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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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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1.8.18 주일설교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모두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며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쉼'이라는 말, 휴식, 안식이라는 말 때문이며, 우리는 모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 지는 짐은 다르겠지만, 모두 버거워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짐이 없어 보이고, 삶이 순탄해 보이지만,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고민이 없는 자가 어디에 있고 무거운 인생의 멍에를 지고 다니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모두 쉬기를 바랍니다. 안식을 원합니다. 누가 일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일을 하려는 것은 결국 좀 더 편안히 쉬고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역설은 우리가 안식을 얻기 위해서 애쓰면 애쓸수록 더 고달파진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번 사람은 더 많이 벌기 위해, 혹은 더 많은 권력을 쥐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 더 많은 명에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애씁니다. 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꼴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죽도록 일하다가 인생이 끝날 무렵에야 원하지 않는 휴식을 얻게 되며, 그것도 못내 아쉬워하면서 작별을 고합니다. 사는 동안 안식이란 잡히지 않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죽음으로 인생을 강제 퇴장 당하는 날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런 안식을 약속하시고 거기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지고 나에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멍에를 아주 없애주겠다고 약속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멍에를 없이 해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쉬운 멍에를 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무거운 멍에일지라도 쉽게 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짐, 지고 가는 짐, 우리의 멍에를 없애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쉽게 지는 법을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려고 합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가볍게 지는 비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고 가는 짐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짐을 지느냐가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짐을 지고서 우리가 끙끙거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멍에' 란 어떤 것이기에 쉽고 그가 지신 짐이 무엇이기에 가볍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의 삶을 회고해보면 오늘 이러한 말씀을 할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힘겨운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분이 나에게 오라, 나에게 배우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갑니다. 그런 말은 오히려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기 좋은 말씀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아예 마음을 쉬는 공부를 표방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예수의 초대는 짐을 없애는 휴식으로의 초대가 아니고, 또 잠시 짐을 내려놓는 일시적인 도피적 휴식으로의 초대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모두 참된 안식이 아니며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안식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안식은 짐이 없는 안식이 아니라 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안식입니다. 그것은 노동의 반대가 아니라, 노동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휴식, 일 속의 휴식이며, 임시로 찾은 산이나 잠시 다녀가는 기도원 속에서만 누리는 안식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시장 한 복판에서 쉬는 법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리는 진정한, 영원한 안식의 길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영혼의 안식이며 진정한 안식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단지 잠시 쉬려고, 그래서 내일 여기를 떠나서 또 다시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집에서 자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잠보다 더 잘 쉬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일시적 도피나 진통제 같이 일시적 해결은 되나 근본적 해결은 못됩니다. 퇴수회는 자칫 하면 일시적 도피가 되기 쉽습니다. 일과성 행사로 끝나고 연례 행사로 치릅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 하던 일을 접어두고 좀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일시적 휴식, 임시방편적 치유를 위해 우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 해결을 위해,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일 속에서 쉬는 방법, 기도원과 시장의 구별을 넘어서는 안식의 길,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누릴 수 있는 안식, 그리고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평화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문제들, 짐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되 쉽게 사는 방법, 쉬운 인생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초대합니다.
그 비법은 '마음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온유는 경쟁하고 올라서고 지배하려는 마음의 반대입니다. 베풀고, 허락하고 양보하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버리고 비우는 마음입니다. 겸손 역시 낮아지고 낮은 데 처하고 섬기는 종의 자세입니다. 스스로 낮음을 자취하는 자세입니다.
실로 인생의 피로와 괴로움은 경쟁심에서, 남을 이기고 올라서려는 마음,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버리고 비우는 마음의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되 그 짐이 그를 괴롭히지 않고, 많은 일을 하되 그 일이 그를 수고롭게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쟁심에서 하지 않고 마음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해도 사랑에서 나온 고생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들의 고생과 희생처럼 사랑에서 나오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한 값진 희생이기 때문에 삶이 고달파도 무의미하지 않고 멍에가 무거워도 벗어버리려는 마음이 없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렇게 낮은 데에 태어나서 더 낮은 데로 임하면서 살다가 간 분입니다. 그는 돈과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누구와 무엇을 얻기 위해 경쟁하지 않았고 스스로 좁은 길, 낮은 삶을 취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었으며,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여기에 인생의 진정한 안식이 있다고 증언하십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니라 더 어려워 보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초대의 말씀은 언뜻 우리에게 위로의 말로 들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짐, 또 하나의 심리적 부담을 안겨준다는 것을 압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낮출 준비, 자세가 되었습니까? 그렇게 살면 분명 쉽고 가벼운 멍에가 될 것이 틀림없지만, 나에게 정말 그럴 마음이 있습니까? 그럴 용기가 있습니까?
그러나 자기를 버리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없이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것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성현들의 한결 같은 증언입니다. 인생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힘든 것이며, 남이 나에게 문제를 주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쓸데없는 욕심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하며 산다는 것이며,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아무리 바꾸어도 나 자신을 바꾸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기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이 한결 같은 성인들의 증언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영성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부정의 영성은 도피적 영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적어도 예수의 영성은 도피적 영성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온유와 겸손의 영성, 자기 부정의 영성은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며 짐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자기와의 부단한 싸움 없는 영성, 세상과의 갈등이 없는 종교, 부정 없는 긍정,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증언입니다.
