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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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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남순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2002. 3.10 주일설교 |
I
3월은 새로운 시작의 계절입니다.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고, 새로운 생명들이 움트는 봄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외면적인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 우리의 내면세계에서의 새로운 시작과 언제나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이나 새로운 계절의 시작은 외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동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란 그렇게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새로움이란 단지 과거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새로운 시작이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자기 의심과 냉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한 용기, 그리고 과거에의 집착으로부터 단호히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이 아침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새로움을 느끼십니까?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오늘과 내일이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느낀다면 이 삶에서 새로운 시작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II
어느 날 밤에 아주 존경받는 높은 위치에 있는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또한 유대사회에서 대법원과도 같은 '산헤드린'의 멤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한 존경받는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옵니다. 이 밤이란 사실상 낮과 밤이라는 시간대를 말하기보다는 '상실의 시간'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많이 쓰이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은 니고데모가 어떠한 깊은 번민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민과 번민이 무엇인가를 예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는 압니다...(We know)"라면서 그의 말을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란 니고데모가 뿌리내리고 있는 공동체, 즉 다양한 특권과 권력을 오랫동안 지닌 찬란한 과거를 지닌 이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들 공동체에 속한 "우리"란 이 세계에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가에 대하여 아주 분명히 규정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니고데모는 "우리는 압니다.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것을..."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칭송하는 이러한 니고데모의 말을 듣고 나서, 전혀 방향이 다른 동문서답격의 응답을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이 이야기는 교회생활을 하신 분들이라면 아주 많이 들었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에 대하여 훤히 잘 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나의 삶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이야기 일까를 찾아 내지 않는 다면, 사실상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깊은 뜻을 전달해 주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지식을 해박하게 알고 있을 니고데모, 이 세계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자명하게 결론 내리고 있을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그의 진술과 상관없는 것 같은 말로 대답을 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왜 찾아 왔는가,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는 무엇이 그토록 고민스러워서 예수를 밤에 찾아왔을까를 예수는 알아차렸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압니다..."라고 시작되는 그의 언저리를 겉도는 진술이 니고데모의 깊은 내면적 물음이나 고민거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는 금방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의 말과는 상관없는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직선적으로 던집니다. 이 말은 니고데모의 인식과 지식체계를 근원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이 세계에서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니고데모에게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의 이러한 말은 전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왜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러한 말을 던졌으며, 이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III
저는 지난 2000년 가을부터 이번 8월까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신학부의 계약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캠브리지대학교의 초청을 받았을 때, 저는 독일과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캠브리지의 생활이 독일과 미국에서의 대학과 그렇게 별로 커다랗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여 생활을 하면서, 저는 독일이나 미국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곳곳에서 경험하면서 놀라게 되었습니다. 교수들이 회의를 할 때에는 검은 가운을 입고 회의를 하고, 모든 대학들마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가지는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하는 저녁식사에는 학생이나 교수들 모두 검은 가운을 입고 식사를 합니다. (캠브리지 대학교는 31개의 college를 가지고 있으며, 이 college들은 한국의 대학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college는 강의를 개설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 개개인의 생활을 다양하게 돌보아 주는 기숙사 같은 개념입니다. 이 각기 다른 대학들은 세워진 연도도 다르고 그 대학들이 지켜오고 있는 전통들도 조금씩 다릅니다.) 식사하기 전에 대부분의 대학들에서는 학생대표든가 채플린의 대표가 나와서 라틴어로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가 끝나면 라틴어로 식사마치는 기도를 합니다. 이러한 예식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대학들은 수백년 이상이 된 은그릇들로 식사를 하고, 세 코스의 정식식사를 serve 받으며 소위 품위 있는 영국상류층 사람들의 식사방식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각 대학에 속하여 있는 교수들은 매일 그 대학 내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합니다. 지난해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식을 할 때에도 모든 순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라틴어로 행하여 졌습니다. 물론 순서지 에는 영어로 해석이 되어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캠브리지 밖에서 온 내빈들이 라틴어로 행하여지는 학위식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많은 한국의 기자들이 한국인인 저에게 '도대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식을 거행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저와 같이 캠브리지 대학교 안에서 그 식에 초청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학위가운을 입고 오라는 것이 초청장과 함께 온 편지에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캠브리지생활을 하면서, 이 대학교가 아주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지켜오고 있는 찬란한 과거의 전통이 지닌 그 역사적 연속성에 대하여 부러운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간혹은 이 찬란한 과거들이, 너무나 기억할 것이 많은 것들이, 이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전공분야들은 제가 모릅니다만, 적어도 신학부에서는 제가 미국의 대학교에서 1980년대 90년대에 택하였던 과목들과 같은 것들이 전혀 개설되지 않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강의들은 대부분 과거의 전통과의 연관성을 지닐 때에만 그 학문성이 인정되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과거의 학문적 전통이나 학설들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도전하고 비판하는 새로운 현대적 사상들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저는 이러한 분위기를 Oxford 대학의 신학부에서도 유사하게 느꼈습니다. 