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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창4: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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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이곤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주일설교 |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에 나타난 는 우리에게 매우 풀기 어려운 숙제를 하나 던져 주고 있는 성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 야훼께서 인류역사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을 지나치게 두둔하고 편드시는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그 살인자의 생명을 지나칠 정도로 편애하듯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는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러한 성격의 가인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가인의 아벨 살해는 전혀 용서할 여지가 없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형제살해의 만행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다는 본문 4절의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아벨은 분명히 선량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선량한 사람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쳐죽이고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해 버리는 철면피한 가인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실로, 가인의 범죄는 매우 절망적이라고 할 만 하다 하겠습니다. 더욱이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이 성서 문맥상으로는 인류역사 최초의 살인사건이라고 하겠는데, 적어도, 이러한 인류역사 최초의 형제살해 사건만은 결코 연민을 갖지 아니하고 단호하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점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결단코 우리의 본문에서와 같은 그런 "살인자 편애와 살인자 두둔"이라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러한 결론이 나와서는 결단코 안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가인의 이 형제살해 사건은 조금도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고 조금도 관용을 베풀 필요도 없는, 단지, "엄벌로만 다스려야 할 사건"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사건의 이러한 전후관계를 살펴 볼 때, 이 사건을 매듭짓는 그 마지막 단계에서 유일무이의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에게 를 주시는 그 모습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와 같은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야훼 하나님은 보복살해를 당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이 가인을 향하여 전혀 엉뚱하게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를 만나는 자들이 너를 죽이려 들지는 결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네게 [생명보호의] "표"( ; 오트; 'oth)를 주리니, 이를 거역하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그 벌을 칠 배나 받게될 것이기 때문이다(창 4:15).
그렇습니다. 이 천인공노할 살인자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엄격한 징계보다는 오히려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의 "표"(오트; )를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모습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들 인간들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최근에 나온 구약성서연구 논문집들 중에 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오늘을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구약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한 학자의 학문을 찬양하는 논문들을 써 모아 헌정하는 매우 주목할만한 책이었습니다. 그 수록된 논문 대부분이 총 주제에 맞춘 비슷한 성격의 신학적 논문들이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제임스 바(James Barr)라는 한 학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정말 모두 다 선하였는가?"라는 제하의 매우 인상적이고도 도전적인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으나, 첫째 날의 빛 창조 이전의 세계에 대하여 성서는 놀라웁게도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혼돈의] '물' 위에 떠돌고 계셨다"라고 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다 선하였다는 재래의 기독교적 신념은, 그러므로, 충분히 재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매우 후대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빛도 지으시지만 어둠도 창조하시며 평화도 지으시지만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이라고까지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7월 16일자 지의 종교 난에서도 매우 자극적인 주제인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가리우실 때(When God hides His Face)"라는 제하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은 공정하신가?"(Is God Just?) "하나님은 의(義)로우신가?"라는 충격적인 성격의 신학적 물음을 제기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분으로서 우리의 이성(理性)으로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실재"(Elusive Presence)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가인 이야기 속의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억겁을 헤아리는 인류 미래의 역사를 바르게 교육하기 위하여서는 그리고 이 땅에 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서는, 정말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가인과 같은 이러한 역사의 독버섯과 같은 파렴치한 살인자에게 대해서만은, 비록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여도, 그를 두둔하고 감싸기보다는 혹독한 심판을 내려서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엄한 교훈을 삼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인간사회의 상식에 어울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류의 미래 역사에 불운한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 너무도 확실한(!) 저 살인자 가인을 한사코 벌주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 역사의 미래를 도대체 어떻게 다스려 가실 작정이시기에 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을 엄단하는 엄한 교훈을 세워 주시지 않고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가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는 그 무슨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리키는 그 어떤 "상징"이기라도 한 것입니까? 말하자면, 하나님은 전혀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시므로, 어느 때는 가슴의 맥박이 멈추어 설 정도로 준엄하고 가혹하시지만, 그러나, 다른 어떤 때는 그런 일이 언제 있었더냐 는 듯이 아예 맹물이 되어 우리 인간들이 땀흘려 애써서 이루어 놓은 모든 일에 초를 쳐서 모든 판을 다 깨어 버리는 그런 설명키 어려운 "변덕쟁이"시라는 그런 말입니까?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가인"이라는 인물이, 그 무슨 하나님조차도 감히 접근하기 어려워 할만한 그 어떤 무시무시한 소름끼치는 특수한 인상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리하여, 많은 성서 주석가들은 이 "가인의 표"가 지니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규명해 보려고 여러 가지 형태로 노력하여 왔었습니다. 그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우리가 흔히 북 아메리카의 "아파치"(Apache) 족의 부족표시 관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어떤 부족 표시를 얼굴이나 가슴이나 팔 다리 등에 표시하여 다른 부족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도록 하였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도 살인자 가인에게 그런 "부족표시"를 해 주셔서 다른 부족의 살해위협으로부터 가인을 지켜 주셨던 것이라는 그런 해석입니다.
