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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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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롬1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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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강기철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2000.7.9 주일설교 |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 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이는 먹지 않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며, 먹지 않는 이는 먹는 이를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 드리셨습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으로 저는 용기를 얻습니다. 제 생각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여러 교우들께서 '모든 것을 다 받아 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편안하게 저를 받아 주시리라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히 이렇게 단 위에 섰습니다. 교우 여러분과 함께 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새길, 편안한 공동체
저는 일요일 아침 시간이 참 좋습니다. 여러분도 물론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일단은, 세상의 힘든 짐들을 잠시 홀가분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겠습니다만, 그것보다도 제가 정말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을 만나는 일이 제게는 정말 부담 없는 기쁨이기도 하구요. 그 편안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곳에서 저는 여러 교우들의 꾸밈없는 진솔한 모습들을 봅니다. 이 곳에는 세상의 그 체면 따위나 이해 같은 복잡함이 없어서 좋습니다. 궂은 일이라도 보이는 대로 찾아서 하는 모습들이 그렇고, 또 격의 없이 맞아 주는 모습들이 그러합니다. 이런 곳을 또 세상 어디서 쉽게 만날 수 있을까요 ? 그런 의미에서 이곳이 편안해서, 여기만큼 편안한 교회를 아직 찾지 못해서 이사를 가고도 대전 그 먼 곳에서 이 곳까지 가끔은 오게 된다는 우리 형제의 고백에 저는 쉽게 수긍을 합니다.
물론, 새로운 길을 찾아서 이런 저런 방향으로 헤쳐 나가다 보면, 이쪽이 옳다, 아니면 저쪽이 옳다, 뭐 이런 저런 생각의 차이로 빚어지는 가벼운 갈등이나, 잠시 스쳐 지나가는 마음의 상처도 있는 줄은 압니다마는,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형제의 우애와 상대에 대한 이해, 마음의 양보로 쉽게 녹아 내리곤 하는 곳이, 바로 이곳, 우리 새길 공동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2. 공동체라는 것
우리는 '새길 교회' 라는 표현보다는 아무래도 '새길 공동체'라는 표현에 더 익숙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새길 공동체라고 부르는 편이 많습니다. 아마, '교회' 에 대한 이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알게 모르게 어떤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쨋든 '교회' 라는 말보다는 '공동체' 라고 부르는데서 훨씬 더 인간적인 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인 듯 싶습니다 .
어떤 분은 '공동체 "와 '교회' 라는 표현을 가려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공동체'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곳이 믿음으로 함께 생활하는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집' 등으로 다양하게 말하고 있다. 영어로 보자면 'church' 와 'congregation' , 혹은 'community' 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두 표현이 가지는 의미의 차이를 찾는다면 '공동체'가 인간 편에서의 교회라는 점이, '교회' 라는 것은 '하나님의 집,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집' 과 같이 하나님 편에서의 교회라는 점이 강조되어 지는 것은 아닐까?"
위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새길 공동체 '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신앙적 믿음을 가지고 모인 모임이다' 라고 하는 다소 '우리중심'의 의식이 그 속에 은연중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혹시 우리가 우리의 편의에 따라 생각하고 또 행동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것은 아닌지요? 그럼으로써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에서 혹 멀어지는 일이 있지는 않은지요? 이 모두가 지나친 걱정이겠습니다. 여하튼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각자의 역할을 모으는 곳이다'라고 해야겠지요?
R. 매키버는 공동체의 기초는 공동체 감정(Community Sentiment)에 있다고 말하며, 이 공동체 감정을 '공통된 이해를 갖는데서 생기는 동일시 및 친밀성의 우리 감정(WE-FEELING)' 과 '공동체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가진다고 하는 '역할 감정', 그리고 '공동체에의 의존 감정' 등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새길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와 평화를 실현하도록 부름 받은 신도들의 공동체임' 을 고백하며 출발했습니다 . 저는 앞서의 '동일시 및 친밀성의 우리 감정' , 공동체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가진다고 하는 '역할 감정' 등과 관련하여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살피고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3. 모두가 요긴한 지체.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봅니다.
