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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비우고, 사랑은 채워야

요한복음 한완상............... 조회 수 2297 추천 수 0 2008.08.08 17: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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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1-12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2. 4.21 주일설교 
성서 말씀의 힘은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는 데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상황에 적절하고 절박한 메시지를 계속 전해 주는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종교 상황, 특히 기독교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기독교가 교리와 율법, 제도와 관행에 매여, 신자들의 은총과 자유를 제약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있겠습니까. 바람직한 종교는 신자의 실존적 고뇌를 덜어주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서도, 역사와 사회구조를 보다 맑고 밝게 변화시키는 용기와 결단으로 인도해줍니다.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와 관용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종교는 항상 자기반성과 개혁을 통해 실존과 구조를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이 절망과 공포, 거짓과 횡포를 일삼고, 분쟁과 전쟁을 충동질 할 때 그 세상을 확 바꾸는 일에 참 종교는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점에서 몇 가지 중요한 기쁜 소식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요한 공동체의 성격을 비춰줌으로써 바람직한 신앙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공적 사역은 혼인잔치에서의 기적을 통해 시작하는데, 이 첫 기적의 입장한 의미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옛 질서를 퇴출시키고 새 질서를 태동시켜 주는 의미 말입니다. 셋째,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 여성이 우뚝 자라잡고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여성의 주도적 역할로 종교적 항아리는 비워지고, 새로운 포도주의 항아리는 채워지면서 개인과 공동체가 사랑과 환희로 전환되는 감동적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성의 지도력으로 공동체의 위기가 공동체의 환희로 반전되는 메시아 운동의 모습을 새삼 보게 됩니다.

먼저 요한 공동체의 기원과 그 성격부터 간단히 배워봅시다.(성서의 context)

요한 공동체는 대체로 주후 70년경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로마 군홧발에 의해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초토화되자, 에세네파를 위시한 유대 종파들은 명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파는 오히려 강화되었습니다. 그들은 회당 중심으로 정통 유대교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유대인 예수따르미들도 처음에는 유대교 회당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숫자가 증가하게 되면서 를 형성하게 됩니다. 나사렛파의 힘이 커짐에 따라 유대 회당의 지도층은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기득권층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따르미들에게 강경 조치를 내리게 되고, 심지어 출교까지 단행했습니다. 추방과 박해, 차별과 통제가 기승을 부린 셈이지요. 이러한 상황을 요한복음 9장은 잘 증언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셨습니다. 유대회당 세력은 진상조사에 착수합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예수가 범했기 때문이지요. 소경 당사자의 증언을 믿을 수 없어 소경이 부모를 증인으로 채택합니다. 부모는 출교 당할까봐 무서워서 증언을 교묘하게 회피합니다.(22절). 당시의 공포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해 줍니다.

요한 공동체는 바로 이같이 쫓겨난 예수따르미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공동체는 유대교 주류 세력과 적대 관계를 갖게 되었지요. 그들은 박해를 받는 비참한 지경으로 몰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에는 유독 시련, 애통, 근심, 슬픔, 공포, 환난, 어둠 등의 표현이 자주 나타납니다. 이른바 세상은 이 같은 을씨년스러운 상황을 펼쳐내는 세력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박해상황에서 요한 공동체는 형제 사랑과 섬김을 자연스럽게 강조하게 됩니다. 사랑과 섬김을 통해 공동체가 안으로 더욱 결속하게 됩니다 : 증오와 배타심으로 결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나눔, 환희의 나눔, 소망의 나눔, 섬김의 나눔으로 박해의 환난을 이겨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담대해지려고 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예수님의 격려 말씀이 바로 이 같은 정황에서 나온 것입니다.(16:33) 여기에서 세상은 유대 회당세력을 뜻합니다.

1980년 중순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1월 초에 형집행정지로 서남동 목사님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그때 함께 옥고를 치르고 있던 이해동 목사님께서 제게 간절한 부탁을 했습니다. "한 박사님. 출옥하시니 좋겠습니다. 부탁이 있는데 이 달 중에 우리 교회에서 한번 꼭 설교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제가 그 요청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1월 중순에 한빛교회에 가서 말씀증거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요한복음 16장 33절의 말씀을 결론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했던 분들을 투옥시켰던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으면서 저는 그분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분들은 다른 민족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으니,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육체의 고통이 클수록, 정신적, 민족적 보람은 뿌듯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동족에 의해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게 되니, 분하기도 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만주에서 독립 운동했던 선배들이 부러웠음을 간증하면서, 그러나 이 환난 속에서 기뻐하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랑과 평화로 이기셨기 때문이지요. 이 설교를 한 뒤 하루만에 안기부 직원, 그것도 저를 60일간 남산 지하실에서 심문했던 사람이 찾아와 "세상을 이기겠다"는 주장이 유신체제를 전복시키겠다는 듯이 아니냐고 신랄하게 따졌습니다.
"한 박사는 겨우 며칠 전에 출옥했는데, 출옥하자마자 유신체제와 또 싸워 이기겠다는 주장을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세상을 이기겠다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해명했지만,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했습니다. 제가 그때 을 유신시대의 지배세력을 지칭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요한공동체도 박해 세력을 으로 간접 지칭했던 것이지요. 여하튼, 요한복음 16:33의 말씀은 지금도 저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끝없이 제공하는 생명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같은 핍박 속에서 요한 공동체는 안으로 온갖 부당한 종교·사회적 담을 헐어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부장적 성차별, 인종차별, 계층 간의 차별을 털어 내는 일에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따뜻한 평등공동체,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성령(위로자) 공동체를 이룩해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이 공동체 내적 노력을 확인해 보면서, 그 확인이 오늘 여기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첫 기적의 의미부터 찾아봅시다.(본문의 사건)

