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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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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2000.3.5 주일설교 |

이제 새길교회가 열세 돌을 맞아 활기찬 10대, 곧 틴 세대로 성숙하고 있습니다. 틴은 모험과 위험이 따르는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성숙의 아픔을 더욱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난 열세 해를 되돌아보면 여러 번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첫해인 1987년 주보를 보면 온 공동체가 대안공동체에 대한 뜨거운 정열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겪기도 했습니다. 교우들의 애경사, 어린이와 학생의 교육문제, 교회관리문제 등으로 목회자를 모셔야 한다는 요청이 있어 공동체가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목회자를 모시기도 했습니다. 일년에 여러 차례 공동체 수련회를 통해 온 교우가 진지하게 각자의 생각을 돌아가면서 진솔하게 쏟아놓기도 했습니다. 열린 공동체, 뜨거운 공동체, 참여민주주의 공동체였습니다.
한때는 제도교회였던 現代敎會가 어려움에 빠지게 되어 저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우리공동체는 그들을 돕기 위해 결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제도교회의 관행을 우리공동체는 무조건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갈라짐의 아픔을 통해 우리 공동체는 더욱 질적으로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도적 차원에서 정체위기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목회자 모시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본질적 차원에서 정체성의 추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삶을 닮고 따르는 것 바로 그것이 열린 평신도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닮기와 예수 따르기가 과연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며, 우리 삶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따르기가 요구하는 희생과 헌신을 감당해 낼 영적 힘을 얻고자 했습니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열린 마음, 창발적 발상, 정직한 용기를 요청합니다. 그러기에 라는 열린 경건성, 열린 실천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따르미의 삶은 피곤하고, 외롭고, 괴로운 삶일 수 있기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욱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열세 돌을 맞으면서, 다시 한번 예수의 경이적인 선교적 행적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 공동체가 부각시켰던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만 본문에 나타난 신앙의 그리스도의 시각에서 본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역사적 예수의 전복적(subversive)이고 대안적(alternative)인 삶에 아주 가까운 듯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에서 당시 위선적 종교제도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맞서셨던 예수의 삶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으로 감동적인 해방의 말씀, 온전케 하는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본문의 상황을 잠시 살펴봅시다.
청년 예수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지켰던 명절을 잘 지켰습니다. 예루살렘 주위 80리 안에 거주했던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같은 민족의 명절에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와 성전에서 경건하게 예배드려야 할 법적 의무를 지녔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의무에 따라 행동한 듯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습니다.
헌데 안식일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께서는 규례에 따라 마땅히 성전으로 발길을 옮겼어야 했는데, 그는 엉뚱한 곳을 향해 바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성전으로 향하지 않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중환자들이 죽치고 있었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지체부자유자들, 심각한 죄인으로 낙인찍힌 들이 우글거렸습니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아비규환의 처절한 경쟁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천사가 연못물을 움직이게 할 때 그들은 필사적으로 그곳에 뛰어들려고 살벌하게 경쟁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추악하고 험악한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베데스다 연못가의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가셔서 놀라운 기적의 치유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치유행위가 바로 안식일을 범한 범법행위였고 율법을 어기는 파계(破戒)행위였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행적이 오늘 열세 돌을 맞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만약 새길 공동체가 참으로 예수 따르미 공동체가 되려고 한다면, 이 사건에서 무슨 교훈과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어떤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것이 우리의 뜻이라면 이 사건에서 어떤 대안적 비젼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풀어야 할 첫 번째 수수께끼는 왜 명절의 안식일에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집트 바로 왕의 학정에서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켰던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성전으로 먼저 가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 