구현한 분이 바로 예수라는 것을 발견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강단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복적으로 믿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를 비판하고 경종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마는,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만 있고 나는 없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따르려고 할 때에는 두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첫째는 나와 우리 공동체의 경험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 싼 세상을 깊이 있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성령이 역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첫째로 나에 대한 깊은 관심 없이 예수는 나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요, 우리 공동체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하고 따르게 하시는 분은 삼위의 한 분이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의 복잡하고 힘겨운 상황 앞에서 그 상황이 가지는 깊은 의미와 그 해결책을 알지 못해 눈먼 장님과 같이 번민하고 헤매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은 무엇이며, 그 그리스도를 뒤따르는데 필요한 용기와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십니다. 또, 우리가 지쳐 쓰러지고, 아파하고 있을 때에 우리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시고, 위로해 주시고 치유해 주셔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도록 힘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령의 공동체가 되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 속에서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사크라멘트, 성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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