" 여러 지체가 모여서 한 몸을 이룹니다. 따라서 발이 '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오 , 또 귀가 ' 나는 눈이 아니니 ,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 만일,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누가) 듣겠으며 , 몸이 다 귀라면, 냄새는 어떻게(누가) 맡겠습니까 ? 눈이 손에게 ' 쓸데가 없다 '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 쓸데가 없다 ' 고 업신여겨서도 안됩니다 . 약하다고 여기는 부분이 오히려 더 소중한 역할을 하고, 보잘것없는 지체가 더 귀하게 쓰입니다 . "
여러 해 전 제게 있었던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 날 회사에서는 제 마음을 아주 무겁게 만드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분이 많이 상했습니다 . 그 일이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에이, 때려 치워 ?' 직장생활 해 보신 분들이 한 번 이상은 다 겪으셨을 그런 감정 있지 않습니까 ?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습니다. 일찍 집에 가서 샤워나 하고, 뭐 시원한 것이나 좀 마시고, 그리고는 오늘은 그냥 한숨 푹 자는 거다. 이런 심사로 현관을 들어서는데 제 처가 "오늘 구역 예배가 있어 가야돼요" 합니다 .
차마 싫다 할 수는 없어 따라 나서기는 하지만 과히 내키는 걸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데 말이죠 . 그런데 그 날의 성경 내용과 말씀 하나 하나가 정말 제 어리석음을 질책하듯 마음의 구석구석 , 정곡을 찌르며 큰 은혜와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 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
아, 그렇구나 . 이 어리석은 자야 . 하시는 하나님의 꾸짖음이 들렸습니다. 정말 제 생각과 행실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동시에 정말 큰 위로가 되어 다가왔습니다. 그래, 나는 발이다. 아주 소중한 발이다. 내가 왜 손의 역할을 넘보느냐. 왜 머리가 되겠다 고 하느냐. 나를 손으로, 머리로 쓰기가 합당한 일이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쓰실 텐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제 마음은 너무 편안해져 있었습니다 . 주님을 안다는 것이 큰 기쁨으로 변화되어 있었고, 저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부족한 저를 항상 샅샅이 살피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 , 감사합니다 . 당신께서는 오늘 저의 미련함을 깨우쳐 주시고 , 참 평안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제가 약하나 그렇게 요긴한 지체로 쓰이는 줄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쓰시던 지 이제 탓 안 할 랍니다. 부족한 저를 주님께서 맡아 주옵소서"
다음 날 출근길에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 데 옆의 쓰레기 수거장에서 마침 쓰레기를 치우는 두 청소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아파트 라인마다 쓰레기 공동 투입구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 냄새나는, 정말 힘든 일을 묵묵히 땀 흘리며 해 내고 있는 그 분들이 그 날은 내게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라는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작지만 요긴한 지체였습니다. 정말 귀하고 소중한 지체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발로 쓴다고 타박하면서, 손으로 써 달라고, 또는 머리가 되게 해 달라고 탓 만하던 제게 하나님은 '작은 지체의 역할도 소중히 여기며 그대로를 감사 할 줄 아는 깨달음'을 주셨고, 이제는 회사의 경영을 맡기셔서 저로 하여금 머리의 위치에서 소중한 여러 지체들을 살피는 큰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삶에 있어 때때로 크고 작은 여러 시련을 주시지만 그때마다 항상 갈 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크게 쓰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습니다.
4 . 참 아름답고 귀한 섬김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 축복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체가 모여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섬기며,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말없이 애쓰는 여러 교우들의 참 아름답고 귀한 모습들을 저는 많이 보고 듣습니다.
이곳에는 식사 후면 꼬박 꼬박 그 냄새나고, 불결한 음식물 쓰레기를 자청하여 비닐 봉지에 묶어 내어놓는 지점장이 계시고, 돌아오는 설거지 순번에는 어김없이 주방으로 오셔서 그 활달하신 유머와 함께 고무장갑 끼시는, 손자와 함께 오는 할아버지도 계십니다(아마 댁에서는 상상도 못하실 일로 생각됩니다). 매주일 마이크 가방 챙겨 다니시며, 음향 조절하시는 우리 교수님은 어떻습니까? 그 분 제자 되는 젊은이가 저희 교회를 한번 찾아 나왔다가, 교수님이 걸레 들고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줄행랑을 치더라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고로 매 주일 우리 손에 쥐어지는 주보도 그렇고, 한 주일 내내 따님의 피아노 반주로 도움 받아 , 그것도 틀릴 때마다 천 원씩 벌금을 물기로 하고 배운다는 그 열성으로 오늘도 이렇게 우리 앞에서는 성가대 형제의 정성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여러 교우들의 섬김과 봉사,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 Francis Schaeffer )는 - 20세기 후반 한국 기독 지성 계 전반에 많은 영향을 준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 말하기를 '올바른 믿음이 올바른 공동체 '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제가 올바른 믿음이란 이러 이러한 것이다 라고 말씀드릴 충분한 신학이나 신앙적인 바탕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옳고 그름을 떠나 믿음이란 행함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성경의 말씀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새길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많은 분들의 보이지 않는 섬김과 헌신에 항상 고마움을 갖습니다. 결국, 제가 우리 공동체에서 느끼는 편안함이란 이런 저런, 일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함께 참여하시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저 자신도 함께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WE-FEEL 이라는 공동체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5. 말 길이 있어 행복한 교회
경북 안동에 있는 모 고등학교 교목 한 분이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 띄운 글입니다.
