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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8: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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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진우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1.7.1주일설교 |
먼저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들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사실 오늘 이런 말씀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더라도 진작에 한번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늘 별러 왔습니다만 천성이 게으르고 무슨 핑계가 많아서 이제서야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새길교회에 처음 왓습니다만 저는 새길교회에 사랑의 빚을 많이 진 사람입니다. 그 빚은 아마 여러분이 아시는 것도 있을 것이고 또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총무로 일하고 있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에 얼마전까지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그 직을 그만두었습니다만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에서 지난 몇 년간 실행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새길교회에서 큰 도움을 주셨고 아마도 지금도 도와주고 계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달려와서 보고도 드리고 인사도 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늦은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는 자리에 있다보니 주일날 어디 간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가 없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침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주셨기에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 핑계가 되겠다 싶어 교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달려왔습니다. 어쨌든 늦게 와서 죄송하고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지난번 언젠가 새길문화원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국교회 갱신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길 하면 늘 그 주제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본문에 따라 그런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국교회 갱신 한국교회의 희망은 어디서 가능한 것인가?
이 문제를 이렇게 던져놓고 보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한국교회의 희망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또 역사의 희망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희망이라는 것이 단지 교회 자체만을 위한 것일 수는 없을테니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사람을 쓰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제목도 그렇게 붙였습니다만 편의상 두 지원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려는 두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사람은 율법학자고 한사람은 제자였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핵심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란 그 겉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자격증 무슨 직업 무슨 직책 그런 것이 사람을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어쨌든 두 사람이 예수 앞에 나왔고 그들과 예수는 예수 추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는 예수에 의해서 예수 추종을 허락 받았고 한 사람은 거부당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거부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훌륭한 제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까? 목회하는 저는 이런 교인하나 만나보았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면서 살아갑니다. 목사님, 목사님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이 정도 아니라도 이것의 한 반만 따라가는 교인들이 있었으면 아마 목사는 행복할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 사람은 비판적 지지자 정도가 아니라 전폭적 지지자 광신적 지지자입니다. 보통 믿음으로는 이런 말하기 힘든 것이 아닙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확신과 신념에 차 있는 사람 예수 운동,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고한 비젼과 열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념적 노선이 확실했고 분명한 자기 목표와 확신에 찬 철학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역사를 개벽시키는 이 일에 모든 죽음의 문화 갈아엎어 생명의 새 나라를 건설하려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잘 써야 하는데 이런 사람 놓치면 일은 이미 그르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는 이 사람을 거부합니다. 어조는 단호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쉽게 말해서 넌 안 돼 라는 말입니다. 넌 아직 내가 가는 곳에 따라 올 자격이 없어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아주 엉뚱한 사람을 주목하고 그를 선발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실망스럽게도 그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 아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로 앞 6장에서 너희는 먼저 하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 추종, 하느님 나라 운동에의 전적인 투신이라는 중차대한 과제 앞에서 다른 핑계를 대다니 도대체 이게 바른 자세입니까? 흐리멍텅하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의 길,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 생명을 걸고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 인간적인 정리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의 듯을 결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인간적인 가치 속에서 흔들리고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괴로워하고 아파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분명한 철학과 소신 이념과 믿음을 지녔던 사람을 거부했던 예수는 무시무시한 말로 그를 선택합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윤리 도덕도 다 사라지는 그런 선언이 아닙니까? 이 말이 가져올 엄청난 오해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본질적 논쟁에 휘말려야 하는지 예수가 모르셨을까? 호시탐탐 예수를 노리는 적대자들에게 이런 류의 예수의 말실수는 정말 좋은 공격의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얼마나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 말이 조중동 같은 신문에 실리기 시작하면 예수 운동도 끝장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 얼마나 패륜적인가? 인륜을 짓밟은 계급해방론자 예수 ? 아마 이런 정도 제목의 사설이 실릴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너를 놓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어떤 비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너만은 반드시 내 제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심겨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네가 필요하다는 선언이 아닙니까? 여기 적당한 체면 전략 어떤 전술적 계산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하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왜 예수는 그 많은 무리수를 두어가면서 끝끝내 그를 놓칠 수 없었던 것입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인간적인 정 앞에서 흔들기고 괴로워할 줄 아는 이 사람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씨앗 역사의 희망이기 때문에, 예수운동 모든 낡은 것들을 갈아엎는 새 역사의 희망은 바로 그런 이들을 통해 동터오기 때문이 아닙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아주 날카로운 예각적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좋은 사람과 사람 좋은 사람과의 대결, 이념과 사상의 명증함과 번민과 고뇌의 회색빛깔과의 대결,
예수는 어떤 편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까? 예수는 누구를 통해 당신의 역사 예수 운동의 일군을 삼고 계십니까?
