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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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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3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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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충구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2. 1.20 주일설교 |
며칠 전 저는 오래 만에 신학대학 동기를 만나서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며 즐겁게 담소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철원에서 목회를 잘 하다가 삼 년 전에 서울의 한 교회에 부임한 목사였습니다. 그 친구 목사는 매우 헌신적이며 세심한 사람이어서 원칙을 매우 존중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 할 때에는 무난하게 별로 큰 어려움이 없이 잘 지내왔고, 교인들과도 따스한 정이 늘 흐르는 목회 생활이었는 데, 서울에 와서 목회를 해보니 배울 점도 많고 마음 속에 놀라는 일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의 교회에는 소위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많은 편인데 이 분들의 성향에 맞추어 참으로 목회하기 어렵다는 것을 토로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한 임원이 목사님을 만나자고 청하여 면담을 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목사님 교인들에게 잔소리나 충고를 하지 마세요. 저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싫은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일류대학교를 나오기까지 맨 날 일등만 하고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거기다가 사회에서도 직장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굽실거리며 하는 인사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찌르고 가르치는 소리를 들으면 불편해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지, 무엇을 하라고 시키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됩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후에, 이 목사님은 설교하거나 교회일 하기가 더욱 부담이 생겼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친구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듯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럴 듯 싶기도 해서 심각한 그 친구 목사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에게 찾아와 그런 권고를 하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궁금하게 여겨졌었습니다.
지난 연말에 어느 대학 기획처장들이 모인 회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모 대학의 기획처장이 나와서 하는 말이 "우리 대학은 학생들을 고객으로 여기고, 학생 감동의 전략을 넘어서서 학생 감격의 대학 경영의 지표를 설정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덧붙이기를 학생감동을 주어야 등록금을 많이 올려도 등록금 협상 때 합의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언뜻 들으면, 대학 교수가 이제는 조금은 장사꾼 같은 논리와 사고를 해야하는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재치가 있고, 무엇인가 선명한 주장인 것 같으면서도 웃어 넘길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학운영을 하는 이들의 철학이 경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저는 대학들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 교회들 역시 고객감동과 감격의 시대에 이미 진입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가 권고도 교훈도 할 수 없는 교인들, 이래라 저래라 명령과 청유형의 언어를 부담스러워하는 교인들에게 감동이 아닌 감격을 안겨주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참으로 어렵게 느껴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인감동과 감격의 경험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설교자로서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저에게 오늘 본문은 새롭고 진기한 무엇인가를 안겨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바리새인 집에 예수께서 초대되어 음식을 잡숫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만찬을 나누는 습성을 생각해 본다면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들며 담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거 문화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닫혀진 구조가 아니고 열려 있었으므로 동네사람들이 기웃거리고 넘겨다 볼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자가 나타나니까 모두들 긴장하여 주목했습니다. 그 여자는 그 동네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 동네 후미진 골목에 살면서 몸을 파는 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 잔치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 여자와 더불어 자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이 자기를 손가락질하고 조소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대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 그 많은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로 다가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향유가 뒤섞여 뿌려지고 여인의 긴 머리털로 자신의 발을 닦는 이 여인을 바라보면서 예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이보다도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한가지 물음은 도대체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듯 감동하고 감격하게 했을까요? 감격과 감동이 없는 무감동의 잔인하고 차갑고 냉랭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바리새인이 속으로 "예수가 진정한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을...."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을 많이 탕감 받은 자"의 마음이 감격스러운 것이라고.... 그리고 속엣 말을 했던 바리새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무런 감동을 내게 주지 못하는 무감동의 삶을 살고 있지만, 이 여인은 내게 감동을 주었다." 너는 나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내게 입맞추지도 아니하였으나, 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나 저는 눈물로 내 발을 씻기고, 내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이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이들 중에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이들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가장 많이 닮지 않았나 하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예수를 초대해 같이 식사를 나누면서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입니다. 예수를 초대했으나, 예수에 대하여 전형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와 평판, 그리고 대중의 기호에 맞추어 원칙과 기준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스스로 성취감에 빠진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감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오늘의 현대 지성인들은 성경을 읽는 일이 적고, 한 달이 지나도 기도하는 시간을 거의 가지지 않는 교인들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하기야 목사의 권면과 권고도 듣지 못하는 오만하고 곧은 목을 가진 이들이 성경을 읽는다고 감동과 감격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성서를 향하여 묻지도 않고, 자신의 유한함을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이들이 시간이 갈수록 한국 교회 안에 더욱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영성이 메마른 이들에게 무슨 수로 감격을 나눌 수가 있을까?