"말 길(言路?)이 있어 행복한 교회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새길 교회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같은 또 다른 교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것인지?). 특히 이곳에서요. 진정한 진보는 소외를 보는 눈이라고 했던가요? 새길 교회에는 말 길도 훤히 트여 있어서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오고갈 수 있는 투명함이 어느 정도 확보된 교회라는 느낌이 풍겨 나오네요. 저 또한 주님 안에 한 가족이라는 거룩한 착각 속에서 행복함을 새길 교회의 홈페이지에서 느끼고 갑니다. "
이 글은 우리 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게재한 교우의 글(그 내용은 가끔 도마 위에 오르는 "열린 교회"의 자격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만)을 홈페이지에서 읽고 보낸 내용입니다.
앞서의 프란시스 쉐퍼 (Francis Schaeffer)는 그리스도인으로 질문하고 사고하며 행동하는 모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 더 이상 객관적인 진리를 거부한 채 자신의 주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시대에 인간과의 만남이란 피상적일 때가 많다. 모두가 한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 생각과 주관을 존중히 여김 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만큼 타인도 인정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나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 이전에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는 것이 우선 갖추어야 할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이리라 믿는다. "
사실 ' 평신도 공동체 ' 에 있어 모든 사람의 참여라고 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수용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 태도나 섬김의 모습에 대하여 각 자가 활발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 그 의견들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자유롭게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또 하나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경험을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 새길 교회의 처소가 있었던 문정동이라는 곳에서 가까운 동네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누군가의 소개로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 부근에서 꽤 이름이 나 있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주일인가 예배 설교 중에 하신 목사님 말씀이 제게 상당히 큰 혼란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은 대강 이러합니다.
"교회 안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 다수결의 원칙이 꼭 존중되어야 하느냐 ? 다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하나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일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냐 ? 어떻게 다수 의견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는 것이냐? "
당시 그 말씀의 이면에 어떤 사건이 교회 내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 져야 하는 것임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 그러면 그 뜻에 합당한 일 인지의 여부는 어떻게 가린 다는 것이냐? 교회 안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무시된다면 , 그러면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의 권한이라는 것이냐? 아, 이래서 교권의 횡포가 생기는 것이구나, 이것이 교권 중심으로 가는 과정이구나. 아직 믿음이 성숙치 못한 저로서는 혼란스러웠고, 그 날 이후 일주일 내내 이 문제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주일 아침에, 우연히 새길교회의 안내문을 접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만, 강남 Y에서 그 곳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지역에 대한 인사로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새길교회의 창립 취지문이나 평신도 공동체라는 것도 제게는 새로운 느낌이었고 , 말씀증거자 들의 면면도 제게는 많은 관심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날 아침 예배 시간에 맞추어 저희 둘은 걸어서 새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운영과 활동에 있어서 민주적 교회를 지향한다는 운영 규칙이 잠시 혼란스러웠던 제 신앙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새길 공동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각 자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 생각과 주관을 존중해 줄 수 있는 공동체,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추고 있는 공동체, 말 길이 있는 공동체, 이렇게 열린 새길 공동체가 저는 참 좋습니다.
6. 서로 지체가 되어 걷는 새 길
새길 공동체는 참 편안한 공동체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입니다. 참 좋은 공동체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 오신다면 그 분은 우리 새길 모습을 어떻게 보 실까요? 그 분도 우리같이 마음이 편하실까요? 아름답게만 보아 주실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혹시 어느 자매의 지적처럼 '어쩌면 위선, 어쩌면 자족' 그런 모습인가요 ?
