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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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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혜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1.12.9 주일설교 |
새천년이 된다고 새 설계를 하고 새 질서를 꿈꾸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올해 초에는 21세기가 시작된다고 다시 새 각오를 했었는데, 1년이 다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세계가 이웃이 되고, 지구촌 시대가 되었다고 떠들었습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배려의 논리가 통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거장의 시대는 가고 풀뿌리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9·11 테러는 지구촌이니 이웃이니 하는 이야기를 쑥 들어가게 만들었고, 자국의 이해와 보호를 위해 전보다 더 나와 너를 가르고, 차별과 압제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국내사정을 보아도 정의도 없고 배려도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예수님 오신 지 2,000년이 지났건만, 사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저의 경우를 보면 해가 바뀔 때마다 새 각오를 하곤 하지만, 각오가 나를 바꾸어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직도 구습과 옛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고정관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고,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깨고자 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인간의 원죄: 욕망과 고정관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욕망과 더불어 태어납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은 잘 먹고, 안락하고, 즐겁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기 때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무엇이나 빨고, 아무데서나 싸는 행동을 합니다. 사회는 이러한 것을 금지하고 제도 속의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이 사회에서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들은 사회의 눈치를 보고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인지를 배우며 적응해 갑니다. 그런데 부모나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가르치는 원칙과 질서는 정의롭고 옳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은 누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지, 누구한테 공손해야 하는지, 어느 편에 줄을 서는 게 이로운지, 어떤 사람들을 무시해도 되는지를 실천적으로, 몸으로 보여줍니다. 아기들은 생각보다 매우 똑똑하고 유능해서 사회가 전달하는 무언의 신호들을 빨리도 알아챕니다. 아기들은 사람들을 범주로 나누고, 누가 권력을 가졌는지, 자기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아채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배워갑니다. 여자/남자, 가진 자/못 가진 자, 배운 자/못 배운 자, 흑인/백인, 아이/어른을 가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생명을 주셨는데, 사회는 이유없이 편을 가르고 무시하며 약자를 누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욕망과 더불어 사회가 가르치는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악에 물들고, 죄를 몸에 익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원죄란 바로 욕망과 더불어 사회에 녹아 있는 고정관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사회 속에서 배우고 그저 따라 가기만 하는데도 죄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란 우리의 숨쉬는 환경 내에 녹아 있는 공기와도 같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상의 죄가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게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지난 주일 우리는 한 형제님 댁을 방문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형제님은 가나에서 온 흑인 노동자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분들은 가나에서 대학도 나오고, 능력이 있는 분들이라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이 검다는 이유로 낮은 보수 뿐 아니라 집을 내어주지도 않아서, 몇 명이 모여 컨테이너 박스를 사서 외진 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운 데서 살다 온 그들은 너무나 추운 날씨에 난방도 제대로 안된 컨테이너 박스에서 옷이나 이불도 변변히 없이 사는데, 작년에는 추운 데서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추위에 떨며 살아야 하는 그들을 보면서,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마 그들을 다르다는 이유로 알아보려고도 안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태도는 인간관계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득실을 계산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경쟁심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 높은 지위의 사람, 득이 될 사람에게는 주의를 기울이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며 이웃이 되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정관념을 적용하여 단정해 버리고 무시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 가나인들을 흑인으로, 이방인으로만 바라보았지, 개개인의 사정은 알아보려고도 않고 더구나 이웃으로는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2. 구습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자동성과 암묵성
