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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어찌할 것인가?

마태복음 길희성............... 조회 수 2184 추천 수 0 2008.08.08 1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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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43-48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2. 4. 7주일설교 
마태복음 5 : 43∼48, 7 : 1∼6

최근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전 세계를 신 냉전 시대로 되돌리고 있습니다. 그런 대로 명분을 가지고 있던 테러와의 전쟁과는 달리 이란, 이라크, 북한을 느닷없이 악의 축으로 지명하면서 곧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감행할 듯한 기세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보다도 더 상대가 안 되는 힘없는 알 카에다를 섬멸하더니, 이제 기고만장하여 전 세계를 상대로 본격적인 경찰국가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불길한 것은, 이와 더불어 멀리서 한반도를 향해 전운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마침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어제 아침, 반가운 봄비가 내려 가뭄에 목 타고 있던 강산을 촉촉이 적셔주듯, 임동원 특사가 남북관계에 반가운 봄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일희일비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입니다.

도대체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며, 우리는 선악의 구별과 대립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이 어렵고 민감한 문제를 놓고 오늘 아침 여러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악이란 말은 함부로 사용할 말이 아닙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원하시고 악을 미워한다고 기독교인들은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선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악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에게는 선과 악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악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힘을 가리키며 믿는 자들은 악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악은 미워하지만 악한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을 공허한 말입니다. 어떻게 둘을 분리한다는 말입니까? 악을 없애려면 일단 악의 주체인 악한 자를 제압하고 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일단 벌을 준 다음 사랑으로 감싸는 것은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식입니다. 감싸안기 전에 벌을 받아 죽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런 논리는 사실상 악인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랑을 하려면 상대방을 그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포용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악한 자들도 미워하고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며, 이 둘은 기독교인들에게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부시도 기독교인임을 자처하고 보수적 기독교 풍토에서 자란 사람이기에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처럼 이런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대다수의 소박한 미국인들처럼 서부활극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입니다. 서부 카우보이 시대 영화를 보면, 선과 악이 매우 뚜렷하게 부각됩니다. 거기에는 빠짐없이 Good guy와 Bad guy가 등장하며, bad guy가 good guy나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최후의 결투에서 good guy에 의해 죽고 만다는 내용이 주종을 이룹니다. 따라서 부시가 악의 축으로 세 나라를 지목했을 때 그는 이 세 나라, 적어도 그 세 정권은 세상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할 권리가 없는 정권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러한 말을 서슴지 않고 당당하게 하는 그가 대표하고 있는 미국은 선한 나라로서, 악을 섬멸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 나라가 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영화에서나 나오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또 자기들 안방에서 서부 활극을 벌린다면 또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엄연히 주권국가들, 그리고 그 나름대로 선과 악을 따지기 어려운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통하여 탄생된 정권을 향해 서슴지 않고 권총을 빼들려 하는 미국의 독선과 오만은 전 세계인들을 경악케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원래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업고서 출발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거룩한 백성으로서 특별한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지닌 백성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했다면, 미국은 구라파라는 구 시대와 구 질서를 탈출하는 새로운 출애굽을 감행하여 세운 나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가나안 땅에서 구시대의 억압적 질서를 청산하고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나라라는 선민의식이 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전 세계의 자유의 수호자로서 자처하며 군림하고 있습니다. 