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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 과연 우리는 무화과 나무 밑에 있나

요한복음 한완상............... 조회 수 2733 추천 수 0 2008.08.09 16: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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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43-51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주일설교 
"새길의 발견"이라는 주제로 새길공동체 여름수련회를 뜻깊게 끝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정말 새 길로 더욱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참석자들의 토론은 열려 있었고 뜨거웠습니다. 비판은 진솔했고 또한 따가웠습니다. 많은 의견들이 개진되었습니다. 그 전의 경험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새길의 정체성과 그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근본적인 회의와 이견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공동체가 조금씩 성숙해 가는 듯 합니다.

또한 새길 공동체가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들, 앞으로 더 고쳐가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도 솔직한 지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충고의 지적이었습니다. 성숙한 비판과 성숙한 수용은 이제 새길교회의 문화로 확실히 뿌리내리고 있는 듯 하여 흐뭇했습니다. 헤어지기 전 여덟 조에서 연출했던 토막극 - '새길의 발견'이라는 주제를 충실하고 감동 있게 소화해 낸 - 은 우리를 정말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각 조가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여 촌극을 연출할 수 있었던 저력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3막극을 수 초 만에 완성시켰던 예수님의 시적(詩的), 극작가적 상상력을 제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정말 예수따르미다운 상상력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 상상력을 육화(肉化)시킨 구체적 테마는 이러했습니다.

·곤경에 처한 참 이웃을 돌봄 없이, 자기 확장에만 열을 올리는 기복교회에 대한 비판과 새 길 제시
·신앙을 빙자한 반민주적인 교회운영을 일삼는 목회자의 횡포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과 새 길 제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 속에서 뜨겁게 하나님체험을 갈망하는 열린 평신도 교회의 자세

이번 수련회를 통해 저는 우리 공동체 안에 강하게 지속하고 있는 세 가지 흐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흐름은 모두 소중합니다. 이것들이 서로 조화롭게 함께 도우면서 흘러간다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속에 착실하게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지난 날 한국 기독교 안에서 이 세 흐름이 거칠게 부딪히면서 한국교회는 흉측하게 멍들었고, 부끄럽게 분열했음을 가슴아프게 회상합니다. 그 세 흐름은 이러합니다.

·첫째, 신앙과 신학의 관용과 포용을 존중하고 종교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흐름
·둘째, 사회정의와 평화, 인권과 민주화의 실현을 위한 헌신의 흐름
·셋째,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뜨겁게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는 흐름

세월이 흘러가면서 "신학은 넓게, 신앙은 깊게"라는 우리 공동체의 합의가 이 세 흐름을 차츰 하나로 만들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 흐름 사이의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날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특히 그 긴장이 처절했습니다. 대체로 종교적 관용은 과격한 사회참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식상해하고, 사회참여는 종교적 관용에 대해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종교적 다양성 존중은 성령의 뜨거움이 독선이나 기복으로 흐른다고 걱정했고, 성령의 뜨거움은 종교적 다양성을 불신의 징후로 경계했습니다. 사회참여는 성령운동의 보수성에 실망하거나 분노했던 반면, 성령운동은 사회참여의 과격성에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5년 간 새길 공동체는 이 흐름들 간의 긴장을 열린 마음과 실천으로 상당히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나와 다름에 대한 열린 마음, 그것은 곧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려는 성숙한 마음이요, 바로 그것이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신학의 지평을 넓혀 가면서도 신앙의 뜨거움을 지속시키려고 했습니다. 하기야 신앙의 뜨거움과 경건함이 처음부터 부족하지 않았느냐고 항상 스스로를 반성해 오면서 꾸준히 노력해 왔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 수련회는 새길의 경험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새 길이 아직도 멀고 여전히 험할 것임을 새삼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멀고 험한 길을 홀로 가지 않고 공동체로 함께 손잡고 나아갈 때, 결코 못 갈 길이 아님 또한 확인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 공동체가 보다 활기차게 이 길을 걸어가려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더불어, 그리고 예수님의 뒷받침을 받으며 가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새 길을 가려고 여기 모였습니다. 바로 이 같은 우리의 결단을 더욱 올곧고 따뜻하게 이끌어주는 말씀을 오늘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 새 길을 가기로 결단했던 빌립은 그의 친구 나다니엘을 새 길의 동반자로 초청합니다. 불붙은 횃불은 다른 횃불에 불을 당기고 싶어합니다. 그 불이 진실로 사랑과 진리의 불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나다니엘의 첫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이 때 빌립은 "와서 보라"고 권고합니다. 빌립의 인도에 따라 마지못해 예수께로 간 나다니엘을 보고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놀라운 감동을 그에게 던져 줍니다. 오늘 이 말씀은 주님께서 2천년 전에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 새길 공동체 자매 형제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먼저 빌립에 주목합시다. 그는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도저히 혼자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 환희와 보람을 독점·독식할 수 없었습니다. 금력이나 권력이라면 홀로 독식·독점하고 싶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는 이 뿌듯한 기쁨을 가나에 사는 친구 나다니엘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를 일부러 찾아간 것이지요. 과연 우리 새길 공동체는 빌립의 그 마음, 나누고 싶은 기쁨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빌립은 그가 만난 예수를 소개합니다. 정직하게 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는 메시아이지만, 요셉의 아들, 평범한 목수의 아들임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가 나사렛 출신임도 말했습니다. 빌립의 솔직함과 정직함이 돋보입니다. 메시아라고 해서 세속적인 화려함의 언어로 분칠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의 출신성분이 세속적으로 보면 보잘것 없는 것임을 시인한 것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나다니엘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올곧게 살려고 토라를 열심히 읽고 경건하게 명상하며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써온 정통 유대인으로서, 예수의 볼품 없는 출신성분과 출신지에 대해 더더욱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나사렛 예수의 모습은 오히려 그 역사성(historicity)으로 더 돋보이기도 합니다만.