새길 공동체의 창립 취지문이나 신앙 고백문 중의 내용들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게으름과 방관자적 자세를 깊이 뉘우치면서"
"공동체적 평신도 중심 교회로" "오늘도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기로 결단합니다"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 "우리의 삶을 바칩니다"
특히 저는 주일 예배 마다 우리 신앙 고백을 드릴 때면 '삶을 바칩니다'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 라고 하는 부분에 이르러 갑자기 자신이 없어집니다 . 목소리가 움츠려 듭니다. 매 주일 그 순간마다 마음이 떳떳치를 못합니다. 그 이유를 잘 압니다 . 그것은 제 자신의 삶이 '바치는 것'에 아직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하기로 결단' 할 만한 의지와 용기를 갖지 못한 탓이지요. 그래서 그러한 고백을 드리기가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이 새길 공동체가 '새 믿음의 길을 가겠다' 고 하는 우리의 요청을 받아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뜻"에 의하여 세워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과연 우리가 이 공동체를 통하여 새롭게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뜻을 열심히, 제대로 받들고 있는가? 우리의 관심과 헌신이 이에 합당한가? 혹시 '그저 주일날 만나서 반가운' 우리 중심의 편안한 믿음으로 잘 못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제 자신을 포함한 모두는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며 그 답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IMF 이듬해인 98년 초 '자유의 종살이' 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의 부족한 헌신을 질타했던 형제(길 박사님)의 말씀이 아직 뇌리에 아직 생생합니다. 정말 우리가 '아주 자유로운 교회'를 핑계로 '정말 엉터리 신앙 '으로 젖어 들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한 번 살펴 볼 일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가 지체가 되었느니라."
저는 이 말씀 중 특히 ' 서로가 지체가 되었다' 는 부분에 눈 길이 갑니다. 그냥 ' 지체가 되었다 ' 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꽃동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꽃동네 삶입니다. 병든 몸으로 무극천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사는 걸인이 되어 , 오직 얻어먹을 수 있는 은총 하나에 감사하며 40여 년 동안 남는 밥만 얻어다가 자기보다 못한 걸인들을 보살피며 살았던 "작은 예수" 최 귀동 할아버지의 삶에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유일하게 얻어먹을 수 있는 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한 지체의 행함이, 그 힘으로 얻어 먹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작은 지체의 고귀한 삶이, 이 세상에 오갈 곳 없는 그 보잘것없는 많은 지체들의 예수 사랑을 꽃동네 속에서 일체화시키는 큰 기쁨을 낳았습니다. '너희가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저는 언젠가 그 곳의 이야기를 T.V를 통해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 서로의 손이 되어, 서로의 눈이 되어, 서로의 발이 되어, 정말 서로의 지체 지체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장애자 분들이 의지하며 나누는 삶의 모습에서 정말 저는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함께 하는 삶, 나누는 기쁨은 아주 보잘것없고 작은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전하십니다 .
7. 서로가 지체되어 얻는 기쁨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특별한 은총의 교회를 선물 받았습니다. 사실, '열린 교회 '를 지향한다고 하는 부분에서 가끔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만큼 열린 교회, 자유로움이 있는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요, 은총일 것입니다. "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우리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많은 헌신과 수고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열리지 않은 '닫힌 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심의 문' 입니다. 저는 이 공동체를 올바르게 섬기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 일이 '관심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로에 대한 관심입니다 .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대한 서로의 관심입니다 . 서로가 서로의 지체가 되어주는 관심입니다.
열린 공동체라고 하는 우리가 오히려 관심을 닫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어려움이나 기쁨을 함께 하는 일 , 공동체를 섬기는 여러 짐을 함께 나누어 지는 일, 이러한 관심에서 우리는 오히려 옛 길이라고 하는 기성 교회보다 못하다는 지적에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을 여는 일, 그리고 그 '관심'을 나누는 일, 그것이야말로 오늘도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새롭게 가꾸어 나가기로 결단하는 우리의 열린 모습이며 , 그 약속을 실천하는 진정한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특히 '평신도 공동체 '를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평신도 자세'의 기본중의 기본이요, 꼭 필요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
새 길의 몸을 이루는 우리 각 지체 모두를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요긴하게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심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외면하시겠습니까 ?
