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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요한계시 권진관 형제............... 조회 수 2132 추천 수 0 2008.07.11 13: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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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계21:1-8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0.3.26 주일설교 
 
마가복음 2:21-22, 요한계시록 21:1-8

오늘의 말씀을 위해 두 개의 본문을 선택하였습니다. 두 본문 모두가 너무나 큰 상상력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본문들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잘 연결시킬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생베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기울 수 없다는 이야기, 새 포도주는 헌 가죽부대에 담을 수 없고,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21 장의 말씀을 읽었는데, 여기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 즉 새 예루살렘이 이 땅에 이루어지면,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집이 이들 속에 있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곧 만물이 새롭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롭게 된 세상에는 더 이상 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알파이며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연결시켜 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의 시를 소개합니다.

나는 철로를 따라 걸었다. 바람결에 비가 올 것임을 느끼면서. 곧 비가 왔다. 비는 나의 왼쪽의 철로길을 따라서 세차게 내렸다. 그 억수같은 비는 철로 왼쪽 끝에 멈춰서 철로를 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내리는 끝서 걷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곳과 내리지 않는 곳 사이를 똑바로 걸었다. . . . 이 은혜는 한 치의 오차가 없이 정확한 것이었다. 나는 이것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은 그 끝이 있는 것이란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것은 가장자리의 끝이란다”고 했다.
-- 메인라드 크레이그헤드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 가서 혼자 산 밑에 있는 벌판을 보고 있는데 저쪽에서는 비가 오는데 이쪽은 전연 비가 오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시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시에서는 철로길을 걷는데 철로 왼쪽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려서 마치 큰 천 조각이 드리워진 것같이 (a sheet of rain) 비가 많이 퍼붓고 있었습니다. 이 시인의 오른쪽에는 비가 오지 않고 말짱했습니다. 시인은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곳과 오지 않는 마른땅을 사이의 경계선을 따라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왼쪽 어깨는 비를 맞고 있는 상태였고 오른쪽은 비를 맞지 않았을 겁니다. 그 경계가 너무나 정확해서 한치의 오차가 없을 정도인데, 이 경계선을 시인은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은혜의 경험을 한 이 시인은 할아버지에게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비가 한 곳에 와서 멈추고 있으니 그것이 끝이라고 할 것입니다. 끝이 있다고 본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 것입니다. 일종의 숙명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물을 법칙적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 법칙을 뛰어넘는 초월의 은혜,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대답은 할아버지의 것과 전연 다른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그것을 가장자리의 끝자락이라고 한다면 전연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에 할머니의 지혜와 신앙이 엿보입니다. 가장자리의 끝(the edge of the rim)은 곧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은혜의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자리의 끝이라는 것은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을 약속합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에 나오는 말씀 “그때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다‘“ (계 21:5-6). 저는 계시록의 말씀을 늘 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그 말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무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씀과 상징이 너무나 강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예언하고 있는 일들이 정말로 이 땅에서 이루어 질까봐 사실 걱정이 됩니다. 물론 생명의 강과 도성을 선물하신다는 것은 좋지만, 우리가 거기에 나아가기 전에 정말 끔찍한 심판(예를 들어, 일곱 봉인의 심판, 일곱 천사들의 나팔 소리에 의한 심판, 해가 어두워지고, 물이 쓴 물이 되며, 이상하게 생긴 메뚜기들의 공격에 의한 심판 등이 있고, 일곱 천사가 행한 일곱 대접에 의한 심판들이 있습니다)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저를 두렵게 합니다. 계시록에는 엄청난 상징과 비전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만큼이나 그 상징의 힘이 강한 말씀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 본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처음과 끝은 동이 서로부터 멀 듯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즉 끝이 곧 처음이요, 그것이 이 처음은 원래 마지막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이 바로 처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 순간이 바로 새로이 시작해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이며, 이것이 신앙의 은혜라고 봅니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절망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역시 은혜인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 삶 속에서 새로운 것이란 도저히 생길 수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보좌에 앉아 말씀하시는 그 분의 말씀 “보아라. 내가 이제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말씀에 따라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경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를 들여다보면, 한숨이 나오고, 정말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 속에 거짓과 허영과 교만과 불신, 탐심, 나태, 이기주의 이런 마음의 병들이 우리 마음속에 너무나 깊게 들어와 있습니다. 특히 거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도 진리인 것처럼 용납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인민들의 삶이 그렇게 피폐해 있어도 북한 지도자들은 거짓으로 그것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남한 지도자들은 당리당략을 위해 진실을 피해서 거짓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과 허위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거짓은 아마 종교적인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가일수록 더 교만하고, 더 허위로 뭉쳐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제도교회의 제도성에 포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인적, 물적 성장이 곧 최고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어서 예수의 역설적인 신앙의 삶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의도를 오해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받을 수 없고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강변한 베드로처럼 한국교회들도 자기 만족에 젖어 있습니다. 폴 틸리히가 죽기 2년 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학교 The Pacific School of Religion에서의 강연해서 말한 것처럼, 교회사 속에서의 우리 교회들도 이 베드로를 줄곧 따라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입니다. 권위주의적인 목회방식도 다 이런 잘못된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예수는 지금도 이러한 베드로의 후예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정치와 사회가 문제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종교의 상태의 반영이라고 생각됩니다. 종교가 그만큼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그만큼 타락해지고, 그만큼 문란하고, 그만큼 비합리적이고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가 그렇게도 거짓이 많고, 부패가 난무하며, 권위주의적인 비민주성이 그렇게도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것이 우리 교회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권위주의, 비민주성, 물량주의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불교도 같은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교는 신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어서 우리 사회의 잘못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고,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드는 데에 한 몫을 했습니다.
따라서 사회가 변화되려면 먼저 종교와 교회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평신도들의 사명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제도교회의 목회자들은 이러한 일을 해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평신도들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평신도들이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작은 오직 예수를 따름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역사적인 삶을 오늘 속에서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이 땅에서 구현하여야 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려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었지, 예수가 당시와 그 장소에서 했던 것들을 그대로 따라하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 방향은 모든 인간의 해방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우리의 상황 속에서 무엇이 해방과 구원의 길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예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독신으로 광야나 거리에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한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새로운 시작을 방해하는 세력이 너무나 강고했습니다. 먼저 과거와 현재 지향적 유대 율법주의자들, 제사장들, 예루살렘주의자들이 그의 새로운 시작을 방해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반한 사람도 생기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예수를 방해한 세력은 로마 총독부였습니다. 로마의 현재 지향적 강고한 세력이 예수를 최종적으로 방해했던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말이 들어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되어 있지 않고 보다 더 궁극적인 적인 ‘본디오 빌라도’라고 하는 로마 지배자를 들었던 것은 사도신경이 가지는 중요한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의 눈에 비추어 볼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씀은 정말로 다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고난 당한 것이기 보다 원래의 주범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둔 것은 보수적이고 부드러운 신앙고백으로서는 획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제자들까지도 오해받고 외면당한 예수의 새로운 일이 언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경험으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새로운 일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나중된 자가 처음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이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믿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의 잘못된 것을 뒤로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우리 삶 속에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의 경험은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경험입니다.

