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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민족의 근원에 대한 확인

신명기 최만자............... 조회 수 1794 추천 수 0 2008.07.16 21: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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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26:1-11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2000.9.17 주일설교 
추석명절을 지낸 바로 첫 주일을 우리교회는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미국교회의 전통대로 11월 3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음에 대하여 우리는 교회절기를 토착화 시켜 우리 고유한 명절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1년 동안 땀흘려 수고한 농사의 결과로 얻어진 수확의 기쁨을 느끼면서 하늘에 감사드리는 이 절기를 우리 나라의 수확기에 해당하는 추석 때로 잡는 것이 우리에게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풍성한 이 계절은 참으로 축복의 계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추수감사절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단어는 역시 '감사'라는 말일 것입니다.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게 은택을 나려주신 하나님, 햇빛과 단비와 그리고 생명의 젖줄인 땅, 구슬땀을 흘리며 밤낮으로 농작물을 돌보며 애쓴 농부의 수고 등등에 대한 감사는 우리 자세를 경외로운 마음가짐으로까지 가게 합니다. 수확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확대는 한없는 사랑으로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신 부모님의 은공에 대한 감사, 형제자매의 사랑에 대한 감사, 이웃의 우정에 대한 감사, 교회공동체의 보살핌과 나눔에 대한 감사, 친구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사의 리스트들이 세워집니다. 금번 우리교회에서는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의 편지를 한번씩 써보자고 시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감사'에 대한 의미를 넘어서 이 절기에 우리가 또한 깊이 생각해야 할 또다른 차원의 의미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년이나 마찬가지로 올해도 추석 귀성 인파는 민족대이동의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왜 이렇게 추석을 앞세워 고향을 찾아가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모습이 회귀본능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내 존재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가 발동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모든 종교적 의례들은 태고의 신화적 원형을 재연하는 것이며 그 의례를 통해 영원을 회복하며 그래서 현재의 삶의 의미를 새삼 확인하고 희망과 힘을 얻게 된다고 했는데 추수감사제의 또한 그 맥락에서 태고의 원형을 재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속화된 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현대 산업사회의 인간들에게는 명절이 아마도 나 존재의 원초적 상태를 회복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제 명절의 민족대이동 현상은 현대를 사는 우리 삶의 한 통과의례처럼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 수 많은 사람들은 평소 자신이 살아오던 일상의 모든 삶의 형태를 일단 정지시키고 어쩌면 약간 낯설어지기 조차한 전통적 삶의 형태로 복귀합니다. 핵가족 제도에 익숙했던 이들이 갑자기 대가족, 그것도 죽은 조상까지 포함이 되는 대가족 제도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혹시 산업사회가 붕괴시킨 대가족제도에의 향수가 살아나고 시한적으로 그것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조금 즐거움을 갖게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친밀 집단이 극도로 좁아진 핵가족 안에서 이모, 고모, 삼촌, 그리고 6촌, 8촌까지도 셈이 되고 몇 대조 위의 조상들도 참여되는 차례 지킴과 명절의 분위기가 그럴 것도 같습니다. 대가족 제도로의 복귀는 어느새 우리들에게 '효'의 윤리를 강조합니다. 살아 계신 부모에게는 물론 돌아가신 조상에게까지도 예를 지키고 효심을 가져야 함을 듣게 됩니다. 한편 메스컴은 갑자기 전통적 가치들을 고양시킵니다. 예법들이 강조되고 옷차림도 달라지며 상차림, 말씨 등등 옛 것에로의 회복을 극대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현대적 일상의 정지와 동시에 자신이 대가족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확인을 하고 전통가치들을 새삼 익히면서 존재의 근원을 찾은 것 같고 그래서 지금의 생활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은 듯이 느끼는 중에 명절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현재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전통과는 단절됩니다. 이 짧은 명절 동안 우리는 일상의 단절, 전통의 고양, 그리고 다시 전통의 단절,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절이 준 에너지와는 별 상관없이 오늘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사실 명절동안 강조된 우리의 전통적 가치들은 지금 우리의 생활에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로 '효'를 강조하여 죽은 조상까지 올라가지만 실제로는 무능력한 노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형제자매간에 심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들이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알쯔하이머' 질환을 앓고 있는 부모님이 계신 경우 그 갈등과 그들간의 고통은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신앙심이 매우 깊어 전도를 700여명을 하였다는 제가 아는 한 교회여성이 정신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서 저와 얘기를 나누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알쯔하이머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시 형제들과 분담하여 모시자고 했으나 모두 불가하다면서 장남이 맡아야 한다고 욱박지르고 신앙 좋다면서 무슨 소리냐고 해서 해결책을 못 찾았는데 결국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른 YWCA에서 탁노소를 하는데 10여일 동안이라도 그곳에 맡기고 그 시간만이라도 자유를 가지도록 해보라고 권유했더니 어머니를 시설에 맡기는 것은 인륜 도덕을 져버리는 일이라며 시동생들이 펄펄 뛴다는 것입니다. 