남녀차별, 인종차별, 엄청난 빈부격차, 마약, 총기난사 등 각종 범죄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나라, 정의와 평등,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나라, 방종에 가까운 극도의 개인주의적 자유 외에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가 마치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나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본래부터 이러한 도덕적 오만과 종교적 사명감으로 뭉친 나라이기에, 부시 같은 인물이 사용하는 '악'이라는 말에는 하나님의 적이라는 뜻이 당연히 담겨 있고, 이러한 악의 세력을 척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특별한 축복을 받은 미국은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 그 일을 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종교적 신앙의 논리와 도덕적 오만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의 이른바 기독교 우익(Christian right) 세력이 강한데, 부시 대통령을 당선시킨 것도 바로 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80년대 레이건 시대에 한참 맹위를 떨치다가 그 후 수그러지는 경향을 보였는데,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이 터져 그들의 도덕적 자만심에 다시 불을 붙였고, 그들의 지원 하에 부시가 간신히 당선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악의 축 발언을 마음놓고 하는 것도 결국 그 배후에는 기독교 우익 내지 보수 층, 그리고 미국민 일반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단순 소박한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9·11 테러라는 그야말로 악의 극치를 자기들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선악을 두부 모 자르듯 가르는 부시 식 사고방식이 단순무지하고 소박한 대다수 미국민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 일반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선악을 하나님과 결부시키는 것은 인격적인 하나님, 도덕적 의지를 지닌 하나님을 믿는 성서적 신앙에 기초한 것이고 기독교의 본질적 전통입니다. 하나님 신앙과 도덕적 신념이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한 특징이고 위대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성서적 신앙은 선악의 피안이라는 개념을 모릅니다. 인간은 항시 하나님의 준엄한 윤리적 명령과 심판 아래 서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러한 도덕적 신앙은 매우 위험한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인간의 애매한 도덕적 싸움에 하나님을 끌어들여 인간의 분쟁과 다툼을 더 격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선악의 대립이 이제 인간들의 생각이나 판단의 차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으로 확대되고 극단화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보는 선과 악의 잣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하여 상대방을 악마로, 악의 축으로 간주하여 대화할 필요도 없고 상종할 가치도 없는, 아예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기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를 강조하는 신앙이 자기 절대화의 편리한 수단이 되고,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편이라는 부족주의 신앙으로 쉽게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선악의 대립 피안에 있는 초연한 하나님을 믿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인들이 범하는 가장 심각한 죄 중에 하나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세 번째 계명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 오용, 남용해 왔으며, 지금도 툭하면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려 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경 자체가 일정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단순히 우리와 같은 사람처럼 보는 인격적 신관이 주종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초월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의인화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초월적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이전의 다신 숭배자들의 신화처럼 신들에 대하여 조잡한 의인화를 서슴지 않고 합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거닐었다느니,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했다느니 하는가 하면, 질투하시는 하나님, 진노하고 증오하는 하나님 등 초월적 신에게 걸맞지 않는 조잡한 표현들로 성경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 뜻, 섭리, 계획, 명령, 말씀, 지혜, 그리고 선과 악 등 수많은 인간에 관한 단어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수와 벌주기를 예사로 하는 하나님, 원수를 남김없이 박멸하라고 명하는 잔인한 폭군, 조상의 죄를 죄 없는 자손에게까지도 묻는 불공정한 하나님 상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원죄라는 운명의 족쇄를 씌우는 하나님을 교회는 버젓이 성스러운 진리로 가르쳐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들먹이며 인간을 위협하는가 하면, 나의 뜻,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나의 뜻을 관철하거나 나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곧잘 스스로를 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와 닮은 사람처럼 말하다 보니, 기독교인들은 툭하면 자기의 생각과 의지, 욕구와 욕망 등 온갖 생각을 하나님께 투사하여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바라고 말합니다. 사업이 잘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 내가 입학시험에 붙는 것도 하나님의 뜻, 교통사고 속에서 자기만 살아남은 것도, 교회를 무리하게 확장하는 것도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징벌이라고까지 극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하나님의 적이요 원수로 낙인찍히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와 인생의 수수께끼 앞에서 겸손히 머리 숙여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기독교인들의 이런 유치한 신관과 논리 앞에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이들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란 이 세상의 사물들, 피조물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어떤 말도 초월적 존재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침묵만이 합당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기독교 신학의 한 전통에서는 이른바 '부정신학'이란 것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일체 긍정적인 진술을 거부하고 오직 그가 어떠어떠한 것이 아니다라는 부정적 진술만을 하자는 신학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단절과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며 원인이시기에 하나님과 피조물,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연속성과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들에 관한 술어를 하나님에 대해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유비적(analogical)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고전적인 신학적 견해입니다.

