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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불상, 누런 가사, 킬링 필드

에스겔 길희성 형제............... 조회 수 2332 추천 수 0 2008.08.05 1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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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겔37:1-14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2. 2.10 주일설교 
오늘 설교 제목을 보고 혹시 놀라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웬 교회 설교에서 불상 얘기, 스님들이 입는 가사 얘기냐고 말입니다. 아마도, 한국 교회에서 이런 제목의 설교는 모르긴 하지만 처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새길교회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달에 약 두 주간 학생들과 함께 동안 동남아 불교문화답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어정쩡한 불교식 사회주의와 군부 통치로 과거 50여 년 간 세계사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역사가 정지된 땅' 미얀마(구 미얀마)를 보았고, 불교 국가를 자처하지만 무질서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안고 질주하다가 우리나라처럼 보기 좋게 경제 위기를 맞았던 태국, 그리고 킬링필드의 악몽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캄보디아를 다녀왔습니다. 이 지역들이 불교, 특히 소승불교(상좌불교)가 지배적인 문화권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가서 보니 역시 불교 유적을 빼면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려하고 웅대한 불교 사원들과 유적유물들로 가득 찬 나라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불교가 성행하고 있지만, 조선조 500년의 단절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불교국가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들 세 나라는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불교 신자로서 명실공히 불교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의 한 특징은 항시 자기 삶의 의미를 성찰한다는 것입니다. 의미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미의 연결고리 가운데서 최종 고리가 되며, 의미의 문제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최종 어휘'이며 의미의 원천이요 준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의미에 대한 관심은 여행을 통해 고조됩니다. 평소에 친근했던 삶의 맥락을 떠나 낮선 지역을 여행하는 경우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자기 사회와 문화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숙고해 보는 계기가 됩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하고 살고 있으며,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까? 저 엄청난 규모의 유적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었으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가난하고 고달파 보이는 저 사람들의 삶의 여정을 지탱해 주고 있는 힘은 무엇일까? 등 많은 의문들을 안고 여행을 합니다. 결국 나는 이런 물음을 물으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여행을 한 셈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현존과 손길을 항시 느끼면서 여행을 했다고는 장담 못하지만, 항시 의미를 생각하면서 여행하였기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여행을 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렸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미의 물음을 묻도록 유도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또 매 주일마다 보는 새길 공동체의 형제, 자매님들의 반가운 얼굴들도 나의 머리와 가슴을 떠나지 않았기에 나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여행을 한 셈입니다.

여행을 통해 나를 사로잡은 의미의 문제를 세 단어로 요약하자면 황금불상, 노란 가사, 그리고 킬링필드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방문한 세 나라 모두 어디를 가나 그 나라의 문화와 정신을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 같은 절이나 불상 혹은 불탑(파고다, 스투파)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한결 같이 그 나라 국민들의 신앙적 귀의의 대상이자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성스러운 나라의 보물로서, 관광객은 물론이요 수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태국 방콕의 에메랄드 사원이 그러하고 미얀마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왕궁사원의 황금불상이 그러합니다. 금은 변하지 않는 성질, 그리고 찬란한 광명으로 인해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는 상징이었고, 특히 불상이나 불탑을 금으로 장식하는 일은 특별한 공덕이 있는 신앙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들 나라에서는 신도들이 금불상이나 여느 불상에 금을 덧칠하는 행위를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한 1달러 정도를 주면 금을 얇게 붙여 놓은 조그마한 종이 조각을 사서 불상에 찍어 바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에 있는 마하무니 사원에도 순금으로 만든 큰 황금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수많은 신도들이 찾습니다. 