그리하여, 가인은 "가인족(族)"을 표시하는 문신, 즉 그 어떤 태투마크(tatoo-mark)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가인의 생 명은 또한 이러한 가인 족의 태투 마크를 가진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그런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좀 더 확대하여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부족표시의 마크가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헤르만 헷세의 문학작품인 이라는 작품은 바로 이러한 현대인의 생각을 잘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품 은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나이의 얼굴에는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어. 사람들은 그 사나이한테 감히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지. 그 사나이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신비한 힘이 있었던 거야. 예컨대, 그 사나이의 눈에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보다는 좀 더 많은 지성과 좀더 많은 용기가 번득이고 있었던 거야. 그 사나이는 권력을 쥐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사나이 앞에서 겁을 먹고 쩔쩔 맸지.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가인의 후예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신(神)이 주신 바, 이러한 신비한 은총의 "표"를 그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
라고 쓰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많은 현대인들은 살인, 강간, 약탈을 일삼는 악인(惡人)들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더욱 당당하게 더 잘 살고 있는 것은 그들 악인들은 특별하게 이러한 종류의 무시무시한 를 갖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해(害)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악인들의 얼굴에는 끔직하고도 험상스러운 칼자국이 나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보기만 하여도 슬슬 그를 피하여 지나갑니다. 또 다른 어떤 악인들의 경우를 보면, 그 어깨나 팔뚝에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덤벼드는 호랑이 모습의 문신이 새겨져 있거나 또는 불을 내어 뿜는 청룡 대가리의 문신이 새겨져 있어서 가까이 가기가 섬뜩섬뜩하여 감히 접근조차 하지를 못합니다. 또 어떤 악인들은 기괴(奇怪)한 모양의 장발 헤어스타일을 하고 위로 쫙 찢어진 눈으로 상대방을 노려보기 때문에 감히 말을 붙이기조차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석의 논리가 전혀 정답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괴이(怪異)하고 변덕스러운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가인"이라는 그 어떤 특정인간에게 그 무슨 신(神)이 특별하게 내려 주신 남다른 위엄과 권위가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또한 성서의 가르침 어디를 살펴보아도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에게 은총의 표를 주셔서 그 생명을 기어이! 지키시고, 기어이!! 보호하시었다는 우리 본문의 증언은 도대체 오늘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가르치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를 이 역사 속으로 불러내신 창세기 12장 1절의 아브라함 소명(召命) 이야기에 이르는 성서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결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인 창세기 4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우연한 일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또 한번 더 놀라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즉 이야기는 천지창조 때부터 시작하여 계속적으로 반복된 하나님 이야기(God-talk)의 일관된 중심주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야훼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가차없이 낙원 밖으로 추방하시고 생명실과 나무로 접근하는 길을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으셨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은 오히려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고 되어 있고 심지어 아담의 아내에게는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타락하여 낙원에서부터 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은 감히 후손을 이어가게 하시는 생명계승의 은총을 베풀고 계셨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가 하늘과 땅에 사무쳐 그 죄악이 극도에 달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거대한 홍수를 지상으로 쏟아 부으셔서 땅 위에서 호흡하며 사는 모든 생물을 다 죽이실 때도 노아의 가족만은 살리신 바가 있는데, 기이하게도, 그 살려 주신 생물들 중에는 "함"과 같은 불륜의 자식도(!)