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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마태복음 김창락 교수............... 조회 수 2027 추천 수 0 2008.08.09 23:58:51
.........
성경본문 : 마4:17 
설교자 : 김창락 교수 
참고 : 새길교회 2002. 9.15 주일설교 
마 4:17; 18:14

1.
"나는 생각한다. 그런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귀에 익은 유명한 철학적 명제입니다. 이 명제는 문명을 비평하는 공식으로 종종 재치 있게 응용되기도 합니다.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나는 소유한다. 그런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망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인간상으로 희화(戱畵)됩니다. 소비문화에 빠진 인간을 규탄하는 데는 "나는 소비한다. 그런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구호를 적용합니다. 나는 오늘 이 명제를 긍정적인 것을 나타내는 공식으로 응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인간은 함께 살아갈 때에 참으로 인간이 됩니다. 우리말의 '인간'(人間)이라는 글자의 뜻 자체가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적 존재임을 잘 말해 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은 언어입니다. 언어를 이용한 의사 소통은 관계 형성의 최초 단계입니다. 여러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켜 주는 것은 그들이 공유한 공동의 이야기입니다. 유대 민족은 이 세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가장 민족적 결속력이 강한 민족입니다. 그들은 공동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 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주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신 26:5-9)

자기네 민족이 겪은 고난과 해방에 관한 공동의 이야기는 그들을 든든한 끈으로 결속시켜 주었습니다.

2.
원시 사회에서나 촌락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마주칠 때에 말을 하지 않고 지나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전철을 탑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나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단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각자 목적지까지 갑니다.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 이상이나 장시간 비행할 때조차도 옆 사람과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가혹한 고문이라 하겠습니다.

지난 6월 월드컵 대회 기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이요 세계 사람들도 놀란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리 응원이라는 폭발적 열풍입니다. 이 것이 매스컴의 상업주의적 선전에 놀아난 탓인지 스포츠를 통한 고도의 우민화 전략에 말려든 탓인지를 두고 사회학자나 문화비평가가 전문가로서 무슨 답을 내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몰려 나와 열광한 것은 그들이 공동으로 즐길 수 있는 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공동의 이야기 거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공동의 이야기로 결속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아무리 진한 감동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을 영속적으로 결속시킬 수 없으며 그 감격이 해마다 그 때에 재현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3.
우리는 일 이년 전에 2000년대라는 새 천년기와 21세기라는 새 세기를 맞이하는 축하 행사를 하느라고 야단을 피웠습니다. 새 천년은 천년에 한 번 오는 것이고 새 세기는 백년에 한 번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했으니 큰복을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7000년 후에 살고 있을 사람들은 일만년기에 접어드는 경험을 할 것인데 그들은 우리들보다 열 배나 더 큰 행운을 타고 난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골로새 3장 11절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모든 차별이 철폐된다는 중요한 선언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도, 할례자와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스구디아는 흑해 동북부에서 볼가 분지까지 뻗쳐 있는 지역입니다. 문명의 중심부를 이루는 헬라 세계의 동북방 주변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스구디아인은 여기서 야만인의 대표로 언급되었습니다. 주후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AD 465-545년)에 걸쳐서 디오니시우스(Dionysius)라고 이름하는 한 스구디아인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의 정확한 이름은 디오니시우스 엑스구스(Dionysius Exguus)였는데 그것은 '변변찮은 디오니시우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그 이름이 뜻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무렵에 스구디아에는 융성한 기독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사제가 되고 497년에 로마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는 후대의 거의 모든 사람이 기억해야 큰 업적을 하나 남겼습니다. 그것은 525년에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여 연대를 정하는 제도를 창안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서력 기원입니다. 올해가 서기 2002년이라는 것은 그가 만든 서력 기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탄생하신 연도를 기원 1년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예수의 탄생 연대를 결정할 때에 로마시의 건설 연대를 기준으로 해서 계산했습니다. 로마 시는 BC 759년에 건설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에 계산 착오로 4년 늦게 BC 754년에 건설된 것으로 셈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기원 1년은 실제로는 BC 4년이 되어야 합니다. 헤롯 대왕의 사망연대가 BC 4년이고 예수가 탄생하실 때에 헤롯 대왕이 살아 있었으니까 예수의 탄생 연대는 아무리 늦어도 BC 4년 이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 천년 또는 새 세기가 시작하는 해가 2000년 또는 2001년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새 천년과 새 세기를 맞이하는 축하 행사를 하려고 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어는 어느 해에 시작하느냐 뿐만 아니라 어느 날에 시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1월 1일에 시작한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디오니시우스가 이 서력 기원을 제정할 때에 그는 3월 25일을 새해 첫날로 삼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전통상으로 예수의 탄생일로 축하하는 12월 25일을 새해 첫날로 삼지 않고 9개월 소급해서 3월 25일을 신기원 첫해 첫날로 정했습니다. 3월 25일은 마리아가 예수의 수태 고지를 받는 날인 셈입니다. 기독교회는 약 1000년 동안 3월 25일을 새해 첫날로 지켰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새해의 시작을 춘분 또는 추분으로 잡는 민족이 많이 있습니다.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삼은 것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Gregory) 13세가 달력을 개정한 이래로 정해진 일입니다.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두 가지 물음이 제기됩니다.

