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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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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창모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2001.12.16 주일설교 |
어렸을 때의 일이다. 종종 아버지께서 부르셔서 가보면 머리에 나있는 흰 머리카락을 뽑아달라는 것이다. 한 개를 뽑는데 10원씩을 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왜 그런 일을 시키시는지 이해도 못하면서, 돈 버는 재미로 솔솔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런데 요즘 제게 그런 문제가 발생했다.
의학적으로 왜 흰 머리카락이 생겨나는지 불분명하다하나, 우리가 알다시피 늙으면 생겨나는 것이 흰 머리카락이 아닌가? 여성에게 있어서 흰 머리카락은 폐경기에 이른 증거라는 說도 있다. 더 이상 생산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검고 많은 숱의 머리카락은 젊음의 상징이요, 힘의 상징이다. 머리카락은 그 사람의 건강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가? 삼손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반면, 흰 머리카락이 생겨난다는 것은 인생의 진액(액기스)이 다 소진(消盡)되어 감을 의미한다. 가을되면 낙엽에 물이 들고, 이내 바람불면 후두득 떨어지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이, 백발(白髮)은 힘의 퇴조를 알리는 신호이다. 힘을 상실해 가는 신체상의 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백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종 백발은 인생의 관록을 말해주기도 하나, 흰 머리카락을 좋아하여 검은 머리카락을 희게 물들이는 이는 많지 않다.
다윗 왕은 늙어 몸에 찬기가 돌아, 신하들이 잠자리에 젊은 처녀를 넣어 주곤 하였다는데, 그런데도 냉기가 가시지 않았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젊었을 때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고생스러운 날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너는 창조자를 기억하라 .....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높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전도서 12:3-5)라 하였다.
그런데, 천수를 다하고도 원기 왕성하게 살다가 간 인물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는데,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신명기 34:7)고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나이 들어도 힘이 넘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름대로 어떤 비결이 있는 듯 싶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소식(小食)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지만 진짜 힘있는 노인은 평생을 초지일관(初志一貫) 자신의 신조를 지키며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성경의 오늘 본문에서는 백발이 성성하고 힘이 다 빠져버린 에브라임에 관해 말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본래 히브리어로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들나귀'(wild ass)라는 말이다(호8:9 "저희가 홀로 처한 들나귀처럼"). 들나귀는 본래 힘이 장사라서 왠만한 코끼리도 당하지를 못한다. 본래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가장 큰 지파로써 힘이 막강하였다. 인구가 가장 많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받은 영토는 가장 넓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에도 북이스라엘은 에브라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힘이 다 빠졌다는 말인가? 본문 v.8a에 의하면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라고 말하고 있다. '혼잡되다'(yitbolal)는 말은 창세기 11:9의 바벨탑 사건 이 후 언어가 '혼잡되었다'(balal)는 다는 말과 동일한 단어이다. 본문은 영어로 "He is rotting away"("썩다, "쇠약해지다," JPS), 혹은 "mix"("혼합되다", RSV), "confound"("본말을 전도하다"), "mingle"("섞다"), "confuse"("혼동하다") 등으로 번역하였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다른 민족들 속에 섞여서 튀기가 되었다."고 의역(意譯)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에브라임이 힘이 다 빠진 이유는 잡종(雜種)이 되었기 때문인데, 역사적으로 이민족들과 혈통적인 혼혈을 의미하며, 동시에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 동화(同化)되었음을 말한다. 사상이나 종교나 생활습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점은 사라지고 이방인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 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북이스라엘은 바알 신을 섬기며,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앙은 퇴색되어갔던 시대였다.
사실, 우리의 모습에서도 이렇게 뒤죽박죽 섞여버려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조차 어려운 일들이 적지 않다. 문제의 시작은 애매모호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지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상태 말이다. 여기서는 힘을 쓸 수가 없다.