우리는 섬김 받는 교회에서 섬기는 교회의 새 길을 택한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고자 하시는 작고, 보잘것없는 지체들입니다. 서로가 지체되어, 주님의 몸 된 공동체가 건강한 새 길을 갈 수 있도록, 함께 맡겨진 짐을 지고 새 길의 소망을 키워 가십시다. 이 몸 된 공동체를 각 지체가 되어 함께 섬기는 기쁨을 받아들이십시다. 볼품 없다고 여기는 지체를 가장 소중하고, 가장 아름답게 쓰시는 하나님께서도 정말 기뻐하실 일입니다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제목:
본문:
설교: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으로 저는 용기를 얻습니다. 제 생각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여러 교우들께서 '모든 것을 다 받아 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편안하게 저를 받아 주시리라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히 이렇게 단 위에 섰습니다. 교우 여러분과 함께 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새길, 편안한 공동체
저는 일요일 아침 시간이 참 좋습니다. 여러분도 물론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일단은, 세상의 힘든 짐들을 잠시 홀가분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겠습니다만, 그것보다도 제가 정말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을 만나는 일이 제게는 정말 부담 없는 기쁨이기도 하구요. 그 편안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곳에서 저는 여러 교우들의 꾸밈없는 진솔한 모습들을 봅니다. 이 곳에는 세상의 그 체면 따위나 이해 같은 복잡함이 없어서 좋습니다. 궂은 일이라도 보이는 대로 찾아서 하는 모습들이 그렇고, 또 격의 없이 맞아 주는 모습들이 그러합니다. 이런 곳을 또 세상 어디서 쉽게 만날 수 있을까요 ? 그런 의미에서 이곳이 편안해서, 여기만큼 편안한 교회를 아직 찾지 못해서 이사를 가고도 대전 그 먼 곳에서 이 곳까지 가끔은 오게 된다는 우리 형제의 고백에 저는 쉽게 수긍을 합니다.
물론, 새로운 길을 찾아서 이런 저런 방향으로 헤쳐 나가다 보면, 이쪽이 옳다, 아니면 저쪽이 옳다, 뭐 이런 저런 생각의 차이로 빚어지는 가벼운 갈등이나, 잠시 스쳐 지나가는 마음의 상처도 있는 줄은 압니다마는,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형제의 우애와 상대에 대한 이해, 마음의 양보로 쉽게 녹아 내리곤 하는 곳이, 바로 이곳, 우리 새길 공동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2. 공동체라는 것
우리는 '새길 교회' 라는 표현보다는 아무래도 '새길 공동체'라는 표현에 더 익숙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새길 공동체라고 부르는 편이 많습니다. 아마, '교회' 에 대한 이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알게 모르게 어떤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쨋든 '교회' 라는 말보다는 '공동체' 라고 부르는데서 훨씬 더 인간적인 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인 듯 싶습니다 .
어떤 분은 '공동체 "와 '교회' 라는 표현을 가려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공동체'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곳이 믿음으로 함께 생활하는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집' 등으로 다양하게 말하고 있다. 영어로 보자면 'church' 와 'congregation' , 혹은 'community' 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두 표현이 가지는 의미의 차이를 찾는다면 '공동체'가 인간 편에서의 교회라는 점이, '교회' 라는 것은 '하나님의 집,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집' 과 같이 하나님 편에서의 교회라는 점이 강조되어 지는 것은 아닐까?"
위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새길 공동체 '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신앙적 믿음을 가지고 모인 모임이다' 라고 하는 다소 '우리중심'의 의식이 그 속에 은연중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혹시 우리가 우리의 편의에 따라 생각하고 또 행동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것은 아닌지요? 그럼으로써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에서 혹 멀어지는 일이 있지는 않은지요? 이 모두가 지나친 걱정이겠습니다. 여하튼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각자의 역할을 모으는 곳이다'라고 해야겠지요?
R. 매키버는 공동체의 기초는 공동체 감정(Community Sentiment)에 있다고 말하며, 이 공동체 감정을 '공통된 이해를 갖는데서 생기는 동일시 및 친밀성의 우리 감정(WE-FEELING)' 과 '공동체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가진다고 하는 '역할 감정', 그리고 '공동체에의 의존 감정' 등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새길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와 평화를 실현하도록 부름 받은 신도들의 공동체임' 을 고백하며 출발했습니다 . 저는 앞서의 '동일시 및 친밀성의 우리 감정' , 공동체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가진다고 하는 '역할 감정' 등과 관련하여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살피고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3. 모두가 요긴한 지체.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봅니다.