이미 수 톤의 순금이 들어간 불상이건만 아직도 부족하기라도 한 듯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금박지의 금을 찍어 바르는 행위를 하고 있으며, 그 불상 밑에는 부처님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하는 신도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 부처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불상 앞에서 두 손을 모은 신도들의 행위를 딱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기도'라고 부르기는 어렵고, 사실 신자들마다 지니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는 천차만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이미지나 혹은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는 내용이 천차만별인 것을 이해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모든 불자들의 행위가 적어도 재가신도들의 경우는 복을 받기 위한 공덕 신앙에 근거해 있다는 점입니다. 엄청난 시주 돈을 내어 불상을 조성하는 행위나 불상에 금을 찍어 바르는 행위가 모두 공덕을 쌓아 복을 받기 위한 행위이며, 돈이 없어서 그냥 불상 밑에서 합장을 하고 있는 사람도 공덕을 나누어 가진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복을 빕니다. 실로 공덕 신앙이 없으면 제도로서의 불교는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불교의 물질적,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모든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무욕과 무아의 청정한 삶을 살라는 것이지만, 재가신도들은 공덕 신앙을 통해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불상을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번뇌와 고뇌를 완전히 초월한 부처님의 평온하고 자비로운 얼굴을 앞에 두고서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이루고자 빕니다. 물론 불자들 가운데는 이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불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온과 청정을 위해 불상을 명상의 도구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일체의 상을 거부한 채 불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고차적 수행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가신도들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이기적 공덕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복신앙이 불교나 기독교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임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며, 이러한 신앙이 종교는 살찌울지 몰라도 인격의 변화나 사회의 변혁을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 종교는 번창하지만 사람 사는 삶의 질과 도덕적 수준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기복신앙이 불교나 기독교를 막론하고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황금 불상 앞에서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불자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문자 그대로 황금을 숭배하는지 아니면 부처를 숭배하는지 그 의미의 모호성에 대하여 의문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공덕신앙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착한 일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절에 보시를 하고 황금 불상을 만들고 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외면하고 절에다 보시하고 교회에다 바치는 일이 공덕의 근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무엇보다도 귀합니다. 종교도 신앙도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적선'이란 문자 그대로 선을 쌓는다는 뜻인데, 이 선이 가난한 이웃과의 나눔을 의미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기야 세상에는 가난한 이웃과도 나누지 않고 절이나 교회에도 돈 한푼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도대체 준다는 것, 바친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자기가 잘 사는 것은 오직 자기가 잘 낫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어디든 바치는 사람은 좀 낳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내내 불교유적지들만 보고 다니던 여행이 끝날 무렵에 우리는 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행 목적이 본래 불교문화를 공부하려는 것이었기에 일정에 넣지도 않았던 일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것입니다. 캄보디아 하면 킬링필드를 연상합니다. 폴 포트 정권 아래 무려 200만 명이나 되는 캄보디아 인민이 무참하고 잔혹하게 살해된 끔찍한 대량학살 사건입니다. 지금은 킬링필드를 가 보아야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하여 우리는 대신 프놈펜에 있는 투올 슬랭(Tuol Sleng)이라는 킬링필드 대량학살 박물관(genocide museum)을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박물관은 본래 고등학교였으나 크메르루주 군이 이전 정권에 협력한 사람들을 취조하고 고문하는 무시무시한 장소로 사용했던 곳으로서, 지금은 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증언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온갖 끔찍한 사진들과 고문기구들, 그리고 해골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광주 사건이나 삼청교육대는 저리 가라 이고, 나치 정권의 유태인 학살보다도 더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게 합니다. 이 엄청난 비극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왜 일어났는지 등에 대한 분석은 간단한 일이 아니겠지만, 나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억울하게 죽은 그 수많은 목숨들의 한을 누가 풀어 줄 것이며 누가 보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미의 문제였으며, 산더미 같이 쌍인 구멍 뚫린 해골바가지(둔기로 머리를 맞아 죽었기 때문에) 더미로부터 과연 에스겔 선지자가 광야에서 본 환상대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돋아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내전으로 팔다리를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캄보디아 민중을 다시 살릴 새로운 바람, 부활의 영은 과연 어디서부터 불어 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은 훈센 정부가 질서를 잡고 관광을 촉진하고 경제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지만, 힘이 있는 자들의 부정부패는 나라 살림을 좀먹고 있다고 합니다.