교인감동의 사건을 불러일으키려고 성가대를 동원하고, 찬양과 경배의 대중적 정서에 호소도하고, 말구유 위에 오신 그리스도를 화려하게 치장한 교회의 호스트로 만들고, 예수의 가시관을 내려놓고 금관의 예수로 만들어 버리는 예수 이해의 변질을 불러오는 연출신학이 등장하고, 연극의 대사와 같은 흉내내는 감동 어린 목소리로 대중을 현혹하는 설교가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는 어찌 보면 진실한 감동과 감격이 아닌, 코메디 신앙의 흥성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감격하지 않는 대중에게 감격을 불러일으키려는 목회자들의 몸부림이 안타깝다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시대의 무감동이 우리의 영성과 하나님을 향한 인식의 출구를 꽉 막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그 천박한 여인의 등장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인의 천박함을 간파하고 물리칠 것을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차갑고 이지적이며, 도덕주의적이고 규범주의적인 삶의 태도로 서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는 대신, 자신의 집에 들어 선 그 여인의 죄인 됨에 대하여 칼날같이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그 여인을 정죄하면, 자신이 더욱 고결하고 순결해 진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 함으로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이와 같은 것이지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삶의 반성은 없고, 다른 이들의 행태를 주시하며 정죄하는 지성적 쌔디스트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영성에 든 깊은 병은 감동을 얻지도 못하고, 감격하지도 못하는 메마른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오히려 예수가 그 천박한 여인을 받아주고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를 바라보면서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구원은 내게 있는 것이지 저 여인에게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 말입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런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요? 그는 스스로 빛을 많이 진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하여 언제나 우월한 사람,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도, 하나님도 필요 없었는지 모릅니다. 자기의 법칙과 기준을 따라서 오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서 넉넉히 자족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 인식의 실패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것은 스스로 벌거벗고 있음을 모르는 자의 인식의 실패입니다. 구원의 등대의 불이 아무리 밝아도 등대를 찾지 않는 무모한 삶의 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파멸 가능성과 초라함을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기준을 상실합니다. 하나님 인식의 실패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의 실패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 동네에서 죄인이라 불리던 그 여인은 자신을 전혀 의롭게 여길 수 없음에 대하여 절망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되돌아보고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그 여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밖에는 달리 다른 의로운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정직하게 보는 것, 나는 그것이 건강한 영성을 얻는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영혼을 지닌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지요. 어느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친 베드로에게 예수가 다가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는 그 말 한마디에 복종하여 그물을 던졌던 베드로는 자기의 디베랴 바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의 논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힘을 느꼈을 때,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여인은 죄인인 자기 자신의 절망에서 구원을 경험한 여인입니다. 자신이 처한 좌절과 절망과 탄식과 그리고 애원을 하기 위하여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며 침을 뱉는 대상이었던 자기 자신을, 뭇 남자들의 희롱거리로만 여겨졌던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한 것입니다. 삶의 감격과 감동은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감격과 감동이 일어나는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이들이 그 역사를 이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역사는 감격과 감동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역사가 아니라, 눈물의 감격이 있는 죄인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감동이 없이 삶을 살아가는 병든 부부"들의 메마른 삶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동과 감격이 없는 삶에는 희생과 헌신과 봉사는 무거운 율법이요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여인은 여인의 가장 내면의 선물인 눈물과 아름다운 향기 나는 향유를 예수의 발에 쏟아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러한 장면을 상상하면서 예수와 이 여인을 사랑하는 관계로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 여인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여 존귀하여 여기는 이는 드뭅니다. 