저의 학교의 제 연구실에는 화분이 여러 개 있습니다. 많이 줄였는데도 아직도 9개가 있습니다. 큰 화분도 있고 작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언젠가부터 서너 개의 화분에 토끼풀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실내인데도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아니면 원래 화분의 흙 속에 씨앗이나 뿌리가 숨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한 두 개씩 싹이 터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모양도 좋아서 그냥 놔두었는데 지난 가을부터 화분을 완전히 덮어 버리더니만, 화분에 주렁주렁 넘쳐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토끼풀들이 양분을 먹어 화초가 약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 달 전쯤에 화분으로부터 토끼풀들을 완전히 뽑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2주정도 지나니까 웬걸, 토끼풀 숲이 다시 왕성하게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뽑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올라옵니다. 계속 뽑다가 이럴 것이 아니라, 완전히 흙을 갈아버리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지난주간 동안에 화분의 흙을 완전히 바꾸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시작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로운 결단은 정말로 새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흙을 바꾸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만의 변화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민중들의 생활을 잘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께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옷을 기워 입는 경험을 하시면서 그 속에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옷을 깁는다는 것은 여성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여성의 일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이 하는 일을 손수 하시면서 경험한 것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가 대고 기우면 찢어진 곳이 기워지기는커녕 더 찢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새 천을 갖다가 헌옷에 대고 기우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완전히 새 옷을 만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흔히 남성이 하는 경험 입니다마는 예수께서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셨다고 했으니, 술을 담그는 일을 많이 하셨을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손수 술을 담그고, 그것을 가죽 부대에 넣어 보관하시면서 그곳에서도 특별한 깨달음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옷을 고치는 이야기와 포도주를 보관하는 일과 같은 실생활의 경험에서 바로 하나님의 원리와 뜻을 끄집어내시는 그의 통찰력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부대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려면 그 형식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고, 시작하려면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여성과 남성의 경험을 몸소 다 하시면서, 그 남성과 여성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늘의 메시지의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새롭게 시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를 Imago Dei로 만드신 것은 새로운 창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듯 우리에게도 그 능력을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가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마는 당장에는 편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새로운 무엇을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그러나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새로운 상황에서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형상 즉, Imago Dei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은 우리의 힘으로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실 때도 있습니다. 저를 감옥에 처넣으시고 역사 속에서 고난을 경험하게 하시고, 급기야는 신학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전공분야로 저를 내 몰아 내셨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새로운 시작의 계기를 마련해 주시기도 하지만, 더 귀중한 것은 우리의 결단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나님 뜻에 맞게 시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서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험난한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많은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주님께서 하신 이 새로운 일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교회의 모습은 계시록 말씀에 잘 나오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되듯이, 교회도 사람들 속으로,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집단적으로, 그리고 모든 교인들과 연대해서 이루어나가야 할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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