제4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공적 사역은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으로부터 시작되는 듯 합니다. 제3복음인 누가 복음에서는 나사렛 회당에서의 말씀으로 공생애를 시작했지요. 공적 사역은 이렇게 다르게 시작한 것으로 되었으나 두 사건이 모두 참된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옛 질서를 퇴진시키고, 새 질서를 태동시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새 질서 탄생의 산파 역할을 누가 해냈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변혁의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혼인잔치를 베푼 주인이나 신랑신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손님으로 초대받았던 예수의 모친이 그 계기를 마련했고, 예수께서 친히 그 변혁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 모친은 본문에서는 마리아란 이름을 지닌 有名人이 아니라, 한낱 이름 없는 無名의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단지 예수의 어머니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여성은 예수 공생애의 첫 시작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해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장면인 십자가 처형 때에도 다시 등장합니다. 요한 공동체에서 여성의 역할은 알파와 오메가처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첫 공적 활동에서 무명의 이 여성은 어떻게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습니까? 그녀의 역할은 한 여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 내의 여성의 지도력을 가늠케 해주는 한 지표이기도 합니다.

첫째, 남성과 달리 이 여성은 혼인잔치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 무엇이 가장 절박하게 부족한 것인지를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른 손님들과 주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위기를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덜어진 사실입니다. 이것은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연주자들의 손이 갑자기 마비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위기란, 미리 알고 준비하게 되면 새로운 기회가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심각한 공동체 위기로 악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위기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도력이라 하겠습니다. 예수의 모친이 바로 이 같은 리더쉽을 발휘한 것이지요. 여성의 세심한 배려가 공동체 위기를 알아차리게 했습니다.

둘째, 이 여성은 위기 해결의 열쇠가 전적으로 예수에게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자기의 육신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새 시대 새 역사를 만들어 갈 메시아 예수에게 문제 해결의 비결이 있음을 강도 높게 확신했습니다. 그 같은 확신이 어느 정도였을까요?

모친의 부탁을 받은 예수께서는 아직 자기 때가 오지 않았음을 말하면서 위기극복에 나서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친은 물러서지 않고, 메시아의 때를 앞당기는 일에 적극 나섰습니다. 그 만큼 확신에 차 있었던 것이지요. 모친은 소극적으로 때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갔지요.

암울했던 유신시절, 새벽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만, 함석헌 선생을 비롯하여 새벽을 만든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일종의 과잉민주화현상 속에서 표류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들 새벽을 앞당긴 분들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때 어둠을 연장시키려고 몸부림쳤던 세력이 지금은 과잉민주화를 더 악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계속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예수의 모친, 무명의 여성은 때를 소극적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카이로스(kairos)를 적극 앞당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첫 기적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는 적절하고 절박한 메시지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먼저 물 항아리의 기능과 역할이 180도 달라졌음에 주목합시다. 원래 물 항아리는 종교적 정결예법(6절)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안식일법과 정결예법은 유대인에게 반드시 준수해야 할 절대규범이었습니다. 이것을 지킴으로써 비로소 정통 유대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킴으로써 비로소 다른 잡스러운 인간과 인종들과 구별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킴으로써 비로소 자랑스러운 유대인다운 유대인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정통 유대교 신자와 바리새인이 되는 그들의 존재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성별(聖別)된다고 자부했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독선이었지요. 이 같은 항아리가 버티고 있는 한, 차별과 성별은 있되 포용과 관용은 없습니다. 이 같은 항아리가 버티고 있는 한 독선과 교만은 있되, 사랑과 용서는 없습니다. 하기야 바리새인이란 성별되어 분리된 사람을 뜻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항아리들은 종교뿐만 아니라, 성, 계급, 문화, 지역의 차별을 확인시켜주는 장치요 제도적 벽이기도 합니다. 불순과 불결에서 벗어난다는 미명 하에 사람들을 부당하게 분열시키는 사회적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항아리에 예수님 지시에 따라 새로운 물이 가득 채워지면서 놀라운 反轉이 일어났습니다. 일거에 그러나 조용하고 확실하게 잔칫집 위기가 환희의 기회로 전환되었습니다. 위기는 가고 기쁨이 찾아왔지요. 이러한 반전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종들의 순종이 놀랍습니다. 으로 가벼이 보거나 투덜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지시를 일대 변화의 지시로 받아들였습니다. 새로운 물 곧 포도주는 손님들에게 필요한 것이니 그들에게 갖다주라고 명령하신 주님은 새 물을 퍼주어야 하는 것, 넉넉하게 나눠주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새 물은 종교적 정결을 위해 손발 씻는 종교적 용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잔칫집의 환희와 사랑, 포용과 관용을 넘치게 나눠주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원이요 은총입니다. 사랑의 기쁨과 관용의 환희는 반드시 퍼주고 나눠주는 행위에서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이 반전의 과정에서 , , 의 2분법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포도주가 주는 기쁨은 이 2분법을 뛰어넘어 확산되었습니다. 이 기쁨과 감격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상황을 맞는 감격입니다. 그 감격을 본문은 이렇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은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두었구려.(2:10)

