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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잠16:1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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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1.10.28 주일설교 |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정신 없이 뛰던 삶을 한 템포 늦추고 독서를 하면서 조용히 인생을 돌아보는 사색의 계절입니다. 책이나 한 권 싸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또 다가올 엄동설한 겨울을 앞두고 인생의 겨울을 맞기 전에 해야 할 준비도 하는 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 무엇이 가장 요긴할까 생각해봅니다.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돈, 명예, 권력, 학식, 건강 등 모두가 필요하지만, 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없으면 이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즐기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며 오히려 그런 것들을 가짐으로 인해 패가망신의 길로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돈이 있어도 돈의 노예가 되며, 돈 있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그 어는 것보다도 소중하다는 건강도 지혜가 없으면 오히려 자만의 원인이 되어 몸을 망치는 결과를 자초합니다. 솔로몬 왕이 다른 것 모두 제쳐놓고 지혜를 구한 것도 단지 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혜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위해 필수적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선인지를 식별하는 눈이 됩니다. 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지혜가 없으면 허사가 되고 오히려 화가 됩니다. 과도한 욕망과 교만으로 패망을 자초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3가지 덕이 있습니다. 실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우리 인생의 토대가 무너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웃들, 인간들과의 관계가 차단되고 고립되어 사는 재미와 보람을 모릅니다. 소망이 없으면 미래가 막혀버린 답답한 인생이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삶을 하나님에 토대를 두고 이웃과 더불어 미래의 소망 가운데서 보람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 줍니다. 그런데 지혜는 어찌 보면 믿음, 소망,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인생에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도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물론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 지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청종하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러고 보면 지혜와 믿음은 선순환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혜로써 우리는 사랑과 믿음을 구하고 지켜나가며, 믿음이 크면 클수록 지혜도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잠언은 지혜를 찬양하며 지혜로운 삶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는 지혜문학의 보고입니다. 잠언의 일관된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 소망, 사랑과 마찬가지로 지혜도 결코 인간 스스로로부터 생겨나는 덕목이 아니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마음에서 지혜와 겸손한 마음이 생기지, 그렇지 않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무슨 일을 하든 자기 힘만으로 다 성취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교만하면, 그러한 인생에는 패망이 바로 문턱에 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라고 하면 단순히 세상을 사는 지혜나 인생을 사는 꾀 정도로, 혹은 인생의 얄팍한 처세술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는 또한 단순히 인생 경험이 많다고 해서 얻어지는 경험적 지식 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계와 사물의 질서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하며, 지혜는 세계와 사물에 새겨진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근본적 토대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현현이며,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요한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예언자로 보는 데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증언하고 실천한 종말적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지혜의 교사로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언적 활동에는 어리석은 인생을 일깨워주는 지혜의 교사로서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야말로 얻는다는 등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전복적인 지혜로서 그는 어리석은 인생을 일깨워 주었으며 인생을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가치관에 따라 살도록 가르쳐준 파격적인 지혜의 교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가 인간의 상식으로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사는 십자가의 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다운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일깨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참다운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지혜의 스승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잠언의 말씀은 사도 바울처럼 역설의 지혜를 드라마틱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인생과 지혜로운 인생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와 명철의 사람은 악을 떠나 정직한 삶을 살고 생명을 지키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의 눈에는 바른 길을 가는 것 같이 보이나 교만하여 멸망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그 명철함이 생명의 샘이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 어리석음이 벌이되어 마침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컴퓨터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점점 더 이 문명의 이기가 지닌 힘을 실감해 갑니다. 특히 우리가 여기 주일마다 모이는 새길교회 말고 또 하나의 새길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둔하게도 요즈음에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지하 교회, cyber church지요. 새길교회는 일요일 한번만 예배를 드린다고 약간 허전해 하는 교인들이 있는데, 사실 예배는 일주일 내내 cyber 교회에서 계속된다는 사실에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격려의 말, 비판의 말, 주고받는 토론들이 매우 활발하며, 또 가끔 씩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좋은 자료들이 아름다운 영상 처리로 화면에 뜨기도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참으로 귀한 자료를 접하고 많은 감동을 받은 바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기철 형제가 올린 자료인데, 어떤 사람이 꿈에 하나님과 면담을 한 대화 내용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래 그대가 나와 면담하겠다고 하는가? 하나님이 물으셨다.
시간이 있으시면요 하고 나는 말했다.
하나님은 미소를 머금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시간은 영원이니라 하셨다.
그런데 물어볼 말이 무엇인가?
당신 보시기에 인간이 당신을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몇 가지 있지, 하나님은 대답하셨다.
인간들은 어린 시절이 지겨워 빨리 어른이 되고자 하지만,
어른이 되선 다시 어린이처럼 되길 원하지.
인간들은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잃지.
인간들은 미래를 불안해하며 현재를 잊고 살지만
현재를 사는 것도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니지.
인간들은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마치 살지 않았던 것처럼 죽지.