" 여러 지체가 모여서 한 몸을 이룹니다. 따라서 발이 '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오 , 또 귀가 ' 나는 눈이 아니니 ,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 만일,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누가) 듣겠으며 , 몸이 다 귀라면, 냄새는 어떻게(누가) 맡겠습니까 ? 눈이 손에게 ' 쓸데가 없다 '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 쓸데가 없다 ' 고 업신여겨서도 안됩니다 . 약하다고 여기는 부분이 오히려 더 소중한 역할을 하고, 보잘것없는 지체가 더 귀하게 쓰입니다 . "
여러 해 전 제게 있었던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 날 회사에서는 제 마음을 아주 무겁게 만드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분이 많이 상했습니다 . 그 일이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에이, 때려 치워 ?' 직장생활 해 보신 분들이 한 번 이상은 다 겪으셨을 그런 감정 있지 않습니까 ?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습니다. 일찍 집에 가서 샤워나 하고, 뭐 시원한 것이나 좀 마시고, 그리고는 오늘은 그냥 한숨 푹 자는 거다. 이런 심사로 현관을 들어서는데 제 처가 "오늘 구역 예배가 있어 가야돼요" 합니다 .
차마 싫다 할 수는 없어 따라 나서기는 하지만 과히 내키는 걸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데 말이죠 . 그런데 그 날의 성경 내용과 말씀 하나 하나가 정말 제 어리석음을 질책하듯 마음의 구석구석 , 정곡을 찌르며 큰 은혜와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 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
아, 그렇구나 . 이 어리석은 자야 . 하시는 하나님의 꾸짖음이 들렸습니다. 정말 제 생각과 행실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동시에 정말 큰 위로가 되어 다가왔습니다. 그래, 나는 발이다. 아주 소중한 발이다. 내가 왜 손의 역할을 넘보느냐. 왜 머리가 되겠다 고 하느냐. 나를 손으로, 머리로 쓰기가 합당한 일이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쓰실 텐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제 마음은 너무 편안해져 있었습니다 . 주님을 안다는 것이 큰 기쁨으로 변화되어 있었고, 저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부족한 저를 항상 샅샅이 살피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 , 감사합니다 . 당신께서는 오늘 저의 미련함을 깨우쳐 주시고 , 참 평안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제가 약하나 그렇게 요긴한 지체로 쓰이는 줄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쓰시던 지 이제 탓 안 할 랍니다. 부족한 저를 주님께서 맡아 주옵소서"
다음 날 출근길에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 데 옆의 쓰레기 수거장에서 마침 쓰레기를 치우는 두 청소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아파트 라인마다 쓰레기 공동 투입구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 냄새나는, 정말 힘든 일을 묵묵히 땀 흘리며 해 내고 있는 그 분들이 그 날은 내게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라는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작지만 요긴한 지체였습니다. 정말 귀하고 소중한 지체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발로 쓴다고 타박하면서, 손으로 써 달라고, 또는 머리가 되게 해 달라고 탓 만하던 제게 하나님은 '작은 지체의 역할도 소중히 여기며 그대로를 감사 할 줄 아는 깨달음'을 주셨고, 이제는 회사의 경영을 맡기셔서 저로 하여금 머리의 위치에서 소중한 여러 지체들을 살피는 큰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삶에 있어 때때로 크고 작은 여러 시련을 주시지만 그때마다 항상 갈 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크게 쓰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습니다.
4 . 참 아름답고 귀한 섬김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 축복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체가 모여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섬기며,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말없이 애쓰는 여러 교우들의 참 아름답고 귀한 모습들을 저는 많이 보고 듣습니다.
이곳에는 식사 후면 꼬박 꼬박 그 냄새나고, 불결한 음식물 쓰레기를 자청하여 비닐 봉지에 묶어 내어놓는 지점장이 계시고, 돌아오는 설거지 순번에는 어김없이 주방으로 오셔서 그 활달하신 유머와 함께 고무장갑 끼시는, 손자와 함께 오는 할아버지도 계십니다(아마 댁에서는 상상도 못하실 일로 생각됩니다). 매주일 마이크 가방 챙겨 다니시며, 음향 조절하시는 우리 교수님은 어떻습니까? 그 분 제자 되는 젊은이가 저희 교회를 한번 찾아 나왔다가, 교수님이 걸레 들고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줄행랑을 치더라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고로 매 주일 우리 손에 쥐어지는 주보도 그렇고, 한 주일 내내 따님의 피아노 반주로 도움 받아 , 그것도 틀릴 때마다 천 원씩 벌금을 물기로 하고 배운다는 그 열성으로 오늘도 이렇게 우리 앞에서는 성가대 형제의 정성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여러 교우들의 섬김과 봉사,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 Francis Schaeffer )는 - 20세기 후반 한국 기독 지성 계 전반에 많은 영향을 준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 말하기를 '올바른 믿음이 올바른 공동체 '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제가 올바른 믿음이란 이러 이러한 것이다 라고 말씀드릴 충분한 신학이나 신앙적인 바탕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옳고 그름을 떠나 믿음이란 행함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성경의 말씀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새길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많은 분들의 보이지 않는 섬김과 헌신에 항상 고마움을 갖습니다. 결국, 제가 우리 공동체에서 느끼는 편안함이란 이런 저런, 일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함께 참여하시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저 자신도 함께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WE-FEEL 이라는 공동체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5. 말 길이 있어 행복한 교회
경북 안동에 있는 모 고등학교 교목 한 분이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 띄운 글입니다.
