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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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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2: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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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홍주민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2005. 5. 1 주일설교/충북디아코니아학교 책임교수 |
두 주 전 설교를 의뢰받고 어떠한 설교를 하여야 할까 무척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란 어떤 특정인을 청중으로 하고 특정 교회공동체를 향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여러분들의 교회에 대해서 대략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한번도 만나지도 와보지도 않은 교회, 그리고 교우들이지만 어느 정도 온라인을 통해 대화를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새길 교회에 대한 정보를 보면서 일반 기존교회와는 아주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즉 담임목사가 없고, 교회건물이 없으며, 교단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만인 사제직을 지향하여 교회 안에 직분적 위계질서를 지양하는 것이 아주 두드러진 점이라 하겠습니다. 몇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현금의 교권만능주의에 빠져있는 대부분의 한국교회에 비하여 아주 파격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120년의 역사를 지나면서 이곳저곳에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여러 부분, 즉 물량주의 가치관, 기복주의, 교회의 고급화, 맘모니즘, 교회지상주의, 교회의 사유화, 세습화, 권위주의적 성직자중심주의, 성장제일주의 등으로 요약되어진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한국 개신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멀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적 정체성을 상당부분 잃고 존재하는 한국교회에 대해 이제는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과연 무엇에 저항을 했고 무엇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생명까지 던져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했던가를 분명하게 할 시점에 있다고 봅니다. 말로는 개신교라 하면서 카톨릭의 성직 계급주의에 매몰되어 있고 면죄부 이상의 것을 자연스레 거래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 아닙니까? 아니 중세 이전의 카톨릭보다 더 몰이성적인 일들이 소위 프로테스탄티즘이란 간판을 내건 곳에서 자행되고 있지나 않습니까? 도대체 개신교가 도대체 개신교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6만의 교회가 있다는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신교 교회를 좀처럼 만나기 힘든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길 교회의 고민과 저항은 분명 프로테스탄트로서 자명한 성찰의 결과라 여겨집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과연 이 땅에서 개신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코자 합니다.
저는 먼저 개신교의 개신교됨은 여러분들의 제도 운영규칙 2조에 나오는 만인사제직을 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 당시 제자들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날 밤 공동식사로 모인 날 저녁에 생긴 일입니다. 싸움의 핵심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누가 큰 자냐 하는 헤게모니싸움이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동기에 의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예수 공동체 안에서도 있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권력지향성에 빠진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가차 없이 비판을 합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즉 예수가 원한 공동체는 이러한 큰 자, 작은 자 구분을 하고 인간위에 인간이 지배하는 틀이나 구조가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니 공동체는 이러한 원리아래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 원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한마음으로 순수하게 모여 모두 함께 지내면서 나누며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 그래서 그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큰 자 작은 자의 구분이 사라진 공동체였음을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확인 하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 공동체의 원리였던 섬김의 질서만이 지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섬기는 이가 더욱 더 섬김을 받는, 시중을 드는 이가 오히려 크다고 여김을 받는 희안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안에서는 아예 직제라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고 섬김의 원리만이 살아있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직분이 섬김을 위해 유기체적으로, 즉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로 소중하게 여김을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제도적으로 분화되면서 그 안에 말씀 선포하는 직제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직제로 분화되고, 급기야는 말씀 선포하는 직이 구원의 대리인 격으로 격상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교회의 본질에서 점차 사라지는 경향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모든 믿는 이의 사제직”이라는 원칙은 중세 캐톨릭 교회의 사제와 교회라는 제도를 통해서 구원을 향할 수 있다는 구원 전달체계의 절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의 독특성중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이 만인사제직사상에 의한 평신도들의 원시그리스도교 신앙의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500년간 개신교역사에 있어서 생생한 개신교적 신앙의 실천의 역사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바로 이 종교개혁의 명제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각성운동에 의해 다시 한번 불이 지펴진 만인사제직 사상은 변화된 상황 속에서 다시금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행동양식을 새로이 규정지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 이래 시민들의 주체적 행동이 강화되면서 당시까지 지배하고 있던 분리와 차이를 강조하는 사고에 대항한 하나의 새로운 개신교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0년 전 종교개혁 당시 만인사제직에 대한 이해가 구원의 전달체계에 대한 이의제기였다면 150년 전 제기된 만인사제직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산출에 관련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독일을 위시한 유럽은 수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으로 일관한 당시의 공룡 같은 기존교회들에 대항하여 평신도들이 문제제기를 하며 시작한 운동이 각성운동입니다. 이들은 만인사제직의 강한 자의식아래 교회 밖을 향한 선교가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내적 각성을 요구하며 “Innere Mission(내적 선교)”라는 운동을 벌여 나갑니다.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직업 현장 안에 하나님의 소명이 주어졌다는 인식 아래,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 안에 섬김을 위한 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 졌다는 자각아래 이 운동은 들불처럼 확산된 것입니다.