전통고수를 고집하는 이들 앞에서는 삶의 새로운 방법들을 새 윤리로 제시하거나 모순을 구조 조정 하고자하는 제안들은 비윤리적인 것으로 매도당합니다. 특히 여성들은 여러 가지 누명을 뒤집어쓰는데 그러한 새로운 제안들을 남편이 해도 주로 여자들이 쑥쑥 거려서 자기네형이 저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금년 추석에 여성 민우회 에서는 남녀 평등한 추석 보내기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들을 호소하였습니다. 집안일 같이 나누어 하기, 차례의식에 여자들도 참여하기 등 등. 옛말에 그릇과 여자는 명절이 없다고 했는데 이런 전통적 불평등 관습을 걷어 내고자하는 소리입니다. 옛날 여성들과 오늘의 여성들의 생활형태는 판이합니다. 그리고 농경 부족사회의 형태와 도시화된 지금의 형태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도 60%가 도시화되었다고 합니다. 도시화 과정에서 유지되어야 할 전통적 아름다운 것들이 상실되어지고 왜곡, 파괴된 것들이 많은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러나 변화된 사회에서 전근대적 가치기준을 그대로 유지 혹은 복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에 강요당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억압하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추석 절에 행해지는 단순한 전통 복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으며 과연 우리의 근원 찾기는 어떤 것이라야 할 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서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추수절기에 가진 고백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한 후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기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처음으로 거두게 된 수확물을 놓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고백한 말입니다.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그 땅을 바라보면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그 땅에 들어가서 행할 바를 지시하는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계명들은 가나안에 들어 간 후 훨씬 후대에 제정된 것들과 섞여 있으며 신명기는 기원전 622년 요시아 왕이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근거로 삼은 책입니다.

아무튼 오늘 성서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추수 절에 행한 제사와 그 때 그들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이 절기는 맥추절 혹은 칠칠절에 해당한다고 보는데 첫 수확물이 보리를 거두는 것으로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로부터 칠칠일을 지나는 50일 동안을 추수절기로 보며 그 처음 날 드린 제사가 됩니다. 이 신명기 26:5-9은 소 신앙 고백문으로 불리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핵심적 신앙고백이 바로 수확물에 대한 감사의 제사 때 드려지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추수 감사절의 기도문으로는 매우 독특함을 발견합니다. 이 고백문이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추수에 대한 감사를 단순하게 풍성한 수확에 대한 감사로 드리지 않고 그 수확을 하기까지 지내온 자신들의 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지극한 회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거기까지 이끌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은 유리하던 아람인 이었고 힘없는 소수의 집단이었음을 회상합니다. 애굽에 가서는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비참하게 살았던 노예생활을 한 집단이었음을 회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로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지금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음을 회상합니다. 주께서 주신 땅에서 얻은 소산의 첫 열매를 주님 앞에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등학교 첫해 학년 국어 교과서 맨 처음에 '우리는 과거에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저들은 모든 것에 앞서 자신들의 역사의 기원을 회상하고 자신들 존재의 근원이 해방시키신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서도 '용서하되 망각하지는 말라'고 말합니다. 성서 특히 신명기서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기억하라' 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빈번하게 나옵니다. 유랑민이었고 지극히 소수의 무리였으며, 노예 살이 까지 겪었고 그리고 땅도 없던 집단이었는데 하나님이 생존시키시고 땅과 후손을 주시고 해방시켜 주셔서 존속하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역사회상과 하나님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 의미를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민족형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국가의 형성이 실제로는 가나안 정착 때부터라고 봅니다. 멘덴 홀이나 군네백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종족개념의 민족이 아닙니다. 하비루들의 집합으로 사회학적 개념을 가지는 민족이라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은 3가지 유형의 집단들이 결합되어 민족과 국가를 이루었다고 봅니다.