일면 가부장제의 비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여성의 지나친 자기 비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따라 이 여인을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녀의 과거의 삶이 창기로 살아왔을지라도,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을 고귀하여 간직할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 여인은 깊이 감동하고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격이 있다면 인생은 그것만으로도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을 감격시키는 종교입니다. 바리새인 같은 이들은 결코 이런 감격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 차이는 그 여인이 창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여인이 자기 존재의 죄스러움을 깊이 깊이 인식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감격과 감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바리새인은 자기 존재의 죄스러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성과 율법과 자기 의의 휘장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니 우리 기독교 공동체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이 어느 편을 닮았는가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즈음 나는 신문을 펼쳐보면 무엇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곤 합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법조계와 학계를 막론하고 국민들에게 정보와 현실을 정직하게 알려주어야 하는 매스콤까지 모리배들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어 염치도 잃고, 상식도 없으며, 진실의 잣대를 상실한 사회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리배들이 이끌어 가는 사회는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기 존재의 진실을 직면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익과 생존과 그리고 평판까지도 초월하는 삶의 자유를 얻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들의 관심은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를 늘임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관행처럼 뇌물을 주고받고, 정의의 잣대를 임의적으로 늘이거나 줄이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지위가 높아지면 질수록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뱀같이 넘나들면서 공적 영역을 사유화하는 부정직하고 부패한 공직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쾌락을 뜻하는 것이지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만난 이 여인과 같은 진실의 눈물과 헌신은 참으로 낮선 것이 됩니다.
좋은 성적을 내고, 좋은 대학을 나온 목적 자체가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나누는 특권층이 되기 위한 것이 되어버린 현실은 기독교 복음의 왜곡을 심각하게 불러오고 있습니다. 성취와 성공의 길을 달려온 이들에게 있어서 몸에 밴 것은 바리새인들의 오만함과 무감동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교회조차도 무감동과 오만함으로 색칠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회중들 조차 감동을 잃고, 생기 없는 신앙인이 되어 버립니다. 진실에 감동이 되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눈물을 흘릴 줄 모르고,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성서가 가르치는 진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행복을 약속해 주는 소유에의 집착이거나, 지성적 자기만족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자의 불행은 이미 그 자신 속에 담겨있습니다. 스스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종교의 언어로, 혹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가치로, 아니면 형이상학적 진리로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자기 삶의 절망을 고백하지 않는 이상 그렇습니다. 성서에 보면 바리새인중의 하나인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와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질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답을 하는 것이지요.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향유 한 옥합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었던 이 여인은 도대체 왜 그 소중한 향유를 예수께 부어버렸을까요?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있어서 향유란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지참금과도 같은 것입니다. 향유를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한 옥합이 되면 그것을 팔아서 자신의 삶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그 옥합을 깨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이 여인은 지금까지는 몸을 팔아가면서까지 향유를 모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삶의 기준과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삶의 포기를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그 향유 가득한 옥합이 깨어질 때, 소유에 대한 집착을 가르치는 자본주의도 깨어지는 것이지요. 그보다도, 소유를 넘어선 행복을 이 여인은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살 용기가 난 것이지요. 이 여인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진리에 민감한 이들은 삶의 감격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나는 오로지 이러한 감격과 감동이 있는 자리에서만, 사랑이 꽃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저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고, 진리는 소유에 우리를 붙잡아 매어두는 법칙이 아니라,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능력이기도 하고, 진리는 우리를 감동하고 감격하게 하는 눈물이기도 합니다.