캠브리지 보다 먼저 세워진 학교인 Oxford의 신학풍은 그래서 캠브리지 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영국의 상류사회를 이끌어 가는 인재들을 키운다는 이 두 대학교는 기억할 것을 너무나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찬란한 과거 전통과 기억과 추억들은 새로운 시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에서는 아주 새로운 현대담론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저는 한번 그 이유를 점심시간에 제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철학부 교수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같은 대학에 속하는 교수들은 거의 매일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 때문에 전공이 달라도 흥미롭게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들을 갖습니다. 그는 비교적 젊은 교수였는데, "그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It is a painful story)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 사실상 저 나름대로 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기억할 것이 너무 많은 이들, 자랑할 것이 많은 찬란한 과거를 지닌 이들이 상실하기 쉬운 것은, "새로운 시작함"이 주는 그 생생한 의미들의 상실입니다. 그들은 변화를 거절하기 쉽고, 현재와 미래보다는 과거 속에 사는 이들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는 압니다" 보다는 과거 전통이 내려준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압니다"라는 진술을 퉁해서만 확신을 갖는 이들입니다. 저는 미국대학교와 캠브리지 대학교를 단순하게나마 비교하면서, 찬란한 전통과 과거를 지닌, 그래서 기억할 것이 너무나 많은 캠브리지 대학교가 그들에 비하여 별로 기억할 것이 없는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의 대학교에 비하여 많은 것은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밤에 예수를 찾은 니고데모, 학식,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그 모든 것을 다 갖춘 그가 고민과 번민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번민의 내용이 무엇인지 성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삶 속에는 구원이 없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단호히 던집니다. 찬란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니고데모, 기억할 것이 너무나 많은 니고데모에게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요한복음 3장 9절에 보니까 그는 "How can this be...!"(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예수에게 놀라서 반문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어떠한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은 다음에 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는 사실적 표현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는 우리에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세계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것이다'라고 항목별로 나열하여 모두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예수께서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목별로 하나님 나라의 테두리를 분명히 긋기 시작할 때, 이미 그 하나님 나라는 경직되고 고착되어 그 무한한 생명력 있는 의미가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통해서 어떠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상태일까에 대하여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표상은 우리의 삶의 깊이와 넓이만큼 심화되고 확장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는 예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 나라란 우리 삶에 온전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구원의 차원과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IV
저는 지난 2월 말 캠브리지에서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에 영국의 TV 방송에서 아주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3주에 걸쳐서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Andy Warhol 이라는 미국의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룬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우연히 첫 방송을 보고서 저는 나머지 두 번에 걸친 방송도 놓치지 않고 보았습니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고 (그의 출생신고서가 정확하지 않다고 하는데, 그가 1928년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1930년에 태어났다고도 함) 1987년에 죽었는데, 20세기의 후반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닌 미국의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개인 이름으로 된 박물관인 Andy Warhol Museum이 그의 출생지인 피츠버그에 있다고 합니다. 이 Andy Warhol의 작품세계와 그의 삶의 철학은 제게 다양한 점에서 깊은 통찰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상식과 관습의 잣대로 평가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고, 예술의 세계를 추구하였습니다. 그의 일생과 예술세계에 대하여 제가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할 수 없지만, 제가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받은 한가지 중요한 통찰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몸이 약했고, 성홍열까지 앓아서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말을 빨리 빨리 하지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육성으로 녹음된 그의 철학 "Philosophy of Andy Warhol"이라는 테입은 그 자신의 말을 녹음 한 것이고 그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 적어서 책으로도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어눌한 말투로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 방송에서 나왔을 때, 저는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말투와 분위기를 모두 전달 할 수는 없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 I don't have any memory. I don't have any momery of people and places. I forget everything. I start everything as new. I meet people as if I meet them for the first time. I see things as if I have never seen them before. I just don't have any memory. Everything is new to me. Every moment is new to me."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자화상 중에는 "I Am from Nowhere"라는 제목이 달린 작픔이 있습니다. "I am from nowhere"라는 선언은 철저한 자유의 선언입니다. 철저하게 매 순간을 스스로 새롭게 창조하며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속한 출신, 찬란한 과거 업적, 경력이 아니라, 지금 매 순간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느끼며 살고 있는가'라는 끊임없는 현재적 삶에 자신을 기투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한 사람의 출신, 찬란한 과거, 빛나는 역사전통, 내세울 것이 많은 것 같은 배경들이, 사실상 많은 경우 새로움을 경험하는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을 저는 많은 사람들, 많은 단체들, 모임들, 그리고 여러 문화들에서 경험을 해 왔습니다.