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정(淨)한 짐승 이외의 부정(不淨)한 짐승도(!) 또한 암수 둘씩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인류의 죄를 깡그리 청산(淸算)하시는 대(大) 홍수 심판 사건 속에서조차도 불륜의 아들 "함"뿐만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또한 구원의 대상 속에 포함되었었다는 사실은 괴의(怪疑)하기 짝이 없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제기됩니다. 사람들은 노아 홍수와 같은 이러한 대 홍수심판의 교훈을 뼈저리게 가르침 받고서도 여전히 깨닫는 바 없이 되려 홍수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대항하여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서 감히 하나님께 대항하려고까지 하였었는데 이 때도 하나님은, 인간적인 기대와는 달리, 그들을 엄벌하시지 않고 단지 그들을 지면에 흩어 놓는 일만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 불경된 바벨탑 건축에 참여한 자들을 온 지면에 흩으셔서 오히려 그들이 땅 위에 번창해 지도록 축복하셨을 뿐(창 1:28 참조)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이러한 하나님은 풀기 어려운 신학적 난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은 어줍잖게도 오늘 본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간단명료하게 대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야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말하자면, 가인의 생명탄생은 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가인의 생명탄생은 단순한 아담과 하와의 성생활(性生活)의 한 결과가 아니라 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가인과 같은 살인자의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그것은 이 세상에 잘못 돋아난 하나의 독버섯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도 또한 하나님이 주셔서 비로소 얻은 것,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세상에 보내신 것, 그러므로, 살인자의 생명탄생도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한 결과라는 그런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가인의 생명을 잉태한 바로 그 가인의 "어버이"!!시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 그러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우리 생명의 잉태자요 우리 생명의 출산자요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의 어머니시라면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가인과 같은 살인자의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친히 잉태(孕胎)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출산(出産)하신 것이라는 것, 그것을 우리의 본문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 정체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문맥 안에서만 바르게 밝혀질 수 있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는,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모성애적(母性愛的) 사랑을 가시화(可視化)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가인을 잉태하고 출산한 아버지 또는 어머니이신 야훼 하나님이 그 "가인"이라는 못난 자식에게 보여 주신 부성애적 또는 모성애적 사랑을 표현한 하나의 가시적(可視的) 표식이 라고 보아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말하자면, 가인의 생명을 세상에 보내 주신 하나님 어버이의 그 부성애적-모성애적 사랑이 인간의 가슴 가슴속에 하나의 문신(文身)처럼 가시적(可視的)으로 새겨져 표현된 것이 라는 그런 말입니다. 살인자 자식을 가슴으로 부둥켜안고 안타깝고 안쓰러운 연민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어버이의 마음의 본질은 본능적으로 자식의 생명을 무조건 지키려는 것입니다. 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또한 바로 다름 아닌 가인에게 생명보호의 표를 주시는 야훼 하나님의 바로 그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야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의 경험적 은유(隱喩)로 표현한다면,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무조건 지키시고 보호하시려는 을 가지신 분에 비유될 수 있으십니다. 