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소의 풀을 먹는 사자 : 북한을 다녀와서

이사야 한완상............... 조회 수 1960 추천 수 0 2008.07.16 21:59:31
.........
성경본문 : 사11:6-9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0.10.1 주일설교 
무릇 여행이란 자기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고 조용히 그러나 깊이 반성해 보는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은 값진 인생 경험입니다. 여행에서 자기성찰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여행의 참 맛과 멋을 모르는 사람이지요. 인생을 하나의 여행으로 본다면, 사람다운 사람일수록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새롭게 깨닫고 배우면서 앞날을 더 밝고 맑게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번에 북한을 돌아보면서 내 믿음이 형편없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북한 동포들은 그들 나름대로 믿는 바를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 듯 했습니다. 믿음과 실천이 함께 가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믿는 바는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와는 아주 다르지요. 그러기에 信言一致가 저를 더욱 부끄럽게 했습니다. 특히 북한의 열악한 경제 형편 속에서도 그들 나름의 을 믿고 그들의 표어대로 를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사도 바울이 권면한 것처럼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북한 사회는 두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항일유격대 정신으로 살아가는 유격대 국가의 특징입니다. 다른 하나는 神政國家 또는 信政國家的인 특징입니다. 이같은 특징은 북한 동포들로 하여금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자면,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교회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신자들이 교회가 주관하는 기도회나 수양회에 즐겁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듯, 북한 주민들도 각종 집회에 그들 나름의 믿음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쁨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북한의 집단주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경솔한 것 같습니다.

남북한 교차관광은 남북장관회의의 합의사항이었습니다. 이 합의에 따라 저는 백두산과 그 주변을 닷새간 둘러보았고, 묘향산에 일박하면서 묘향산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웅장함의 향기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온종일 평양시내를 둘러보았습니다. 이 여행기간동안 예술인단의 공연도 보았습니다. 특히 자연 부락을 지나면서 감자 캐는 농부들, 우물가에서 쌀을 씻는 주민들, 순례지에게 놀이하고 있는 학생들을 자유롭게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 열린 마음으로 저희들을 맞아주었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 일행 중 어떤이들이 그들의 금기사항을 거론해도 안내인들은 인내하면서 그것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들이 신성한 곳으로 믿는 온갖 순례지에서 우리 일행은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그래도 북쪽의 안내원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거대한 교회 같은 것일까요? 그것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보다 더 강한 믿음을 지닌 교인들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남과 북이 각기 자기 식으로 살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며, 이것을 위해 예수 따르미들은 어떤 각오를 해야 할까요?

먼저 제 눈에 확 띄는 북한의 글귀, 여기 저기 중요한 곳에 걸려있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 이 글귀를 보자 저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저절로 상기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날에 걸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요. 그리고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마태 28:20)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사망했으나, 북한동포의 마음속에는 살아있을 뿐 아니라, 항상 그들과 함께 있어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는 믿음이 확고한 듯 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랐듯이, 그것도 온갖 환난과 곤경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소망으로 삼고 즐겁게 살았듯이, 오늘의 북한 동포도 그들 나름의 독특한 신앙으로 웃으며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남쪽의 예수 따르미의 믿음이 그들 믿음 보다 나을까를 저는 반성해 보았습니다.

북한사회는 이 같은 믿음과 가치를 아주 어릴 때부터 학습시키고 있습니다. 초기 사회화 과정에서 부터 이 같은 확실한 가치를 어린이들은 수용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삶의 목적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라는 인식을 교육자들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양 소년 궁전 같은 곳에는 하루에 5천명의 어린이들이 자기의 소망과 자질을 살리는 온갖 과외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가 그 모든 경비를 부담하지요. 그만큼 국가와 당, 그리고 지도자에 대한 경외심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같은 초기교육이 중고등학교 수준을 거쳐 대학에 까지 뻗어나고 있습니다. 대학 이후에도 끊임없는 믿음 교육이 사회교육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김일성 대학을 두차례 지나가면서 퍽 인상적인 것은 대학의 고층 건물 높은 곳에 김일성 지도자가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최고 학부인 김일성 대학도 긍정적인 뜻에서 신과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쪽의 그 어느 신과대학 보다 더 뚜렷한 신념과 목표를 구현하는 있는 세속적 신학대학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정보는 넘쳐 흐르는데 뜻있는 메시지는 고갈되어 가는 듯 합니다. 특히 남쪽에는 그러합니다. 공교육이나 사교육이나 간에 나쁜 정보가 좋은 정보를 밀어내는 듯 합니다. 정보의 그래샴 법칙이 통용되는 듯 합니다. 게다가 의미있는 메시지는 점점 더 줄어드는 듯 합니다. 그래서 퍽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그들 나름의 메시지는 너무 많은 듯 했습니다. 교육은 그들 식의 메시지로 가득 찬 듯 했습니다. 이것이 교육현실에 있어서 남북간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저의 믿음이 형편없이 약하구나 하고 느끼면서 동시에 어떻게 하면 참 를 만들어 갈수 있을까를 고심했습니다. 우리 남쪽 광광단은 대체로 지도자급의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도 그 중에는 남북을 하나의 로 보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가끔 보여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예수 따르미들이 남과 북을 하나의 민족으로 참된 로 엮어가는 일에 앞장서야 할 터인데, 과연 우리가 그런가를 반성해 보면서 성서는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주고 있는지를 찬찬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의 꿈을 다시 생각하게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삶의 정황이 불신, 대결, 증오의 현실이었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정의는 땅에 떨어지고, 민족간, 계급간의 처절한 마찰이 심각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 속에서 그는 정의와 평화가 구현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이사야 선지자 개인의 꿈만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이 지향해야 할 민족의 비젼이자, 하나님 당신의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이리같은 인간과 어린 양같은 인간이 함께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사는" 꿈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뿐입니까.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 처럼 풀을 먹는" 그러한 꿈을 꾸었습니다.(이사야 11:6-9).

