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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환타지

요한일서 신옥희 교수............... 조회 수 1904 추천 수 0 2008.07.24 22: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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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일4:16 
설교자 : 신옥희 교수 
참고 : 새길교회 2001.4.22 주일설교 
저는 몇 년 전 학교의 부활절 새벽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때 교목 선생님의 부활절 메시지로부터 매우 큰 감동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그 설교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간단히 적어놓았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어보는 것으로 오늘 아침 저의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신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그분은 자기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셨다. 그것은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죄를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분이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은 그분의 사랑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분은 이 세상이 그를 다시 죽인다 해도 또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다. 그분은 사랑의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이다. 최후의 승리는 사랑의 승리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저는 그날 아침,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인 것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을 다시금 마음 속 깊이 아로새기게 되었습니다.
『카라마죠프의 형제들』이라는 그의 소설 속에서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죄 많은 이 세상을 끝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참으로 아름답고 감명 깊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이 소설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부분들 중의 하나는 카라마죠프가의 둘째 아들 이봔이 그 자신의 무신론적 허무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창작한 이라는 일종의 서사시(극시)입니다. 이봔은 그것을 신부 수업중인 그의 동생 아료샤에게 읽어주는데, 이 부분의 내용은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앙의 의미에 대한 많은 신학적 및 철학적 논의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부분의 내용에서 영감을 받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설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라는 극시의 내용에 대해서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극시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하고 있는 끝부분의 감동적인 장면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라는 이봔의 서사시는 16세기 스페인의 세비리아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대신문관의 지휘아래 100명의 이교도가 화형을 당한 다음날, 그리스도가 거기에 나타나서 기적을 행하고 다녔습니다. 그 때 그곳을 지나가던 90세의 대신문관이 예수를 잡아 옥에 가두고, 어느 날 밤 거기에 가서 예수를 심하게 욕하고 힐난하며 공격합니다. 대신문관은 예수의 가르침의 비현실성과 비합리성, 무지와 과실, 비능률성 등에 대하여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예수에게 "왜 또다시 돌아왔느냐고, 당신은 우리의 일을 방해하러온 것이 아니냐"고 외치면서 "내일 당신도 이교도 중의 하나로 화형에 처하겠다"고 호통을 칩니다.
예수는 대신문관의 비난과 공격에 대하여 한마디의 저항도 없이 그의 말을 끝까지 조용히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대신문관의 말이 끝났을 때 조용히 일어나서 말없이 대신문관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대신문관은 이제 예수가 자기의 공격에 대한 반격의 포문을 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는 말없이 대신문관에게 다가가서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던 것입니다. 대신문관은 그때 당황하여 몸을 떨면서, 입술에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일은 그 키스가 대신문관의 얼어붙은 가슴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입니다. 대신문관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감당할 길이 없어 감방의 문을 열고서 "어서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절대로 돌아오지 말아요"하고 말하면서 예수를 어둠 속으로 내보내는 데서 이 극시는 끝납니다. 여기서 내가 늘 궁금한 것은 예수의 그 키스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 키스를 통해 무엇을 전하려고 한 것일까요? 소설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나는 예수가 대신문관에게 키스를 하면서 이렇게 속삭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네가 (내일) 나를 죽인다해도, 나는 (반듯이) 또 다시 돌아올 거야. 사랑 때문에."
이태리의 유명한 영화감독 Federico Fellini는 1950년대에 (길)이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직후에 그는 또 하나의 성공작을 만들어 호평을 받고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카비리아의 밤들)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연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에서 젤소미나의 역을 맡아 유명해진 Fellini감독의 아내 Guiltiatta Masina가 이 영화의 주인공 Cabiria의 역을 맡고 있습니다.