오늘 한국교회는 어떤 이들의 편을 들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이들을 통해 역사의 희망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천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노라는 이 나라에서 온 나라에 교회 없는 곳 없지만, 모든 인간적 가치를 뒤로 하는 교리적 관념적 믿음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예수의 몸인 교회에 그토록 분쟁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까? 소위 믿음 좋은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에는 싸움이 나면 쉽게 그치질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지쳐서 그만 둘 때가 되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 기도해서 새 힘 받거든요.
여러분 역사의 마지막 순간, 하늘 나라가 도래하게 될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아십니까? 여의도나 대학로 같은 곳에 데모가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프랭카드를 들고 억울한 일에 항의를 할 것입니다. 그 프랭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국에 의혹있다. 하느님은 각성하라?
이게 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입니다. 마태 7장 2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외서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 이러십니까? 세계 선교사의 기적을 일구어 낸 사람들입니다. 고친 암과 난치병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천하에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예수께 따져 묻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두 지원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따르게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에 의해 거부당합니다. 우리는 어떤 지원자입니까?
신앙은, 참된 신앙은 언어나 논리 교리나 구호에 있지 않습니다. 심오한 신학책에도 없습니다. 사람의 길에 있습니다. 참 사람의 길에 서기 위해서 고뇌하고 번민하는 길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 바로 그곳에 참된 생명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역사는 전진하고 새 나라는 도래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역사의 희망은 오늘도 참 사람의 길을 걷기 위해 고뇌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참 사람의 길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번민하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이들을 통해서 하늘 역사는 이 땅에 뻗어갈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성, 고뇌와 번민의 영성, 끝끝내 사람의 체온과 호흡이 느껴지는 인간적인 영성이 살아 숨쉬는 그런 한국기독교의 새길을 여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은총이 넘치시기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저도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는 자리에 있다보니 주일날 어디 간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가 없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침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주셨기에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 핑계가 되겠다 싶어 교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달려왔습니다. 어쨌든 늦게 와서 죄송하고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지난번 언젠가 새길문화원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국교회 갱신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길 하면 늘 그 주제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본문에 따라 그런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국교회 갱신 한국교회의 희망은 어디서 가능한 것인가?
이 문제를 이렇게 던져놓고 보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한국교회의 희망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또 역사의 희망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희망이라는 것이 단지 교회 자체만을 위한 것일 수는 없을테니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사람을 쓰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제목도 그렇게 붙였습니다만 편의상 두 지원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려는 두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사람은 율법학자고 한사람은 제자였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핵심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란 그 겉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자격증 무슨 직업 무슨 직책 그런 것이 사람을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어쨌든 두 사람이 예수 앞에 나왔고 그들과 예수는 예수 추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는 예수에 의해서 예수 추종을 허락 받았고 한 사람은 거부당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거부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훌륭한 제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까? 목회하는 저는 이런 교인하나 만나보았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면서 살아갑니다. 목사님, 목사님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이 정도 아니라도 이것의 한 반만 따라가는 교인들이 있었으면 아마 목사는 행복할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 사람은 비판적 지지자 정도가 아니라 전폭적 지지자 광신적 지지자입니다. 보통 믿음으로는 이런 말하기 힘든 것이 아닙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확신과 신념에 차 있는 사람 예수 운동,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고한 비젼과 열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념적 노선이 확실했고 분명한 자기 목표와 확신에 찬 철학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역사를 개벽시키는 이 일에 모든 죽음의 문화 갈아엎어 생명의 새 나라를 건설하려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잘 써야 하는데 이런 사람 놓치면 일은 이미 그르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는 이 사람을 거부합니다. 