우리가 어렸을 때, 문턱을 밟고 서 있으면 어른들은 어떤 합리적인 설명 없이 그것을 못하게 강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턱'은 방 안쪽도 아니고 바깥쪽도 아닌 어중간한 곳으로써 모순과 대립되는 것들을 매개하는 매개 항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영과 육을 오고가는 영매들에 의해 사로잡힌 곳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창세기 4장 7b에도 "문지방에 죄가 귀신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다"는 본문이 있다.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세계와 개념을 범주화하여 애매함이 섞일 여지를 없애는 것을 좋아했다.: 하나의 개체는 인간이던가 동물이던가 어느 한쪽이며, 아이이던가 어른이던가 어느 한쪽이며, 기혼이던가 미혼이던가, 살아 있던가 죽었던가, 밖이던가 안이던가, 어느 한쪽이어야 한다. 양다리 걸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인 문턱은 불확실성의 상태이며, 불확실성은 불안감을 낳아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입술이나 성기(性器)의 접촉을 다른 신체적인 접촉과는 다른 차원에서 위험하게 취급하는 까닭은 입술은 피부도 아니고 창자도 아닌 어중간한 지역이며, 따라서 위험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성 접촉 역시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남자 성기의 드러난 피부가 여자 성기의 감추어진 창자 속으로 삽입됨으로써 피부와 창자가 뒤섞여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뒤섞임과 애매 모호함은 깨끗함과 순결함의 적이다. 물론 입술과 성기의 감각신경(sensory nerve)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가 신체의 다른 곳 보다 매우 넓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도로의 중앙차선을 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인 것처럼, 경계/금기를 넘어가는 것은 위험한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금기는 성(聖)과 속(俗), 깨끗함과 더러움, 남자와 여자, 종(種)과 종(種)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하게 해주며, 그것은 곧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엄격한 기초가 된다.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진 질서는 만물의 길이고, 질서가 전부다. '차이'가 없는 곳에는 위험도 없고, 따라서 오염도 없다. 차이를 거세하려 들면 충돌하게 되고, 결국 차이가 파괴/소멸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죄가 시작된다.
신처럼 되려고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 남자가 되려는 여자들, 동물과 교합하는 인간들, 유전자를 조작하여 종과 종의 간격을 파괴하는 자들 모두가 죄인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뒤섞어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혐오하신다.
퇴색한 에브라임 사람들에 관하여 본문은 다시 설명하기를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v.8b)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주로 빵을 사다 먹기 때문에 직접 구울 기회가 많지 않지만, 이스라엘에서 살 때는 주로 집에서 빵을 구워 먹었다. 지금도 사막의 유목민들이 먹는 '걸레 빵'이라는 것이 있는데, 솓뚜껑 같이 생긴 것을 불 위에 올려놓고, 반죽해서 넓게 펼쳐 만든 밀가루를 얹어 굽다가 얼른 뒤집어 반대쪽을 구우면 노릇노릇한 게 맛이 기가 막힌다.
그런데 '뒤집지 않은 빵'은 한쪽은 까맣게 타고 다른 한쪽은 설익은 그런 빵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쪽은 멀쩡한데 다른 한쪽은 병들고, 겉은 멀쩡한데 속은 썩어 있다는 것이다.
(예)시집 온 서툰 며누리가 너무도 분주하게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데, 불에 올려놓은 생선이 타는 것을 보고도 뒷짐지고 구경만 하던 시어머니가 "얘야! 조기가 타는구나!" 하였다. 은근히 화가 난 며누리가 이르기를 "어머님! 지까진게 뜨거우면 돌아눕겠지요!" 하더란다.
앞은 타고 뒤는 설익은 생선처럼 앞뒤가 안 맞는 이중적인 삶,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삶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쪽은 틀림없이 크리스챤인데 다른 쪽은 세속인과 다름 아니요, 한쪽은 분명 교회인데 다른 쪽은 꼭 회사 닮았고, 한쪽은 꼭 성직자인데 다른 쪽은 꼭 정치인 닮았으며, 한 쪽은 천사인데 다른 쪽은 악마다. 그러니 들나귀 같던 힘은 다 어디로 가고, 백발만 휘날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약하면 에브라임은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른 채 뒤섞여 있으니 힘이 없이 되었고, 이중적인 생활과 인격을 소유하였으니 힘이 없다는 말이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 구나"(v.9).