우리가 일생동안 습득한 사회의 질서나 고정관념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고, 내 생각이 되었으며, 내 행동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인생초기부터 너무나도 반복해서 학습하고 연습해왔기 때문에 의식 이전 수준에서부터 자동적으로 작동합니다. 최근의 심리학 실험들은 우리들이 깨닫기도 전부터 고정관념이 작동하고, 암묵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밝힙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글자를 1/10초 제시한 후 바로 그 자리에 다른 자극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는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다음에 고정관념과 관련된 단어들('여성'에 대해서는 '스커트', '설거지' 등)이 나타나면 다른 중립단어들('사과', '칠판')에 비해 읽는 속도가 촉진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은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고 의식적인 검사에서는 편견이 없는 것으로 나오는데도, 암묵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화면에 백인의 얼굴이 나오면 오른손으로 키를 누르고, 흑인얼굴이 나오면 왼손으로 키를 누릅니다. 연습을 몇 번하고나면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와 관련 된 단어들 예를 들어, '우리', '내 것', '나' 등의 단어가 나오면 왼손 키를 누르고, '너희', '그들', '네 것' 등의 단어가 나오면 오른손 키를 누릅니다.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흑인얼굴'이나 '나', '우리', '나의' 단어가 나오면 왼쪽, '백인얼굴'이나 '너희', '그들'의 단어가 나오면 오른쪽 키를 누릅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됩니다. 우리는 백인도 아니면서 백인에다가 우리, 나를 집어 넣고, 너희나 그들은 흑인에다가 놓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경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차별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고정관념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원죄의 굴레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세상을 지으시고 만족해 하셨던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한계 속에 갇혀서 이분법적으로 편가르고, 우리편은 좋아하고 너희 편은 싫어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아기들에게 세상 규칙을 가르칠 때, 돼/안 돼, 맞아/틀려, 좋아/싫어 식으로 가르쳐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으로 교묘하게 자신의 고정관념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유없이 싫은데, 싫다고 하기에는 부담이 됩니다. 따라서 자기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못을 캐내려고 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게 마련이고, 결국 잘못은 발견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확인되어 더욱더 싫어지게 됩니다.
우리들은 인종이나 여성, 지역에 대한 고정관념 외에도 수많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인과 불교도, 신자와 불신자, 장애인과 정상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능력 있는 자와 없는 자 등 수없이 많은 편가르기를 하고 고정관념을 적용시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 시대에도 수많은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리와 창녀, 문둥병자, 사마리아인 등... 그들을 차별하고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3. 자기 이행적 예언효과
그런데 고정관념은 다른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거나 차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고정관념의 대상 스스로가 고정관념을 실천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순환성을 갖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성은 수학을 못한다."고 믿는 여성에게 "수학은 어렵다."는 말을 들려준 뒤 수학문제를 풀게 했을 때 수학점수가 전보다 더 낮아졌다는 것을 밝힌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깡패라고 보게 되면, 그를 깡패로 취급하여 피하고 말도 붙이지 않으며 그래서 그 사람은 정말로 깡패가 되어갑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느 범주에 드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여성이므로 알게 모르게 여성에게 부과하는 역할들에 적응되었고, 거기에 맞는 행동들이 길러졌습니다. 내게 맡겨진 역할을 나의 달란트라고 생각해 버리고 거기 안주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의 자동적인 반응은 고정관념적입니다. 저는 남들 앞에 나와 서는 것보다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분수를 알고 적응한 결과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처럼, 저도 그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예수님의 고정관념
그렇다면, 예수님은 고정관념이 전혀 없으셨을까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나와 유사하게 인간 사회 속에 사시면서 사회가 가진 고정관념에 동조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가르침의 기법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예수님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유대인의 편에서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6장 32절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리고 세리에 대해서도 고정관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47절에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 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고정관념의 내용은 희랍인 수로보니게 여자가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 주시기를 간청했을 때,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마가 7:24∼30) 편을 가르신 것입니다.