표범과 새끼와 염소는 결코 가 될 수 없습니다. 새끼 염소에게는 표범이 일 뿐이지요. 이 둘 간에는 불신과 증오가 항상 끼어있습니다. 초식동물은 항상 육식 동물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물을 먹는 사슴은 조그마한 소리에도 화다닥 놀라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육식동물의 눈은 예외없이 무섭고 잔인합니다. 그러기에 이 둘 사이엔 죽음과 죽임이 있을 뿐, 평화는 없습니다.

하기야 지난 반세기동안 남과 북간의 관계가 그러했습니다. 냉전불신, 냉전증오, 냉전대결로 남과 북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의 소중한 자원을 소진시켜 왔습니다. 같은 동족인데도 말입니다. 육식의 존재와 초식의 존재로 나눠지지 않는 동족인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비극의 상황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이사야의 꿈같은 힘, 바로 그 꿈의 힘으로 극복해 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꿈 속에 참 를 만들 수 있는 지혜가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다음의 메시지가 바로 그 지혜입니다.
"사자가 소 처럼 풀을 먹는다"

이 꿈은 강자인 사자가 약자인 소의 主食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약자인 초식동물이 강자인육식동물의 주식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곧 강자가 약자의 주식을 먹어야 비로소 둘간의 관계가 아름답게 변할 수 있습니다. 다른 존재의 피를 흘리기까지 하면서 자기 배를 채우는 강자의 삶을 전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易地思之나 易地感之의 수준을 뛰어 넘어 易地食之 해야 함을 뜻합니다. 약자의 주식(主食)을 먹음으로써 강자는 자기의 체질, 자기의 삶, 자기의 관행, 자기의 이기적 가치를 뒤집어야 합니다. 폐기해야 합니다.

바로 이같은 이사야의 꿈은 약한 원수를 닮고 사랑하는 꿈이기도 합니다. 약한 상대방의 좋은 점을 수용하여 내 행동과 삶을 고칠 수 있을 때 참 우리는 형성되는 것입니다. 잔인한 육식의 삶을 비워야만, 풀 먹은 존재와 참된 우리, 참된 공동체, 참된 하나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참 우리를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친히 보여주신 분이 아닙니까? 더더군다나 예수님은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강자나 가해자가 아닌데도, 스스로 자기를 철저히 비워 진정한 를 구현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이 같은 예수의 자기 비움의 삶을 실천한다면 흡수 통일이나 적화통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일에 끼어들 수가 없는 법이지요.

저는 감옥에서 개마고원을 생각하며 남북의 하나됨을 꿈 꾼 시인이요, 목사인 문익환님의 을 바로 그 개마고지에 있는 갑산지역에서 생각했습니다. 보천보가 있는 곤장덕 언덕에서 멀리 백두산의 그 은은한 웅장함을 가슴에 품으며 문 목사님의 시를 생각했습니다. 마침 그의 아들이 바로 내 곁에 있어 아버지의 그 시를 다 욀 수 있느냐를 확인 한 뒤 우리 관광단과 북쪽 안내원들 앞에서 문호건씨를 소개하고, 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문 목사님의 꿈 역시 이사야의 꿈을 바탕삼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다라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나는 이 시에다가 이사야의 꿈을 하나 더 보태고 싶었습니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사자가 소의 여물을 먹는
어처구니 없는 꿈 말이외다."