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이는 땅입니다. 20세기의 격동과 혁명의 역사를 뒤로하고 21세기를 맞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슨 세속적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은 이제 금물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캄보디아 인민의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면 오랫동안 그들의 삶을 지탱해 온 정신적 지주인 불교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크메르루즈의 광풍의 휩쓸었을 때 절들도 많이 파괴되었지만, 우리가 방문한 사찰 여기 저기서 그래도 고승들을 모시고 법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윤회를 통해 또 다른 삶이 없다면 그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어떻게 보상을 받겠으며 그 유족들이 어떻게 위로를 받겠습니까? 사후의 삶을 떠나서는 부조리한 인류 역사에 도덕적 의미를 긍정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속적 이데올로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캄보디아가 불란서 식민 통치 이후 겪어 온 근대사가 연속되는 수난과 비극 이외에 캄보디아 인민들에게 가져다 준 이익과 행복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열대 지방이라 쌀과 과일들이 풍부한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굶어 죽지는 않게 되 있는 곳이며, 현대 서구나 우리나라 기준으로 볼 때 가난하다 해도 옛날 왕정 때처럼 옛 방식대로 살았더라면 차라리 그러한 끔직한 비극은 경험하기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 세계 사상계에서 일고 있지만, 어설픈 사회주의의 유산을 안고 군부독재를 겪고 있는 미얀마나, 격렬한 근대적 이념갈등으로 인해 지울 수 없는 내전의 상처를 입은 캄보디아를 볼 때,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의 현대사는 영광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상처뿐인 역사입니다. 차라리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창출했던 중세에 그들의 역사가 정지되었다 해도 이들 민중의 삶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텔레비전과 냉장고, 세탁기와 자동차가 없었다고 가난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있다가 없는 사람들에게나 불편을 줄뿐입니다. 또 근대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근대식 교육을 받아서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인간은 더 사악해지고 불행해지지 않습니까? 가장 원시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인 것이 된 포스트모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또 현대식 의료가 질병을 퇴치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의사는 추호도 없지만, 그런 것 없이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는 시골 노인네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옛날에도 참혹한 전쟁들이 많이 있었지만, 계획적인 인종청소, 숙청, 대략학살 같은 것은 20세기에서만 일어난 현상들이며 히틀러, 스탈린, 폴포트, 밀로세비치와 같은 자들은 현대사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악마적 존재들임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불교는 과연 이들 나라에서 부활의 역사를 창조할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며 계속해서 살아 남아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간단치 않은 문제입니다. 불교가 단지 호기심 많은 외국인들의 관광자원으로 전락하지 않고 진정으로 현대 동남아인들의 정신 생활과 가치관에 살아 있는 힘을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관적인 전망을 합니다. 우선, 정치와 종교의 분리로 인해 전통적인 승가의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교육이나 의료 등 사찰의 전통적인 역할이 절에서 일반 기관으로 이전되어 승려들의 역할이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평생 승려생활을 하려는 지원자들도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배금주의와 향락주의 등 세속적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사회 전반은 물론이요 승가에도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문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불교적 가치관과 인생관이 얼마만큼 진정으로 저들의 삶과 문화에 반영되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태국 같이 자본주의와 관광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소비문화와 향락문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 말이 불교국가이지 사람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은 실제로 소비향락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태국에 오래 살고 있는 한 선교사 교수는 말합니다. 