곡식이 자라지 못하도록 잡초가 땅의 모든 영양분을 빼앗아 가듯이, 인생의 진액을 모두 빼앗아 가도 모르는 인생들아! 인생의 힘이 쇠잔해 가는데도 아직까지 쾌락의 벼개를 베고, 인생을 지루하고 게으르게 소모하는 삼손의 검은 머리카락아!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사는 들나귀 같은 젊은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나요? 밥통같이 밥만 많이 먹으면 힘이 솟나요? 일평생 심혈을 기울여 재산을 모으면 일평생 힘을 빼앗기지 않고 살 수 있는 건가요? (돈 많은 이병철도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처럼 맥없이 쓰러져 가더군요.)
하나님의 자녀가 그 젊은 힘을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이사야 45장 24절에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은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에게만 의와 힘이 있다.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다.
(예) 내가 잘 아는 장로님은 기업을 크게 일으켜 돈이 굉장히 많으신데, 외양은 꼭 시골 할아버지처럼 생기셨다. 한 번은 손자 녀석이 학교에서 소풍을 간다기에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사주고 싶어서 함께 집 앞 작은 가게에 갔다. 원하는 것이 뭐냐 하니 음료수 한 개를 짚더란다. 돈을 지불하려고 계산대에 섰는데,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더란다. 아차 싶어 계산대의 그 청년에게 사정을 했다. "내가 여기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고, 얘가 내 손잔데, 아침에 소풍 간다기에 음료수 한 개 사주려고 나왔는데, 그만 돈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노라고. 그러니 금방 돈을 가져다 줄테니 음료수를 그냥 줄 수 있느냐?"고. 아, 그런데 그 청년 왈 "안 된다"는 것이었다. 통사정을 해도 않되어서 하는 수 없이 그냥 놓고 나왔는데, 1200원이 없어서 손자 앞에서 할아버지 체면이 얼마나 깍였는지? 생애 최고로 수치감 같은 것을 느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었다.
아무리 돈 많은 회장님도 당장 호주머니에 1200원이 없어서, 형편없는 인간취급 받더라는 말씀에 모두가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돈이 힘이 될 때가 있지만, 당장 호주머니에 1000원 짜리 한 장이 없으니 전혀 힘을 쓰지 못할 때도 있더라.
또, 하박국 3장 19절에 이르기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힘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같이 않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힘의 원천은 돈이요 권력이요 명예라고 소리치지만, 우리가 아는 힘의 근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요 소망인 것이다.
영혼이 젊어지고 힘이 있다는 것은 세상과 혼잡하게 살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는 새 힘을 공급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세상에 나가 힘이 없는 까닭은 세상과 타협하고 짝짓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고 그럴듯해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당장 눈에 보이는 개인의 이익이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애써 살아가려는 마음을 혼잡케 하고 있다. 목적보다는 수단이 우선하기 때문에 적당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진 것이다. 기진맥진 한 사람이 어떻게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겠읍니까?
저는 노년에도 존경받는 분들을 보면, "평생을 한결같이, 그야말로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사시는 분"들임을 알게된다. 평생을 사귀어도 겉과 속이 똑같아, 변함이 없으신 분들 말입니다. 그런 분들에게서는 힘이 느껴집니다.
교회 다니면서 제게는 하나의 습관이 생겼는데, 아침 성경공부 마치고 본당에 들어 와서 자리를 쭉 훑어보는데, 항상 그 자리에 계시던 장로님, 권사님들이 보여야 안심이 간다. 평생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분들의 백발에서 들나귀 같은 강렬한 힘을 느낀다.
테레사 수녀가 존경받는 까닭은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비록 길바닥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병원 침대에 옮겨 놓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바로 그 일만을 평생을 바쳐 함으로써 그녀는 그 어떤 사람도 갖지 못한 힘을 갖게된 것이다. 은행의 한 청원경찰, 그가 친절하게 그 자리를 30년 동안 지킴으로써, 수 천명의 고객을 가지게 된 것, 이것이 바로 힘의 원동력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존경받는 어른이 없다고 말하는데, 자꾸 제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적인 풍토 때문이다. 자기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불러 내 정치에 입문시키면서, 본래의 모습을 상실해 가는 분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씀에 확신이 없으니, 세상을 사는데 힘이 없는 것이다. 지도자가 힘이 없는 까닭은 그 분의 삶이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가 힘이 없는 까닭은 교회다움이 사라지고 세상과 뒤섞여버려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요, 그것이 힘을 갖는 비결이다.
