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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요한복음 한인섭............... 조회 수 1873 추천 수 0 2008.08.04 09: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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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3-9 
설교자 : 한인섭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1.11.11 주일설교 
요한복음서 4:3-9, 8:48

저는 대학에서 형법과 형사정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사회의 범죄와 형벌의 문제를 규범과 사실의 각도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년 강의 중에 성경 이야기를 하나 대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남이 생명 등 중대한 위험에 처해있고 조금만 도움을 제공하면 그가 위태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러한 최소한의 도움을 이행하지 않은 행위를 구조불이행죄라 부릅니다. 달리 표현해서 구조불이행죄는 성경속의 사마리아인이 그러했듯이 위험에 처한 자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는 형법상의 의무를 부과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선한 사마리아인법(good Samaritan law)라 부릅니다. 이 법률에 따른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조불이행죄로 처벌될지도 모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법을 여러 나라에서 두고 있지만, 어찌된 셈인지 윤리적 연대를 어느 나라보다 강조할법한 우리 형법에서는 그런 규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자세히 읽어보면 약간은 의아한 질문과 대답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누가복음 10:29 이하를 봅시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즉답 하지 않고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그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거의 때려죽이고 가버렸습니다.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레위인(법률가)도 역시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또 돈까지 주막주인에게 주면서 돈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으니 잘 치유해주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묻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는가?" 이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요. 잠깐 생각해봅시다. 학교시험에 이 문제가 나왔다면 답변은? 그 답은 "사마리아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의 답변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였습니다. 과연 율법사의 답변은 진정한 정답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의문은 왜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답하지 않았을까, 혹은 답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저의 의문은 왜 예수님은 제사장, 레위인 다음에 사마리아인을 언급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엔 사마리아인이라고 굳이 할 것도 없고, "보통사람"이라고 해도 되고 "장사꾼"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비유인지도 확실치 않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함으로써 갑자기 다른 차원의 긴장을 유발시킨 것 같습니다. 그 모종의 긴장 때문에 율법사의 답변이 "사마리아인"이라는 답변을 비껴나가, "자비를 베푼 자"로 추상화해버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교훈은 그냥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착하게 살자"는 정도의 것이 아니고 당시 이스라엘 세계에서 가장 문제중의 하나였음직한 민족내부의 갈등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면서 그에 대한 치유책을 동시에 함축한 것이 아니었던가 감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정말 궁금해지는 것은 도대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가 어떠했길래 하는 의문입니다. 제가 신학전문가가 아니니 깊은 설명을 할 순 없지요. 다만 아마튜어에게도 나름대로의 탐사방법이 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성경 속에 란 글자를 검색해보았더니 구약에서 104개, 신약에서 20개가 나타났습니다. 정말 편리하지요. 그 내용을 봤더니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 열왕기(상,하), 역대하 및 예언어(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등)에 대부분이 나왔고, 신약에는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에 그 내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총 124건의 를 읽어보고 난 뒤의 첫 느낌은, 구약과 신약의 접근방법의 놀라운 차이였습니다.
구약에서 사마리아는 온전히 유대적 관점에서만 접근됩니다. 세가지가 뚜렷합니다. 첫째, 사마리아에 산당을 지어 우상숭배한 이야기가 가장 압도적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폭군으로 지탄받는 아합왕이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았고, 이후의 열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산당을 지어 여호와의 노를 격발했다고 합니다. 그 산당은 요시아왕이 그 제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예언자들은 이를 일러 '바알을 의탁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릇되게 하였다고 비판하고, 우상으로 만든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울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서의 입장은 더욱 극단적입니다. 사마리아는 하나님을 배반한 땅이어서,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여 땅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호세아 13:16)는 등의 비난까지 받습니다. 끔찍하지요. 이 때 사마리아란 말은 거의 소돔이란 말과 다를 바 없이 쓰여집니다.