5. 예수님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어떻게 하셨나?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도 가지고 있는 이런 고정관념들을 깨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라고 예수님의 고정관념을 지적했을 때에,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하시면서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심으로 자신을 수정하십니다. 우리가 편을 가르고 상대편을 배제시키며 정당화하고 싫어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한 이방사람이나 세리를 차별하시지 않고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물을 달라고 하시며 대화를 나누셨고,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사마리아인의 문둥병을 고쳐 주셨으며, 세리와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보다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누가 10:30∼37)나,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세리의 이야기(누가 18:10∼14)를 들려주심으로 인간이 속한 범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시며, 우리에게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예수 따름이로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고정관념은 나뿐 아니라 예수님조차도 가지셨던 반응이지만,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지만 노력하면 예수를 좇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는 고정관념을 사용하지만, 의도에 따라 그리고 목적에 따라 그것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활성화된 고정관념이라 할지라도 이후에 의식적으로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정관념을 깰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신성을 지닌 분이지만, 아무 노력없이 위에서 내려오는 능력으로 고정관념을 깨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새벽 미명부터 기도하셨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깨어 항상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냥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깨어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구하는 고정관념적인 기복적인 기도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사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집단,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동적으로 죄의 사슬에 묶이려는 우리의 무의식적 고정관념적인 습성에서 벗어나도록 먼저 '깨어서' 의식을 명료하게 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를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고정관념을 깨는 행동들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고정관념을 깨고 나오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면서 칭찬하신 사람들을 보면, 자기를 고정관념의 희생자로 두지 않고 그것을 뚫고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마태 8:2∼4)에 나오는 나병환자를 생각해 봅시다. 나병환자는 사실상 사회적 고정관념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싫어함을 당하고, 그래서 자신의 나병을 숨기기 위해 숨어살든가 병난 부분을 가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자기를 드러내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 환자에게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시고, 그를 손을 대어 고치십니다. 그리고 그를 숨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증거 하도록 파송하십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던 것은 차별 당하고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그 원인을 수정하겠다는 의지이고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란 바로 그 상태에서 놓여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증거하고 새로운 행동을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감추는 우리의 약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약점들을 감추느라 숨어 지내다 보니, 저는 여전히 새해나 연말이나 같은 상태입니다. 수정할 의지를 가지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6. 맺는 말
올해가 거의 다 가고 있습니다. 한 해를 결산해 볼 때,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옛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이 들어가면서 더 고집스러워져가는 건 아닌지요.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이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나 우리의 자동적인 반응은 고정관념의 틀 속에 살던 그 습성에 안주하고 싶어집니다. 교회에 와서도 뒤에서 청소하고 설거지는 하겠는데, 말씀증거하고 사회를 보고 대표기도하는 건 정말 두렵고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달라지고 행동하기를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숨어서 옛 모습 그대로 달라지지 않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마17:17)."라고 하십니다.
21세기의 첫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처녀의 임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그 고정관념을 깨고 어린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수용한 마리아는 예수님을 몸에 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깨어 기도함으로, 고정관념을 깨고 예수님을 품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럴 때에 역사의 흐름도 성령을 거스르지 않게 되리라 믿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저의 경우를 보면 해가 바뀔 때마다 새 각오를 하곤 하지만, 각오가 나를 바꾸어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직도 구습과 옛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고정관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고,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깨고자 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인간의 원죄: 욕망과 고정관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욕망과 더불어 태어납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은 잘 먹고, 안락하고, 즐겁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기 때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무엇이나 빨고, 아무데서나 싸는 행동을 합니다. 