어조는 단호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쉽게 말해서 넌 안 돼 라는 말입니다. 넌 아직 내가 가는 곳에 따라 올 자격이 없어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아주 엉뚱한 사람을 주목하고 그를 선발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실망스럽게도 그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 아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로 앞 6장에서 너희는 먼저 하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 추종, 하느님 나라 운동에의 전적인 투신이라는 중차대한 과제 앞에서 다른 핑계를 대다니 도대체 이게 바른 자세입니까? 흐리멍텅하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의 길,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 생명을 걸고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 인간적인 정리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의 듯을 결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인간적인 가치 속에서 흔들리고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괴로워하고 아파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분명한 철학과 소신 이념과 믿음을 지녔던 사람을 거부했던 예수는 무시무시한 말로 그를 선택합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윤리 도덕도 다 사라지는 그런 선언이 아닙니까? 이 말이 가져올 엄청난 오해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본질적 논쟁에 휘말려야 하는지 예수가 모르셨을까? 호시탐탐 예수를 노리는 적대자들에게 이런 류의 예수의 말실수는 정말 좋은 공격의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얼마나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 말이 조중동 같은 신문에 실리기 시작하면 예수 운동도 끝장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 얼마나 패륜적인가? 인륜을 짓밟은 계급해방론자 예수 ? 아마 이런 정도 제목의 사설이 실릴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너를 놓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어떤 비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너만은 반드시 내 제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심겨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네가 필요하다는 선언이 아닙니까? 여기 적당한 체면 전략 어떤 전술적 계산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하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왜 예수는 그 많은 무리수를 두어가면서 끝끝내 그를 놓칠 수 없었던 것입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인간적인 정 앞에서 흔들기고 괴로워할 줄 아는 이 사람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씨앗 역사의 희망이기 때문에, 예수운동 모든 낡은 것들을 갈아엎는 새 역사의 희망은 바로 그런 이들을 통해 동터오기 때문이 아닙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아주 날카로운 예각적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좋은 사람과 사람 좋은 사람과의 대결, 이념과 사상의 명증함과 번민과 고뇌의 회색빛깔과의 대결,
예수는 어떤 편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까? 예수는 누구를 통해 당신의 역사 예수 운동의 일군을 삼고 계십니까?
오늘 한국교회는 어떤 이들의 편을 들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이들을 통해 역사의 희망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천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노라는 이 나라에서 온 나라에 교회 없는 곳 없지만, 모든 인간적 가치를 뒤로 하는 교리적 관념적 믿음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예수의 몸인 교회에 그토록 분쟁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까? 소위 믿음 좋은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에는 싸움이 나면 쉽게 그치질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지쳐서 그만 둘 때가 되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 기도해서 새 힘 받거든요.
여러분 역사의 마지막 순간, 하늘 나라가 도래하게 될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아십니까? 여의도나 대학로 같은 곳에 데모가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프랭카드를 들고 억울한 일에 항의를 할 것입니다. 그 프랭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국에 의혹있다. 하느님은 각성하라?
이게 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입니다. 마태 7장 2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외서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 이러십니까? 세계 선교사의 기적을 일구어 낸 사람들입니다. 고친 암과 난치병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천하에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예수께 따져 묻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두 지원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따르게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에 의해 거부당합니다. 우리는 어떤 지원자입니까?
신앙은, 참된 신앙은 언어나 논리 교리나 구호에 있지 않습니다. 심오한 신학책에도 없습니다. 사람의 길에 있습니다. 참 사람의 길에 서기 위해서 고뇌하고 번민하는 길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 바로 그곳에 참된 생명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역사는 전진하고 새 나라는 도래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역사의 희망은 오늘도 참 사람의 길을 걷기 위해 고뇌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참 사람의 길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번민하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이들을 통해서 하늘 역사는 이 땅에 뻗어갈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성, 고뇌와 번민의 영성, 끝끝내 사람의 체온과 호흡이 느껴지는 인간적인 영성이 살아 숨쉬는 그런 한국기독교의 새길을 여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은총이 넘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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