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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진전

빌립보서 서중석 교수............... 조회 수 2101 추천 수 0 2008.07.24 22: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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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1:12-18 
설교자 : 서중석 교수 
참고 : 새길교회 2001.5.20 주일설교 
바울은 빌립보서 1장 12절에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에 관계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전이 된 것을 여러분이 알아주기 바랍니다." 여기서 "나에 관계된 일"(ta kat eme)은 바울의 감금 상태를 뜻한다. "오히려"(mallon)는 복음이 전보다 더욱 진전된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바울의 투옥 때문에 손상을 입을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손상을 입지 않은 채 "오히려" 예정된 진전을 계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이 본 "복음의 진전"(prokop n tou euaggeliou)의 징후는 바울의 투옥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1.13)는 점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몇 차례에 걸친 혐의 조사시에 자신의 부당한 투옥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복음의 정당성을 강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울의 투옥은 그 지역 크리스천들에게 타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를 위기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당당한 입장 천명으로 그 지역 크리스천들의 "대부분"(tous pleionas)이 "주 안에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1.14). 바울이 여기서 "대부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들의 일부는 계속 흔들렸던 것 같다. 여하튼 그들 "대부분"은 바울의 투옥을 통해 오히려 확신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히 전했다"(14절).

바울은 15절 이하에서 복음 전파자들의 다양성을 소개한다. 그 전파자들의 전파의 동인은 상반되어 드러난다. 곧 "투기"(phthonos)와 "분쟁"(eris)이 동인이 되는가 하면, "착한 뜻"(eudokia)과 "사랑"(agap s-16절)이 동인이 되기도 한다. 이 "투기"와 "분쟁"은 바울이 로마서 1장 29절이나 갈라디아서 5장 20-21절에서 악덕 목록으로 분류한 종류의 것들이다. 반면에 "착한 뜻"은 로마서 10장 1절에서는 바울 자신의 마음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하고, 마태복음서 11장 26절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사랑"은 도처에서 언제나 바람직한 덕목 중에서도 우선적 위치를 차지한다. 곧 투기나 분쟁과 착한 뜻이나 사랑은 대립적인 두 그룹의 명사군이다.

착한 뜻과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의 변호([개역성경]의 '변명'은 적합하지 않다)를 위하여(eis apologian tou euaggeliou) 세우심을 받은 줄로 안다"(1.16). 반면,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감금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1.17). 바울의 감금은 그가 감금된 지역교회 크리스천들에게 다양한 반향을 일으켰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처럼 자신들도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기회에 자신들의 전파 영역을 확장시키려 했다. 바울은 이들 후자의 활동 동기를 "이기심"(eritheia)으로 요약했다(1.17). 바울은 이들을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히 전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소수로 간주했다. 여기서 바울이 흔히 저열한 기질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이기심"(eritheia)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들의 활동 자체를 자신의 활동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18절에서 그들의 동기를 다른 단어로 다시 요약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곧 "외모로 하든지 진정으로 하든지"가 그것이다. 그들의 활동은 외모로(prophasei), 또는 구실로 한 것이다. 그들의 그리스도 전파는 그 자체에 뜻이 있다기 보다는 다른 목적을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울이 동조하는 다른 쪽은 진정으로(al theia), 곧 순수한 의도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그러나 바울의 이어지는 진술은 그의 위대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바울은 외모로 전파하든지 진정으로 전파하든지 그 전파 방식의 차이를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 이유는 결국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이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면(1.20), "죽는 것마저 유익하다"고 토로한다(1.21). 결국, 바울은 이 단락에서 흑·백 구도의 대립을 통합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면에 위치시킨다.

여기서 오늘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롤랑 조페 감독의 명화, [미션] 중 몇 장면을 들어 이미 다소 희미해졌을 여러분의 기억을 돕고 싶다. 예수회 신부들의 신념과 갈등을 섬세하고도 감동적인 영상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남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을 선교하며 살아가는 신부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에 맞서 그 부족의 권익을 옹호하다 결국은 순교하는 이야기를 치밀하게 그려낸다. 주교는 유럽의 정치적, 군사적 팽창 세력을 대변하면서 원주민들과 신부들에게 마을과 거기에 세워진 선교회를 버리고 숲으로 되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포기하기 않고 끝까지 포르투갈의 침략에 항거할 것임을 명령한다. 정치, 군사 세력과의 마찰을 원치 않았던 주교는 신부들에게 이 일에 관여하면 파면시킬 것임을 경고하고, 원주민들이 포르투갈과 싸우더라도 이 마을의 선교회와는 무관한 것으로 처리하라고 일침을 가한다. 그러나 신부들은 파면의 위협을 감내하면서 주교의 지시를 거부하고 원주민들의 편에 서기로 작정한다.