야훼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어버이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子女)요 하나님의 소생(蘇生)이며 하나님이 주신 를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예외 없는 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 에 화인(火印)처럼 찍혀 있는 이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지금 감히 여기 앉아 살아 숨쉬며 호흡하고 있고 또 감히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까지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살육의 위협으로 가득 찬 각박하기 짝이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투쟁장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가려는 살기(殺氣)가 가득한 원수들로 가득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발붙여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 가련한 생명을 이 살기(殺氣) 가득한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줄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 야훼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낳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줄 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 생명이 감히 이 살육의 현장 속에서도 아직도 여전히 이렇게 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지난 4월 15일, 부활절 예배의 설교 때도 이미 짧게 간증을 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지금부터 매우 오래 전인 1968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3년전 구정(舊正)이 가까웠던 어느 혹한(酷寒)의 겨울날, 저는 아직도 나이 29세의 총각이었던 젊은 나이였습니다만, 더 이상 혼자서 걷기도 어려울 정도의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서울생활을 결별한 후 사력(死力)을 다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는 고향 땅에 묻히겠다는 심산 때문이었습니다. 그 병이 하도 심하여 제가 주일학교 교사시절에 가르쳤던 아직도 나이 어린 그 해맑은 모습의 교회제자들이 새벽기도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매일같이 하나의 일과처럼 저희 집으로 달려와서 이렇게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김선생님은 장차 목사가 될 주의 종이오니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제발 지금 데려가지는 마시고 한 번만 더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마치 그들의 기도가 전혀 효력이 없기라도 한 듯이 병의 차도는 전혀 없는 채, 저승사자와 목숨을 건 숨 가쁜 줄 다루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밤, 매우 밤이 깊은 시각이었습니다. 저는 그날따라 유난히도 귀를 모으게 하였던 한 음성, 즉 옆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찬 밤공기를 갈라내는 듯한 가냘픈 어머님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 그러나 그것은 "기도 소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통렬한 단장(斷腸)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런 논리도 없이 마구 무질서하게 이어지는 단장(斷腸)의 애(哀)가 서려 있는 는 하나의 절규요 탄원이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 기도 소리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질서도 무시한 채, 저녁과 새벽을 무작정 깨우며 그저 그렇게 그저 그렇게만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확신하건대, 그 후 지금까지 30여년이 넘도록, 60이 넘도록 까지, 비록 썩 좋은 건강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지금까지 큰 잘못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저 놈의 불효한 아들보다는 어머님 당신을 차라리 하늘 나라로 데려가 달라시며 하나님께 마구 떼쓰셨던 이 어머님의 모성애적 기도가 이룩해 낸 기적의 한 결과 이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저는 기독교 교리나 기독교 신학이 가르쳐 온 그 가르침이 바로 이 "어머니의 자기 희생적 자식사랑" 앞에서는 그렇게도 무력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것을 예전엔 미쳐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어머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즉 죽어 가는 아들 앞에서는 결코 정죄함도 없으시고 결코 단념함도 없으시며 결코 포기함도 없으신 그런 그 무한대의 어머님의 사랑이, 다름 아닌 제 가슴에 이토록 뚜렷이 그리고 이토록 확실하게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어서 지금껏 이 생명을 지켜 주었던 저 마력적 생명 보존력을 가진 ,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 가슴에 그리고 제 넓은 이 이마에 뚜렷이 박혀있는 이 가 바로 다름 아닌 마른 풀잎 같은 이 목숨을 지금까지 지켜 준 그! 힘이요 그! 능력이었습니다. 이 는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인간생명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우리의 의 그 포기하지 못하는 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 상징도 바로 다름 아닌 우리 모든 인류의 가슴 가슴속에 사랑의 야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새겨 넣어 주신 바로 그 였던 것입니다.