하나님께서 내 손을 잡으시고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실로 아름다운 대화이며, 우리가 평소 얼마나 어리석게 살고 있는가를 일깨워주는 대화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우리의 어리석음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러한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는 지혜가 꿈속에서 하나님과의 대화의 형식을 통해 말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꿈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주고, 생시에 우리는 모두 욕심이 눈을 가려 전도된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정작 죽음을 맞아서는 한 번도 제대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허전한 느낌을 가지고 후회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 모습을 깨닫는 지혜는 인생을 내신 하나님의 초월적 시각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릅니다. 인생에 코를 박고 살기 바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일 리 만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경험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모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본다고 어리석은 인간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일단 지혜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미련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미련하다고 아는 사람은 그나마 진짜 미련한 사람이 아니지요.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이라고 보았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말은 본래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쓰여 있던 말로서, 신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신이 아니고 죽을 존재들인 인간임을 알라, 즉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알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참으로 답답하게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남이 나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나를 얼마나 답답하게 여길까를 알고, 내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할 때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아는 지혜는 타자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진정한 타자는 초월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적 시각이 있어야만 우리는 인생의 참 모습을 바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가 참으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지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약 미가서는 인생의 선에 대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 시각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선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7: 8).
인생의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우리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으시고 부모와 같이 우리를 아끼고 돌보시는 주께서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공의를 실천하며 의롭게 사는 것, 인자함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겸손히 우리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가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며, 이것이 인생의 참 선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국내외적으로 매우 뒤숭숭합니다. 국내적으로는 경제가 기울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은 진흙탕 싸움질만 하고 있고, 집단 이기주의는 곳곳에서 판을 치고, 남북관계는 뒷걸음질치고 있어,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 없고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국외적으로는 부와 번영, 힘과 영광의 상징인 미국이 테러 공격을 받은 후 안팎으로 승산이 없어 보이는 전쟁을 치르느라 매우 곤혹스러워 하고 있으며, 미국 국민들은 언제 터질지 모를 테러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누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별탈 없이 잘 굴러만 가던 것처럼 보이던 역사의 수레바퀴에 급 제동이 걸려, 사람들은 문명이란 것이 무엇이며 번영이란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묻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조용히 성찰하기 시작했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행복이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것인지 성찰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습니다. 돈과 힘으로만은 안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우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없이는 인간이 구축해 놓은 번영이란 한낮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숭숭한 세상, 불안한 세상, 우리가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늘 성경 말씀은 매우 평범하나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가 주시는 지혜에 그의 법도대로 겸손히 그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16장에 있는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께서 하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주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
"말씀에 따라 조심하며 사는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주를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사람이 사는 데 무엇이 가장 요긴할까 생각해봅니다.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돈, 명예, 권력, 학식, 건강 등 모두가 필요하지만, 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없으면 이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즐기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며 오히려 그런 것들을 가짐으로 인해 패가망신의 길로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돈이 있어도 돈의 노예가 되며, 돈 있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그 어는 것보다도 소중하다는 건강도 지혜가 없으면 오히려 자만의 원인이 되어 몸을 망치는 결과를 자초합니다. 솔로몬 왕이 다른 것 모두 제쳐놓고 지혜를 구한 것도 단지 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혜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위해 필수적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선인지를 식별하는 눈이 됩니다. 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지혜가 없으면 허사가 되고 오히려 화가 됩니다. 과도한 욕망과 교만으로 패망을 자초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3가지 덕이 있습니다. 실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우리 인생의 토대가 무너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웃들, 인간들과의 관계가 차단되고 고립되어 사는 재미와 보람을 모릅니다. 소망이 없으면 미래가 막혀버린 답답한 인생이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삶을 하나님에 토대를 두고 이웃과 더불어 미래의 소망 가운데서 보람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 줍니다. 그런데 지혜는 어찌 보면 믿음, 소망,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인생에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도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물론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 지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청종하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러고 보면 지혜와 믿음은 선순환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혜로써 우리는 사랑과 믿음을 구하고 지켜나가며, 믿음이 크면 클수록 지혜도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잠언은 지혜를 찬양하며 지혜로운 삶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는 지혜문학의 보고입니다. 