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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출4:1-5 |
|---|---|
| 설교자 : | 김민웅 목사 |
| 참고 : | 새길교회 2000.6.4 주일설교 |
오늘 우리가 읽은 장면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의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애굽을 향해 파송을 받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받고 있는 히브리 민족의 아우성을 들으셨으니 이들을 구해내는 일을 위해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산 위로 오르게 하신 것은 그곳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산아래 어렵고 안타까운 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수께서 변화산상에 오르셔서 모세,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자 그에 놀란 베드로는 "이곳이 좋사오니"하고 거기에 예루살렘을 위압할 종교적 정통성을 지닌 터를 잡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산아래 현실로 내려 가셨습니다. 그 현실의 중심에는 자칫 죽을지 모를 아이의 고통받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권력과 재물과 명예, 그리고 승패를 겨룰 정상에 오를 생각에만 사로잡혀 바로 그 고통의 자리를 망각합니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게 된 지도자들의 타락과 변절이 그토록 무수하고 그로써 그 사회의 좌절과 절망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산밑에 있던 예수의 제자들은 정작 문제의 핵심은 놓친 채 논쟁에만 골몰하여 이길 생각에 사로잡혔고, 병든 아이의 아버지는 내려온 예수에게 이를 고발합니다. "생명을 살릴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는 저들이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바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파송의 후보로 선택된 모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사자인 모세가 스스로를 이 일에 합당한 능력이나 자질, 또는 신망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자칫 "확신이 없는 파송"을 강요하는 모양새가 되는 사태를 만들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확신을 갖지 못한 하나님의 사자는 어려운 고비가 나타나면 뒤로 후퇴하기 십상일 터이니 하나님의 계획은 벽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상에 대하여 반기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자신이 걸머지기에는 여러 가지 불리함이 있다고 지레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인물을 내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모해 보이는 일인 것만 같습니다.
우리의 오늘 본문 앞서에 그는 "자기가 무엇이관대 감히 애굽의 절대적 통치자인 바로에게 가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케 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킵니다. 이것은 한때는 애굽제국의 왕궁에서 자란 지체 놓은 왕자와 다를 바 없는 신분이었지만, 이제는 도망자를 거쳐 망명객의 신세에다가 평범한 목동에 불과한 그가 절대군주 바로와 맞서야 하는 용기의 문제입니다. 잘못하면 대역죄에 걸려 그의 생명이 왔다갔다할 수 있는 막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상대하기 버거운 바로도 바로이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있음을 하나님에게 제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믿지도 않고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강자와 대결할 때 요구되는 의 문제와 함께, 자기 동족의 를 얻는 일이 같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 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모세는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 신뢰를 확보할 만한 새로운 징표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의 그가 내세울 수 있었던 그의 신분이나 지식, 또는 그의 육체적 완력은 지금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사실 그는 이 동족의 신뢰 문제에 있어서 뼈저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노예생활을 하는 동족이 괴롭힘을 받는 현장에서 그는 잔혹하게 구는 애굽의 감독자를 쳐서 살해하고는 모래 속에 암매장을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로써 그는 동족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덜게 되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그에게 있어서 최선의 문제해결의 방식이었습니다. 사실 이로써 그의 민족이 겪는 고난의 뿌리가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이로써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고 안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세는 동족간의 분쟁에 끼어 들어, 자기가 보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쪽을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누구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세의 살인행위를 갑자기 폭로하면서 모세를 궁지에 몰아놓았던 것입니다. 그 동족은 모세의 살인행위를 힐난하면서 이르기를, "도대체 당신이 무엇이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운바가 있소?"하였습니다. 그의 권위를 정면으로 도전하여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인도 죽이더니 나까지 죽이려하오?" 하고 대드는 동족 앞에서 모세는 더 이상 분쟁을 위엄있게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나설 입장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족들 앞에서 졸지에 한낱 살인자에 불과한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즉 남의 일에 끼어 들 처지가 전혀 아니게 된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일신의 안전을 꾀하는 일이 보다 다급한 현안으로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타자를 위한 자기헌신"이 갖는 의외의 함정을 일깨웠을 것입니다. 모세 나름으로는 동족을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했던 과거사가 도리어 이제 바로 그 동족에 의해 그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로 변한 것입니다. 