먼저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곳에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것도 엄마 자궁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 제도교회는 이 같은 사랑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곳에는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주인 노릇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대제사장, 제사장들, 레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관료적 권위주의는 지녔으나 체휼의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 언덕에서 강도를 만나 너무나 억울하게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거의 죽게 된 사람에게 가까이 가기는커녕 종교적으로 불결하다고 믿어 그를 피해 갔던 정결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마리아 사람같은 잡종의 불결한 사람들이나 억울하게 고통 당했던 민중은 성전 밖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성전 밖의 암울한 현장 가운데 하나가 베데스다 연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성전 밖 북쪽에 위치했던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곳에는 몸이 아픈 사람들(disease에 걸린 사람들)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illness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처참한 경쟁이 때때로 광풍처럼 휘몰아치면서 그 경쟁에서 패배한 처절한 인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힘없고 절망한 군상들의 찌든 모습으로 가득찬 연못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히틀러 따르미들이 인간 쓰레기로 믿어 쓸어 없애려 했던 존재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던 셈이지요. 예수님께서 가야 할 곳이 그러한 곳이였고, 예수님께서 계셔야 할 곳도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활동하시는 절망의 마당에는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소중한 사랑의 공동체가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의 교회로 예수께서 발길을 옮기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향해 던져야 할 것입니다. 한국 크리스쳔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시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무슨 행위를 하셨습니까?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그 많은 억울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딱하고 가장 비참했던 한 지체부자유자 환자에게로 나아가셨습니다. 38년간 몸은 병균으로 무너졌고 마음은 종교적 정죄로 허물어졌던 한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향해 가셨습니다. 왜? 그에게 가장 절박했던 것이 사랑의 치유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다가가 예수님은 너무나 뻔한 질문을 했습니다.
“형제여 낫기를 원하십니까?”
싱겁고 뻔한 질문을 던졌던 예수님의 참뜻은 무엇이었을까요? 환자 자신이 낫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사랑의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38년 간 갖은 고초를 다 겪고 매번 경쟁에서 탈락했던 이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도 꺼져가는 등불같은 희미한 소망과 의지가 남아있어야만 나음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란 불씨가 조금이라도 살아있어야만 기적의 불이 붙게되어 있습니다. 38년간 심하게 꺾인 상한 갈대같은 인생에게 꺼져가는 희미한 소망의 불씨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신 예수께서는 비록 그가 그 희망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불 부칠 수단과 힘이 없음을 아시고 놀라운 기적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오늘의 교회가 가장 절망적이고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 그 문을 활짝 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대안공동체의 참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쉽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 마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침상을 손으로 잡으십시오”
“걸어나가십시오”
이 세 마디는 시저가 남의 땅을 정복한 뒤 장엄하게 선포했다는 말과는 너무나 뚜렷이 대조됩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시저의 감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보고 죽인 뒤, 그 시체더미 위에서 나온 끔찍스러운 잔인한 승리의 감탄이었습니다. 처절한 떼죽음을 보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면서 하신 차원이 다른 말씀이셨습니다. 한마디 한마디의 뜻을 되새겨 봅시다. 왜냐하면 그 한마디 한마디들이 대안 공동체의 비젼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사람만이 직립(直立)할 수 있습니다. 직립하여 일을 해 낼수 있습니다. 이때까지 동물처럼 밑바닥만 보고 살아온 삶을 이제 청산하라는 뜻입니다. 일어서야 비로소 눈 높이의 현실을 볼 수 있고 나아가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은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합니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 냄새나는 존재만이 하늘을 쳐다볼 수 있습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의 몸은 일어서 있지만, 과연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까? 실제로는 땅의 것들, 돈, 권력, 이권에 눈이 어두워 하늘을 향해 쳐다보기보다는 일시적 만족을 위해 땅만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교회들은 어떠합니까? 말로는 하늘을 쳐다보는 듯하나 실제로는 이 땅에 어떻게 하면 더 큰 교회, 더 많은 교회, 더 부유한 교회를 세울까 염려하고 있거나 그것을 탐하지 않습니까?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보는 대안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둘째, 침상을 들라고 했습니다.