이 영화의 백미는, 신부들이 주교의 명령에 대항한 채, 원주민을 돕는 두 가지 방식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장면에 있다. 가브리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로버트 드 니로 分)는 원주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방법에서 각자의 방식을 고수한다. 원주민 어린이가 건네주는 칼을 받아쥔 로드리고, 곧 무력항쟁을 고집하는 로드리고는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한 다른 신부들을 대변한다. 그는 사랑을 고집하는 가브리엘 신부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순종의 서약을 파기하고 싶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로드리고에게 대답한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손에 피를 묻힌 채 죽는다면, 그대는 우리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오. 그대는 그대의 삶을 하나님께 서약했소. 하나님은 사랑이오." 이 영화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폭력과 사랑 그 어느 쪽의 편에도 쉽게 손을 들어주지 못하게 하는 균형을 제시한다. 실제로 여기서 한쪽은 백이고, 한쪽은 흑이라고 누가 선뜻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직접 전투에 나서 맹렬히 활약하던 중, 위험에 처한 원주민 어린이를 구하려다 총탄을 맞은 로드리고,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의 와중 속에서도 안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자신의 미사 집전의 의무를 묵묵히 수행한 후 행진하다 총탄을 맞은 가브리엘, 그 두 사람 앞에서 우리의 윤리적 입장은 유보되고, 가치판단은 정지된다. 살아남은 어린 소녀가 강가에 떠 다니는 바이올린을, 오직 그것 하나만을 건져올린 후 이미 노를 젓고 있는 몇몇 어린이들에 합류한 채 떠나간다. 왜 유독 바이올린 하나인가? 왜 어린이들뿐인가? 유럽의 욕심사나운 군사력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그 무자비한 침략에도 불구하고, 그 원주민들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는 끊임없이 울려퍼지면서 계속 이어져 내려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저항을 저지하고자 했던 주교는 결국 회한의 편지를 이렇게 끝맺는다. "신부들은 죽고 저는 살았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죽은 것은 저요, 산 자는 그들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들의 정신은 산 자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기 때문입니다(The spirit of the dead will survive in the memory of the living)." 이 주교조차 칼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 중 어느 것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소중하게 기억될 것임을 천명한다. 요한복음 1장 5절로 장식한 맨 마지막 자막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되 어두움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여기서 어두움은 누구인가? 유럽의 정치, 군사력의 팽창주의인가? 아니면 원주민들과 신부들을 비정하게 희생시킨 교권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역사상 수많은 비참하고도 잔혹한 사건들은 대체로 흑·백 논쟁, 선·악 구분, 정의와 불의 판정 등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선으로만 구성된 개인이나 집단도 없고, 악으로만 구성된 개인이나 집단도 없다. 한쪽만이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집단이고 다른 쪽은 절대적으로 불의한 집단으로 판정할 수 없다. 양쪽이 모두 선악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선으로 내세우고, 상대를 악으로 매도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셈이 될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마가복음 9장 38-3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 요한과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귀신 축출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그룹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해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그룹의 전형적인 배타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 동안 사도들은 회개의 필요성을 전파하기도 했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다(막 6장 13절). 이러한 성공적인 선교 활동에서 오는 사도들의 자만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때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사도들의 활동과 유사한 활동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예수의 일행이 사마리아의 마을로 들어가자, 그 주민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눅 9.51 이하). 야고보와 요한이 노하여 예수의 의향을 물었다. "주여, 하늘의 불을 내려 저들을 태워버리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곧 그들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대 그룹이 유황 불벼락이라도 맞아 이내 소멸되어 없어지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이 때 예수께서는 돌아보시고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너희들과 다른 그들의 생각과 입장 자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크리스천들도, 착한 뜻과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크리스천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하튼 두 그룹을 통해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또한 바로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복음의 진전"이 이루어진다고 강변했다. "복음의 진전"은 급진파의 전유물도 아니고, 보수파의 전유물도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복음은 여러 경로로 여러 형태로 전파되어 왔다.

우리의 선교활동은 마치 바둑판과 비견될 수 있다. 흑이 못마땅하다 해서 흑을 전부 제거시키고, 백만 가지고 바둑을 둘 수는 없다. 흑·백이 어우러져야 바둑이라는 세계가 성립된다. 선교활동을 해나가면서 자신이 속한 교파나 그룹의 활동만을 절대적으로 고집하고 다른 크리스천의 활동을 수용하지 못하는 배타적인 사람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하나의 훌륭한 경종과 지침이 될 것이다. "금하지 말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다"(막 9.40).

우리는 주님께 우리에게만 복을 내려달라고 간구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리게 하신다(마 5.45). 우리는 기독교사상의 진수 중 하나인 이 말씀의 깊은 뜻을 너무 쉽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경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명함으로써 바로 그러한 폭넓은 하나님의 심정을 닮을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한 '폭'이 있어야 '복음의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전만 이루어진다면, 곧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드러난다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바울의 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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