사회는 이러한 것을 금지하고 제도 속의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이 사회에서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들은 사회의 눈치를 보고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인지를 배우며 적응해 갑니다. 그런데 부모나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가르치는 원칙과 질서는 정의롭고 옳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은 누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지, 누구한테 공손해야 하는지, 어느 편에 줄을 서는 게 이로운지, 어떤 사람들을 무시해도 되는지를 실천적으로, 몸으로 보여줍니다. 아기들은 생각보다 매우 똑똑하고 유능해서 사회가 전달하는 무언의 신호들을 빨리도 알아챕니다. 아기들은 사람들을 범주로 나누고, 누가 권력을 가졌는지, 자기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아채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배워갑니다. 여자/남자, 가진 자/못 가진 자, 배운 자/못 배운 자, 흑인/백인, 아이/어른을 가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생명을 주셨는데, 사회는 이유없이 편을 가르고 무시하며 약자를 누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욕망과 더불어 사회가 가르치는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악에 물들고, 죄를 몸에 익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원죄란 바로 욕망과 더불어 사회에 녹아 있는 고정관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사회 속에서 배우고 그저 따라 가기만 하는데도 죄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란 우리의 숨쉬는 환경 내에 녹아 있는 공기와도 같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상의 죄가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게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지난 주일 우리는 한 형제님 댁을 방문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형제님은 가나에서 온 흑인 노동자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분들은 가나에서 대학도 나오고, 능력이 있는 분들이라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이 검다는 이유로 낮은 보수 뿐 아니라 집을 내어주지도 않아서, 몇 명이 모여 컨테이너 박스를 사서 외진 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운 데서 살다 온 그들은 너무나 추운 날씨에 난방도 제대로 안된 컨테이너 박스에서 옷이나 이불도 변변히 없이 사는데, 작년에는 추운 데서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추위에 떨며 살아야 하는 그들을 보면서,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마 그들을 다르다는 이유로 알아보려고도 안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태도는 인간관계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득실을 계산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경쟁심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 높은 지위의 사람, 득이 될 사람에게는 주의를 기울이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며 이웃이 되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정관념을 적용하여 단정해 버리고 무시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 가나인들을 흑인으로, 이방인으로만 바라보았지, 개개인의 사정은 알아보려고도 않고 더구나 이웃으로는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2. 구습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자동성과 암묵성
우리가 일생동안 습득한 사회의 질서나 고정관념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고, 내 생각이 되었으며, 내 행동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인생초기부터 너무나도 반복해서 학습하고 연습해왔기 때문에 의식 이전 수준에서부터 자동적으로 작동합니다. 최근의 심리학 실험들은 우리들이 깨닫기도 전부터 고정관념이 작동하고, 암묵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밝힙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글자를 1/10초 제시한 후 바로 그 자리에 다른 자극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는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다음에 고정관념과 관련된 단어들('여성'에 대해서는 '스커트', '설거지' 등)이 나타나면 다른 중립단어들('사과', '칠판')에 비해 읽는 속도가 촉진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은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고 의식적인 검사에서는 편견이 없는 것으로 나오는데도, 암묵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화면에 백인의 얼굴이 나오면 오른손으로 키를 누르고, 흑인얼굴이 나오면 왼손으로 키를 누릅니다. 연습을 몇 번하고나면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와 관련 된 단어들 예를 들어, '우리', '내 것', '나' 등의 단어가 나오면 왼손 키를 누르고, '너희', '그들', '네 것' 등의 단어가 나오면 오른손 키를 누릅니다.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흑인얼굴'이나 '나', '우리', '나의' 단어가 나오면 왼쪽, '백인얼굴'이나 '너희', '그들'의 단어가 나오면 오른쪽 키를 누릅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됩니다. 우리는 백인도 아니면서 백인에다가 우리, 나를 집어 넣고, 너희나 그들은 흑인에다가 놓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경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차별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고정관념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원죄의 굴레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세상을 지으시고 만족해 하셨던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한계 속에 갇혀서 이분법적으로 편가르고, 우리편은 좋아하고 너희 편은 싫어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아기들에게 세상 규칙을 가르칠 때, 돼/안 돼, 맞아/틀려, 좋아/싫어 식으로 가르쳐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으로 교묘하게 자신의 고정관념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유없이 싫은데, 싫다고 하기에는 부담이 됩니다. 따라서 자기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못을 캐내려고 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게 마련이고, 결국 잘못은 발견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확인되어 더욱더 싫어지게 됩니다.