더군다나 피조물 가운데서도 만물의 영장이며 가장 초월적 존재인 인간과 인격에 관한 술어로써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시편 기자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셨나이까?"라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 마음대로 인간처럼 그려놓은 것이 아니라, 본래 인간이 하나님을 닮을 만큼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 지닌 속성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선과 악도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유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는 상통하며 상호 영향을 미칩니다. 인격이 지닌 신비, 초월성, 영성, 자유, 말과 지성, 기억이나 의지, 사랑과 자비, 죄와 용서 등의 개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 언어는 우리에게 되돌아와서 우리 인격을 하나님의 깊이로 심화시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며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선과 악의 기준과 근거가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의지에서 유래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도 믿습니다. 도덕적 신관은 기독교의 빼놓을 수 없는 전통이며, 높은 도덕적 의식은 역사와 문명에 대한 유대교-그리스도교의 큰 공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선과 악의 문제를 어떠한 자세로 논해야 할까요? 자칫하면 하나님을 우롱하기도 쉽고 또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이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할지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에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우리의 삶과 사고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께서는 선과 악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선악의 대립 문제에 대하여 세 가지 관점 내지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1) 첫째, 선악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선을 선택하고 악을 배척해야 합니다. 문제는 남에게서만 악을 보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악을 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 안의 대들보,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은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 자기 성찰에 있어서도 황금률, 즉 남이 나에게 하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하라는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서 발견하는 악 만큼 남이 나에게서 보는 악도 보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다른 사람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며 자기는 항시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을 것이고, 남을 헤아리는 대로 하나님도 너희를 헤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기를 먼저 심판하기 전에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가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성찰과 자기 고발이 없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자기 성찰이 없는 도덕성은 도덕적 오만과 독선만을 낳고 증오와 다툼만을 조장할 뿐입니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면 상대방이 무조건 잘못했고 자기는 항상 옳으며, 나는 착하고 다른 사람은 나쁜 놈이 됩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위대한 점은, 그들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먼저 고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백성, 다른 민족의 죄를 말하기에 앞서 자기 백성의 죄를 가차없이 고발하면서, 하나님이 무조건 자기편이라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선민의식을 깬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고발의 예언자적 정신입니다. 자기 백성들부터 왕따 당하고 돌팔매를 맞더라도 그들을 향해 쓴 소리를 하는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미국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자만과 독선만이 제어되지 않은 채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자기 뜻을 절대화하는 도덕적 오만을 치유하는 두 번째 길은 '오십보백보론'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절대윤리 앞에서 인간이 주장하는 선과 옳음이란 별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대동소이하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보면 모두 다 갈데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사이 사람이 죄인으로 천대받고, 왕따 당하는 세리나 창녀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있으면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모두가 꽁무니를 뺐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강간을 하고 간음한 자난 마음 속으로 음심을 품은 자나 하나님 앞에 별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재수 없어 발각되면 감옥에 가지만, 몰래 들키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천지에 깔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추고 있는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감춰야 될 약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의 죄에 대하여 관대하지 않고 앞장서서 손가락질을 합니다. 온갖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테러리스들을 몰래 지원했던 미국이 이제 테러를 근절하겠다고 온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합니다. 결코 도덕적으로 모범이 아닌 나라가 가장 도덕적인 국가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 때 친일했던 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겠다고 혈안이 되고, 독재에 순응하고 협력했던 자들이 애국을 자처하면서 남에게 색깔공세에 더 열을 올립니다. 때로는 가장 반개혁적인 사람이 개혁을 제일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향해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그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하신 이가 없다."라고 예수께서는 꾸짖으셨습니다(마가 10:18). 