! 그러므로 그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배역무도(背逆無道)한 가인 같은 우리 죄스러운 인류 모두에 대한 포기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입니다. 대책 없는 우리, 포기할 수 없는 우리, 80이고 90이면 천하장사라도 대책 없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 허약한 우리,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이 우리, 아무리 씻어 낼래야 씻어 낼 수 없는 우리의 그 죄 때문에 속수무책 심판 밖에는 달리 더 받을 것이 없는 이 우리, 이러한 우리의 가슴속에 그래도(!!) 살 수 있다는, 아마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불꽃이 아직도 여전히 남아 불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 때문입니다. 이 는,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확증된 바, 희망 없는 우리의 가장 확실한 희망입니다(끝).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분명히 이러한 성격의 가인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가인의 아벨 살해는 전혀 용서할 여지가 없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형제살해의 만행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다는 본문 4절의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아벨은 분명히 선량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선량한 사람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쳐죽이고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해 버리는 철면피한 가인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실로, 가인의 범죄는 매우 절망적이라고 할 만 하다 하겠습니다. 더욱이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이 성서 문맥상으로는 인류역사 최초의 살인사건이라고 하겠는데, 적어도, 이러한 인류역사 최초의 형제살해 사건만은 결코 연민을 갖지 아니하고 단호하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점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결단코 우리의 본문에서와 같은 그런 "살인자 편애와 살인자 두둔"이라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러한 결론이 나와서는 결단코 안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가인의 이 형제살해 사건은 조금도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고 조금도 관용을 베풀 필요도 없는, 단지, "엄벌로만 다스려야 할 사건"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사건의 이러한 전후관계를 살펴 볼 때, 이 사건을 매듭짓는 그 마지막 단계에서 유일무이의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에게 를 주시는 그 모습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와 같은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야훼 하나님은 보복살해를 당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이 가인을 향하여 전혀 엉뚱하게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를 만나는 자들이 너를 죽이려 들지는 결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네게 [생명보호의] "표"( ; 오트; 'oth)를 주리니, 이를 거역하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그 벌을 칠 배나 받게될 것이기 때문이다(창 4:15).
그렇습니다. 이 천인공노할 살인자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엄격한 징계보다는 오히려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의 "표"(오트; )를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모습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들 인간들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최근에 나온 구약성서연구 논문집들 중에 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오늘을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구약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한 학자의 학문을 찬양하는 논문들을 써 모아 헌정하는 매우 주목할만한 책이었습니다. 그 수록된 논문 대부분이 총 주제에 맞춘 비슷한 성격의 신학적 논문들이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제임스 바(James Barr)라는 한 학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정말 모두 다 선하였는가?"라는 제하의 매우 인상적이고도 도전적인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으나, 첫째 날의 빛 창조 이전의 세계에 대하여 성서는 놀라웁게도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혼돈의] '물' 위에 떠돌고 계셨다"라고 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다 선하였다는 재래의 기독교적 신념은, 그러므로, 충분히 재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매우 후대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빛도 지으시지만 어둠도 창조하시며 평화도 지으시지만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이라고까지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7월 16일자 지의 종교 난에서도 매우 자극적인 주제인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가리우실 때(When God hides His Face)"라는 제하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은 공정하신가?"(Is God Just?) "하나님은 의(義)로우신가?"라는 충격적인 성격의 신학적 물음을 제기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분으로서 우리의 이성(理性)으로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실재"(Elusive Presence)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가인 이야기 속의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억겁을 헤아리는 인류 미래의 역사를 바르게 교육하기 위하여서는 그리고 이 땅에 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서는, 정말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가인과 같은 이러한 역사의 독버섯과 같은 파렴치한 살인자에게 대해서만은, 비록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여도, 그를 두둔하고 감싸기보다는 혹독한 심판을 내려서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엄한 교훈을 삼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인간사회의 상식에 어울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류의 미래 역사에 불운한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 너무도 확실한(!) 저 살인자 가인을 한사코 벌주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 역사의 미래를 도대체 어떻게 다스려 가실 작정이시기에 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을 엄단하는 엄한 교훈을 세워 주시지 않고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가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는 그 무슨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리키는 그 어떤 "상징"이기라도 한 것입니까? 말하자면, 하나님은 전혀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시므로, 어느 때는 가슴의 맥박이 멈추어 설 정도로 준엄하고 가혹하시지만, 그러나, 다른 어떤 때는 그런 일이 언제 있었더냐 는 듯이 아예 맹물이 되어 우리 인간들이 땀흘려 애써서 이루어 놓은 모든 일에 초를 쳐서 모든 판을 다 깨어 버리는 그런 설명키 어려운 "변덕쟁이"시라는 그런 말입니까?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가인"이라는 인물이, 그 무슨 하나님조차도 감히 접근하기 어려워 할만한 그 어떤 무시무시한 소름끼치는 특수한 인상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리하여, 많은 성서 주석가들은 이 "가인의 표"가 지니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규명해 보려고 여러 가지 형태로 노력하여 왔었습니다. 그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우리가 흔히 북 아메리카의 "아파치"(Apache) 족의 부족표시 관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어떤 부족 표시를 얼굴이나 가슴이나 팔 다리 등에 표시하여 다른 부족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도록 하였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도 살인자 가인에게 그런 "부족표시"를 해 주셔서 다른 부족의 살해위협으로부터 가인을 지켜 주셨던 것이라는 그런 해석입니다.