그로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을만한 대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남에게 신뢰를 획득한다는 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절감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로서는 일에 의의가 있다고 해서 섣불리 나설 만큼 어리석은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닌 상황인 것입니다. 이렇게 "네가 도대체 뭐냐?"하고 그 권위를 불신 당한 경험이 있는 모세로서는 오랜 세월 타지에서 살다 돌아온 자신을 이들 백성들이 과연 제대로 받아 주기나 하겠는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의 핍박이야 각오해야 할지 모르나, 한편이 되어서 하나의 마음으로 똘똘 뭉쳐야 할 이들 백성들이 그를 전적으로 믿고 그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로서는 실로 난감한 처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바로가 억압한다해도 이들 백성들이 든든하게 믿고 뒤를 따르면 상황은 한결 나아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의 불신의 근거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근본적인 회의라면 이는 출발부터 삐꺽거리지 않을 수 없는 사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모세에게 실질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입증해 보이지 않고서는 안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신뢰는 입증과 직결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뭘 새롭게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사람들이 그나마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의 권세를 어떤 식으로 입증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르셔서 물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모세로 하여금 지금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주목하고 깨닫도록 일깨우시는 것에 그 질문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데 무슨 따로 특별한 수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이미 준비는 충분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 역사하시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힘겨운 도전이나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대단히 특별한 방법이 동원되어야만 해결의 열쇠가 생긴다고 여기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모세는 "지팡이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모세에게는 그가 양을 치면서 항상 손에 익숙하게 잡고 있던 지팡이가 이 거대하게만 보이는 사건의 시작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낯설거나 손에 익숙하지 않은 수단을 새롭게 배워야만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장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사명에 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지팡이 하나로 그 무수한 양떼를 쳐온 모세로서야 지팡이 다루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맡겨진 일 앞에서 영 확신을 갖지 못하는 모세로 하여금 그가 현재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방식에서부터 출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평생을 어부로 지내온 베드로와 그의 형제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너희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지팡이를 "땅에 던져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그가 이제 걸어가야 할 길과 지팡이가 "짱"하고 마주치는 장면을 상징해주는 듯 합니다. 그의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자 그것은 졸지에 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뱀의 위협적인 모습 앞에서 모세는 몸을 피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지팡이를 잡고 가는 길에 봉착하게 되는 위험과 위기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한 뜻을 감당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 선한 일을 하는 것 때문에 고난과 시련이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선함을 반가워하지 않는 악의 세력들이 도처에서 역공을 취할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자 도리어 그를 공격하는 뱀으로 화한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일은 그로 말미암아 뱀과 만나는 일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모세는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자유자재로 놀았던 지팡이가 뱀이 되자 사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오로지 피할 길만 찾습니다. 바로의 위협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척 앞에서 모세가 어떤 대응을 할지 충분히 예상하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사명으로 알고 그에 따르다가 예상치 않게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바로 이 에게 물릴까봐 피합니다. 우리는 근거 없는 악소문에 물리며, 비방에 물리고, 핍박과 시기, 악한 술수에 물립니다. 우리는 악연에 물리고 미움에 물리며 오해와 불신에 물리기도 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이렇게 물려본 경험이 있으면 다시는 지팡이를 잡고 나설 생각을 하게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바로 사탄이 원하는 바가 달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구상이 좌절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에서 각자 자기 지팡이를 잡고 열심히 일을 하다가 생각지도 않게 주변의 입방아가 그에게 뱀이 되어서 상처를 입히면 몸을 온통 사리게 됩니다. 사태를 감당할 만한 자신을 잃고 뒤로 물러나려 합니다. 아예 시작하지 않았던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까지 하게 됩니다. 