부시 대통령이 이런 말이 성경에 있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궁금합니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자기 눈 안의 대들보를 보라는 말씀이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오십보백보론은 결코 기회주의적 양비론의 구실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다 엄정한 도덕의식의 발로이며, 도덕적 자만심을 가지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예수님의 절대주의적 윤리를 우리는 문자 그대로 현실세계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완전한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선과 악을 따지고 식별하는 양심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만 자기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안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절대 선으로, 상대방을 절대 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따지고 있는 선악이 상대적임을 인정하라는 말이지, 선악의 판단유보나 선악의 피안에서 노닐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3) 마지막 세 번 째로, 예수께서는 도덕적 오만을 극복하는 길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본받을 것을 강조하십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도덕적 교만과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한 마지막 해법은 오직 하나님의 시각과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해를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악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일깨워 주시면서 우리들도 원수까지 포용하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다 하는, 세리들조차 하는 편가르기 식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우선 주목할 사항은, 예수께서는 일단 우리가 선과 악, 의와 불의의 구별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선악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선악의 피안을 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선악을 따지면서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선악을 구별하며 대립한다 해도, 악인을 폭력으로 징벌하거나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인에게 선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선악의 대립을 극복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악을 폭력으로 응징하고 징벌하면 악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선과 악의 대립은 영원히 종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패배한 자의 원한은 계속될 것이며, 증오의 불길은 삭으러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는 선악의 구별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먼저 이 진리의 말씀에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선악을 가리는 일에 몰두하시는 분이라면,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악하지 않은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인즉, 우리도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악의 대립을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받은즉 우리도 용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자처하여 악을 징벌하고자 나서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십보백보론이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 칠 선한 자는 아무도 없고 모두가 죄인임을 말한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는 보듬지 못할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구원받지 못할 자, 궁극적으로 악한 자는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기독교 식 선악의 피안입니다.

이런 시각을 현 국제관계에 적용시켜 생각해 봅시다. 설령 이란과 이라크와 북한이 미국의 시각에서 악의 축이라 해도, 예수님의 해결책은 전쟁을 통한 일방적 승리와 제거가 아니라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똑 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무차별적 사랑으로 감싸 않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키면서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관계에서도 그렇고 집단과 국가 간의 관계, 특히 분단 50여 년을 맞고 있는 우리 남북한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한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안으라는 말은 상대방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려는 책략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랑으로 인해 상대방이 변하면 다행이지만, 우리가 변화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명하시는 사랑의 실천은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전략이 아닙니다. 우리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어서 사는 것 같이, 우리도 상대방을 용서하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것이지, 우리가 그렇게 하니 우리 사랑에 감복하여 우리에게 머리 숙일 것이라는 타산적 행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북한이 변한 것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냉전론자들은 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쥐꼬리만한 자선을 베풀고서 북한이 감읍하기를 요구합니다. 이른바 햇볕정책이 상대방의 옷을 벗기려는 타산적 '정책'인 한 북한은 결코 감읍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북한이 햇볕정책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선한 국가, 의로운 정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한 개인, 의로운 개인은 혹시 있을지 몰라도, 의로운 집단이나 국가는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듯,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라는 말은 개인들뿐만 아니라 집단들도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종래 기독교에서 악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론인 이른바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이론도 신중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불의한 전쟁이 도대체 존재합니까? 지금까지 벌어진 전쟁 치고 불의한 전쟁이라고 자인하면서 일으킨 전쟁이 과연 있었습니까? 모두가 다 자기가 옳다고 해서 일으킨 전쟁입니다. 모두가 다 이유가 있고 구실이 있고 명분이 있습니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자기가 하면 정의로운 전쟁이요, 남이 시작하면 불의한 전쟁이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에 도덕적 명분만 제공할 뿐입니다. 전쟁을 도덕적인 행위로 미화하고 정당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전쟁, 모든 폭력은 그 자체가 악임을 일단 인정해야 합니다. 전쟁 그 자체는 여하한 경우에도 악이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해야만 하는 악이라는 확실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은 전쟁과 폭력을 이른바 '필요악'으로 피치 못하게 선택해야만 할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감싸며 상대방이 변하기를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평화적 방법이 기독교적으로 최선이기는 하나, 그러기에는 문제가 너무 시급한 경우에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악을 강제로 제압하고 변화시켜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이 생깁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처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셨던 현실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예수님의 문자적 가르침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가르침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방향으로 해답을 모색해야 합니다.