V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생각할 수록 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밥만으로 그 조건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어찌 보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번민과 투쟁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인간됨의 의미는 언제나 ‘자유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영화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 잘 곳이 마련되어 있어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그리는 그 영화들 속에서 아마 자신이 느끼는 감옥으로부터 자유를 향한 탈출을 시도하는 만족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오래 전에 보았는데, 주인공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감옥에 있는 그 주인공이 어느 날 방송으로 듀엣의 아름다운 아리아를 크게 틀어서 온 감옥에 가득 차게 한 그 이미지가 나에게 아주 인상깊게 남아있습니다. 사방 철망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자유가 어떻게 제한되고 있는가를 망각하며 그 감옥생활에 길들여져 매일 매일 지내던 사람들, 자신들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며 쳇바퀴 도는 감옥에서의 삶을 그런 대로 만족스럽게 살던 사람들이, 뜻밖에 한없이 높고 길게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듀엣의 아리아를 듣는 그 순간--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불현듯 깨닫습니다. 감옥의 이곳 저곳에서 큰 불평 없이 잡담을 나누며 주어진 일들을 하고 있던 그들이, 별안간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그 아리아를 듣는 순간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그 아리아에 귀기울입니다. 그 돌연한 침묵의 순간--그 순간은 감옥에서도 큰 문제없이 만족하며 살아가던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사실상 한없는 허구적 삶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이었으며, 자신들의 삶이 사방 벽으로 둘려 쌓인 부자유의 삶이라는 것을 마주보게 하는 순간이 됩니다. 자신들이 상실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였던 그 자유의 삶--그 자유가 무엇인가를 사람들이 흘깃 보게 되는 순간이 된 것이었든 것입니다. 일손을 놓고 아리아를 향해 온통 집중하는 그 사람들의 눈에는 자유에의 갈망이 절절히 담겨 있었습니다. 감옥의 벽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울려 퍼지는 아리아를 들으며 사람들은 비로소 그 감옥의 벽 너머의 자유에 대한 목마름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유에의 갈망을 지닌 사람들의 순전한 모습은 어디에서든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그 장면에서 느꼈습니다.
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벽들이 감옥의 벽만이 아니라, 과거의 벽, 찬란한 추억과 기억의 벽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속에서만 만족을 느끼고 그러한 벽들 밖으로 자신을 떼어 미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실상 우리의 대부분은 이러한 과거의 전통과 관습, 기억과 추억의 벽속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감옥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듀엣의 아리아처럼 우리 일상의 공간을 넘어서게 하는 그 무엇을 만났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인간됨을 가로막고 있는가를 불현듯 보게 됩니다. 그 아리아는 우리가 안주하고 편안해 하고, 또는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이 사실상 우리의 삶을 경직시키고, 새로움을 보거나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돌연히 깨닫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은 사실상 이 감옥 안에 뜻밖에 들려진 아리아와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찬란한 추억과 경력을 지닌 니고데모, 모든 것을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었을 니고데모에게 충격적인 근원적 도전이 되었던 말이었을 것입니다.