이 말은 예수의 기적이 세상의 기존 관례를 확 뒤집어 놓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정통 유대 회당 세력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형태를 보여준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세상의 관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처음에는 취하게 한 뒤 나중에는 속여먹는 관례가 아닙니까? "기존 종교의 관행"은 신자로 만들기 위해 처음에는 달콤한 것으로 즐겁게 해 주어 취하게 한 뒤에는 그들을 종교의 집단이기주의에 따라 활용해 먹는 관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새로운 질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사랑과 관용의 기쁨을 더 진하게 맛보게 하는 멋진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 안에서는 신앙은 뜨거워지면서 신학의 지평은 더욱 넓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맛과 멋입니다. 이 같은 새 질서의 맛과 멋의 비밀을 가장 먼저 그리고 깊게 터득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무명의 여인과 하인들이었다는 것 또한 다시 한번 깊이 음미해볼 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오늘의 본문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정리해봅시다. 첫째, 종교가 종교 자체를 위해 존재하고 운영되어서는 안됩니다. 종교규례, 종교교리, 종교 제도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마치 잔칫집에 있는 여섯 개의 물 항아리처럼 공동체의 위기를 외면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위기를 부추기게 될 것입니다. 종교는 차별과 성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용, 평화와 정의를 널리 퍼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종교 항아리는 새 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것은 곧 생수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생수입니다. 이 생수는 퍼 줄수록 샘솟듯 솟아 올라옵니다. 퍼줄수록 생수는 평화의 큰 강물처럼 흐를 것이요, 퍼줄수록 생수는 관용의 이슬비처럼 내릴 것이며, 퍼줄수록 생수는 사랑의 파도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셋째, 새 포도주는 새 부대나 튼튼한 항아리에 담아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지난 10년 가까이 새 포도주도 아닌 것을 그나마 헌 부대나 연약한 항아리에 담았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쓰라린 경험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 술을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 새로운 역사의 도래를 기쁨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해내야 합니다. 마치 무명의 여인이 예수의 메시아 때를 준비시키고 앞당겼듯이, 우리 예수따르미들도 새 역사의 때를 오늘 여기에서 가만히 소극적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앞당길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 새길공동체의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새길 여성들의 믿음과 헌신, 관용과 사랑에 크게 힘입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종교의 독선 항아리는 비워버리고, 사랑과 관용의 항아리는 항상 넉넉하게 채워주려고 애쓰는 우리 새길 여성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그들은 이 천년 전 요한 공동체 여성들의 새 길을 과감히 따라 나선 오늘의 우리 요한 공동체의 여성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아가페와 섬김으로 새길 공동체를 날로 새롭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남성들도 그들처럼, 종교의 물 항아리는 비우고 사랑의 포도주 항아리를 채우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첫 기적을 준비하고 앞당기는 사도들이 되기 위해 더 뜨겁게 사랑하고, 더 넓게 포용하고, 더 겸손하게 서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예수님의 메시아 기적은 새길공동체 속에서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흐뭇한 일입니까? 2천년 전 갈릴리 가나에서만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새길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메시아 사건입니다.

주님, 사랑과 관용의 주님.
환난과 핍박 속에서 더욱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 결속하고,
더욱 겸손한 섬김으로 서로 도우면서
어둠과 혼동의 세계, 위선과 횡포의 세상을 이겨내게 하소서.
주님,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의 종교 항아리를 깨끗하게 비울 수 있게 하시고,
잔치 항아리에 성령의 포도주를 가득 채울 수 있게 하소서.
종교적 순수성보다 사랑의 포용성을 널리 퍼주어,
당신의 나라가 누룩처럼 번지며 큰 강물이 되어
성과 계급의 장벽, 지역과 교리의 장벽을 넘어 흘러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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