흔히 종교는 마음의 위로를 준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진정한 위로와 가짜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약이 있고 가짜 약이 있어 후자는 아편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병폐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단 번에 해결된다고 합니다. 인생의 모든 짐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복신앙으로 아예 짐을 없앨 수 있다고 공수표를 남발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순간만은 정말로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잊고 짐이 사라진 듯 착각에 빠지고, 일단 교회 밖을 나서면 또 다시 세상의 욕망과 격정에 휩싸여 온갖 죄를 짓고는 교회에 와서 또 모든 짐을 예수 앞에 내려놓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십자가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탐욕을 부리고도 탐욕 자체를 회개하지는 않고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탐욕을 이루지 못한 억울함을 인생의 짐이라고 예수 앞에 내려놓고 울면서 호소합니다.
짐 없는 인생, 멍에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누가 약속한다면 그것은 분명 허구요 환상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편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짐은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져야할 짐이 어떤 종류의 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져야 하는 것은 사랑의 십자가이지 세상적 욕망과 야심에서 오는 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신자들은 율법주의적 종교의 짐을 지고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자유와 사랑보다는 강요와 복종의 대상이 되어 버렸고, 권위에 대한 맹종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내가 보기에 지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짐을 지고서 고생하면서, 그것이 마치 십자가인양, 마치 그것이 참다운 신앙인양 열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영성은 우리를 세상적 욕망의 짐뿐만 아니라 율법의 굴레, 종교의 짐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새로운 짐을 질 것을 촉구합니다. 이것만은 우리가 져야할 짐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생명의 길이며 거기에 참다운 평화와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짐은 가볍고 쉬운 멍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짐 아닌 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와 겸손에는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우면 비울수록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기 때문이며 자기를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번민과 고통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온유와 겸손의 길, 십자가의 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지셨던 짐이기에 당연히 그를 따르는 우리들도 져야 하는 짐입니다. "내 주가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라는 찬송가의 가사 대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긍지가 있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감사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듯, 우리가 주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고난에 참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시고 우리가 자취한 고난 속에 고난의 연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시고 우리의 고난을 가볍게 해 주신다는 위로가 있습니다.(찬송가 367장과 510장)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하던 일을 잠시 제쳐두고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참다운 평안과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여기에 모였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다운 평화의 길, 그 깊이와힘을 함께 맛보고 확인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셨던 길,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리로 가라고 부르시는 온유와 겸손의 길, 십자가의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의 영성을 배우러 왔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따라서 우리는 모두 쉬기를 바랍니다. 안식을 원합니다. 누가 일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일을 하려는 것은 결국 좀 더 편안히 쉬고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역설은 우리가 안식을 얻기 위해서 애쓰면 애쓸수록 더 고달파진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번 사람은 더 많이 벌기 위해, 혹은 더 많은 권력을 쥐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 더 많은 명에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애씁니다. 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꼴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죽도록 일하다가 인생이 끝날 무렵에야 원하지 않는 휴식을 얻게 되며, 그것도 못내 아쉬워하면서 작별을 고합니다. 사는 동안 안식이란 잡히지 않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죽음으로 인생을 강제 퇴장 당하는 날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런 안식을 약속하시고 거기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지고 나에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멍에를 아주 없애주겠다고 약속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멍에를 없이 해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쉬운 멍에를 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무거운 멍에일지라도 쉽게 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짐, 지고 가는 짐, 우리의 멍에를 없애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쉽게 지는 법을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려고 합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가볍게 지는 비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고 가는 짐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짐을 지느냐가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짐을 지고서 우리가 끙끙거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멍에' 란 어떤 것이기에 쉽고 그가 지신 짐이 무엇이기에 가볍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의 삶을 회고해보면 오늘 이러한 말씀을 할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힘겨운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분이 나에게 오라, 나에게 배우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갑니다. 그런 말은 오히려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기 좋은 말씀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아예 마음을 쉬는 공부를 표방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예수의 초대는 짐을 없애는 휴식으로의 초대가 아니고, 또 잠시 짐을 내려놓는 일시적인 도피적 휴식으로의 초대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모두 참된 안식이 아니며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안식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안식은 짐이 없는 안식이 아니라 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안식입니다. 그것은 노동의 반대가 아니라, 노동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휴식, 일 속의 휴식이며, 임시로 찾은 산이나 잠시 다녀가는 기도원 속에서만 누리는 안식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시장 한 복판에서 쉬는 법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리는 진정한, 영원한 안식의 길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영혼의 안식이며 진정한 안식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단지 잠시 쉬려고, 그래서 내일 여기를 떠나서 또 다시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집에서 자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잠보다 더 잘 쉬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일시적 도피나 진통제 같이 일시적 해결은 되나 근본적 해결은 못됩니다. 퇴수회는 자칫 하면 일시적 도피가 되기 쉽습니다. 일과성 행사로 끝나고 연례 행사로 치릅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 하던 일을 접어두고 좀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일시적 휴식, 임시방편적 치유를 위해 우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 해결을 위해,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일 속에서 쉬는 방법, 기도원과 시장의 구별을 넘어서는 안식의 길,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누릴 수 있는 안식, 그리고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평화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문제들, 짐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되 쉽게 사는 방법, 쉬운 인생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초대합니다.