첫째로는 유리하던 아람사람들 곧 떠돌이 유랑민 집단입니다. 그들은 정착 할 땅이 없이 떠돌아다니며 목축을 하지만 낙타를 동원하여 본격적인 유목생활을 하지도 못하던 소수의 반 유목민으로 늘 생존의 위협을 받았으며 강대한 종족의 숫적 힘과 안정 된 평화로운 정착지를 희망하며 살았던 무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땅과 후손을 약속하심은 바로 이들의 희망을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가나안 내부의 하층민들입니다. 저들은 도시국가의 왕권지배 아래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억압당하여 가난하고 인권을 누리지 못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같은 이들로 저들은 언제고 기회가 오면 왕권을 타도하고 평등한 새 세상을 이루리라 꿈꾸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집트를 탈출해온 탈출집단 입니다. 이들은 부당한 권력의 억압과 지배를 거부하고 인간이 자유를 누리며 해방되어 사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학자들은 대체로 유랑하던 조상들이 섬긴 신은 엘 샤따이로 위협에서 보호하며 생존시켜 준 전능의 신이었고, 그 조상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가나안 만신전의 엘 신을 섬겼는데 엘 신은 안정과 평화의 신이었으며, 탈출 공동체는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인도하고 해방시키는 야훼 신을 섬겼다고 봅니다.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엘 샤따이, 엘 , 야훼는 생존, 평화와 정의, 해방을 이루어 약자들을 돌보고 해방시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상통하였으며, 종국에는 야훼 신의 이름으로 쉽게 결합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랑의 역사, 노예의 역사, 억압상태의 역사의 회상과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회상은 바로 생존과 정의 평화와 해방을 이루시는 근원자 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삶에서 발생되는 모든 감사와 고백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얻은 수확물을 감사하는 자리에서 그 수확물의 근원에 대하여 먼저 회상하고 그 근원 자체이며 힘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200여년 동안을 평등한 공동체로 살아가려고 왕권 국가를 거부하고 판관시대를 지났던 것은 바로 저들의 민족 형성의 정신을 지속하려던 것이었고 그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려던 것이었으며 왕권국가 이후에도 그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노력들을 부단히 하고 있습니다. 희년법이라는 이상적인 평등과 해방을 지향하는 대사회개혁 법안이 성서에 있다는 사실 또한 이 민족 역사의 근원과 관련이 된다고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성한 추수에 대한 감사는 물질의 풍요함에도 있었지만 그러나 보다더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는데 있었으며 그들의 역사회상 곧 전통으로의 복귀는 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 지워준 신앙과 사상에 있었고 단편적인 관습의 반복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 신앙과 사상은 후대 역사에서 많은 변화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들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잣대가 되며 모든 감사와 찬양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추수감사절을 보면서 다시 우리의 추석절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감사의 근원지는 어디이며, 조상에게 드리는 차례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재를 단절시키고 복귀한 전통 속에서 안정과 평화를 얻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주고 있는 것일까? 바쁜 일상을 접고 허겁지겁 기차로 몇 시간 또 자동차로 더 몇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시부모님 묘소에서 한시간도 체 머무르지 않고 또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그때마다 느끼던 허무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조상 잘 섬기는 것보고 다음에 너희도 우리 산소에 찾아와야 한다라는, 나 죽은 후에 받을 대접을 염려하면서 그렇게 해마다 반복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 형식에 소중한 의미가 담기지 않으면 단순하게 전통적 '효'의 윤리나 대가족제도의 이상을 강요하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고 봅니다. 정보화시대, 사이버 공간에 사는 젊은 엔 세대에게 이제 땅이나 혈통이 자신의 근원이라는 사고는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대가족은 이미 붕괴되었고 요즈음 아이들은 자기 근원을 찾아 안정과 새 힘을 얻으라고 하면 아마도 그 무형의 사이버 공간을 찾아들어 갈 것입니다. 또 우리 민족은 어떠합니까? 통일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만 정말 우리의 근원에 대한 민족적 고백을 어디에 둘 수 있겠습니까? 김치. 냉면, 아니면 한복 등 등 아직도 이질화가 덜되었다고 보는 문화적 현상들에 둘 것입니까? 통일과정에서 겪어야 할 수많은 혼란과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여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동독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여자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얘기는 독일 통일 이후 갑자기 동독 시민들은 이등 시민이 되어졌으며 사회주의 사회에서 직업을 갖는 문제로 별 걱정이 없었던 동독의 여성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을 열등시하는 차별들, 그리고 모든 기준이 서독이 되면서 자신들의 지식과 삶의 방식들이 단번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가장 괴로운 것은 끝없이 그들을 괴롭히는 극우집단의 횡포라고 합니다. 