우리들은 인종이나 여성, 지역에 대한 고정관념 외에도 수많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인과 불교도, 신자와 불신자, 장애인과 정상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능력 있는 자와 없는 자 등 수없이 많은 편가르기를 하고 고정관념을 적용시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 시대에도 수많은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리와 창녀, 문둥병자, 사마리아인 등... 그들을 차별하고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3. 자기 이행적 예언효과
그런데 고정관념은 다른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거나 차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고정관념의 대상 스스로가 고정관념을 실천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순환성을 갖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성은 수학을 못한다."고 믿는 여성에게 "수학은 어렵다."는 말을 들려준 뒤 수학문제를 풀게 했을 때 수학점수가 전보다 더 낮아졌다는 것을 밝힌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깡패라고 보게 되면, 그를 깡패로 취급하여 피하고 말도 붙이지 않으며 그래서 그 사람은 정말로 깡패가 되어갑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느 범주에 드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여성이므로 알게 모르게 여성에게 부과하는 역할들에 적응되었고, 거기에 맞는 행동들이 길러졌습니다. 내게 맡겨진 역할을 나의 달란트라고 생각해 버리고 거기 안주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의 자동적인 반응은 고정관념적입니다. 저는 남들 앞에 나와 서는 것보다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분수를 알고 적응한 결과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처럼, 저도 그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예수님의 고정관념
그렇다면, 예수님은 고정관념이 전혀 없으셨을까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나와 유사하게 인간 사회 속에 사시면서 사회가 가진 고정관념에 동조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가르침의 기법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예수님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유대인의 편에서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6장 32절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리고 세리에 대해서도 고정관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47절에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 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고정관념의 내용은 희랍인 수로보니게 여자가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 주시기를 간청했을 때,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마가 7:24∼30) 편을 가르신 것입니다.
5. 예수님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어떻게 하셨나?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도 가지고 있는 이런 고정관념들을 깨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라고 예수님의 고정관념을 지적했을 때에,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하시면서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심으로 자신을 수정하십니다. 우리가 편을 가르고 상대편을 배제시키며 정당화하고 싫어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한 이방사람이나 세리를 차별하시지 않고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물을 달라고 하시며 대화를 나누셨고,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사마리아인의 문둥병을 고쳐 주셨으며, 세리와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보다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누가 10:30∼37)나,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세리의 이야기(누가 18:10∼14)를 들려주심으로 인간이 속한 범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시며, 우리에게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예수 따름이로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고정관념은 나뿐 아니라 예수님조차도 가지셨던 반응이지만,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지만 노력하면 예수를 좇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는 고정관념을 사용하지만, 의도에 따라 그리고 목적에 따라 그것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활성화된 고정관념이라 할지라도 이후에 의식적으로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정관념을 깰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신성을 지닌 분이지만, 아무 노력없이 위에서 내려오는 능력으로 고정관념을 깨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새벽 미명부터 기도하셨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깨어 항상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냥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깨어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구하는 고정관념적인 기복적인 기도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사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집단,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동적으로 죄의 사슬에 묶이려는 우리의 무의식적 고정관념적인 습성에서 벗어나도록 먼저 '깨어서' 의식을 명료하게 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를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고정관념을 깨는 행동들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고정관념을 깨고 나오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면서 칭찬하신 사람들을 보면, 자기를 고정관념의 희생자로 두지 않고 그것을 뚫고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마태 8:2∼4)에 나오는 나병환자를 생각해 봅시다. 나병환자는 사실상 사회적 고정관념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싫어함을 당하고, 그래서 자신의 나병을 숨기기 위해 숨어살든가 병난 부분을 가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자기를 드러내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 환자에게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시고, 그를 손을 대어 고치십니다. 그리고 그를 숨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증거 하도록 파송하십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던 것은 차별 당하고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그 원인을 수정하겠다는 의지이고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란 바로 그 상태에서 놓여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증거하고 새로운 행동을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감추는 우리의 약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약점들을 감추느라 숨어 지내다 보니, 저는 여전히 새해나 연말이나 같은 상태입니다. 수정할 의지를 가지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6. 맺는 말
올해가 거의 다 가고 있습니다. 한 해를 결산해 볼 때,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옛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이 들어가면서 더 고집스러워져가는 건 아닌지요.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이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나 우리의 자동적인 반응은 고정관념의 틀 속에 살던 그 습성에 안주하고 싶어집니다. 교회에 와서도 뒤에서 청소하고 설거지는 하겠는데, 말씀증거하고 사회를 보고 대표기도하는 건 정말 두렵고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달라지고 행동하기를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숨어서 옛 모습 그대로 달라지지 않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마17:17)."라고 하십니다.
21세기의 첫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처녀의 임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그 고정관념을 깨고 어린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수용한 마리아는 예수님을 몸에 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깨어 기도함으로, 고정관념을 깨고 예수님을 품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럴 때에 역사의 흐름도 성령을 거스르지 않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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