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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질문

호세아 왕대일............... 조회 수 2597 추천 수 0 2008.08.25 14: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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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호6:1~3 
설교자 : 왕대일 목사 
참고 : 새길교회2005. 4. 3 주일설교 /왕대일 목사(감신대신과 교수) 
 어느 교회의 목회자가 교인들과 함께 전도 하러 거리로 나섰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열심히 교회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전도하는 목회자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면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그러자 그 목회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에 나오시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 목회자가 설교하기 위해서 강단 위에 섰을 때 그의 눈에 자신과 내기를 걸었던 사람이 저 뒤편 구석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그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자 온 교인들이 ‘아멘’하며 대답하였습니다. 목회자가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보신 분은 손을 들고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온 교인들이 모두 다 손을 들면서 ‘아멘’하였습니다.

보기를 원하는 세대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몸으로 느끼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오늘 길을 가다가 거리에서 누군가로부터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보지 않고 믿어야 되겠지만, 현실은 보기를 원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지만, 현실은 보고 나서야 믿게 됩니다. 아무리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쳐도 현실은 정작 보고서야 믿게 되는 나날을 살도록 이끕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 요한복음 20:24-28은 바로 그런 우리들의 고민을 화두로 삼고 있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문을 모두 닫아걸고 움츠려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들어서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때 이 자리에는 열두 제자 중 쌍둥이(디두모)라고 불렸던 도마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였지만, 도마는 결코 그 소리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치게 됩니다.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 하겠다”(요 20:25).

   여드레 후 도마와 다른 제자들이 집 안에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도마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면서 도마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주님이 도마에게 무엇을 보여주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가 도마에게 보여준 것은 십자가의 형벌로 상한 손바닥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며 입었던 몸의 상처였습니다. 그것을 본 도마가 감격에 겨워 고백하게 됩니다.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 20:28).

우리는 흔히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나서야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질책하셨기 때문입니다(요 20:29). 그러나 도마를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도마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지극히 논리적이고 경험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고, 또 눈으로 본 만큼 믿었다는 것이 바로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이것은 도마가 하는 질문이 우리 모두가 하는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도마처럼 눈으로 보고 나서야 믿으려는 상식과 이성과 경험의 사람인 까닭입니다.

   이런 도마에게 주님이 보여주신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은 도마에게 상처자국이 난 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은 고난의 상처였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낸 영광의 면류관을 보여 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 때문에 패이고 뚫린 고난의 흔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을 위해 고난의 짐을 지고 가다가 엎어지고 넘어지며 당했던 온 몸의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고난의 상처를 보고 나서야 도마가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오늘 우리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교인의 규모입니까? 건물의 크기입니까? 다양한 프로그램입니까?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을, 예수를,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여 달라고 떼를 쓰는 세상을 향해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일깨워줍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보여주셨던 상처 자국의 손이야말로 이 땅의 교회가 진정 세상에 드러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세상을 위해 일하다가 당한 고난과 고통의 흔적보다는 교회만이 간직한 세속적 번영과 성공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보여주셨던 것은 그런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위한 고난의 상처! 세상을 섬기다가 얻은 아픔의 흔적! 그것만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그랬기에 세상은 교회가 당한 이런 고난의 상처를 보고 나서야 입을 열어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당신은 진정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신영복 선생이 쓰신 <더불어 숲>을 읽다가 깨우친 이야기입니다. 미국 워싱톤에 가면 전승기념탑을 보게 됩니다. 미 해병 병사들이 역동적인 동작으로 성조기를 고지에 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탑이 전하는 전승(戰勝)의 의미는 싸움에서 이기고, 고지를 탈환하고, 국기를 게양하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의 의미를 땅을 빼앗고 우리나라 국기를 그 땅에 꽂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 뇌리 깊은 곳에도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드네프르 강변에 서 있는 전승기념탑은 자못 도전적입니다.  이 탑 역시 2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독일의 침략을 물리쳤던 전승을 기념해서 세운 탑입니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그것이 전승기념탑인지도 모른 채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탑의 형상이 언덕에 서 있는 여인상이기 때문입니다.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안내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승이란 전쟁에 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에 어머니가 나가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야말로 전승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의 생각과 사회주의 사회의 생각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를 깨닫고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촌의 동쪽과 서쪽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생각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드리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가 너무나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가치에 물들어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려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보여주는 하나님이 너무나 물량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우리 사회에 대안적인 가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대안적인 가치를 창출해 가기 위해서 애쓰다가 당한 아픔의 상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서적 신앙입니다.