이 병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도 문제이지만, 병든 세상에서 인생을 배우는 우리의 자식들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위하여 살라고 할 것인가? 바리새인같이 냉정한 법칙을 가르치는 이들보다는, 이 여인처럼 사랑할 대상을 가지고 자신을 포기하고 버리면서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감격과 감동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을 먼저 보여주고,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이 여인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나님 인식의 척도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여인은 바리새인보다 더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훌륭한 학식과 그릇됨 없이 원칙을 지켜온 바리새인을 향하여 "너는 내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천박한 여인으로 소문난 그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삶에서도 이 여인을 향해 주셨던 그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기를 빕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 목사의 교회에는 소위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많은 편인데 이 분들의 성향에 맞추어 참으로 목회하기 어렵다는 것을 토로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한 임원이 목사님을 만나자고 청하여 면담을 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목사님 교인들에게 잔소리나 충고를 하지 마세요. 저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싫은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일류대학교를 나오기까지 맨 날 일등만 하고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거기다가 사회에서도 직장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굽실거리며 하는 인사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찌르고 가르치는 소리를 들으면 불편해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지, 무엇을 하라고 시키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됩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후에, 이 목사님은 설교하거나 교회일 하기가 더욱 부담이 생겼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친구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듯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럴 듯 싶기도 해서 심각한 그 친구 목사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에게 찾아와 그런 권고를 하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궁금하게 여겨졌었습니다.
지난 연말에 어느 대학 기획처장들이 모인 회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모 대학의 기획처장이 나와서 하는 말이 "우리 대학은 학생들을 고객으로 여기고, 학생 감동의 전략을 넘어서서 학생 감격의 대학 경영의 지표를 설정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덧붙이기를 학생감동을 주어야 등록금을 많이 올려도 등록금 협상 때 합의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언뜻 들으면, 대학 교수가 이제는 조금은 장사꾼 같은 논리와 사고를 해야하는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재치가 있고, 무엇인가 선명한 주장인 것 같으면서도 웃어 넘길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학운영을 하는 이들의 철학이 경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저는 대학들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 교회들 역시 고객감동과 감격의 시대에 이미 진입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가 권고도 교훈도 할 수 없는 교인들, 이래라 저래라 명령과 청유형의 언어를 부담스러워하는 교인들에게 감동이 아닌 감격을 안겨주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참으로 어렵게 느껴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인감동과 감격의 경험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설교자로서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저에게 오늘 본문은 새롭고 진기한 무엇인가를 안겨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바리새인 집에 예수께서 초대되어 음식을 잡숫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만찬을 나누는 습성을 생각해 본다면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들며 담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거 문화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닫혀진 구조가 아니고 열려 있었으므로 동네사람들이 기웃거리고 넘겨다 볼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자가 나타나니까 모두들 긴장하여 주목했습니다. 그 여자는 그 동네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 동네 후미진 골목에 살면서 몸을 파는 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 잔치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 여자와 더불어 자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이 자기를 손가락질하고 조소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대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 그 많은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로 다가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향유가 뒤섞여 뿌려지고 여인의 긴 머리털로 자신의 발을 닦는 이 여인을 바라보면서 예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이보다도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한가지 물음은 도대체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듯 감동하고 감격하게 했을까요? 감격과 감동이 없는 무감동의 잔인하고 차갑고 냉랭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바리새인이 속으로 "예수가 진정한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을...."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을 많이 탕감 받은 자"의 마음이 감격스러운 것이라고.... 그리고 속엣 말을 했던 바리새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무런 감동을 내게 주지 못하는 무감동의 삶을 살고 있지만, 이 여인은 내게 감동을 주었다." 너는 나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내게 입맞추지도 아니하였으나, 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나 저는 눈물로 내 발을 씻기고, 내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이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이들 중에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이들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가장 많이 닮지 않았나 하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예수를 초대해 같이 식사를 나누면서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입니다. 예수를 초대했으나, 예수에 대하여 전형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와 평판, 그리고 대중의 기호에 맞추어 원칙과 기준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스스로 성취감에 빠진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감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오늘의 현대 지성인들은 성경을 읽는 일이 적고, 한 달이 지나도 기도하는 시간을 거의 가지지 않는 교인들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하기야 목사의 권면과 권고도 듣지 못하는 오만하고 곧은 목을 가진 이들이 성경을 읽는다고 감동과 감격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성서를 향하여 묻지도 않고, 자신의 유한함을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이들이 시간이 갈수록 한국 교회 안에 더욱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영성이 메마른 이들에게 무슨 수로 감격을 나눌 수가 있을까?