이것은 비단 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곧 미얀마나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도 불어닥칠 바람이며, 우리나라는 물론이요 전 세계의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종교적 삶의 이상을 가지고 초월적 삶의 의미 속에서 영위되던 문화가 이제 동과 서를 막론하고 세속주의적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에 매몰되어 일차원적 삶으로 피상화 되었지만, 현대인들은 이것을 도리어 자유와 해방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인류가 산업화 이전, 근대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소비향락문화 속에서도 아직도 많은 수행자들이 전통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금욕과 절제, 무아와 무욕의 삶을 실천하고 있으며, 재가신도들이 명상 센터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이들에게서 동남아인들, 그리고 나아가서 현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한 가닥 정신적 힘을 찾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이제 문자 그대로 세계적 종교가 되었습니다. 사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동남아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데는 불교에 대한 관심도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서구인들은 세속화된 자기들의 세계에서 정신적 뿌리를 상실하고 동양의 신비스런 정신 세계에서 어떤 영적 해답을 얻으려 동양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며, 최근 불교에 대해 일고 있는 전 세계적 관심도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현각 스님뿐만 아니라 많은 서양 불자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불도를 닦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흐름의 일환입니다. 이제 불교는 서양 불자들을 통해서 어쩌면 다시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기복신앙이 전혀 없고 동양 불자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적 관심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동남아 불교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를 나는 아침 일찍 발우를 들고 탁발에 나서는 누런 가사를 입은 스님들의 행렬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신심 깊은 재가신도들은 손수 음식을 준비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음식을 사서 연꽃 한 송이와 더불어 스님들에게 보시하고는 무릎을 꿇고 그들로부터 축복의 말을 듣습니다. 2,500년 전 부처님이 하시던 관습 그대로를 아직도 준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오전 중에만 두 번 식사를 하며 오후 식을 하지 않습니다. 하루 일과를 그렇게 경건하게 시작하는 스님들과 재가신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체 무소유의 삶을 사는 스님들은 가진 것이 없으니 재가신도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스님들이 타락하면 보시를 하지 않습니다. 항시 신도들의 감시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수도원 전통을 지닌 불교를 세속적 타락으로부터 방지해 온 힘입니다. 세상과의 단절을 목표로 하는 폐쇄적인 서양 중세의 수도원들과는 다릅니다.

스님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면서 시작하는 신도들의 삶 또한 경건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는 비록 지금 출가수행을 하지 못하여도, 인간으로서의 완성은 무소유와 무아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청정 비구들에게 있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으며 승가는 세속의 영고성쇠에도 불구하고 항시 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며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 탁발 의식을 통하여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나와 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떠나는 좋은 영적 훈련을 매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문화에 찌들고 소유와 소비가 존재를 규정해 버리는 사회, 소비문화에 수반한 자원고갈과 환경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불교의 무욕과 무아의 메시지만큼 호소력 있고 긴요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우리 개신교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무욕과 무소유를 실천하는 수도 공동체의 전통이 없다는 점입니다. 최근 이러한 단점을 의식하기 시작하여 개신교에서도 공동체 운동이 일고 있지만, 불교 승가에 가장 가까운 것은 아마도 태백산에 있는 예수원(Jesus Abbey)일 것입니다. 1965년에 성공회 신부 부부 (한국 이름 대천덕, 현재인)가 세워서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안식처를 제공해 왔습니다. 현재 40여명의 정회원들이 모든 것을 주고 나누는 수도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80회 생일을 맞은 생일축하 미사에서 현재인 부인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 마련해 주신 식탁에서 기적적으로 살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도 본래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원했던 한 평범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것이 아름답게 정돈된 저택에 살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서라고는 찾아 볼 길이 없는 초라한 야영생활을 하게 하심으로써 눈을 들어 나무와 꽃과 산과 별과 강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하셨다. 손님들에게 좋은 음식과 깨끗한 침대를 제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손님들은 맨바닥에서 자야 하고 간소한 음식을 먹어야 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삶을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던 일을 제쳐 두고 산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출가승이 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적 출가승의 이상을 세속에서 일상적으로 구현하는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로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중세 수도사의 삶의 모습이나 불교의 전통적인 출가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맑스 베버가 개신교 윤리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인 이른 바 '세계내적 금욕주의'의 정신을 새롭게 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더 많은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대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환경위기, 빈부격차,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의 극복을 위해서 새로운 금욕과 절제의 문화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되(in the world) 세상에 속하지 않는(not of the world) 삶이 기독교인의 본래적 존재양식이며, 이것이 또한 연꽃으로 상징되는 불교적 삶의 이상이기도 합니다. 