Fellini감독은 그가 만든 이 영화, 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 영화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지만, 풍부한 감수성과 환타지(Phantasie)를 가지고 있어서 그에게 모든 세계, 모든 인간이 아름다운 빛 안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한 여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카비리아는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를 가지고 그가 사랑할 어떤 사람을 기다린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카비리아는 밤마다, 밤거리에서 몸을 팔아 살아가는 밤거리의 여인입니다. 카비리아는 비록 밤거리에서 많은 남성들에게 사랑의 서비스를 거래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가고는 있지만 그는 그의 온전한 사랑을 그가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선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카비리아는 바보 같은 어릿광대의 얼굴에다 참새같이 빈약한 몸매를 타고났습니다. 거기에다 그의 마음은 어린애같이 순진하기만 합니다. 육체가 풍만하고 세상이치에 밝은 다른 그의 친구 여자들에 비하여 볼 때 카비리아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만 빈약하고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이 험한 세상, 그 밤거리의 암흑가에서 자기를 지키는 지혜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친구들과 뭇사내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밤들은 공치는 날이 허다했고, 그녀의 순진무구한 사랑은 번 번히 배신당하는 아픔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 영화는 이 비극의 여주인공 카비리아가 그녀의 사랑하는 애인에게 배신당하여 모든 것을 털리고 강물에 던져지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끝장면도 역시 우여곡절 끝에 만난 또 다른 약혼자에게 인적없는 어두운 숲 속에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버림받은 카비리아가 밤의 어둠 속에서 절망하여 울부짖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절망과 암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너무도 기가 막혀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어둠 속을 향하여 비통하게 울부짖던 카비리아는, 얼마 후 그의 울음을 그치고, 일어나 다시 길거리로 걸어나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노래하며 춤추는 젊은이들의 행렬을 만나게 되고 그 행렬에 끼어들어 그들과 함께 웃으며 또다시 노래하고 춤춥니다. 그는 어느새 벌써 그에게 절망과 고통만을 안겨주는 이 세상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인 것입니다. 결국 그에게 거듭하여 찾아오는 고통과 환멸은 그녀의 순진하고 깨끗한 영혼과 순수한 사랑의 꿈을 파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통과 좌절 속에서 다시 일어나 웃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카비리아의 눈동자는 또다시 사랑의 밝고도 환한 환타지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Fellini의 영화들은 타락한 인간 세계의 비참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점에서 풍부한 현실 감각을 살리고 있으며 관객들에게 친근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특별히 이태리의 가난한 민중을 그리고 있고, 그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숨김없이 들어내 보여줍니다. 그 때문에 이태리 사람들은 Fellini감독을 그렇게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Fellini감독의 영화들은 이 세상의 타락과 비참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들 뒤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의 기독교적 가톨릭 신앙,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의 환타지입니다. 그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그의 영화들을 통해 이 세상의 타락과 비참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를 하면서 그와 함께,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는 사랑의 환타지(사랑의 상상력)를 고취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영화 속에서 민중과 함께 아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Fellini는 그의 영화들을 통하여 우리는 버림받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 처해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한번도 버림받은 적이 없다는 것,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그의 자녀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려 합니다. 그리고 멸시받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Fellini감독이 이 영화의 여주인공을 통하여 부각시키려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신앙(기독교 신앙),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인 것입니다. 비천한 신분의 한 창녀, 거기에다 육체적으로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바보 처녀 카비리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버림받은 인간의 한 표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빈약하고 쓸모 없어 보이는 가련한 밤거리의 여인 카비리아는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보다도 강인하고 풍부한 삶의 고귀한 원동력, 즉 믿음과 소망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Fellini감독이 카비리아를 통해 부각시키고 있는 삶의 고귀한 원동력이란 삶의 가장 깊은 좌절 속에서도 질식하지 않고 다시금 거듭하여 새롭게 일어나는 끊임없는 재생의 힘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매임이 없이 항상 자유롭게 새 출발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으로서의 사랑의 꿈, 사랑의 환타지인 것입니다.