"말 길(言路?)이 있어 행복한 교회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새길 교회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같은 또 다른 교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것인지?). 특히 이곳에서요. 진정한 진보는 소외를 보는 눈이라고 했던가요? 새길 교회에는 말 길도 훤히 트여 있어서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오고갈 수 있는 투명함이 어느 정도 확보된 교회라는 느낌이 풍겨 나오네요. 저 또한 주님 안에 한 가족이라는 거룩한 착각 속에서 행복함을 새길 교회의 홈페이지에서 느끼고 갑니다. "
이 글은 우리 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게재한 교우의 글(그 내용은 가끔 도마 위에 오르는 "열린 교회"의 자격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만)을 홈페이지에서 읽고 보낸 내용입니다.
앞서의 프란시스 쉐퍼 (Francis Schaeffer)는 그리스도인으로 질문하고 사고하며 행동하는 모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 더 이상 객관적인 진리를 거부한 채 자신의 주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시대에 인간과의 만남이란 피상적일 때가 많다. 모두가 한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 생각과 주관을 존중히 여김 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만큼 타인도 인정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나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 이전에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는 것이 우선 갖추어야 할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이리라 믿는다. "
사실 ' 평신도 공동체 ' 에 있어 모든 사람의 참여라고 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수용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 태도나 섬김의 모습에 대하여 각 자가 활발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 그 의견들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자유롭게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또 하나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경험을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 새길 교회의 처소가 있었던 문정동이라는 곳에서 가까운 동네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누군가의 소개로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 부근에서 꽤 이름이 나 있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주일인가 예배 설교 중에 하신 목사님 말씀이 제게 상당히 큰 혼란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은 대강 이러합니다.
"교회 안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 다수결의 원칙이 꼭 존중되어야 하느냐 ? 다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하나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일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냐 ? 어떻게 다수 의견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는 것이냐? "
당시 그 말씀의 이면에 어떤 사건이 교회 내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 져야 하는 것임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 그러면 그 뜻에 합당한 일 인지의 여부는 어떻게 가린 다는 것이냐? 교회 안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무시된다면 , 그러면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의 권한이라는 것이냐? 아, 이래서 교권의 횡포가 생기는 것이구나, 이것이 교권 중심으로 가는 과정이구나. 아직 믿음이 성숙치 못한 저로서는 혼란스러웠고, 그 날 이후 일주일 내내 이 문제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주일 아침에, 우연히 새길교회의 안내문을 접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만, 강남 Y에서 그 곳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지역에 대한 인사로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새길교회의 창립 취지문이나 평신도 공동체라는 것도 제게는 새로운 느낌이었고 , 말씀증거자 들의 면면도 제게는 많은 관심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날 아침 예배 시간에 맞추어 저희 둘은 걸어서 새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운영과 활동에 있어서 민주적 교회를 지향한다는 운영 규칙이 잠시 혼란스러웠던 제 신앙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새길 공동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각 자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 생각과 주관을 존중해 줄 수 있는 공동체,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추고 있는 공동체, 말 길이 있는 공동체, 이렇게 열린 새길 공동체가 저는 참 좋습니다.
6. 서로 지체가 되어 걷는 새 길
새길 공동체는 참 편안한 공동체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입니다. 참 좋은 공동체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 오신다면 그 분은 우리 새길 모습을 어떻게 보 실까요? 그 분도 우리같이 마음이 편하실까요? 아름답게만 보아 주실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혹시 어느 자매의 지적처럼 '어쩌면 위선, 어쩌면 자족' 그런 모습인가요 ?