그리하여, 가인은 "가인족(族)"을 표시하는 문신, 즉 그 어떤 태투마크(tatoo-mark)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가인의 생 명은 또한 이러한 가인 족의 태투 마크를 가진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그런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좀 더 확대하여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부족표시의 마크가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헤르만 헷세의 문학작품인 이라는 작품은 바로 이러한 현대인의 생각을 잘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품 은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나이의 얼굴에는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어. 사람들은 그 사나이한테 감히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지. 그 사나이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신비한 힘이 있었던 거야. 예컨대, 그 사나이의 눈에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보다는 좀 더 많은 지성과 좀더 많은 용기가 번득이고 있었던 거야. 그 사나이는 권력을 쥐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사나이 앞에서 겁을 먹고 쩔쩔 맸지.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가인의 후예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신(神)이 주신 바, 이러한 신비한 은총의 "표"를 그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
라고 쓰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많은 현대인들은 살인, 강간, 약탈을 일삼는 악인(惡人)들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더욱 당당하게 더 잘 살고 있는 것은 그들 악인들은 특별하게 이러한 종류의 무시무시한 를 갖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해(害)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악인들의 얼굴에는 끔직하고도 험상스러운 칼자국이 나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보기만 하여도 슬슬 그를 피하여 지나갑니다. 또 다른 어떤 악인들의 경우를 보면, 그 어깨나 팔뚝에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덤벼드는 호랑이 모습의 문신이 새겨져 있거나 또는 불을 내어 뿜는 청룡 대가리의 문신이 새겨져 있어서 가까이 가기가 섬뜩섬뜩하여 감히 접근조차 하지를 못합니다. 또 어떤 악인들은 기괴(奇怪)한 모양의 장발 헤어스타일을 하고 위로 쫙 찢어진 눈으로 상대방을 노려보기 때문에 감히 말을 붙이기조차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석의 논리가 전혀 정답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괴이(怪異)하고 변덕스러운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가인"이라는 그 어떤 특정인간에게 그 무슨 신(神)이 특별하게 내려 주신 남다른 위엄과 권위가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또한 성서의 가르침 어디를 살펴보아도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에게 은총의 표를 주셔서 그 생명을 기어이! 지키시고, 기어이!! 보호하시었다는 우리 본문의 증언은 도대체 오늘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가르치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를 이 역사 속으로 불러내신 창세기 12장 1절의 아브라함 소명(召命) 이야기에 이르는 성서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결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인 창세기 4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우연한 일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또 한번 더 놀라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즉 이야기는 천지창조 때부터 시작하여 계속적으로 반복된 하나님 이야기(God-talk)의 일관된 중심주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야훼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가차없이 낙원 밖으로 추방하시고 생명실과 나무로 접근하는 길을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으셨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은 오히려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고 되어 있고 심지어 아담의 아내에게는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타락하여 낙원에서부터 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은 감히 후손을 이어가게 하시는 생명계승의 은총을 베풀고 계셨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가 하늘과 땅에 사무쳐 그 죄악이 극도에 달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거대한 홍수를 지상으로 쏟아 부으셔서 땅 위에서 호흡하며 사는 모든 생물을 다 죽이실 때도 노아의 가족만은 살리신 바가 있는데, 기이하게도, 그 살려 주신 생물들 중에는 "함"과 같은 불륜의 자식도(!)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정(淨)한 짐승 이외의 부정(不淨)한 짐승도(!) 