그 비법은 '마음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온유는 경쟁하고 올라서고 지배하려는 마음의 반대입니다. 베풀고, 허락하고 양보하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버리고 비우는 마음입니다. 겸손 역시 낮아지고 낮은 데 처하고 섬기는 종의 자세입니다. 스스로 낮음을 자취하는 자세입니다.
실로 인생의 피로와 괴로움은 경쟁심에서, 남을 이기고 올라서려는 마음,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버리고 비우는 마음의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되 그 짐이 그를 괴롭히지 않고, 많은 일을 하되 그 일이 그를 수고롭게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쟁심에서 하지 않고 마음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해도 사랑에서 나온 고생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들의 고생과 희생처럼 사랑에서 나오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한 값진 희생이기 때문에 삶이 고달파도 무의미하지 않고 멍에가 무거워도 벗어버리려는 마음이 없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렇게 낮은 데에 태어나서 더 낮은 데로 임하면서 살다가 간 분입니다. 그는 돈과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누구와 무엇을 얻기 위해 경쟁하지 않았고 스스로 좁은 길, 낮은 삶을 취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었으며,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여기에 인생의 진정한 안식이 있다고 증언하십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니라 더 어려워 보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초대의 말씀은 언뜻 우리에게 위로의 말로 들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짐, 또 하나의 심리적 부담을 안겨준다는 것을 압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낮출 준비, 자세가 되었습니까? 그렇게 살면 분명 쉽고 가벼운 멍에가 될 것이 틀림없지만, 나에게 정말 그럴 마음이 있습니까? 그럴 용기가 있습니까?
그러나 자기를 버리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없이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것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성현들의 한결 같은 증언입니다. 인생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힘든 것이며, 남이 나에게 문제를 주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쓸데없는 욕심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하며 산다는 것이며,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아무리 바꾸어도 나 자신을 바꾸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기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이 한결 같은 성인들의 증언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영성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부정의 영성은 도피적 영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적어도 예수의 영성은 도피적 영성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온유와 겸손의 영성, 자기 부정의 영성은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며 짐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자기와의 부단한 싸움 없는 영성, 세상과의 갈등이 없는 종교, 부정 없는 긍정,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증언입니다.
흔히 종교는 마음의 위로를 준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진정한 위로와 가짜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약이 있고 가짜 약이 있어 후자는 아편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병폐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단 번에 해결된다고 합니다. 인생의 모든 짐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복신앙으로 아예 짐을 없앨 수 있다고 공수표를 남발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순간만은 정말로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잊고 짐이 사라진 듯 착각에 빠지고, 일단 교회 밖을 나서면 또 다시 세상의 욕망과 격정에 휩싸여 온갖 죄를 짓고는 교회에 와서 또 모든 짐을 예수 앞에 내려놓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십자가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탐욕을 부리고도 탐욕 자체를 회개하지는 않고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탐욕을 이루지 못한 억울함을 인생의 짐이라고 예수 앞에 내려놓고 울면서 호소합니다.
짐 없는 인생, 멍에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누가 약속한다면 그것은 분명 허구요 환상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편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짐은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져야할 짐이 어떤 종류의 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져야 하는 것은 사랑의 십자가이지 세상적 욕망과 야심에서 오는 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신자들은 율법주의적 종교의 짐을 지고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자유와 사랑보다는 강요와 복종의 대상이 되어 버렸고, 권위에 대한 맹종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내가 보기에 지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짐을 지고서 고생하면서, 그것이 마치 십자가인양, 마치 그것이 참다운 신앙인양 열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영성은 우리를 세상적 욕망의 짐뿐만 아니라 율법의 굴레, 종교의 짐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새로운 짐을 질 것을 촉구합니다. 이것만은 우리가 져야할 짐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생명의 길이며 거기에 참다운 평화와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짐은 가볍고 쉬운 멍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짐 아닌 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와 겸손에는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우면 비울수록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기 때문이며 자기를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번민과 고통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온유와 겸손의 길, 십자가의 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지셨던 짐이기에 당연히 그를 따르는 우리들도 져야 하는 짐입니다. "내 주가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라는 찬송가의 가사 대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긍지가 있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감사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듯, 우리가 주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고난에 참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시고 우리가 자취한 고난 속에 고난의 연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시고 우리의 고난을 가볍게 해 주신다는 위로가 있습니다.(찬송가 367장과 510장)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하던 일을 잠시 제쳐두고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참다운 평안과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여기에 모였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다운 평화의 길, 그 깊이와힘을 함께 맛보고 확인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셨던 길,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리로 가라고 부르시는 온유와 겸손의 길, 십자가의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의 영성을 배우러 왔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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