교회만 대안적인 가치를 지녀야 합니까? 교회는 에클레시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기 이전에 사람입니다. 규모로 따지기 이전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만 우리 사회에 대해서 대안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인 하나 하나가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의 손 같은 삶의 흔적을 지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땅의 교회는 사회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 교회는 진정 다시 살아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본문인 호세아 6:1-3은 이스라엘의 불성실한 회개를 바로 잡으려는 권고입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호 6:1)는 말씀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유입니다. 하나님이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는 주전 8세기 예언자의 음성 속에는 죄에 대해 죽고 의를 위해 다시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를 따라 다시 산 크리스천에 대한 은유를 읽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소망을 전제로 호세아는 힘써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개역에서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어떤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가슴앓이를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돌보다가 세상을 위해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종은 세상의 고통을 대신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고, 세상의 악함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징계를 받음으로 세상이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종이 매를 맞음으로 세상의 병이 나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를 가리켜 고난 받은 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의 종 덕분에, 교회 덕분에, 크리스천 덕분에 세상이 건강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다가 상처를 지니게 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한 상처!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걸고 계시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오발탄>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범선 선생이 쓴 작품 가운데 <피해자>라는 중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교사인 최요한이라는 사람입니다. 최요안의 아버지인 최 장로는 원래 평양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자선 사업가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최 장로는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구걸하다시피 사람들을 찾아다녔던 대단히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최 장로의 아들 최요한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고아원에서 원생들과 똑같이 먹고 입으며 자랐습니다. 최 장로는 요한을 자기 아들이라고 해서 더 먹이거나 더 잘 입히지 않았습니다. 고아원의 다른 식구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자라면서 전혀 자기와 고아들 사이에 차이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그렇게 키운 아버지를 내심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요한은 성장하면서 고아원에서 같이 살던 양명숙이라는 소녀와 오누이처럼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고아원에서도, 학교 갔다가 올 때도, 주일 날 교회에 다녀 올 때도 둘은 꼭 붙어 다니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요한이가 중학교를 마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 있는 사이 요한에게 혼담이 들어옵니다. 고아원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던 목사님의 딸이 결혼 상대였습니다. 그 혼담을 계기로 요한은 자기에게 사랑하는 여인 양명숙이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알리고 부모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고자 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내린 결정을 당연히 아버지가 칭찬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말을 들은 아버지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아무리 애가 똑똑하다 해도 고아를 며느리로 맞아들일 수야 있느냐....”

요한의 믿음은, 이 한 마디 말에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맙니다. 최 장로의 반대를 눈치 챈 명숙은 아무도 몰래 고아원에서 나가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요한은 술집 마담으로 변신한 명숙을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일로 양명숙은 최요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끝내 자살하고 맙니다.  

양명숙은 피해자였습니다. 최요한도 피해자였습니다. 어쩌면 작가 이범선 선생도 피해자였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모두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을 지녔던 최 장로의 피해자였습니다. 요한의 눈에 비친 아버지 최 장로는 고아를 위하여 고아원을 운영한 자가 아니라 자기 직업으로,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고아원을 차린 사람이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라는 말과 “고아원 최 장로”라는 말이 다같이 요한의 아버지를 두고 부르는 명칭이었으면서도 그 뜻은 서로 사뭇 달랐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버지 최 장로는 고아에 대한 사명감만 갖고 있었지, 고아에 대한 사랑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 없는 사명감! 인간을 향한 연민을 잃어버린 하나님께 대한 충성! 이렇게 살아가는 최 장로는 어느덧 가해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피해 입은 자여야 하는데, 이 땅의 크리스천이 어느덧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범선 선생이 이 소설을 쓰신 때는 그의 나이 48세이던 1967년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 년 전에 이범선 선생은 이 땅의 크리스천을 이런 식으로 고발하였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둘째주일입니다. 이 부활의 절기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어떤 교회가 참 좋은 교회일까요? 어떤 크리스천이 참 좋은 크리스천일까요? 그 몸에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눈 흔적을 가진 교인이 참 좋은 교인입니다. 그런 교인이 많은 교회가 참으로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위해 살다가, 세상을 향해 열린 이웃으로 살다가, 아픔과 희생을 당한 흔적을 지닌 교인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 교인들이 공동체를 이룬 교회가 참으로 좋은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새길 교회가, 새 길의 공동체가 바로 이런 모습을 이루는 커다란 숲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를 향해 도마처럼 말을 겁니다. ‘눈으로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이 도전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대꾸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답변은 진정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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