바울의 말(고후 6:9-10) "나는 죽은자와 같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살아나며, 나는 학대받으나 죽지 않는다. 남들이 나를 괴롭힐 때에도 나는 항상 기쁘다. 나는 거지처럼 가난하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한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대로 카비리아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카비리아는 보통 사람이면, 질식하여 죽거나 자살을 했어도 몇 번하고도 남음이 있을만한 그러한 숨막히는 환경 속에서 몇 번씩 죽을 뻔하였지만, 언제나 불사조처럼 새롭게 웃으며 살아났습니다. 그의 주위의 사람들이 무고히 그를 괴롭힐 때에도 그는 웃고 춤출 수 있는 강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Fellini감독은 카비리아의 영혼의 이러한 강인함 속에서 보이지 않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비리아는 배반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털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로도 살 수 없는 생의 가장 근원적인 힘, 하나님의 사랑의 빛 안에서 세상을 보는 믿음과 소망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카비리아는 죽은 자 같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며 학대받으나 죽지 않습니다. 남들이 그를 괴롭힐 때에도 그녀는 항상 기쁩니다. 카비리아는 거지처럼 가난하나 많은 사람을 기쁘고 부유하게 합니다.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카비리아는 성모 마리아가 은혜를 기구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성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진한 바보 처녀, 카비리아야 말로 이미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영화의 한 논평자는 카비리아를 죄 많은 여인이면서 인간 세상의 더러움 속에 묻혀있는 한 작은 또는 라고 평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과 더러운 먼지 속에서 눈이 흐려진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밝은 빛이 밝고 환하게 카비리아의 순진무구한 영혼 속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카비리아는 웃을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이 그녀를 놀리듯 카비리아는 바보였을까요? 이 적은 처녀는 아직 몸과 마음이 미성숙 상태에 있는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녀의 웃음은 바보나 어린이의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생의 깊은 허무감과 절망 의식이라는 한계 상황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성취되는 입니다. 그녀는 도저히 웃을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 한 가운데에서 그의 영혼의 문을 하늘을 향하여 활짝 열어놓고 웃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녀의 몸은 더러운 진흙탕 속에 내던져져 있으나 그녀의 영혼 속에는 하늘로 가는 시온의 대로가 열려 있었습니다.
현대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알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진리는 인간이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의 체험 안에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생로병사의 고통과 생존을 위한 투쟁, 그리고 무거운 죄책 의식의 압력 밑에서, 시달리다가 결국은 고독하게 혼자서 자기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하는, 비극적인 삶의 근본 상황을 떠맡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실존 철학의 보다 더 중요한 근본 메세지는 이와 같은 비극적인 한계상황의 체험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인생의 한계상황들과의 본래적인 관계에 들어갈 때, 그의 비극적 삶의 현실 그 자체가, 사랑과 믿음과 상상력(환타지)에로의 비약의 도약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극적인 한계상황에서의 절망과 난파의 체험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한계상황에서의 난파의 체험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의식과 변화된 새로운 존재 안에서 인생의 참다운 성취가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은 야스퍼스의 실존 철학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이 전하고자 노력한 인생의 근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야스퍼스는 사람이 비극적인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의식을 초월적 절대자 앞에서 사는 실존의 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절대 의식의 차원을 사랑, 믿음, 환타지(상상력)의 세 측면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한계상황을 통과한 실존에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선물되어지는 새로운 존재의 3가지 능력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 안에서의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며 믿음은 이 세상 안에서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사랑의 무제약적인 확신입니다. 그리고 환타지는 존재의 아름다운 완전성을 투시하는 사랑의 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믿음과 환타지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세 측면으로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 중에서 환타지는 사랑과 믿음을 지탱해주고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의 표현을 빌리면, 절대 의식으로서의 상상력은 일상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본래적 존재의 현실을 투시하는 형이상학적 체험의 능력입니다.