연꽃은 아무 인적도 없는 산 속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물에서 핍니다. 이제 현대인은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뛰어넘어 도시의 생활 한 복판에서 출가자처럼 무아와 무욕의 삶을 사는 방도를 강구해야만 합니다. 몸의 출가보다 어려운 것이 마음의 출가라고 합니다. 절에 들어가서도 세속적 욕망을 끊지 못한다면 삭발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국 절에 있든 세속에 있든 무욕과 무아를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문제의 관건입니다. 불교계에서도 최근 재가불교 연대의 활동이 활발하고 재가자로서 일상 속에서 명상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모두 전통적인 재가와 출가의 거리를 좁히려는 좋은 현상들입니다. 우리 새길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것도 세상 안에서 대안적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속 속에서의 수도생활, 도심 한 가운데서 예수원과 같은 수도공동체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불교 출가승들이 사는 무욕의 삶이 지닌 또 하나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청빈한 삶을 사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이 삶의 최소한의 욕망도 채우지 못하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아직도 이 세계에는 하루 1달러도 못되는 돈으로 삶을 연명해 나가는 절대 빈곤층의 사람이 10억 이상이나 됩니다. 수도원적 가난의 영성만으로는 한 사회 내의 엄청난 빈부의 격차는 물론이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격차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경제발전을 통해 다수의 생활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불가피하게 빈부의 격차, 자원의 고갈, 환경파괴 등 근본적인 문제들이 수반됩니다. 더 많은 부의 창출도 필요하지만 기존의 창출된 부를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공정하게 분배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정치적 투쟁과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스스로의 욕망을 줄이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려는 자발적 가난의 영성과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나라들을 위한 사회적 연대와 정치적 투쟁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근 세계 정치경제의 실력자들이며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이제는 이런 사회적 관심과 환경문제를 제기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직도 수사적 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요원합니다. 특히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보여 주는 도덕적 수준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이나 환경 문제는 안중에 없고 테러 사건을 빌미로 하여 전 세계를 신냉전구도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테러를 없애기 위해 사상 유례 없는 국방예산을 책정했지만, 그 국방비의 십분의 일만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 사용하면 지구상 테러 위험이 말끔히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미국은 모릅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자본주의의 교과서 같다는 미국이 지금 엔론 사건으로 세계적 망신을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걸핏하면 후진국 기업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던 미국이 어느 후진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치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는 평론가의 말대로, 무너진 쌍둥이 빌딩은 언제든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엔론 사태를 계기로 해서 무너진 신뢰는 다시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편, 뉴욕의 세계경제포럼과 발맞추어 브라질에서는 세계사회포럼이 개최되어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지만 아무런 실력도 없는 사람들의 외침이라 허공만 울릴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들과 연대하여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라는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에 사로잡혀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스리랑카 신학자인 피에리스 신부의 말대로, 나 자신이 가난해 지려는 투쟁(struggle to be poor)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쟁(struggle for the poor) 입니다. 이 둘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길이며,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살리고 구하는 구체적 실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실천이야말로 오늘의 세계에서 진정으로 인간성을 유지하며 사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조금이라도 실천하지 못하고 떠드는 온갖 사상이나 이념이나 신앙은 허구에 불과하다 해도 지나친 독선과 편견을 아닐 것입니다.