서독사회에 눈에 보이지 않게 내면화되어 있는 극우사상이 그들의 실제생화로까지 파고 들면서 고통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도 극우사상을 극복하고 그 세력과 투쟁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체 안에 인류가 지향해야할 보편 윤리적 가치들이 세워지지 않는 한 통일과정에 우리가 겪어야 할 혼란과 고통은 정말 큰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이 당면하게 되는 상황에 우리의 방향이 되고 행동의 잣대가 될 근원적 힘을 우리는 더욱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우리민족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을 때 대체로 단군신화를 그 근원으로 정립하려는 노력들을 했습니다. 일제의 민족문화와 정신 말살의 위기 때에 최남선, 신채호 등에 의해 무속과 단군신화를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근거로 삼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을 재창조해 낼 정신적 기반으로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단군 상이 목이 잘리는 무지막지한 폭력사태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찾아 갈 근원이 없는 것 아닐까? 시드니 올림픽에서 북과 남이 한반도 단일기로 통일의 상징을 보였는데 그렇게 우리의 근원은 재창조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 다닙니다. 지금 통일의 열림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남과 북이 분단 유사이래 처음으로 강대국의 개입이 배제된 주체적 통일진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두게 됩니다. 아직도 일제 식민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온갖 불리한 조건이 들어 있는데도 SOFA협정 개정을 당당하고 소리 높게 미국에게 주장하지도 못하고 있는 우리, 전범국으로 일본을 내세워 재판을 하겠다는 정신대 대책협의회가 12월에 있을 2000년 법정에서 일본 천황을 고소한다고 하니까 정대협 지원을 취소하는 우리 기업들, 납덩이가 쏟아져 나와도 수산물 무역의 공정 거래과정을 중국에게 철저하게 규명하자고 주장하지도 못하는 우리, 올림픽에 금메달이 많이 나오고 세계적으로 선진대열에 선다고 큰소리 치는데도 어찌 보면 유랑민 같고 노예 살이 하는 것 같은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와 해방을 이룰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풍성한 수확물 앞에서 도리어 고통과 한의 과거 역사를 회상한 것은 그 날들이 오늘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 동력이었음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민족도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혹은 우리가 재창조해 내어야 할 일 인지요? 제 자신 답을 알지 못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저는 우리 지성인들에게 주어진 오늘의 과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새길 공동체가 감사절을 보내면서 감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동시에 민족의 역사적 차원에서 감사를 생각하는 의식의 균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연구와 함께 통일 준비 학습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감사절에 다시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지난날들의 순간 순간을 인도하시고 보살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특히 고통의 날들에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존재의 근원이 오로지 영원하신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이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음을 진실하게 고백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가 단순한 보호로서가 아니라 나 개인의 삶이나 민족적 차원의 삶에서 생존을 지키시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시며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개입에 대한 감사임을 고백한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제의를 오늘 우리 한국 상황에서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 야웨 하나님이 오늘의 나의 새 삶과 우리 민족의 새 역사에 친히 개입해 주시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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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9 요나 누가 알겠느냐? 욘12:38-42  김이곤 목사  2008-07-1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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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 요한복음 이렇게 삽시다 요13:1-17  유해룡 목사  2008-07-1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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