누구든 그렇게 처음에는 초라한 지팡이일지라도 그것이나마 가지고 의욕적으로 감사하게 시작했다가 물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서 비틀거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서든, 믿음과 꿈을 가지고 임했던 작업에서 의외의 돌발사태로 인해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우리는 뱀을 만나듯이 그 앞에서 몸을 피하면서 쩔쩔매는 일이 적지 아니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용기를 잃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잃어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모습이 점점 굳어지면 어느새 우리는 주변의 신뢰를 힘있게 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우리가 어쩐지 아무래도 불안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일을 함께 도모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잘 알고 또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일에서조차 실수를 저지르고 어처구니없는 실패를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자리에서조차, 그리고 그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에서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젓습니다. 사람이 무섭고, 자신이 또다시 상처를 입을 것을 깊이 두려워하게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안에 꽁꽁 숨어버리고 맙니다. 사탄이 원하는 인간형은 반드시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지팡이를 잡고 가다가 그 지팡이로 인해 당하는 뱀의 공격 앞에서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나고 마는 사람 역시 사탄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유형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계획과 구상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피하려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손을 내밀어서 그 꼬리를 잡아라." 정신이 나가지 않았으면 맨 손으로 뱀의 꼬리를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작대기나 돌로 뱀의 머리를 치든지 아니면 양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로 그 머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 조치를 취하는 것이 사태를 수습하는 일반적인 수순입니다. 꼬리를 잡는 것은 뱀이 머리를 치켜들고 몸을 거꾸로 돌려 모세를 공격하도록 만드는 매우 위험하고 불리한 대응 방법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은 어느새 그의 손에서 그가 다루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한 손에 모든 사태의 격렬한 흐름을 확실하게 장악해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물러섬이 없이 담대하게 맨 손으로 사태를 감당하니 그 손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권세가 충만한 손이 되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그의 손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그가 위기를 제압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임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 놀라서 어쩔 줄 몰랐던 그가 다시 손을 뻗어 잡은 뱀은 이로써 그의 권세를 드러내는 소재로 변하였습니다. 는 그리하여 모세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고, 백성들의 마음에 신뢰감을 힘있게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징표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어지러움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잡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오늘날의 우울하고 복잡한 현실에서 주춤거리며 자기 안에 갇혀있기만 하니 교회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만 뱀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의 집합소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다시 힘있게 움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놓치면 그것은 도리어 뱀이 되어 우리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마음으로 그 현실을 감당하는 믿음을 가지면 실로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지에 몰렸던 상황에서 어쩌다 우연으로 이루어진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시련과 고난을 축복의 기회와 재료로 만들어내는 다름아닌 에 의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인들은 바로 이 믿음의 능력을 갖추어 이 세상의 갖가지 괴롭고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삶의 현장에 파송되는 존재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치루게 되는 도전과 위기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물러난다면 세상은 신앙인들의 영적 권위를 인정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세상을 현혹하여 그 영혼을 마음껏 사냥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 받았고, 또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지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연약해져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순교자와 선지자가 없는 시대의 특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기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한 신뢰감을 주지도 못합니다. 사명감이 부족하며 무기력하기조차 합니다. 자기라는 동굴 안에 갇혀 상처받지 않고 살 궁리만 합니다. 믿음을 통해 얻는 마음의 평안을 그런 것으로 이해합니다. 뱀을 만나면 도망갈 최선의 방법을 구하는 것을 신앙의 지혜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인은 그런 나약하고 개인주의적인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희망이 꺾인 시대를 일으키는 담대한 용기와, 확신이 사라진 시대의 무기력을 극복할 능력 있는 믿음이 충만한 존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고통받고 있는 불신의 늪을 건너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축복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며, 자신의 삶을 진정 가치있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되자고 마음먹고 결단하는 순간부터가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이루어지는 시작입니다. 