킬링필드의 악몽을 벗어나 캄보디아 인민이 진정으로 다시 사는 길도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며, 20세기의 온갖 이데올로기의 폭력과 광기의 역사에서 벗어나 인류가 진정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길도 여기에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본 바 이스라엘 백성의 마른 뼈들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영의 바람도 가난의 영성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쟁 속에서 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나 자신이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이렇게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한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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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242 설교자료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의 설교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8-08-09 8470
1241 설교자료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의 설교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8-08-09 7215
1240 설교자료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목사의 설교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8-08-09 9471
1239 설교자료 남서울 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설교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8-08-09 4092
1238 신명기 도피성과 현대교회 신19:1-10  김승곤 목사  2008-08-09 4696
1237 창세기 술 길 샘 곁으로 오신 분 창16:7-11  김이곤 목사  2008-08-08 2376
1236 요한일서 황무지에 붉은 장미꽃 피고 요일3:14-15  권순구 목사  2008-08-08 2428
1235 출애굽기 축제도 고통도 함께 하는 공동체 출15:19-21  최만자 자매  2008-08-08 2462
1234 마태복음 조건 없는 사랑 마25:31-46  차옥숭 자매  2008-08-08 2853
1233 요한복음 놀이는 인생, 인생은 놀이 요3:16  길희성 형제  2008-08-08 2417
1232 출애굽기 진창길과 기적 출14:21-25  김준우 목사  2008-08-08 2321
1231 민수기 살듯이 죽기(In Death as in Life) 민20:1  최창모 교수  2008-08-08 2658
1230 고린도전 사랑, 그 난해한 수수께끼 고전13:11-13  차정식 교수  2008-08-08 2140
1229 마태복음 폭행 당하는 하늘나라, 꽃씨 뿌리는 예수 마11:12  정경일 형제  2008-08-08 2457
1228 요한복음 종교는 비우고, 사랑은 채워야 요2:1-12  한완상 형제  2008-08-08 2297
1227 창세기 나무 이야기 창2:8-9  박경미 교수  2008-08-08 2161
1226 마태복음 선과 악을 어찌할 것인가? 마5:43-48  길희성 형제  2008-08-08 2189
1225 사도행전 부활의 역사 행4:1-22  한인철 목사  2008-08-07 2158
1224 요한복음 어떤 시작 요6:8-11  김민웅 목사  2008-08-07 2682
1223 요한복음 아무런 기억을 지니지 않는 이들 요3:1-9  강남순 교수  2008-08-07 2267
1222 시편 하나님 체험 시137:1-4  한완상 형제  2008-08-07 1693
1221 갈라디아 깨어질 수 없는 거울 갈5:1, 22-24  이정배 목사  2008-08-07 2051
1220 마태복음 봉사의 삶 마25:31-46  윤공부 목사  2008-08-05 2296
» 에스겔 황금불상, 누런 가사, 킬링 필드 겔37:1-14  길희성 형제  2008-08-05 2332
1218 누가복음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민영진 목사  2008-08-05 3991
1217 시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다 시23편  한완상 형제  2008-08-05 2275
1216 누가복음 하나님 인식의 척도 눅7:36-50  박충구 목사  2008-08-05 1956
1215 고린도후 화해시키는 임무 고후5:17-19  김종일 형제  2008-08-05 1752
1214 시편 창조의 영성 시95:1-7  서창원 목사  2008-08-05 2011
1213 마태복음 임마누엘의 의미 마1:18-25  김준우 목사  2008-08-05 3149
1212 호세아 백발에는 염색을 [2] 호7:8-9  최창모 교수  2008-08-05 2306
1211 마태복음 예수따름이: 고정관념 깨기 마8:2-4  조혜자 자매  2008-08-05 2158
1210 마가복음 하느님의 꿈 막10:23-27  한인철 목사  2008-08-04 1914
1209 출애굽기 적을 위한 윤리가 필요한 시대 출21:23-25  최만자 자매  2008-08-04 1948
1208 마태복음 내 빚을 갚으라 마18:23-35  김광수 목사  2008-08-0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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