VI
사물을 전적으로 새롭게 보고,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이라도 새로운 눈으로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찬란한 전통과 추억의 이름으로 우리 속에 쌓여진 편견과 집착으로부터의 철저한 자 유함을 의미합니다. 기억과 추억에의 집착으로의 자유함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물들, 사람들 속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끊임없이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끊임없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고, 새로운 변화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을 새롭게 살 수 있는 사람, 늘 만나는 사람들도 편견과 선입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만날 수 있는 이들만이 이전에 발견하지 못하는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이들이며, 우리 주변 속에서 전적으로 새로움을 경험 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고, 매 순간을 아주 새로운 눈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 우리가 만나는 이들을 마치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보고 느끼고 만날 수 있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3월은 새로운 시작의 계절입니다.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고, 새로운 생명들이 움트는 봄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외면적인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 우리의 내면세계에서의 새로운 시작과 언제나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이나 새로운 계절의 시작은 외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동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란 그렇게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새로움이란 단지 과거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새로운 시작이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자기 의심과 냉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한 용기, 그리고 과거에의 집착으로부터 단호히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이 아침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새로움을 느끼십니까?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오늘과 내일이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느낀다면 이 삶에서 새로운 시작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II
어느 날 밤에 아주 존경받는 높은 위치에 있는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또한 유대사회에서 대법원과도 같은 '산헤드린'의 멤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한 존경받는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옵니다. 이 밤이란 사실상 낮과 밤이라는 시간대를 말하기보다는 '상실의 시간'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많이 쓰이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은 니고데모가 어떠한 깊은 번민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민과 번민이 무엇인가를 예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는 압니다...(We know)"라면서 그의 말을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란 니고데모가 뿌리내리고 있는 공동체, 즉 다양한 특권과 권력을 오랫동안 지닌 찬란한 과거를 지닌 이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들 공동체에 속한 "우리"란 이 세계에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가에 대하여 아주 분명히 규정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니고데모는 "우리는 압니다.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것을..."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칭송하는 이러한 니고데모의 말을 듣고 나서, 전혀 방향이 다른 동문서답격의 응답을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이 이야기는 교회생활을 하신 분들이라면 아주 많이 들었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에 대하여 훤히 잘 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나의 삶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이야기 일까를 찾아 내지 않는 다면, 사실상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깊은 뜻을 전달해 주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지식을 해박하게 알고 있을 니고데모, 이 세계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자명하게 결론 내리고 있을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그의 진술과 상관없는 것 같은 말로 대답을 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왜 찾아 왔는가,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는 무엇이 그토록 고민스러워서 예수를 밤에 찾아왔을까를 예수는 알아차렸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압니다..."라고 시작되는 그의 언저리를 겉도는 진술이 니고데모의 깊은 내면적 물음이나 고민거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는 금방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의 말과는 상관없는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직선적으로 던집니다. 이 말은 니고데모의 인식과 지식체계를 근원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이 세계에서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니고데모에게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의 이러한 말은 전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왜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러한 말을 던졌으며, 이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III
저는 지난 2000년 가을부터 이번 8월까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신학부의 계약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캠브리지대학교의 초청을 받았을 때, 저는 독일과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캠브리지의 생활이 독일과 미국에서의 대학과 그렇게 별로 커다랗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여 생활을 하면서, 저는 독일이나 미국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곳곳에서 경험하면서 놀라게 되었습니다. 교수들이 회의를 할 때에는 검은 가운을 입고 회의를 하고, 모든 대학들마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가지는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하는 저녁식사에는 학생이나 교수들 모두 검은 가운을 입고 식사를 합니다. (캠브리지 대학교는 31개의 college를 가지고 있으며, 이 college들은 한국의 대학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college는 강의를 개설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 개개인의 생활을 다양하게 돌보아 주는 기숙사 같은 개념입니다. 이 각기 다른 대학들은 세워진 연도도 다르고 그 대학들이 지켜오고 있는 전통들도 조금씩 다릅니다.) 식사하기 전에 대부분의 대학들에서는 학생대표든가 채플린의 대표가 나와서 라틴어로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가 끝나면 라틴어로 식사마치는 기도를 합니다. 이러한 예식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대학들은 수백년 이상이 된 은그릇들로 식사를 하고, 세 코스의 정식식사를 serve 받으며 소위 품위 있는 영국상류층 사람들의 식사방식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각 대학에 속하여 있는 교수들은 매일 그 대학 내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합니다. 지난해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식을 할 때에도 모든 순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라틴어로 행하여 졌습니다. 