또한 암수 둘씩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인류의 죄를 깡그리 청산(淸算)하시는 대(大) 홍수 심판 사건 속에서조차도 불륜의 아들 "함"뿐만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또한 구원의 대상 속에 포함되었었다는 사실은 괴의(怪疑)하기 짝이 없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제기됩니다. 사람들은 노아 홍수와 같은 이러한 대 홍수심판의 교훈을 뼈저리게 가르침 받고서도 여전히 깨닫는 바 없이 되려 홍수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대항하여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서 감히 하나님께 대항하려고까지 하였었는데 이 때도 하나님은, 인간적인 기대와는 달리, 그들을 엄벌하시지 않고 단지 그들을 지면에 흩어 놓는 일만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 불경된 바벨탑 건축에 참여한 자들을 온 지면에 흩으셔서 오히려 그들이 땅 위에 번창해 지도록 축복하셨을 뿐(창 1:28 참조)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이러한 하나님은 풀기 어려운 신학적 난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은 어줍잖게도 오늘 본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간단명료하게 대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야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말하자면, 가인의 생명탄생은 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가인의 생명탄생은 단순한 아담과 하와의 성생활(性生活)의 한 결과가 아니라 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가인과 같은 살인자의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그것은 이 세상에 잘못 돋아난 하나의 독버섯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도 또한 하나님이 주셔서 비로소 얻은 것,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세상에 보내신 것, 그러므로, 살인자의 생명탄생도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한 결과라는 그런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가인의 생명을 잉태한 바로 그 가인의 "어버이"!!시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 그러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우리 생명의 잉태자요 우리 생명의 출산자요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의 어머니시라면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가인과 같은 살인자의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친히 잉태(孕胎)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출산(出産)하신 것이라는 것, 그것을 우리의 본문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 정체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문맥 안에서만 바르게 밝혀질 수 있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는,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모성애적(母性愛的) 사랑을 가시화(可視化)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가인을 잉태하고 출산한 아버지 또는 어머니이신 야훼 하나님이 그 "가인"이라는 못난 자식에게 보여 주신 부성애적 또는 모성애적 사랑을 표현한 하나의 가시적(可視的) 표식이 라고 보아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말하자면, 가인의 생명을 세상에 보내 주신 하나님 어버이의 그 부성애적-모성애적 사랑이 인간의 가슴 가슴속에 하나의 문신(文身)처럼 가시적(可視的)으로 새겨져 표현된 것이 라는 그런 말입니다. 살인자 자식을 가슴으로 부둥켜안고 안타깝고 안쓰러운 연민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어버이의 마음의 본질은 본능적으로 자식의 생명을 무조건 지키려는 것입니다. 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또한 바로 다름 아닌 가인에게 생명보호의 표를 주시는 야훼 하나님의 바로 그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야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의 경험적 은유(隱喩)로 표현한다면,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무조건 지키시고 보호하시려는 을 가지신 분에 비유될 수 있으십니다. 야훼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어버이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子女)요 하나님의 소생(蘇生)이며 하나님이 주신 를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예외 없는 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 에 화인(火印)처럼 찍혀 있는 이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지금 감히 여기 앉아 살아 숨쉬며 호흡하고 있고 또 감히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까지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살육의 위협으로 가득 찬 각박하기 짝이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투쟁장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가려는 살기(殺氣)가 가득한 원수들로 가득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발붙여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 가련한 생명을 이 살기(殺氣) 가득한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줄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 