교인감동의 사건을 불러일으키려고 성가대를 동원하고, 찬양과 경배의 대중적 정서에 호소도하고, 말구유 위에 오신 그리스도를 화려하게 치장한 교회의 호스트로 만들고, 예수의 가시관을 내려놓고 금관의 예수로 만들어 버리는 예수 이해의 변질을 불러오는 연출신학이 등장하고, 연극의 대사와 같은 흉내내는 감동 어린 목소리로 대중을 현혹하는 설교가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는 어찌 보면 진실한 감동과 감격이 아닌, 코메디 신앙의 흥성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감격하지 않는 대중에게 감격을 불러일으키려는 목회자들의 몸부림이 안타깝다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시대의 무감동이 우리의 영성과 하나님을 향한 인식의 출구를 꽉 막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그 천박한 여인의 등장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인의 천박함을 간파하고 물리칠 것을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차갑고 이지적이며, 도덕주의적이고 규범주의적인 삶의 태도로 서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는 대신, 자신의 집에 들어 선 그 여인의 죄인 됨에 대하여 칼날같이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그 여인을 정죄하면, 자신이 더욱 고결하고 순결해 진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 함으로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이와 같은 것이지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삶의 반성은 없고, 다른 이들의 행태를 주시하며 정죄하는 지성적 쌔디스트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영성에 든 깊은 병은 감동을 얻지도 못하고, 감격하지도 못하는 메마른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오히려 예수가 그 천박한 여인을 받아주고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를 바라보면서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구원은 내게 있는 것이지 저 여인에게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 말입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런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요? 그는 스스로 빛을 많이 진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하여 언제나 우월한 사람,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도, 하나님도 필요 없었는지 모릅니다. 자기의 법칙과 기준을 따라서 오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서 넉넉히 자족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 인식의 실패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것은 스스로 벌거벗고 있음을 모르는 자의 인식의 실패입니다. 구원의 등대의 불이 아무리 밝아도 등대를 찾지 않는 무모한 삶의 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파멸 가능성과 초라함을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기준을 상실합니다. 하나님 인식의 실패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의 실패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 동네에서 죄인이라 불리던 그 여인은 자신을 전혀 의롭게 여길 수 없음에 대하여 절망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되돌아보고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그 여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밖에는 달리 다른 의로운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정직하게 보는 것, 나는 그것이 건강한 영성을 얻는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영혼을 지닌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지요. 어느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친 베드로에게 예수가 다가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는 그 말 한마디에 복종하여 그물을 던졌던 베드로는 자기의 디베랴 바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의 논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힘을 느꼈을 때,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여인은 죄인인 자기 자신의 절망에서 구원을 경험한 여인입니다. 자신이 처한 좌절과 절망과 탄식과 그리고 애원을 하기 위하여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며 침을 뱉는 대상이었던 자기 자신을, 뭇 남자들의 희롱거리로만 여겨졌던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한 것입니다. 삶의 감격과 감동은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감격과 감동이 일어나는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이들이 그 역사를 이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역사는 감격과 감동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역사가 아니라, 눈물의 감격이 있는 죄인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감동이 없이 삶을 살아가는 병든 부부"들의 메마른 삶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동과 감격이 없는 삶에는 희생과 헌신과 봉사는 무거운 율법이요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여인은 여인의 가장 내면의 선물인 눈물과 아름다운 향기 나는 향유를 예수의 발에 쏟아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러한 장면을 상상하면서 예수와 이 여인을 사랑하는 관계로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 여인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여 존귀하여 여기는 이는 드뭅니다. 일면 가부장제의 비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여성의 지나친 자기 비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따라 이 여인을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녀의 과거의 삶이 창기로 살아왔을지라도,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을 고귀하여 간직할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 여인은 깊이 감동하고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격이 있다면 인생은 그것만으로도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을 감격시키는 종교입니다. 