물론 순서지 에는 영어로 해석이 되어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캠브리지 밖에서 온 내빈들이 라틴어로 행하여지는 학위식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많은 한국의 기자들이 한국인인 저에게 '도대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식을 거행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저와 같이 캠브리지 대학교 안에서 그 식에 초청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학위가운을 입고 오라는 것이 초청장과 함께 온 편지에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캠브리지생활을 하면서, 이 대학교가 아주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지켜오고 있는 찬란한 과거의 전통이 지닌 그 역사적 연속성에 대하여 부러운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간혹은 이 찬란한 과거들이, 너무나 기억할 것이 많은 것들이, 이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전공분야들은 제가 모릅니다만, 적어도 신학부에서는 제가 미국의 대학교에서 1980년대 90년대에 택하였던 과목들과 같은 것들이 전혀 개설되지 않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강의들은 대부분 과거의 전통과의 연관성을 지닐 때에만 그 학문성이 인정되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과거의 학문적 전통이나 학설들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도전하고 비판하는 새로운 현대적 사상들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저는 이러한 분위기를 Oxford 대학의 신학부에서도 유사하게 느꼈습니다. 캠브리지 보다 먼저 세워진 학교인 Oxford의 신학풍은 그래서 캠브리지 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영국의 상류사회를 이끌어 가는 인재들을 키운다는 이 두 대학교는 기억할 것을 너무나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찬란한 과거 전통과 기억과 추억들은 새로운 시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에서는 아주 새로운 현대담론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저는 한번 그 이유를 점심시간에 제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철학부 교수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같은 대학에 속하는 교수들은 거의 매일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 때문에 전공이 달라도 흥미롭게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들을 갖습니다. 그는 비교적 젊은 교수였는데, "그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It is a painful story)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 사실상 저 나름대로 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기억할 것이 너무 많은 이들, 자랑할 것이 많은 찬란한 과거를 지닌 이들이 상실하기 쉬운 것은, "새로운 시작함"이 주는 그 생생한 의미들의 상실입니다. 그들은 변화를 거절하기 쉽고, 현재와 미래보다는 과거 속에 사는 이들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는 압니다" 보다는 과거 전통이 내려준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압니다"라는 진술을 퉁해서만 확신을 갖는 이들입니다. 저는 미국대학교와 캠브리지 대학교를 단순하게나마 비교하면서, 찬란한 전통과 과거를 지닌, 그래서 기억할 것이 너무나 많은 캠브리지 대학교가 그들에 비하여 별로 기억할 것이 없는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의 대학교에 비하여 많은 것은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밤에 예수를 찾은 니고데모, 학식,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그 모든 것을 다 갖춘 그가 고민과 번민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번민의 내용이 무엇인지 성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삶 속에는 구원이 없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단호히 던집니다. 찬란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니고데모, 기억할 것이 너무나 많은 니고데모에게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요한복음 3장 9절에 보니까 그는 "How can this be...!"(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예수에게 놀라서 반문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어떠한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은 다음에 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는 사실적 표현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는 우리에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세계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것이다'라고 항목별로 나열하여 모두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예수께서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목별로 하나님 나라의 테두리를 분명히 긋기 시작할 때, 이미 그 하나님 나라는 경직되고 고착되어 그 무한한 생명력 있는 의미가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통해서 어떠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상태일까에 대하여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표상은 우리의 삶의 깊이와 넓이만큼 심화되고 확장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는 예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 나라란 우리 삶에 온전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구원의 차원과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IV
저는 지난 2월 말 캠브리지에서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에 영국의 TV 방송에서 아주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3주에 걸쳐서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Andy Warhol 이라는 미국의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룬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우연히 첫 방송을 보고서 저는 나머지 두 번에 걸친 방송도 놓치지 않고 보았습니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고 (그의 출생신고서가 정확하지 않다고 하는데, 그가 1928년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1930년에 태어났다고도 함) 1987년에 죽었는데, 20세기의 후반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닌 미국의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개인 이름으로 된 박물관인 Andy Warhol Museum이 그의 출생지인 피츠버그에 있다고 합니다. 이 Andy Warhol의 작품세계와 그의 삶의 철학은 제게 다양한 점에서 깊은 통찰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상식과 관습의 잣대로 평가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고, 예술의 세계를 추구하였습니다. 그의 일생과 예술세계에 대하여 제가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할 수 없지만, 제가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받은 한가지 중요한 통찰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몸이 약했고, 성홍열까지 앓아서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말을 빨리 빨리 하지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육성으로 녹음된 그의 철학 "Philosophy of Andy Warhol"이라는 테입은 그 자신의 말을 녹음 한 것이고 그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 적어서 책으로도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어눌한 말투로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 방송에서 나왔을 때, 저는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말투와 분위기를 모두 전달 할 수는 없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 I don't have any memory. I don't have any momery of people and places. I forget everything. I start everything as new. I meet people as if I meet them for the first time. I see things as if I have never seen them before. I just don't have any memory. Everything is new to me. Every moment is new to me."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자화상 중에는 "I Am from Nowhere"라는 제목이 달린 작픔이 있습니다. "I am from nowhere"라는 선언은 철저한 자유의 선언입니다. 철저하게 매 순간을 스스로 새롭게 창조하며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속한 출신, 찬란한 과거 업적, 경력이 아니라, 지금 매 순간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느끼며 살고 있는가'라는 끊임없는 현재적 삶에 자신을 기투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한 사람의 출신, 찬란한 과거, 빛나는 역사전통, 내세울 것이 많은 것 같은 배경들이, 사실상 많은 경우 새로움을 경험하는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을 저는 많은 사람들, 많은 단체들, 모임들, 그리고 여러 문화들에서 경험을 해 왔습니다.