여하튼 나다니엘은 당시 유대의 관례적 관점에서 예수에 대해 "어찌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폄하했습니다. 당시 헤브론이나 예루살렘 성도(聖都)라면 몰라도 나사렛 같은 곳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임을 그는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나다니엘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경건한 전통에 서서 올곧게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빌립의 대응이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중요한 문제, 그것이 생사의 문제든 진리의 문제든 실리의 문제든 무엇이든 간에 냉소적으로 대응하는 사람과 논쟁하거나 분개하는 것은 별로 도움되지 않음을 그는 잘 터득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의 지혜로운 대응은 간단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와서 직접 만나 보게." 판단은 직접 본 뒤 내려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百聞而不如一見임을 강조했습니다. "자네 주장도 일리 있네. 하지만 와서 예수를 직접 보고 판단하게. 그 때 나도 자네 판단을 존중하겠네." 이 같은 성숙한 권유에 끌려 나다니엘은 예수가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기도 해서 빌립을 따라 나섰습니다.

사랑하는 자매형제 여러분! 새길공동체는 예수님의 마음과 삶 위에 자리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열 다섯 살은 먹었으나 유치한 점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도 경청해야 할 건전한 비판과 충고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너무 편하긴 하나 전도의 열정이 부족하다든지, 젊은이가 적어 공동체 재생산 문제가 심각하다든지, 교우간 대화가 부족하다든지, 먹고 사는 문제에 걱정이 없는 신자들의 교회라든지, 정말 우리가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할 충고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날에는 더 가혹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사랑없는 냉랭한 교회
·예수의 정의감은 강조하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부족한 교회
·지루한 시국강연같은 설교를 자주 하는 교회
·중산층 지식인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
·평신도 중심 교회이지만, 예배순서를 은혜없이 너무 서툴게 진행하는 교회
·......

이런 교회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 라고 반문하는 한국 기독교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우리가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말했던가를 이제는 겸손하고 준열하게 성찰해봐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지난 15년 간 새길 공동체에서 정말 흐뭇한 새 길을 발견했다면, 그 발견의 기쁨을 나눴어야 했습니다. 앞으로 빌립의 그 나눔의 열정을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뜻을 다시 한 번 새겨 봅니다. 도대체 우리가 보여 줄 것이 과연 있습니까? 대체로 한국 크리스천들이 교회에 대해 알려고 할 때, 교회 건물이 우람한가, 교인은 몇 명이나 되는가, 교회의 예산은 어느 정도 규모인가, 목사님의 설교가 은혜로운가 등에 주목합니다. 이런 외양적 매력 포인트에 관한 한 새길교회는 보여줄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 건물도 없고, 목사도 없습니다. 교인 수도 적고 예산도 보잘것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보잘것 없는 공동체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역사적 예수요 부활의 그리스도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가리키는 우리의 손가락은 때가 묻어 꾀죄죄하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목표는 우리를 끊임없이 감동시켜 새 사람으로 일으켜 세워 주시는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매 주일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보여주고 싶었던 분도 바로 그러한 메시아였습니다.