만일 성도님들 가운데서 '나는 늙어 힘이 없어'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성도님의 인생이 '한쪽은 타 들어가고 다른 한쪽은 아직 익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뒤집지 않은 빵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흰 머리카락이 앉기 시작하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영혼의 머리에 흰 서리가 앉기 시작한다.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날던 성령의 힘은 어디로 가버리고, 겉은 아직 시커멓고 멀쩡한데 속은 이미 다 늙어 가지고 백발이 휘날리는구나!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덧 영적인 힘이 다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는 비록 머리가 희끗희끗한 성도들이 많지만, 참으로 힘이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지키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누가 압니까? 혹 이미 희어진 머리카락에 검은 염색하고 앉아 있는 성도들이 있는지? 또 혹시 압니까? 속 사람의 힘은 세상에 다 빼앗기고, 힘없는 겉 사람(껍데기)만 앉아있는 젊은 늙은이들(검은 백발)이 이 가운데에도 계신지? 그래서 조만간 흰 머리카락 뽑아주면 돈주겠다는 사람이 생겨날는지?
사랑하는 성도님들! 올해가 가기 전에
백발이 된 영혼에 검은 물감으로 염색합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의학적으로 왜 흰 머리카락이 생겨나는지 불분명하다하나, 우리가 알다시피 늙으면 생겨나는 것이 흰 머리카락이 아닌가? 여성에게 있어서 흰 머리카락은 폐경기에 이른 증거라는 說도 있다. 더 이상 생산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검고 많은 숱의 머리카락은 젊음의 상징이요, 힘의 상징이다. 머리카락은 그 사람의 건강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가? 삼손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반면, 흰 머리카락이 생겨난다는 것은 인생의 진액(액기스)이 다 소진(消盡)되어 감을 의미한다. 가을되면 낙엽에 물이 들고, 이내 바람불면 후두득 떨어지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이, 백발(白髮)은 힘의 퇴조를 알리는 신호이다. 힘을 상실해 가는 신체상의 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백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종 백발은 인생의 관록을 말해주기도 하나, 흰 머리카락을 좋아하여 검은 머리카락을 희게 물들이는 이는 많지 않다.
다윗 왕은 늙어 몸에 찬기가 돌아, 신하들이 잠자리에 젊은 처녀를 넣어 주곤 하였다는데, 그런데도 냉기가 가시지 않았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젊었을 때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고생스러운 날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너는 창조자를 기억하라 .....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높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전도서 12:3-5)라 하였다.
그런데, 천수를 다하고도 원기 왕성하게 살다가 간 인물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는데,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신명기 34:7)고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나이 들어도 힘이 넘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름대로 어떤 비결이 있는 듯 싶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소식(小食)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지만 진짜 힘있는 노인은 평생을 초지일관(初志一貫) 자신의 신조를 지키며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성경의 오늘 본문에서는 백발이 성성하고 힘이 다 빠져버린 에브라임에 관해 말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본래 히브리어로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들나귀'(wild ass)라는 말이다(호8:9 "저희가 홀로 처한 들나귀처럼"). 들나귀는 본래 힘이 장사라서 왠만한 코끼리도 당하지를 못한다. 본래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가장 큰 지파로써 힘이 막강하였다. 인구가 가장 많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받은 영토는 가장 넓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에도 북이스라엘은 에브라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힘이 다 빠졌다는 말인가? 본문 v.8a에 의하면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라고 말하고 있다. '혼잡되다'(yitbolal)는 말은 창세기 11:9의 바벨탑 사건 이 후 언어가 '혼잡되었다'(balal)는 다는 말과 동일한 단어이다. 본문은 영어로 "He is rotting away"("썩다, "쇠약해지다," JPS), 혹은 "mix"("혼합되다", RSV), "confound"("본말을 전도하다"), "mingle"("섞다"), "confuse"("혼동하다") 등으로 번역하였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다른 민족들 속에 섞여서 튀기가 되었다."고 의역(意譯)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에브라임이 힘이 다 빠진 이유는 잡종(雜種)이 되었기 때문인데, 역사적으로 이민족들과 혈통적인 혼혈을 의미하며, 동시에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 동화(同化)되었음을 말한다. 사상이나 종교나 생활습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점은 사라지고 이방인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 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북이스라엘은 바알 신을 섬기며,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앙은 퇴색되어갔던 시대였다.