바리새인 같은 이들은 결코 이런 감격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 차이는 그 여인이 창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여인이 자기 존재의 죄스러움을 깊이 깊이 인식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감격과 감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바리새인은 자기 존재의 죄스러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성과 율법과 자기 의의 휘장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니 우리 기독교 공동체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이 어느 편을 닮았는가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즈음 나는 신문을 펼쳐보면 무엇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곤 합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법조계와 학계를 막론하고 국민들에게 정보와 현실을 정직하게 알려주어야 하는 매스콤까지 모리배들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어 염치도 잃고, 상식도 없으며, 진실의 잣대를 상실한 사회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리배들이 이끌어 가는 사회는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기 존재의 진실을 직면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익과 생존과 그리고 평판까지도 초월하는 삶의 자유를 얻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들의 관심은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를 늘임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관행처럼 뇌물을 주고받고, 정의의 잣대를 임의적으로 늘이거나 줄이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지위가 높아지면 질수록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뱀같이 넘나들면서 공적 영역을 사유화하는 부정직하고 부패한 공직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쾌락을 뜻하는 것이지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만난 이 여인과 같은 진실의 눈물과 헌신은 참으로 낮선 것이 됩니다.
좋은 성적을 내고, 좋은 대학을 나온 목적 자체가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나누는 특권층이 되기 위한 것이 되어버린 현실은 기독교 복음의 왜곡을 심각하게 불러오고 있습니다. 성취와 성공의 길을 달려온 이들에게 있어서 몸에 밴 것은 바리새인들의 오만함과 무감동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교회조차도 무감동과 오만함으로 색칠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회중들 조차 감동을 잃고, 생기 없는 신앙인이 되어 버립니다. 진실에 감동이 되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눈물을 흘릴 줄 모르고,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성서가 가르치는 진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행복을 약속해 주는 소유에의 집착이거나, 지성적 자기만족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자의 불행은 이미 그 자신 속에 담겨있습니다. 스스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종교의 언어로, 혹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가치로, 아니면 형이상학적 진리로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자기 삶의 절망을 고백하지 않는 이상 그렇습니다. 성서에 보면 바리새인중의 하나인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와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질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답을 하는 것이지요.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향유 한 옥합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었던 이 여인은 도대체 왜 그 소중한 향유를 예수께 부어버렸을까요?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있어서 향유란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지참금과도 같은 것입니다. 향유를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한 옥합이 되면 그것을 팔아서 자신의 삶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그 옥합을 깨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이 여인은 지금까지는 몸을 팔아가면서까지 향유를 모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삶의 기준과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삶의 포기를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그 향유 가득한 옥합이 깨어질 때, 소유에 대한 집착을 가르치는 자본주의도 깨어지는 것이지요. 그보다도, 소유를 넘어선 행복을 이 여인은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살 용기가 난 것이지요. 이 여인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진리에 민감한 이들은 삶의 감격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나는 오로지 이러한 감격과 감동이 있는 자리에서만, 사랑이 꽃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저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고, 진리는 소유에 우리를 붙잡아 매어두는 법칙이 아니라,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능력이기도 하고, 진리는 우리를 감동하고 감격하게 하는 눈물이기도 합니다.
이 병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도 문제이지만, 병든 세상에서 인생을 배우는 우리의 자식들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위하여 살라고 할 것인가? 바리새인같이 냉정한 법칙을 가르치는 이들보다는, 이 여인처럼 사랑할 대상을 가지고 자신을 포기하고 버리면서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감격과 감동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을 먼저 보여주고,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이 여인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나님 인식의 척도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여인은 바리새인보다 더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훌륭한 학식과 그릇됨 없이 원칙을 지켜온 바리새인을 향하여 "너는 내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천박한 여인으로 소문난 그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삶에서도 이 여인을 향해 주셨던 그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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