새길 공동체의 창립 취지문이나 신앙 고백문 중의 내용들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게으름과 방관자적 자세를 깊이 뉘우치면서"
"공동체적 평신도 중심 교회로" "오늘도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기로 결단합니다"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 "우리의 삶을 바칩니다"
특히 저는 주일 예배 마다 우리 신앙 고백을 드릴 때면 '삶을 바칩니다'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 라고 하는 부분에 이르러 갑자기 자신이 없어집니다 . 목소리가 움츠려 듭니다. 매 주일 그 순간마다 마음이 떳떳치를 못합니다. 그 이유를 잘 압니다 . 그것은 제 자신의 삶이 '바치는 것'에 아직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하기로 결단' 할 만한 의지와 용기를 갖지 못한 탓이지요. 그래서 그러한 고백을 드리기가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이 새길 공동체가 '새 믿음의 길을 가겠다' 고 하는 우리의 요청을 받아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뜻"에 의하여 세워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과연 우리가 이 공동체를 통하여 새롭게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뜻을 열심히, 제대로 받들고 있는가? 우리의 관심과 헌신이 이에 합당한가? 혹시 '그저 주일날 만나서 반가운' 우리 중심의 편안한 믿음으로 잘 못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제 자신을 포함한 모두는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며 그 답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IMF 이듬해인 98년 초 '자유의 종살이' 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의 부족한 헌신을 질타했던 형제(길 박사님)의 말씀이 아직 뇌리에 아직 생생합니다. 정말 우리가 '아주 자유로운 교회'를 핑계로 '정말 엉터리 신앙 '으로 젖어 들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한 번 살펴 볼 일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가 지체가 되었느니라."
저는 이 말씀 중 특히 ' 서로가 지체가 되었다' 는 부분에 눈 길이 갑니다. 그냥 ' 지체가 되었다 ' 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꽃동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꽃동네 삶입니다. 병든 몸으로 무극천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사는 걸인이 되어 , 오직 얻어먹을 수 있는 은총 하나에 감사하며 40여 년 동안 남는 밥만 얻어다가 자기보다 못한 걸인들을 보살피며 살았던 "작은 예수" 최 귀동 할아버지의 삶에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유일하게 얻어먹을 수 있는 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한 지체의 행함이, 그 힘으로 얻어 먹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작은 지체의 고귀한 삶이, 이 세상에 오갈 곳 없는 그 보잘것없는 많은 지체들의 예수 사랑을 꽃동네 속에서 일체화시키는 큰 기쁨을 낳았습니다. '너희가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저는 언젠가 그 곳의 이야기를 T.V를 통해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 서로의 손이 되어, 서로의 눈이 되어, 서로의 발이 되어, 정말 서로의 지체 지체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장애자 분들이 의지하며 나누는 삶의 모습에서 정말 저는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함께 하는 삶, 나누는 기쁨은 아주 보잘것없고 작은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전하십니다 .
7. 서로가 지체되어 얻는 기쁨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특별한 은총의 교회를 선물 받았습니다. 사실, '열린 교회 '를 지향한다고 하는 부분에서 가끔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만큼 열린 교회, 자유로움이 있는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요, 은총일 것입니다. "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우리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많은 헌신과 수고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열리지 않은 '닫힌 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심의 문' 입니다. 저는 이 공동체를 올바르게 섬기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 일이 '관심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로에 대한 관심입니다 .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대한 서로의 관심입니다 . 서로가 서로의 지체가 되어주는 관심입니다.
열린 공동체라고 하는 우리가 오히려 관심을 닫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어려움이나 기쁨을 함께 하는 일 , 공동체를 섬기는 여러 짐을 함께 나누어 지는 일, 이러한 관심에서 우리는 오히려 옛 길이라고 하는 기성 교회보다 못하다는 지적에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을 여는 일, 그리고 그 '관심'을 나누는 일, 그것이야말로 오늘도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새롭게 가꾸어 나가기로 결단하는 우리의 열린 모습이며 , 그 약속을 실천하는 진정한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특히 '평신도 공동체 '를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평신도 자세'의 기본중의 기본이요, 꼭 필요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
새 길의 몸을 이루는 우리 각 지체 모두를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요긴하게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심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외면하시겠습니까 ?
우리는 섬김 받는 교회에서 섬기는 교회의 새 길을 택한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고자 하시는 작고, 보잘것없는 지체들입니다. 서로가 지체되어, 주님의 몸 된 공동체가 건강한 새 길을 갈 수 있도록, 함께 맡겨진 짐을 지고 새 길의 소망을 키워 가십시다. 이 몸 된 공동체를 각 지체가 되어 함께 섬기는 기쁨을 받아들이십시다. 볼품 없다고 여기는 지체를 가장 소중하고, 가장 아름답게 쓰시는 하나님께서도 정말 기뻐하실 일입니다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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