사실, 우리의 모습에서도 이렇게 뒤죽박죽 섞여버려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조차 어려운 일들이 적지 않다. 문제의 시작은 애매모호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지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상태 말이다. 여기서는 힘을 쓸 수가 없다.
우리가 어렸을 때, 문턱을 밟고 서 있으면 어른들은 어떤 합리적인 설명 없이 그것을 못하게 강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턱'은 방 안쪽도 아니고 바깥쪽도 아닌 어중간한 곳으로써 모순과 대립되는 것들을 매개하는 매개 항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영과 육을 오고가는 영매들에 의해 사로잡힌 곳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창세기 4장 7b에도 "문지방에 죄가 귀신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다"는 본문이 있다.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세계와 개념을 범주화하여 애매함이 섞일 여지를 없애는 것을 좋아했다.: 하나의 개체는 인간이던가 동물이던가 어느 한쪽이며, 아이이던가 어른이던가 어느 한쪽이며, 기혼이던가 미혼이던가, 살아 있던가 죽었던가, 밖이던가 안이던가, 어느 한쪽이어야 한다. 양다리 걸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인 문턱은 불확실성의 상태이며, 불확실성은 불안감을 낳아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입술이나 성기(性器)의 접촉을 다른 신체적인 접촉과는 다른 차원에서 위험하게 취급하는 까닭은 입술은 피부도 아니고 창자도 아닌 어중간한 지역이며, 따라서 위험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성 접촉 역시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남자 성기의 드러난 피부가 여자 성기의 감추어진 창자 속으로 삽입됨으로써 피부와 창자가 뒤섞여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뒤섞임과 애매 모호함은 깨끗함과 순결함의 적이다. 물론 입술과 성기의 감각신경(sensory nerve)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가 신체의 다른 곳 보다 매우 넓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도로의 중앙차선을 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인 것처럼, 경계/금기를 넘어가는 것은 위험한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금기는 성(聖)과 속(俗), 깨끗함과 더러움, 남자와 여자, 종(種)과 종(種)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하게 해주며, 그것은 곧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엄격한 기초가 된다.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진 질서는 만물의 길이고, 질서가 전부다. '차이'가 없는 곳에는 위험도 없고, 따라서 오염도 없다. 차이를 거세하려 들면 충돌하게 되고, 결국 차이가 파괴/소멸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죄가 시작된다.
신처럼 되려고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 남자가 되려는 여자들, 동물과 교합하는 인간들, 유전자를 조작하여 종과 종의 간격을 파괴하는 자들 모두가 죄인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뒤섞어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혐오하신다.
퇴색한 에브라임 사람들에 관하여 본문은 다시 설명하기를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v.8b)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주로 빵을 사다 먹기 때문에 직접 구울 기회가 많지 않지만, 이스라엘에서 살 때는 주로 집에서 빵을 구워 먹었다. 지금도 사막의 유목민들이 먹는 '걸레 빵'이라는 것이 있는데, 솓뚜껑 같이 생긴 것을 불 위에 올려놓고, 반죽해서 넓게 펼쳐 만든 밀가루를 얹어 굽다가 얼른 뒤집어 반대쪽을 구우면 노릇노릇한 게 맛이 기가 막힌다.
그런데 '뒤집지 않은 빵'은 한쪽은 까맣게 타고 다른 한쪽은 설익은 그런 빵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쪽은 멀쩡한데 다른 한쪽은 병들고, 겉은 멀쩡한데 속은 썩어 있다는 것이다.