둘째는 이민족과의 혼혈 이야기입니다.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 등 이방 땅으로 끌어간 대신 이민족 사람들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었고, 그들과 식민지 백성이 된 사마리아(여성)과의 (강제)혼인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님에도 사마리아인들은 이로 인해 인종적 순수성을 훼손하고 혼혈민족이 된 것으로 경멸받게 됩니다. 아마 '더러운, 불순한' 집단으로 낙인찍히는 것이겠지요. 흔히 이러한 낙인은 강대국을 직접 공격할 수 없을 때(그런 힘이 없을 때) 자기 주변의 약한 집단들에게 비난을 전가시키게 되는 방식으로 흔히 나타납니다. 그런 강제력을 행사한 앗수르인들이 아니라 그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마리아인에게 비난이 집중되는 것이지요. 민족분열로 인해 강대국의 침략 앞에 당해야 했던 점이 유대인 성경기술자들이 사마리아를 더욱 비난하는 구실이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셋째는 크게 부각되어 있진 않지만 역대의 사마리아왕들의 치적이 결코 훌륭하지 못했다는 점이지요. 특히 여호와 하나님이 주로 관심을 쏟고 있는 어려운 이웃을 학대하는 자로서의 이미지입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아모스 4:1)이라 할 때 자비심 없이 욕심을 채우는 지배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으로서의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유태인들에게 거의 고착화되었고 자손들에게 그 이미지를 계속 전달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 시절에 이르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할 수 없는 사람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요한 4:9)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말을 거는 유태청년에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는 반문은 이런 배경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고착화된 이미지, 민족분열과 인간관계의 파괴를 야기하는 이 이미지와 정면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3개의 사마리아인 일화가 나타납니다. 그 모든 일화에서 참으로 놀랍게도 사마리아인들은 모두 지극히 훌륭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지요. 그 이야기를 통해 악한으로서의 사마리아인의 이미지는 선의 이미지로 완전히 변화된 반면, 가장 유대적 전통을 대표한 군상(제사장, 레위인)의 이미지는 우리의 이웃일 수 없는 존재로 급전직하해버립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종교적·종족적 고정기준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혈통과 신분을 기준으로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됨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번째 일화는 누가복음 1:11 이하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면서 병을 낫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나음을 입은 사람 가운데 9명은 감사함도 표하지 않고 가버리고 오직 하나가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합니다. 성경은 "저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분명히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인에다 장애인, 그것도 당시 천형으로 여겨졌던 중증 장애인만이 참 믿음을 가졌고, 또 감사의 마음을 돌아와 표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로서의 사마리아인의 고정관념은 이 사건 앞에 산산히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만남은 지나가다 생긴 다소 우연적 만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인과의 첫 대면을 매우 치밀하게 준비합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세번째 이야기, 사마리아 여성과의 만남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처음으로 거두고 그들에게 첫 과제를 부과하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에게로 가라"(마태 10:5)라고 지침을 내립니다. 왜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가지 말라고 했을까요. 매우 큰 의문입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볼 때 그 문제는 갈등과 편견이 중첩된 상황 속에서 준비 없는 접촉은 오히려 재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격이지요. 그런 어설픈 접촉으로 오히려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사마리아로의 통행을 결심합니다.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의 곁에서 그대로 앉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우물이 아니라 '야곱'의 우물을 강조한 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원래 한 조상, 한 믿음 속에서 나왔음을 은근히 배경자락으로 깔기 위해서 인 듯합니다. 정오에 우물곁에 앉은 것은 누구를 기다리는 마음가짐이겠지요. 누구를 기다리는 마음일까요. 우물은 공동체의 중심지이지 생활과 정보의 교류처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물은 통상 여자들의 출입공간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만난 여자는 그 중에서도 남편 다섯을 둔 경험이 있고 또 지금은 남편 아닌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이교도와 피를 섞은 것이 사마리아인의 낙인이라면, 그러한 낙인은 여자에게 더욱 집중되기 마련입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 중에서도 세속적 의미에서 요조숙녀도 아닌 남편을 여럿 거친 소위 '몸 버린 여자', 아마도 그 마을에서 가장 평판이 낮을 법한 여자를 예수님은 미리 알고 기다린 듯이 맞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낯선 유대남자가 우물곁에 있음을 보고 약간은 무섭고 당혹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물을 달라고 말을 겁니다. 당연히 답변은 아니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인에게, 그것도 유대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느냐고 반문합니다. "물"은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자 돈으로 따지면 가장 싸거나 공짜입니다. 그런데 "물"을 달라는 가장 단순한 요청에 대해서도 "유대인-사마리아인", "남성-여성"의 벽을 의식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더 추가하자면 "점잖은 남자가 평판이 별로인 여자에게"까지 추가되면 이렇게 말을 건넨 것 자체가 스캔들 감이겠지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점입가경으로 이어집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구별짓는 종교적 무대였던 논쟁, "예루살렘 정통성" 대 "그리심 정통성"의 복잡한 논의도 예수님은 "예루살렘도 그리심도 아닌"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된다고 하여 장소적 집착을 깨끗하게 털어 냅니다.
이 장면은 여러 모로 쇼킹합니다. 유대남자와 사마리아여인과의 수작 !!
종교교리 이야기를 빼고 순전히 세속적 차원에서 보자면 완전히 스캔들 감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그녀)와 말씀하시나이까" 하고 차마 묻지도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질문도 차마 못 던질 정도의 사건입니다(요한 4:27).