V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생각할 수록 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밥만으로 그 조건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어찌 보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번민과 투쟁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인간됨의 의미는 언제나 ‘자유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영화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 잘 곳이 마련되어 있어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그리는 그 영화들 속에서 아마 자신이 느끼는 감옥으로부터 자유를 향한 탈출을 시도하는 만족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오래 전에 보았는데, 주인공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감옥에 있는 그 주인공이 어느 날 방송으로 듀엣의 아름다운 아리아를 크게 틀어서 온 감옥에 가득 차게 한 그 이미지가 나에게 아주 인상깊게 남아있습니다. 사방 철망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자유가 어떻게 제한되고 있는가를 망각하며 그 감옥생활에 길들여져 매일 매일 지내던 사람들, 자신들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며 쳇바퀴 도는 감옥에서의 삶을 그런 대로 만족스럽게 살던 사람들이, 뜻밖에 한없이 높고 길게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듀엣의 아리아를 듣는 그 순간--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불현듯 깨닫습니다. 감옥의 이곳 저곳에서 큰 불평 없이 잡담을 나누며 주어진 일들을 하고 있던 그들이, 별안간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그 아리아를 듣는 순간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그 아리아에 귀기울입니다. 그 돌연한 침묵의 순간--그 순간은 감옥에서도 큰 문제없이 만족하며 살아가던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사실상 한없는 허구적 삶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이었으며, 자신들의 삶이 사방 벽으로 둘려 쌓인 부자유의 삶이라는 것을 마주보게 하는 순간이 됩니다. 자신들이 상실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였던 그 자유의 삶--그 자유가 무엇인가를 사람들이 흘깃 보게 되는 순간이 된 것이었든 것입니다. 일손을 놓고 아리아를 향해 온통 집중하는 그 사람들의 눈에는 자유에의 갈망이 절절히 담겨 있었습니다. 감옥의 벽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울려 퍼지는 아리아를 들으며 사람들은 비로소 그 감옥의 벽 너머의 자유에 대한 목마름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유에의 갈망을 지닌 사람들의 순전한 모습은 어디에서든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그 장면에서 느꼈습니다.
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벽들이 감옥의 벽만이 아니라, 과거의 벽, 찬란한 추억과 기억의 벽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속에서만 만족을 느끼고 그러한 벽들 밖으로 자신을 떼어 미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실상 우리의 대부분은 이러한 과거의 전통과 관습, 기억과 추억의 벽속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감옥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듀엣의 아리아처럼 우리 일상의 공간을 넘어서게 하는 그 무엇을 만났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인간됨을 가로막고 있는가를 불현듯 보게 됩니다. 그 아리아는 우리가 안주하고 편안해 하고, 또는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이 사실상 우리의 삶을 경직시키고, 새로움을 보거나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돌연히 깨닫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은 사실상 이 감옥 안에 뜻밖에 들려진 아리아와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찬란한 추억과 경력을 지닌 니고데모, 모든 것을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었을 니고데모에게 충격적인 근원적 도전이 되었던 말이었을 것입니다.
VI
사물을 전적으로 새롭게 보고,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이라도 새로운 눈으로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찬란한 전통과 추억의 이름으로 우리 속에 쌓여진 편견과 집착으로부터의 철저한 자 유함을 의미합니다. 기억과 추억에의 집착으로의 자유함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물들, 사람들 속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끊임없이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끊임없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고, 새로운 변화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을 새롭게 살 수 있는 사람, 늘 만나는 사람들도 편견과 선입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만날 수 있는 이들만이 이전에 발견하지 못하는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이들이며, 우리 주변 속에서 전적으로 새로움을 경험 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고, 매 순간을 아주 새로운 눈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 우리가 만나는 이들을 마치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보고 느끼고 만날 수 있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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