이때까지 그를 뒷받침 해주었던 침상은 실제로 그에게는 주인 같았습니다.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존재의 물적 토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는 손으로 잡고 들라고 명령했습니다. 주객을 바꾸란 명령입니다. 혁명적 명령입니다. 주인 노릇했던 물적 토대를 한낱 수단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인이 바로 사람 자신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침상은 신의 손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 존재를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온갖 물적 토대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사람다운 사람, 온전한 사람, 사람 냄새나는 인격적 존재로 우뚝 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과연 한국교회가 제도의 틀이라는 침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교회를 지탱시켜준 제도와 금력, 그리고 이데올로기로서의 교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까?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 모든 제도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주인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대안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걸아 가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이제 직립하여 하늘의 뜻(하나님 나라의 의)을 되새기면서 주인이 되어 전의 자기와 같이 사람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사랑의 기적을 나누어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남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여리고 언덕에 쓰러져 있는 깨어진 인간들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사람이로되,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인간들을 향해 발길을 옮겨야 하고 , 그들과 함께 사랑과 소망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 여기저기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로 가서 그 절망과 고통의 땅을 희망과 기쁨의 마당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살라는 명령이기도 하지요.
과연 한국교회는 그렇게 걸어나가는 교회인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과연 북한의 어린이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까. 동티모르의 학살현장을 향해 문을 열고 있습니까?
오늘 한국교회를 보면, 당당히 직립하기 보다는 교주에게 계속 엎드려 있기를 즐기는 교회가 아닙니까? 또 엎드려 있으라고 강요하는 교주와 성직자의 교회가 아닙니까? 과연 한국교회가 이제껏 안정을 보장해주었던 거적데기 같은 침상에 계속 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것을 손으로 잡아 치워버리고 있습니까? 그것이 제도든지, 교리든지, 헌금이든지 그것에 의존해 자족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과연 한국교회가 나라 안팎에 널려있는 오늘의 베데스다 연못을 향해 문을 활짝 열 뿐만 아니라 그곳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제자리에 앉아 더 높은 바벨탑을 쌓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울타리를 더 높이면서 교리의 담장도 더 두텁게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같은 물음에서 우리 새길공동체는 정직하게 새로운 도전을 받아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억울한 고통을 당하는 비인간화된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는 될 수 있지만 그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를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즉, 새길공동체가 절망한 인간들을 위한 교회(church for the hopelessness)는 될 수 있지만, 그들의 교회(church of the hopelessness)가 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고 정직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필요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대해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겸손하게 시인하면서 성령의 힘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여하튼 적어도 우리 새길공동체는 베데스다 연못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을 위한 공동체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열세해를 맞아 우리가 새삼 확인해야 할 우리의 정체성일 것입니다. 사람 냄새나는 공동체, 온전한 인간을 위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현실세계로 다시 오신다면 제도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치실 것입니다. 종교적 교리와 값싼 축복 속에 편하게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보시고 벌떡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종교제도 속에서 온갖 기득권이라는 침상에 편안히 누워 즐기는 종교지도층을 향해 그 침상을 손으로 들라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그 침상을 내동이 치고 교회 밖으로 나와서, 처절한 비인간적 경쟁에서 낙오하는 인간들,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인간답게 하고 온전케 하는 일에 앞장서라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종교적 동물 아니, 동물적 종교인으로 자족하는 신도들을 향해 이제는 종교냄새, 교리냄새, 신앙냄새를 그만 피우고 사람다운 사람냄새, 하나님 형상의 향기, 곧 자기를 비워 남을 채우는 사람의 향기를 피워내는 온전한 인간이 되라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이 같은 향기를 지녀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온전케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식일 주님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이 명령의 우렁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의 귀를 우리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귀가 있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교인들은 바로 이 소리를 들어 깨달아야 합니다. 열세 돌을 맞는 우리 새길 공동체가 이러한 영의 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귀를 가질 때 새길 공동체는 비로소 올곧은 대안공동체로 아름답게 자라면서 마침내 예수 따르미의 공동체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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