바로 이러한 꿈의 힘으로 냉전체제속에서 사팔뜨기가 되어 현실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위선자가 되어 언행일치도 이루지 못하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거듭나야 하고 이태까지 북한동포를 주적으로 미워하고 북한체제를 악마화 했던 냉전관행이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꿈이 명령하는 대로 상대방의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평화스러운 참 우리가 한반도 조국 땅에 우뚝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따르미들이 사자가 소의 여물을 먹듯 자기 체질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사자가 소의 여물을 먹는 꿈이 현실이 될 때, 비로소 한반도 남북간에는 하나님의 샤롬(shalom)이 저 한강물 처럼, 저 대동강물 처럼 여유있게 흐르게 될 것이고, 라는 참 공동체의 배가 그 위를 자유롭게 드나들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sort 조회 수
17362 요한복음 이렇게 삽시다 요13:1-17  유해룡 목사  2008-07-16 2136
17361 신명기 나와 민족의 근원에 대한 확인 신26:1-11  최만자 자매  2008-07-16 1791
17360 요나 누가 알겠느냐? 욘12:38-42  김이곤 목사  2008-07-16 1536
» 이사야 소의 풀을 먹는 사자 : 북한을 다녀와서 사11:6-9  한완상 형제  2008-07-16 1960
17358 창세기 하늘과 땅 울림 창2:7  박재순 목사  2008-07-16 1543
17357 다니엘 시민사회를 위한 성서적 근거 단7:11-14  권진관 형제  2008-07-16 1373
17356 누가복음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눅10:25-37  차옥숭 자매  2008-07-17 2500
17355 누가복음 성탄절, 그 오늘의 의미 눅1:26-35,46-55  이정배 교수  2008-07-17 2644
17354 빌립보서 구원의 완성 빌2:12-13  강종수 목사  2008-07-20 2046
17353 마태복음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인가? 마25:31-40  박충구 목사  2008-07-22 2063
17352 고린도전 기억, 기념, 그리고 결단 고전11:23-26  한완상 형제  2008-07-22 1784
17351 고린도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전13:1-3  이주향 자매  2008-07-22 2571
17350 요한복음 진리와 자유 요14:6  강종수 목사  2008-07-23 1917
17349 마가복음 소리는 빛보다 아름다워! 막10:46-52  조태연 목사  2008-07-23 1791
17348 전도서 우리 삶의 창조적 시간과 공간 전3:1-11  최만자 자매  2008-07-23 1753
17347 마가복음 여성없는 교회가 예수의 몸인가? 막15:41  한완상 형제  2008-07-23 1610
17346 마태복음 마음의 빈들 마11:7-9  박경미 교수  2008-07-23 2131
17345 요한복음 성령이여 오셔서 우리를 움직이소서 요16:5-13  권진관 형제  2008-07-23 2561
17344 사도행전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 행2:40-41  최현섭 형제  2008-07-24 1458
17343 누가복음 억지로 진 십자가 눅23:26-43  길희성 형제  2008-07-24 2486
17342 마태복음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마5:1-11  강남순 교수  2008-07-24 2723
17341 마태복음 빛과 소금 [1] 마5:13-16  박재순 목사  2008-07-24 3147
17340 요한복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한다 요8:31-38  추응식 형제  2008-07-24 1850
17339 호세아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호13:12-14  김이곤 목사  2008-07-24 2520
17338 요한일서 사랑의 환타지 요일4:16  신옥희 교수  2008-07-24 1902
17337 마태복음 우리들의 자화상 마7:3-5  최만자 자매  2008-07-24 1667
17336 요나 요나와 베드로 욘1:1-3  최창모 교수  2008-07-24 2308
17335 빌립보서 복음의 진전 빌1:12-18  서중석 교수  2008-07-24 2098
17334 에스겔 氣化가 있는 사회 겔37:1-6  권진관 형제  2008-07-26 1924
17333 마가복음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막4:1-9  서창원 목사  2008-07-26 1746
17332 고린도전 성경은 생명 교과서 고전6:15  우명미 자매  2008-07-26 2107
17331 마태복음 바닥을 친 신앙 마4:1-11  김광수 형제  2008-07-26 1752
17330 마가복음 누가 이 바윗돌을 옮길 것인가? 막16:1-4  최만자 자매  2008-07-26 1509
17329 마태복음 두 지원자 마8:18-22  정진우 목사  2008-07-26 1620
17328 마태복음 주님, 우리가 언제 마25:37-44  민영진 목사  2008-07-26 1881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