첫째, 할 수 있는 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되, 상대방이 계속해서 명백한 악을 행하면서 약자, 무고한 자들을 괴롭힐 때는, 바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을 악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구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필요악(necessary evil)으로서의 폭력과 전쟁입니다. 전쟁과 폭력이 악이지만 더 큰 악을 제거하거나 방지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필요악이 다 정당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악에서 오는 피해가 사태를 방관함으로써 오는 악보다 적을 때, 즉 폭력사용이나 전쟁이 더 적은 악(lesser evil)일 경우에만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보다는 보다 적은 악의 전쟁 이론이 나는 더 기독교적이라고 봅니다. 이 세상이 아직도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상, 그래서 억울하게 사람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악한 자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우리는 때로는 불가피하게 전쟁이라도 불사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전쟁이 악이지만 그래도 보다 적은 필요악으로 말입니다.

이를 남북한이 맞서 있는 한반도의 경우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독재에 신음하는 북한 백성들, 비참하게 굶어죽는 불쌍한 북한 주민을 구하기 위해 북한을 궁지에 몰고 전쟁까지도 불사하여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폅니다. 사실, 미국이 다 나쁜 짓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코소보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에 개입하여 약자인 무슬림들을 구출해 낸 자랑스러운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또 시각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도 6·25 전쟁 때 개입하여 구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부시와 우리나라 극우파들이 같은 논리를 북한정권에 적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선 백 번 양보해서, 북한과의 전쟁이 필요악이라 가정해도, 그것이 보다 적은 악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한 남북한의 대치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더 많은 무고한 생명이 고통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발치서 전자 게임을 즐기듯 한반도의 전쟁을 구경하는 미국민들에게는 이것이 명분 있는 선택이라고 여겨질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끔찍한 일을 우리 한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 곧 자국민을 가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는 순전히 전쟁 억제력으로만 사용한다는 종래의 핵전쟁을 바꾸어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소리까지 들리고 있으니 참으로 소름끼칠 일입니다. 한반도의 전쟁과 굶어 죽는 북한주민의 구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 악인지는 너무나 명약관화합니다. 한반도 전쟁은 결코 보다 덜한 악이 아니며 필요악으로서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한반도의 전쟁은 더 큰 악을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전쟁, 즉 더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한 덜한 악, 필요악으로서의 전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보다도 신앙적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여태까지 북한을 사랑으로 감싸안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겨우 햇볕정책의 이름으로 좀 하려 하니까, 극우파들의 퍼 주기 식 비난과 함께 남남갈등과 이념논쟁으로까지 비화하고 있습니다. 선거의 해를 맞아 이 문제는 더욱 큰 갈등의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선악의 판단을 내리며 악을 정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는 불가피하지만 매우 위험한 일임을 동시에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가 신앙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선악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결론적으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남을 비난하기 전제 자기 눈의 대들보를 보는 자성적 태도가 우선적으로 요구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죄인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도덕성이나 남의 도덕성이나 오십보백보 별 차이가 없는 존재들이며, 우리 가운데 누구도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셋째, 설령 우리가 불가피하게 상대방과 선악시비를 다투게 되는 경우, 우리는 악한 자를 폭력으로 단죄하고 없애려 해서는 안 되고,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똑 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한없이 넓고 평등한 사랑으로 감싸안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이 변하기를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이 변화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요구 자체가 또 하나의 도덕적 오만이요 대립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증오를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선악의 판단이나 징벌보다 우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감싸안듯, 우리도 악한 자를, 원수들을 용서하고 감싸안으라는 것이 예수의 핵심적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살길입니다. 그리고 만약,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 우리는 모든 폭력은 악이라는 인식 아래 그것이 필요악, 보다 적은 악임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도 최소화해서, 그리고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의 종식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종식한다는 것은 불행한 선택이지만, 절대 평화주의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 한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온 인류를 내시고 자식처럼 품으시는 하나님께는 적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선악의 구별보다는 사랑이 우선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도 벌을 위한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선한 자는 하나도 없으며, 아무리 악한 자라도 존재할 권리나 가치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초월적인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는 선악을 대하며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사역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 없이 먼저 폭력으로 악을 제거하려는 행위나 선을 이루려는 것은 예수님의 길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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