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감금시키는 좁은 현실 존재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마련하여 주고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열어주며, 경험적 현실에 대한 지식과는 다른 보다 더 깊은 삶의 진리를 붙잡도록 하여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인 것을 우리들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고,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서도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고, 바로 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기독교인으로서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의 과제를 우리들의 평생의 사명으로 떠맡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 설교에서, 찬송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생활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서 참으로 특별한 사랑의 은사를 받았다고 스스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앞에서 언급한 Fellini의 영화의 여주인공 카비리아처럼, 멸시받고 고난을 당하며, 번번히 배반과 버림을 받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처해서도 절망과 허무를 넘어서 인생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랑과 믿음의 실천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오래 계속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카비리아처럼 순수한 사랑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며 웃고 춤추며, 우리를 공포와 전율 속으로 밀어 넣는 인생의 한계상황 속으로 끊임없이 뛰어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두운 한계상황에서의 좌절과 절망이라는 쓰라린 체험과 공포와 전율의 십자가 체험을 생각함이 없이, 기독교적인 사랑을 너무나도 쉽게 미화하고, 이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웨덴의 유명한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리히만은 그의 영화들 속에서 인생을 사랑하기 원하지만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고 무의미한 일상 생활의 기계적 반복 속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현대인의 내면적인 고뇌를 너무나도 절실하게 표현하여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일으킵니다. 그의 영화 중에 "아우성과 속삭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4월에 동숭 아트센터의 하이퍼텍 나다에서 베르히만 영화 다시보기 프로그램에 이 영화도 포함되어 있어서 다시 한번 꼭 보려고 했는데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이 영화를 보았는데 그 내용 중에서 장례식 집전을 맡은 목사가 죽은 자에게 한 부탁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세상을 떠난 사자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사의 말을 합니다. "Agnes여, 그대가 천국에 당도하여 사랑하는 신의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되거든 우리 산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여 주오. 우리의 이 무거운 죄의 짐을 면하게 하여 달라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물어봐 주오. 우리의 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이 목사의 절망적인 절규는 또한 우리들의 혼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우리들 자신의 절실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어둠과 더러운 현상을 넘어 그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의 상상력, 사랑의 눈을 가지고 이 세상과 이웃을 새롭게 보며, 나를 실망시키고, 좌절시키는 이 세상 안에서 무조건적인 세계 긍정의 큰 웃음을 웃으며 내 이웃과 사랑 안에서 동행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를 비롯하여 모든 세계 종교는 우리들 속에 이와 같은 사랑의 눈과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가르침과 수행의 실천 방식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는 사람을 신앙의 교리와 신앙 생활의 틀 속에 안주하게 하고, 독선적인 선별 의식과 교만에 빠지게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독선과 교만에 빠지게 될 때 우리의 상상력은 쇠퇴하고 마음의 눈은 흐려져서 어리석은 아집과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게 되고, 이웃을 정죄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을 멀리하시고, 이 세상에서 멸시당하고 천대받은 세리와 창녀, 그리고 가난한 어부들을 사귀어 제자로 삼고 그들에게 사랑의 선교를 맡기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 속에서 예수는 세속적인 삶 속에 던져져 있지만, 어떠한 고통이나 좌절 속에서도 흐려짐이 없이 그의 빛을 발하는 사랑의 환타지와 삶에 대한 순진무구한 긍정의 태도를 보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거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한계상황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고난과 죽음의 어두운 골고다의 고개를 넘어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사랑의 승리를 증거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와 제자들 보다 앞서서 세속의 오염과 아우성으로 들끓는 로 먼저 가셨고,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그곳으로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그의 사랑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오늘 여기 모인 교우 여러분들에게도 Fellini의 카비리아처럼, 깨끗한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며 웃으며 춤추며, 항상 거듭하여 사랑의 모험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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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9 요나 누가 알겠느냐? 욘12:38-42  김이곤 목사  2008-07-16 1538
1138 신명기 나와 민족의 근원에 대한 확인 신26:1-11  최만자 자매  2008-07-16 1794
1137 요한복음 이렇게 삽시다 요13:1-17  유해룡 목사  2008-07-1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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