그 결단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혹 어려운 일을 만나면 흔들리지 마시고, 손을 뻗어 뱀의 꼬리를 잡았던 모세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이 결단과 이 믿음에 의지하면, 그 어떤 도전과 위기도 우리 손에 쥐어진 지팡이가 되는 것을 확신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 머리를 쳐든 뱀의 꼬리를 움켜쥐고 다시 잡은 지팡이가 가져올, 결코 패배하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능력과 권세에 의지해서 전진하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강하신 손의 보호하심이 끝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 이 시대에 웅대한 변화를 가져올 능력있는 존재가 되어갈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우울한 시대의, 절망에 처한 이들의 가슴에 새로운 용기와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축복된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불신 당하는 교회, 겁나는 불안에 진정 움추러 들지 않는 크리스찬이 되셔서 믿음을 상실한 이 세대를 향해 믿음의 권위와 그 능력을 증거하는 일에 다함 없는 기쁨을 누리는 감사가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런데 막상 이렇게 파송의 후보로 선택된 모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사자인 모세가 스스로를 이 일에 합당한 능력이나 자질, 또는 신망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자칫 "확신이 없는 파송"을 강요하는 모양새가 되는 사태를 만들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확신을 갖지 못한 하나님의 사자는 어려운 고비가 나타나면 뒤로 후퇴하기 십상일 터이니 하나님의 계획은 벽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상에 대하여 반기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자신이 걸머지기에는 여러 가지 불리함이 있다고 지레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인물을 내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모해 보이는 일인 것만 같습니다.
우리의 오늘 본문 앞서에 그는 "자기가 무엇이관대 감히 애굽의 절대적 통치자인 바로에게 가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케 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킵니다. 이것은 한때는 애굽제국의 왕궁에서 자란 지체 놓은 왕자와 다를 바 없는 신분이었지만, 이제는 도망자를 거쳐 망명객의 신세에다가 평범한 목동에 불과한 그가 절대군주 바로와 맞서야 하는 용기의 문제입니다. 잘못하면 대역죄에 걸려 그의 생명이 왔다갔다할 수 있는 막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상대하기 버거운 바로도 바로이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있음을 하나님에게 제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믿지도 않고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강자와 대결할 때 요구되는 의 문제와 함께, 자기 동족의 를 얻는 일이 같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 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모세는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 신뢰를 확보할 만한 새로운 징표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의 그가 내세울 수 있었던 그의 신분이나 지식, 또는 그의 육체적 완력은 지금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사실 그는 이 동족의 신뢰 문제에 있어서 뼈저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노예생활을 하는 동족이 괴롭힘을 받는 현장에서 그는 잔혹하게 구는 애굽의 감독자를 쳐서 살해하고는 모래 속에 암매장을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로써 그는 동족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덜게 되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그에게 있어서 최선의 문제해결의 방식이었습니다. 사실 이로써 그의 민족이 겪는 고난의 뿌리가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이로써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고 안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세는 동족간의 분쟁에 끼어 들어, 자기가 보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쪽을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누구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세의 살인행위를 갑자기 폭로하면서 모세를 궁지에 몰아놓았던 것입니다. 그 동족은 모세의 살인행위를 힐난하면서 이르기를, "도대체 당신이 무엇이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운바가 있소?"하였습니다. 그의 권위를 정면으로 도전하여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인도 죽이더니 나까지 죽이려하오?" 하고 대드는 동족 앞에서 모세는 더 이상 분쟁을 위엄있게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나설 입장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족들 앞에서 졸지에 한낱 살인자에 불과한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즉 남의 일에 끼어 들 처지가 전혀 아니게 된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일신의 안전을 꾀하는 일이 보다 다급한 현안으로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타자를 위한 자기헌신"이 갖는 의외의 함정을 일깨웠을 것입니다. 모세 나름으로는 동족을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했던 과거사가 도리어 이제 바로 그 동족에 의해 그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로 변한 것입니다. 그로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을만한 대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남에게 신뢰를 획득한다는 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절감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로서는 일에 의의가 있다고 해서 섣불리 나설 만큼 어리석은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닌 상황인 것입니다. 이렇게 "네가 도대체 뭐냐?"