첫째 물음은 새 천년은 몇 년에 시작하느냐는 것입니다. 2000년입니까? 2001년입니까? 예수의 탄생 연도를 AD 1년으로 잡으면 첫 천년은 1년에서 1000년까지이고 둘째 천년은 1001년에서 2000년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셋째 천년은 2001년에서 시작하여 3000년에 끝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2000년을 새 천년기의 시작으로 잡고 축하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미국, 영국, 바티칸 같은 몇몇 나라에서 그렇게 하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디오니시우스가 서력 기원을 제정할 당시에는 0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의 탄생 연도를 0년으로 셈했더라면 100년, 200년, 300년,...900년에 2세기, 3세기, 4세기,..10세기가 시작되고 1000년에 11세기와 둘째 천년기가 시작되고 2000년에 21세기와 셋째 천년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물음은 새 천년기와 21세기가 시작하는 날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디오니시우스의 제정한 제도로는 2001년 3월 25일일 것입니다. 2000년 1월 1일은 죽도 밥도 아닌 셈입니다. 예수의 탄생 연도를 BC 4년으로 잡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좀 더 가깝다고 본다면 1997년 3월 25일에 새 천년과 21세기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보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의 탄생 연도를 정확히 모를 뿐만 아니라 그의 탄생일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신기원의 시작으로 잡는다면 셋째 천년기는 2026년 또는 2030년 4월 어느 날에 시작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어느 것이 옳으냐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서기 2000년 또는 2001년과 그 해의 첫날 속에 특별한 의미가 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에 매 100페이지마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습니다. 제3 천년기라 해서 이전 천년기와 다르고 21세기라 해서 20세기와 다른 세계로 천지개벽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천진한 미신입니다. 실제로 21의 첫해가 지나기 전에 21세기 최초의 전쟁이라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그 전쟁의 위협 속에 떨고 있습니다. 의미 심장한 사건이 그것이 일어난 연대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이지 기이한 숫자로 배합된 연대가 의미 심장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4.
우리 앞에 놓인 새 천년과 새 세기가 어떠할 것이라고, 또는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설계도를 그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큰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습니다. 현재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 과정이 전체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인간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잡을 대안에 대한 청사진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을 새 시대의 지도 이념으로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체주의는 지금까지의 모든 지배적 가치 체계를 잘못된 것으로 잘못된 것으로 폐기 처분하자는 주장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은 17세기 이래로 20세기말까지 약 400여 년 간 이성과 합리성을 기본 축으로 하여 발전시켜 온 계몽주의적 근대화 문명을 해악으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주장입니다. 이 두 주장은 과거의 잘못을 진단한 데는 옳은 점이 많으나 새 시대를 지도할 적극적 이념으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합니까? 기독교회는 이 시대를 향해서 무슨 목소리를 내야 합니까?

5.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양 군도의 어느 밀림 속에서 한 일본인 병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전투 중에 미군의 포로가 되는 위험을 피하여 밀림 속으로 도망쳤는데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른 채 밀림 속에 숨어서 20여년을 살아왔다고 합니다. 적군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밀림 속에서 원시적 삶을 살아가는 고초를 감내하는 것을 선택한 그의 용기는 갸륵합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그러한 생활을 계속한 것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어떤 사건의 의미는 거대한 이야기의 틀 속에 넣어서 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큰 이야기는 공허한 추상적 이야기로 전락될 위험이 있습니다.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은 이러한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교훈입니다. 그와 반대로 너무 작은 것에만 집착하고 큰 시야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서는 "손톱 밑에 가시 박힌 줄은 알면서도 염통 썩는 줄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아까 말씀드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종류의 큰 이야기를 배격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시콜콜한 작은 이야기만 해야 합니까?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고 서로 배제하는 것입니까? 작은 이야기는 큰 이야기의 틀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올바로 드러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작은 이야기를 배제한 큰 이야기는 공허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큰 이야기는 작은 이야기들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게 통합시키는 이야기라야 합니다.

5.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큰 이야기 중의 큰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낡은 역사는 끝장이 나고 새 세상이 시작되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에 끝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경험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역사의 끝에 가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끝이 있는지, 역사가 어떤 정해진 목표점을 향해서 진행하는 것인지 사람의 지각 능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민족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무한히 반복해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역사란 것도 결국 순환적으로 끝없이 진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달리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역사의 종말을 말합니다. 역사는 끝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목표점을 향해서 진행하며 역사가 끝나는 종말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그 종말이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미 동터오기 시작했다고 선포합니다.

6.
나사렛 예수의 사건을 역사 속에 이미 일어난 종말적 사건으로 선포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 이래 최대의 큰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가 공허한 신화로 흐르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가장 작은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억압받는 사람, 차별과 소외를 당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갈라디아 3장 28절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와 여자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들을 해방하고 역사를 변혁시키는 이야기로 바꾸어서 거듭거듭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변혁했던 것입니다.

7.
이야기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 방식입니다. 아무개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세계가 무엇인지는 세계 내의 사물들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이해되지 않고 세계에 관한 종합적 이야기를 통해서 이해됩니다. 무릇 종교는 인간과 역사와 세계와 우주에 대한 물음을 이야기로 답해 줍니다. 이것이 종교가 가진 위대한 기능입니다. 인간은 모두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특히 미래에 희망을 비춰주는 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나를 변화시키고 사회와 세계를 변혁시키는 힘을 발휘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큰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이러한 큰 이야기를 개인화, 내면화, 몰역사화 하여 사유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 변혁의 힘을 상실하고 가진 자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가진 자들, 즉 기득권자들은 사회의 변혁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도래에 제동을 겁니다. 교회가 이들과 한 편에 서는 것은 복음을 배신하는 처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재창조되고 만물이 새롭게 변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약속하는 성서의 큰 이야기를 되찾아서 외쳐야 하며 동시에 변두리의 작은 이야기들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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