처음에 나다니엘은 이런 예수를 보지 못하고 나사렛 출신 목수아들 예수, 껍데기만을 보고 빌립의 초청을 거절했겠죠. 그러나 실제로 예수를 만나 본 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다니엘을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사람의 中心과 重心을 꿰뚫어 보시되 심판주의 무서운 눈이 아니라 인자한 자비의 눈과 가슴으로 나다니엘을 맞으셨습니다. 그를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47절) 정말 놀라운 칭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인데, 그는 간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다니엘은 속임수로 고기를 낚아 채듯 사람을 속이는 인물이 아니라 참으로 자랑스런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야곱보다 더 훌륭한 인물로 격찬하셨습니다. 야곱은 간사한 이스라엘이지만 나다니엘은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자매형제 여러분.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천사와 악마가 공존합니다. 철저하게 선하거나 철저하게 악한 존재는 정말 드뭅니다. 대체로 이 두 힘이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다툽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악이 승할 수 있고 또 선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또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사회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중범죄자 재판정에 나온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대의 살인마 아이히만이 그렇게 평범하고 정상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 놀랐던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보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고 했습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같은 악마의 충견 노릇을 할 때는 정말 악마의 화신 같았습니다. 인신매매범도 자기 자식에게는 어진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인 속에도 선한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경우 선과 악은 더욱 공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나다니엘 속에 있는 아름다운 자질을 크게 부각시켜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서로 상대방 속에 있는 천사를 보고, 그 천사의 선한 힘을 키워주라는 당부가 아니겠습니까. 서로 상대방 속에 있는 천사를 보고 격려해주면, 그 천사의 날개는 힘을 얻어 훨훨 날아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내는 일에 앞장 설 것입니다. 상대방 속에 있는 천사의 날개가 활짝 펴질 때, 내 속에 있는 천사도 함께 날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번지게 될 것입니다. 때로 우리 속에 있는 천사가 깊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새길 공동체는 내 속에서 잠자는 천사를 깨어나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에는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감동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칭찬에 놀란 나다니엘은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기를 알아볼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어떤 질문이든지 친절하게 대답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 기절초풍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초면인데, 어떻게 나의 일상적인 삶, 일상적인 구도자의 은밀한 삶을 훤하게 꿰뚫어보고 계실까 흠칫 놀랐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다니엘은 百聞而不如一見의 권고로 예수를 만났는데, 예수는 百見而不如一"易地思之"임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 밑은 고향집에서 평화롭게 쉬는 공간을 뜻합니다.(왕상 4:25) 나다니엘은 당시 경건한 유대 정통파 신자가 그러했듯이 무화과 나무 밑에서 토라를 읽고 명상했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자기 삶을 지배하게 된 소리를 그곳에서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다니엘도 메시아를 고대하면서 토라를 읽고 명상했습니다. 그것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예수님이 이미 알고 계셨기에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진리대로 살려고 조용히 노력하는 삶 속에 이미 하나님은 현존해 계신다는 진리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 속에,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행동 속에 이미 우리 주님은 와 계십니다. 비록 명상하는 우리가, 행동하는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자비로운 눈길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무화과 나무 밑의 공간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명상의 마당이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마당이 있는가, 자기를 비우기 위해 애타게 하나님을 찾는 영적 공간이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 새길 공동체 안에 '무화과 나무 밑'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울부짖고 싶은 심령들이 머물고 싶은 영적 공간이 있습니까. 아직도 분단의 족쇄에 매어 신음하는 동포들이 널려 있는 우리 상황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면서 고통 당하는 분들이 와서 힘을 얻을 수 있는 '무화과 나무 밑'의 평화가 있습니까. 독선적 교리와 교회의 반민주적 횡포에 상처입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무화과 나무 밑'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 새길 공동체 안에 이 '무화과 나무 밑'의 영적 공간이 없을 때, 어떻게 "와서 보라."고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 공간이 그간 조그마하게 마련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너무 좁다면 이것을 확장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남 속에 있는 천사를 날게 할 수 있다면, 새길 공동체는 천사들이 왔다 갔다 할 뿐만 아니라, 새길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 밑의 평화의 마당이 넓어질수록 이 광경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란 나다니엘에게 더욱 놀라게 하신 다음의 말씀이 오늘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51절)

우리 공동체의 삶과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이미 하늘이 열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리고 우리가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베풀 때, 바로 그 순간 바로 거기에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명상과 실천의 마당은 그만큼 넓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그 마당에서 왕래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공동체에는 이미 여러 천사들의 헌신과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애씀으로 이번 수련회도 자유스럽고 은혜롭게 준비되었고 진행되었고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새길교회 천사님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만남의 기독론(Christology of encounters)의 감동적 이야기입니다. 이 만남의 감동이 새길공동체에 항상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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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의 주님,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힘과 용기, 희망과 보람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먼저 빌립에게 배울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을 만난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와서 보라"고 권면한 그 사랑과 기쁨의 마음을 저희들도 갖게 하소서.

주님, 나다니엘에게 배우게 하소서.
자기의 세속적 판단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만난 그의 결단을 배우게 하소서.
자기 속의 천사를 작동시키는 주님 앞에 새로운 사람으로 일어선 그를 배우게 하소서.

주님.
무화과 밑의 평화의 자리를 마련하여 끊임없이 자기의 부족함을 되돌아보면서
사랑의 주님으로부터 그 사랑의 위력을 얻을 수 있게 하소서.
항상 저희들 속에 잠자는 천사를 깨워주시고 날게 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 드리면서
저희들도 주님처럼 남들 속에 있는 천사를 깨우고 훨훨 날게 하는 일을 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황무지에서 장미꽃 피듯 피어나게 하시고,
사막에서 샘물 터지듯 터져 나오게 하소서.
새길 공동체 안에서 무화과나무 밑의 영적 공간이 날로 커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아름다운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아름다운 능력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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