하고 그 권위를 불신 당한 경험이 있는 모세로서는 오랜 세월 타지에서 살다 돌아온 자신을 이들 백성들이 과연 제대로 받아 주기나 하겠는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의 핍박이야 각오해야 할지 모르나, 한편이 되어서 하나의 마음으로 똘똘 뭉쳐야 할 이들 백성들이 그를 전적으로 믿고 그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로서는 실로 난감한 처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바로가 억압한다해도 이들 백성들이 든든하게 믿고 뒤를 따르면 상황은 한결 나아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의 불신의 근거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근본적인 회의라면 이는 출발부터 삐꺽거리지 않을 수 없는 사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모세에게 실질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입증해 보이지 않고서는 안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신뢰는 입증과 직결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뭘 새롭게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사람들이 그나마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의 권세를 어떤 식으로 입증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르셔서 물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모세로 하여금 지금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주목하고 깨닫도록 일깨우시는 것에 그 질문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데 무슨 따로 특별한 수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이미 준비는 충분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 역사하시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힘겨운 도전이나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대단히 특별한 방법이 동원되어야만 해결의 열쇠가 생긴다고 여기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모세는 "지팡이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모세에게는 그가 양을 치면서 항상 손에 익숙하게 잡고 있던 지팡이가 이 거대하게만 보이는 사건의 시작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낯설거나 손에 익숙하지 않은 수단을 새롭게 배워야만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장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사명에 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지팡이 하나로 그 무수한 양떼를 쳐온 모세로서야 지팡이 다루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맡겨진 일 앞에서 영 확신을 갖지 못하는 모세로 하여금 그가 현재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방식에서부터 출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평생을 어부로 지내온 베드로와 그의 형제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너희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지팡이를 "땅에 던져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그가 이제 걸어가야 할 길과 지팡이가 "짱"하고 마주치는 장면을 상징해주는 듯 합니다. 그의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자 그것은 졸지에 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뱀의 위협적인 모습 앞에서 모세는 몸을 피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지팡이를 잡고 가는 길에 봉착하게 되는 위험과 위기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한 뜻을 감당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 선한 일을 하는 것 때문에 고난과 시련이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선함을 반가워하지 않는 악의 세력들이 도처에서 역공을 취할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자 도리어 그를 공격하는 뱀으로 화한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일은 그로 말미암아 뱀과 만나는 일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모세는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자유자재로 놀았던 지팡이가 뱀이 되자 사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오로지 피할 길만 찾습니다. 바로의 위협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척 앞에서 모세가 어떤 대응을 할지 충분히 예상하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사명으로 알고 그에 따르다가 예상치 않게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바로 이 에게 물릴까봐 피합니다. 우리는 근거 없는 악소문에 물리며, 비방에 물리고, 핍박과 시기, 악한 술수에 물립니다. 우리는 악연에 물리고 미움에 물리며 오해와 불신에 물리기도 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이렇게 물려본 경험이 있으면 다시는 지팡이를 잡고 나설 생각을 하게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바로 사탄이 원하는 바가 달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구상이 좌절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에서 각자 자기 지팡이를 잡고 열심히 일을 하다가 생각지도 않게 주변의 입방아가 그에게 뱀이 되어서 상처를 입히면 몸을 온통 사리게 됩니다. 사태를 감당할 만한 자신을 잃고 뒤로 물러나려 합니다. 아예 시작하지 않았던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까지 하게 됩니다. 누구든 그렇게 처음에는 초라한 지팡이일지라도 그것이나마 가지고 의욕적으로 감사하게 시작했다가 물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서 비틀거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서든, 믿음과 꿈을 가지고 임했던 작업에서 의외의 돌발사태로 인해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우리는 뱀을 만나듯이 그 앞에서 몸을 피하면서 쩔쩔매는 일이 적지 아니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용기를 잃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잃어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모습이 점점 굳어지면 어느새 우리는 주변의 신뢰를 힘있게 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우리가 어쩐지 아무래도 불안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일을 함께 도모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잘 알고 또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일에서조차 실수를 저지르고 어처구니없는 실패를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자리에서조차, 그리고 그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에서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젓습니다. 사람이 무섭고, 자신이 또다시 상처를 입을 것을 깊이 두려워하게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안에 꽁꽁 숨어버리고 맙니다. 