야훼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낳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줄 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 생명이 감히 이 살육의 현장 속에서도 아직도 여전히 이렇게 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지난 4월 15일, 부활절 예배의 설교 때도 이미 짧게 간증을 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지금부터 매우 오래 전인 1968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3년전 구정(舊正)이 가까웠던 어느 혹한(酷寒)의 겨울날, 저는 아직도 나이 29세의 총각이었던 젊은 나이였습니다만, 더 이상 혼자서 걷기도 어려울 정도의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서울생활을 결별한 후 사력(死力)을 다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는 고향 땅에 묻히겠다는 심산 때문이었습니다. 그 병이 하도 심하여 제가 주일학교 교사시절에 가르쳤던 아직도 나이 어린 그 해맑은 모습의 교회제자들이 새벽기도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매일같이 하나의 일과처럼 저희 집으로 달려와서 이렇게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김선생님은 장차 목사가 될 주의 종이오니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제발 지금 데려가지는 마시고 한 번만 더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마치 그들의 기도가 전혀 효력이 없기라도 한 듯이 병의 차도는 전혀 없는 채, 저승사자와 목숨을 건 숨 가쁜 줄 다루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밤, 매우 밤이 깊은 시각이었습니다. 저는 그날따라 유난히도 귀를 모으게 하였던 한 음성, 즉 옆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찬 밤공기를 갈라내는 듯한 가냘픈 어머님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 그러나 그것은 "기도 소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통렬한 단장(斷腸)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런 논리도 없이 마구 무질서하게 이어지는 단장(斷腸)의 애(哀)가 서려 있는 는 하나의 절규요 탄원이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 기도 소리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질서도 무시한 채, 저녁과 새벽을 무작정 깨우며 그저 그렇게 그저 그렇게만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확신하건대, 그 후 지금까지 30여년이 넘도록, 60이 넘도록 까지, 비록 썩 좋은 건강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지금까지 큰 잘못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저 놈의 불효한 아들보다는 어머님 당신을 차라리 하늘 나라로 데려가 달라시며 하나님께 마구 떼쓰셨던 이 어머님의 모성애적 기도가 이룩해 낸 기적의 한 결과 이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저는 기독교 교리나 기독교 신학이 가르쳐 온 그 가르침이 바로 이 "어머니의 자기 희생적 자식사랑" 앞에서는 그렇게도 무력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것을 예전엔 미쳐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어머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즉 죽어 가는 아들 앞에서는 결코 정죄함도 없으시고 결코 단념함도 없으시며 결코 포기함도 없으신 그런 그 무한대의 어머님의 사랑이, 다름 아닌 제 가슴에 이토록 뚜렷이 그리고 이토록 확실하게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어서 지금껏 이 생명을 지켜 주었던 저 마력적 생명 보존력을 가진 ,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 가슴에 그리고 제 넓은 이 이마에 뚜렷이 박혀있는 이 가 바로 다름 아닌 마른 풀잎 같은 이 목숨을 지금까지 지켜 준 그! 힘이요 그! 능력이었습니다. 이 는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인간생명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우리의 의 그 포기하지 못하는 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 상징도 바로 다름 아닌 우리 모든 인류의 가슴 가슴속에 사랑의 야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새겨 넣어 주신 바로 그 였던 것입니다.
! 그러므로 그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배역무도(背逆無道)한 가인 같은 우리 죄스러운 인류 모두에 대한 포기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입니다. 대책 없는 우리, 포기할 수 없는 우리, 80이고 90이면 천하장사라도 대책 없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 허약한 우리,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이 우리, 아무리 씻어 낼래야 씻어 낼 수 없는 우리의 그 죄 때문에 속수무책 심판 밖에는 달리 더 받을 것이 없는 이 우리, 이러한 우리의 가슴속에 그래도(!!) 살 수 있다는, 아마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불꽃이 아직도 여전히 남아 불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 때문입니다. 이 는,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확증된 바, 희망 없는 우리의 가장 확실한 희망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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