그 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술 더 뜹니다. 짧은 시간 한 여자와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여자를 매개로 하여 동네사람들을 만나고 예수를 믿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이틀을 묵고 떠납니다. 이 생생한 사건을 예감하고 전개시킴으로써, 예수님은 유대와 사마리아, 남자와 여자 사이의 벽을 허물고, 우상숭배와 혼혈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냄으로써 상종 못할 수준의 지역적·종족적 갈등을 서로 대화하고 숙식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적 유대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같이 착한 사마리아인, 장애인 사마리아인, 여성 사마리아인의 세 가지 이야기, 그리고 실천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내부적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그 방법은 △상대를 종족, 지역의 일원으로 보기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대하기, △고통의 공유와 고통의 치유에 동참, △좋은 것은 상대방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 집단의 것으로 만들기. 예수님은 세간의 억측과 오해, 스캔들 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웃을 향한 사랑과 연대를 펼쳤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곰곰이 보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자기 마음 속에서 "원수"라 여겨지는 인간은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원수가 아닌 것으로 자기 마음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어떻게요? 원수인 사마리아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방식으로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상종 못할 존재로 여겨왔던 기존의 관념들은 모두 사마리아인 개개인을 구체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을 한 덩어리로 파악하고, 그들은 이럴 것이라는 스테레오타이프를 만들어내어 상종 못할 존재로 찍어낸 것이겠지요. 그에 반해 예수님은 전체의 덩어리로서의 사마리아인을 으로서 바꿉니다. 착한 상인, 감사 할 줄 아는 장애인,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줄 아는 활발한 여성의 모습은 하나 하나가 손에 잡힐 듯 합니다. 그 사람 개개인을 있는 그대로 대할 때 유대인 누구도 그 개개인을 원수로 볼 순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 하는 예수님의 물음을 다시 상기할 수 있습니다. 집단적 존재로서의 원수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개개인으로 바꾸어놓고, 그 다음 그를 사랑하기는 쉽지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이런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곁의 예가 하나 떠오릅니다. 한국인들은 어릴 때 고무땅 놀이를 하면서 군가를 불렀습니다. 제일 자주 불리웠던 군가 중엔 "무찌르고 말 테야 중공 오랑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중공 하면 상종할 수 없는 오랑캐로 고정관념화 된 상태에서, 한국의 한 청년 안재형은 중공오랑캐의 앞잡이(탁구는 중공의 국위를 선양하고 국가목적에 이바지했으므로 중국탁구선구는 곧 오랑캐의 앞잡이인 셈이지요) 여성을 국제대회에서 만나게 됩니다. 안재형은 그 여성을 중공오랑캐가 아니라 자오즈민이라는 한 여성으로 대했습니다. 중국말도 모르면서, 이국여성, 그중에서도 적성국 여성과의 사귐은 꿈도 못 꾸는 시대에, 그는 자오즈민을 연모하고 온갖 관문을 넘어, 국경과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 결혼했습니다. 안재형은 중국말을 배우고 자오즈민은 한국어를 배우고, 또 안재형은 중국요리를, 자오즈민은 한국요리를 배워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찌르고 말 터인 '원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방식이 이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예수님의 이런 친사마리아적 행동,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원수를 고무·찬양·회합 통신하는 이적행위는 어떻게 평가되었을까요. 사마리아 여자와의 쇼킹한 만남에다 이틀이나 그 마을에서 유숙한다고 했을 때는 앞으로 닥쳐올 일이 충분히 예감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대의 지식인들은 별의별 방법으로 예수를 시험하고 질문을 던지다 잘 안 되자, 최후의 카드, 유대식 색깔공세의 무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한 8:48)는 비난입니다. 좋은 것은 사마리아인에게, 비판은 유대의 권력층에 집중하니 그런 모진 색깔공세가 나올 법도 하지요. 성경 귀절을 자세히 보면, 그런 비난은 한차례가 아니라 예수를 죽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를 기피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마리아의 존재를 끝까지 의식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인상적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란 말은 굳이 안 넣어도 뜻이 잘 통하는데, 그럼에도 예수님의 의식 속에는 사마리아가 항상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예수님 승천 후에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마리아로 이제는 주저없이 진출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사도행전 8:5), 그에 따라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또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갔다고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 공동체 속에서 지역차별·인종차별은 완전히 사라졌고, 모두가 하나님의 형제자매로서 같이 기쁘게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지요. 이는 소돔과 고모라와 비슷한 낙인을 찍어 민족분열을 지속해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관계를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형성했고, 그를 토대로 예수공동체 전체가 편견과 차별을 넘어 평안하고 든든하게 땅끝까지 퍼져나갈 수 있었던 놀라운 이야기 앞에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반성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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