사탄이 원하는 인간형은 반드시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지팡이를 잡고 가다가 그 지팡이로 인해 당하는 뱀의 공격 앞에서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나고 마는 사람 역시 사탄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유형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계획과 구상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피하려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손을 내밀어서 그 꼬리를 잡아라." 정신이 나가지 않았으면 맨 손으로 뱀의 꼬리를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작대기나 돌로 뱀의 머리를 치든지 아니면 양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로 그 머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 조치를 취하는 것이 사태를 수습하는 일반적인 수순입니다. 꼬리를 잡는 것은 뱀이 머리를 치켜들고 몸을 거꾸로 돌려 모세를 공격하도록 만드는 매우 위험하고 불리한 대응 방법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은 어느새 그의 손에서 그가 다루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한 손에 모든 사태의 격렬한 흐름을 확실하게 장악해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물러섬이 없이 담대하게 맨 손으로 사태를 감당하니 그 손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권세가 충만한 손이 되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그의 손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그가 위기를 제압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임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 놀라서 어쩔 줄 몰랐던 그가 다시 손을 뻗어 잡은 뱀은 이로써 그의 권세를 드러내는 소재로 변하였습니다. 는 그리하여 모세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고, 백성들의 마음에 신뢰감을 힘있게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징표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어지러움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잡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오늘날의 우울하고 복잡한 현실에서 주춤거리며 자기 안에 갇혀있기만 하니 교회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만 뱀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의 집합소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다시 힘있게 움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놓치면 그것은 도리어 뱀이 되어 우리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마음으로 그 현실을 감당하는 믿음을 가지면 실로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지에 몰렸던 상황에서 어쩌다 우연으로 이루어진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시련과 고난을 축복의 기회와 재료로 만들어내는 다름아닌 에 의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인들은 바로 이 믿음의 능력을 갖추어 이 세상의 갖가지 괴롭고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삶의 현장에 파송되는 존재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치루게 되는 도전과 위기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물러난다면 세상은 신앙인들의 영적 권위를 인정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세상을 현혹하여 그 영혼을 마음껏 사냥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 받았고, 또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지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연약해져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순교자와 선지자가 없는 시대의 특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기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한 신뢰감을 주지도 못합니다. 사명감이 부족하며 무기력하기조차 합니다. 자기라는 동굴 안에 갇혀 상처받지 않고 살 궁리만 합니다. 믿음을 통해 얻는 마음의 평안을 그런 것으로 이해합니다. 뱀을 만나면 도망갈 최선의 방법을 구하는 것을 신앙의 지혜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인은 그런 나약하고 개인주의적인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희망이 꺾인 시대를 일으키는 담대한 용기와, 확신이 사라진 시대의 무기력을 극복할 능력 있는 믿음이 충만한 존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고통받고 있는 불신의 늪을 건너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축복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며, 자신의 삶을 진정 가치있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되자고 마음먹고 결단하는 순간부터가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이루어지는 시작입니다. 그 결단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혹 어려운 일을 만나면 흔들리지 마시고, 손을 뻗어 뱀의 꼬리를 잡았던 모세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이 결단과 이 믿음에 의지하면, 그 어떤 도전과 위기도 우리 손에 쥐어진 지팡이가 되는 것을 확신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 머리를 쳐든 뱀의 꼬리를 움켜쥐고 다시 잡은 지팡이가 가져올, 결코 패배하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능력과 권세에 의지해서 전진하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강하신 손의 보호하심이 끝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 이 시대에 웅대한 변화를 가져올 능력있는 존재가 되어갈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우울한 시대의, 절망에 처한 이들의 가슴에 새로운 용기와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축복된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불신 당하는 교회, 겁나는 불안에 진정 움추러 들지 않는 크리스찬이 되셔서 믿음을 상실한 이 세대를 향해 믿음의 권위와 그 능력을 증거하는 일에 다함 없는 기쁨을 누리는 감사가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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