(예)시집 온 서툰 며누리가 너무도 분주하게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데, 불에 올려놓은 생선이 타는 것을 보고도 뒷짐지고 구경만 하던 시어머니가 "얘야! 조기가 타는구나!" 하였다. 은근히 화가 난 며누리가 이르기를 "어머님! 지까진게 뜨거우면 돌아눕겠지요!" 하더란다.
앞은 타고 뒤는 설익은 생선처럼 앞뒤가 안 맞는 이중적인 삶,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삶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쪽은 틀림없이 크리스챤인데 다른 쪽은 세속인과 다름 아니요, 한쪽은 분명 교회인데 다른 쪽은 꼭 회사 닮았고, 한쪽은 꼭 성직자인데 다른 쪽은 꼭 정치인 닮았으며, 한 쪽은 천사인데 다른 쪽은 악마다. 그러니 들나귀 같던 힘은 다 어디로 가고, 백발만 휘날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약하면 에브라임은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른 채 뒤섞여 있으니 힘이 없이 되었고, 이중적인 생활과 인격을 소유하였으니 힘이 없다는 말이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 구나"(v.9).
곡식이 자라지 못하도록 잡초가 땅의 모든 영양분을 빼앗아 가듯이, 인생의 진액을 모두 빼앗아 가도 모르는 인생들아! 인생의 힘이 쇠잔해 가는데도 아직까지 쾌락의 벼개를 베고, 인생을 지루하고 게으르게 소모하는 삼손의 검은 머리카락아!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사는 들나귀 같은 젊은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나요? 밥통같이 밥만 많이 먹으면 힘이 솟나요? 일평생 심혈을 기울여 재산을 모으면 일평생 힘을 빼앗기지 않고 살 수 있는 건가요? (돈 많은 이병철도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처럼 맥없이 쓰러져 가더군요.)
하나님의 자녀가 그 젊은 힘을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이사야 45장 24절에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은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에게만 의와 힘이 있다.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다.
(예) 내가 잘 아는 장로님은 기업을 크게 일으켜 돈이 굉장히 많으신데, 외양은 꼭 시골 할아버지처럼 생기셨다. 한 번은 손자 녀석이 학교에서 소풍을 간다기에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사주고 싶어서 함께 집 앞 작은 가게에 갔다. 원하는 것이 뭐냐 하니 음료수 한 개를 짚더란다. 돈을 지불하려고 계산대에 섰는데,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더란다. 아차 싶어 계산대의 그 청년에게 사정을 했다. "내가 여기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고, 얘가 내 손잔데, 아침에 소풍 간다기에 음료수 한 개 사주려고 나왔는데, 그만 돈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노라고. 그러니 금방 돈을 가져다 줄테니 음료수를 그냥 줄 수 있느냐?"고. 아, 그런데 그 청년 왈 "안 된다"는 것이었다. 통사정을 해도 않되어서 하는 수 없이 그냥 놓고 나왔는데, 1200원이 없어서 손자 앞에서 할아버지 체면이 얼마나 깍였는지? 생애 최고로 수치감 같은 것을 느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었다.
아무리 돈 많은 회장님도 당장 호주머니에 1200원이 없어서, 형편없는 인간취급 받더라는 말씀에 모두가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돈이 힘이 될 때가 있지만, 당장 호주머니에 1000원 짜리 한 장이 없으니 전혀 힘을 쓰지 못할 때도 있더라.
또, 하박국 3장 19절에 이르기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힘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같이 않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힘의 원천은 돈이요 권력이요 명예라고 소리치지만, 우리가 아는 힘의 근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요 소망인 것이다.
영혼이 젊어지고 힘이 있다는 것은 세상과 혼잡하게 살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는 새 힘을 공급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세상에 나가 힘이 없는 까닭은 세상과 타협하고 짝짓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고 그럴듯해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당장 눈에 보이는 개인의 이익이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애써 살아가려는 마음을 혼잡케 하고 있다. 목적보다는 수단이 우선하기 때문에 적당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진 것이다. 기진맥진 한 사람이 어떻게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겠읍니까?