잠언의 일관된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 소망, 사랑과 마찬가지로 지혜도 결코 인간 스스로로부터 생겨나는 덕목이 아니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마음에서 지혜와 겸손한 마음이 생기지, 그렇지 않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무슨 일을 하든 자기 힘만으로 다 성취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교만하면, 그러한 인생에는 패망이 바로 문턱에 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라고 하면 단순히 세상을 사는 지혜나 인생을 사는 꾀 정도로, 혹은 인생의 얄팍한 처세술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는 또한 단순히 인생 경험이 많다고 해서 얻어지는 경험적 지식 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계와 사물의 질서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하며, 지혜는 세계와 사물에 새겨진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근본적 토대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현현이며,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요한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예언자로 보는 데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증언하고 실천한 종말적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지혜의 교사로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언적 활동에는 어리석은 인생을 일깨워주는 지혜의 교사로서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야말로 얻는다는 등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전복적인 지혜로서 그는 어리석은 인생을 일깨워 주었으며 인생을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가치관에 따라 살도록 가르쳐준 파격적인 지혜의 교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가 인간의 상식으로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사는 십자가의 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다운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일깨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참다운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지혜의 스승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잠언의 말씀은 사도 바울처럼 역설의 지혜를 드라마틱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인생과 지혜로운 인생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와 명철의 사람은 악을 떠나 정직한 삶을 살고 생명을 지키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의 눈에는 바른 길을 가는 것 같이 보이나 교만하여 멸망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그 명철함이 생명의 샘이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 어리석음이 벌이되어 마침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컴퓨터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점점 더 이 문명의 이기가 지닌 힘을 실감해 갑니다. 특히 우리가 여기 주일마다 모이는 새길교회 말고 또 하나의 새길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둔하게도 요즈음에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지하 교회, cyber church지요. 새길교회는 일요일 한번만 예배를 드린다고 약간 허전해 하는 교인들이 있는데, 사실 예배는 일주일 내내 cyber 교회에서 계속된다는 사실에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격려의 말, 비판의 말, 주고받는 토론들이 매우 활발하며, 또 가끔 씩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좋은 자료들이 아름다운 영상 처리로 화면에 뜨기도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참으로 귀한 자료를 접하고 많은 감동을 받은 바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기철 형제가 올린 자료인데, 어떤 사람이 꿈에 하나님과 면담을 한 대화 내용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래 그대가 나와 면담하겠다고 하는가? 하나님이 물으셨다.
시간이 있으시면요 하고 나는 말했다.
하나님은 미소를 머금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시간은 영원이니라 하셨다.
그런데 물어볼 말이 무엇인가?
당신 보시기에 인간이 당신을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몇 가지 있지, 하나님은 대답하셨다.
인간들은 어린 시절이 지겨워 빨리 어른이 되고자 하지만,
어른이 되선 다시 어린이처럼 되길 원하지.
인간들은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잃지.
인간들은 미래를 불안해하며 현재를 잊고 살지만
현재를 사는 것도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니지.
인간들은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마치 살지 않았던 것처럼 죽지.
하나님께서 내 손을 잡으시고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실로 아름다운 대화이며, 우리가 평소 얼마나 어리석게 살고 있는가를 일깨워주는 대화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우리의 어리석음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러한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는 지혜가 꿈속에서 하나님과의 대화의 형식을 통해 말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꿈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주고, 생시에 우리는 모두 욕심이 눈을 가려 전도된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정작 죽음을 맞아서는 한 번도 제대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허전한 느낌을 가지고 후회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 모습을 깨닫는 지혜는 인생을 내신 하나님의 초월적 시각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릅니다. 인생에 코를 박고 살기 바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일 리 만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경험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모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본다고 어리석은 인간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일단 지혜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미련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미련하다고 아는 사람은 그나마 진짜 미련한 사람이 아니지요.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이라고 보았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말은 본래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쓰여 있던 말로서, 신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신이 아니고 죽을 존재들인 인간임을 알라, 즉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알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참으로 답답하게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남이 나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나를 얼마나 답답하게 여길까를 알고, 내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할 때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아는 지혜는 타자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진정한 타자는 초월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적 시각이 있어야만 우리는 인생의 참 모습을 바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가 참으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지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약 미가서는 인생의 선에 대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 시각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선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7: 8).
인생의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우리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으시고 부모와 같이 우리를 아끼고 돌보시는 주께서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공의를 실천하며 의롭게 사는 것, 인자함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겸손히 우리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가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며, 이것이 인생의 참 선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국내외적으로 매우 뒤숭숭합니다. 국내적으로는 경제가 기울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은 진흙탕 싸움질만 하고 있고, 집단 이기주의는 곳곳에서 판을 치고, 남북관계는 뒷걸음질치고 있어,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 없고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국외적으로는 부와 번영, 힘과 영광의 상징인 미국이 테러 공격을 받은 후 안팎으로 승산이 없어 보이는 전쟁을 치르느라 매우 곤혹스러워 하고 있으며, 미국 국민들은 언제 터질지 모를 테러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누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별탈 없이 잘 굴러만 가던 것처럼 보이던 역사의 수레바퀴에 급 제동이 걸려, 사람들은 문명이란 것이 무엇이며 번영이란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묻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조용히 성찰하기 시작했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행복이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것인지 성찰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습니다. 돈과 힘으로만은 안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우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없이는 인간이 구축해 놓은 번영이란 한낮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숭숭한 세상, 불안한 세상, 우리가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늘 성경 말씀은 매우 평범하나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가 주시는 지혜에 그의 법도대로 겸손히 그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16장에 있는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께서 하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주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
"말씀에 따라 조심하며 사는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주를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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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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