저는 노년에도 존경받는 분들을 보면, "평생을 한결같이, 그야말로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사시는 분"들임을 알게된다. 평생을 사귀어도 겉과 속이 똑같아, 변함이 없으신 분들 말입니다. 그런 분들에게서는 힘이 느껴집니다.
교회 다니면서 제게는 하나의 습관이 생겼는데, 아침 성경공부 마치고 본당에 들어 와서 자리를 쭉 훑어보는데, 항상 그 자리에 계시던 장로님, 권사님들이 보여야 안심이 간다. 평생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분들의 백발에서 들나귀 같은 강렬한 힘을 느낀다.
테레사 수녀가 존경받는 까닭은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비록 길바닥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병원 침대에 옮겨 놓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바로 그 일만을 평생을 바쳐 함으로써 그녀는 그 어떤 사람도 갖지 못한 힘을 갖게된 것이다. 은행의 한 청원경찰, 그가 친절하게 그 자리를 30년 동안 지킴으로써, 수 천명의 고객을 가지게 된 것, 이것이 바로 힘의 원동력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존경받는 어른이 없다고 말하는데, 자꾸 제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적인 풍토 때문이다. 자기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불러 내 정치에 입문시키면서, 본래의 모습을 상실해 가는 분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씀에 확신이 없으니, 세상을 사는데 힘이 없는 것이다. 지도자가 힘이 없는 까닭은 그 분의 삶이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가 힘이 없는 까닭은 교회다움이 사라지고 세상과 뒤섞여버려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요, 그것이 힘을 갖는 비결이다.
만일 성도님들 가운데서 '나는 늙어 힘이 없어'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성도님의 인생이 '한쪽은 타 들어가고 다른 한쪽은 아직 익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뒤집지 않은 빵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흰 머리카락이 앉기 시작하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영혼의 머리에 흰 서리가 앉기 시작한다.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날던 성령의 힘은 어디로 가버리고, 겉은 아직 시커멓고 멀쩡한데 속은 이미 다 늙어 가지고 백발이 휘날리는구나!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덧 영적인 힘이 다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는 비록 머리가 희끗희끗한 성도들이 많지만, 참으로 힘이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지키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누가 압니까? 혹 이미 희어진 머리카락에 검은 염색하고 앉아 있는 성도들이 있는지? 또 혹시 압니까? 속 사람의 힘은 세상에 다 빼앗기고, 힘없는 겉 사람(껍데기)만 앉아있는 젊은 늙은이들(검은 백발)이 이 가운데에도 계신지? 그래서 조만간 흰 머리카락 뽑아주면 돈주겠다는 사람이 생겨날는지?
사랑하는 성도님들! 올해가 가기 전에
백발이 된 영혼에 검은 물감으로 염색합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댓글 '2'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은 가난히 살아도 흰머리도 많으셔도 그보다 열정적으로 사는 젊은이도 별로 없을 정도고 60이 안되었어도 총회에서 모든이가 일어서서 맞이하고 존경하시는대요 사모님도 그러시고
제가볼때 수많은희생과 참을인을 하시며 열정적으로 사시는 사람들 젊을때부터 흰머리인데 젊은 누구도 못따라오게 더 뛰어난 열정 더 큰믿음 으로 누구나가 인정하는데 그다지 나이 안 많은데 흰머리는 누구보다도 친정엄마보다 많아도 그 믿음과 의로운 생활은 아무도 못따라와요 성경에 능통하시고요 매일기도 두시간넘게 하시고요 봉사헌신등 그런데 흰머리는 그나이 누구보다도 스물살 위 사람만치나 있는데요
제가볼때 수많은희생과 참을인을 하시며 열정적으로 사시는 사람들 젊을때부터 흰머리인데 젊은 누구도 못따라오게 더 뛰어난 열정 더 큰믿음 으로 누구나가 인정하는데 그다지 나이 안 많은데 흰머리는 누구보다도 친정엄마보다 많아도 그 믿음과 의로운 생활은 아무도 못따라와요 성경에 능통하시고요 매일기도 두시간넘게 하시고요 봉사헌신등 그런데 흰머리는 그나이 누구보다도 스물살 위 사람만치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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