급기야 1848년 3월 막스와 엥겔스가 영국에서 공산당선언을 하는 바로 그해 9월 우리에게는 잘 안 알려진 인물인, 하지만 독일에서는 루터와 이 분을 개신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지칭하는, 요한 힌리히 비헤른이 교회의 날 행사에서 즉흥연설을 통해 독일 디아코니아운동의 거대한 획을 긋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동력도 바로 이 만인사제직에로의 회복과 더불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당시의 사회문제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교회에 있다고 강변하며 당시의 죽은 공룡인 교회를 향해 각성을 요구합니다. 그의 연설 중 가장 중요한 한마디는 바로 교회에 있어 사랑은 신앙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연설이 기폭제가 되어 독일 개신교는 디아코니아운동을 조직화 하게 되었고 150여년이 지난 오늘 독일의 디아코니아 기관 즉 예수님 사랑의 실천 기관은 전국에 3만 천개, 거기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이 45만 명, 그리고 하루에 100만 여명을 구체적으로 섬기고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로 개신교적 섬김 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현실화된 사건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두 번째 개신교의 개신교 됨은 사랑과 믿음의 통일성에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중요 명제인 의인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을 읽어 나가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기 때문에 그저 믿습니다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양 값싼 은혜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결과 사랑의 실천, 즉 디아코니아는 교인들의 필수과목이 아니고 선택과목이고, 심지어 목회자를 교육하는 신학교에서도 디아코니아는 아예 선택과목조차 없는 형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육의 목표가 아직도 설교나 성례전을 위한 사전교육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가지 아이러니칼한 사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디아코니아적 섬김의 목회를 하는 이들을 특수목회 한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영과 육, 두 영역을 통괄하는 목회를 하신 것을 보면 그분들의 목회가 그리 특수하거나 특별난게 아닌데, 오히려 별난 목회 한다고 취급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히려 영적인 부분만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목회가 어느 특수 영역에 국한 된 것이기에 특수 목회가 아닌가 생각듭니다. 그 결과 교회의 목회는 주로 개교회주의의 기류 속에서 독일어로 Mitgliedergemeinschaft, 즉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의 사교적 친목모임 수준으로 전락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문밖을 나서자마자 널려있는 사회문제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부분에만 초점을 둔 자명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 서문을 읽어보면 이전에 각인된 의인론이 잘못된 것임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그의 로마서 주석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신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용기, 의미, 모든 힘들을 변화시켜 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그리고 성령 안에 살게 한다. 오! 신앙은 얼마나 생명력이 있고 활동적인가. 그래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쉬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 안에 사는 이는 그가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는 이를 묻기 전에 이미 실천을 했는가와 행동 속에 항상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위에서 확인 하듯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새로워진 사람은 이웃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그 믿음은 의심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의 실천으로 몰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특히 신앙 안에서 전적인 사랑의 실천을 위해 의인론을 전개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신앙으로부터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흘러나오고, 사랑으로부터 자유하고 즐거운 생명이 흘러나와, 이웃을 향해 자신을 전혀 유보하지 않는 섬김의 행위가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더나아가 믿음이 큰 사람은 행함도 크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신교인의 개신교인 됨은 전적으로 섬기는 존재로의 실존적 전이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바로 위의 두 명제와도 연결되는 종합적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시중드는 자로 명명 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
“나는 시중드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중년의 디아콘(Diakon) 아저씨들을 독일의 디아코니아 행사 때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분들이셨는데, 얼굴에 해 맑은 웃음을 띠고 말 그대로 ‘시중드는 자’의 향기가 물씬 흘러나옴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외국인인 나를 극진히 맞이해 주었습니다. 자리를 제공하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정중하게 대접하고 친근하게 말벗으로 다가옵니다. 이천년 전 시중드는 이로 자기 자신을 명명한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를 입은 제자들의 따름 속에 오늘도 현존하고 있음을 경험한 소중한 사건이었습니다. 독일 체류 10년간 저는 수많은 디아코니아 공동체의 디아콘, 디아코니세, 디아코닌 분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의 조우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은 맑고 순수하고 기쁨이 넘치고 늘 새로워지는 섬김의 영성이었습니다.
로마의 발덴저 대학 신학과 교수 Paolo Ricca가 1992년 행한 강연에서 시중드는 자 예수에 관한 도발적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기를 신약성서 안에는 예수에 관한 많은 명칭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예수 자신이 ‘섬기는 자’,‘시중드는 자’ 라는 명칭으로 유일하면서도 명백하게 자신을 ‘규정’했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누가복음 22장 27절에서 예수는 ‘시중드는 이’로서 주님이요 스승이 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입니다. 예수 안에서 커다란 전환, 신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배의 방법과 양식이 ‘섬기는 것’, ‘시중드는 이’로 전환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중드는 이로 되는 것이 스승 되는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즉 예수에게 있어서 섬기는 것은 그의 삶의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그의 삶 존재 자체인 동시에 그의 보냄의 근거요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막10,45) 예수는 ‘섬기는 자’(Diakon, Diener)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 입니다.
지나간 기독교역사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많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걸어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콘스탄틴 대제 이후 지배자로서의 기독교의 역할이라든지 십자군 운동아래서 폭력을 정당화한 신앙운동이라든지,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 안에서도 거룩한 전쟁을 정당화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민중들을 학살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러한 정치지도자나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한목소리로 모두 자신들이 섬기는 자라고 기염을 토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섬기는 자다. 하지만 지배하는 자로...”. 하지만 이는 자신을 시중드는 자로 명명한 예수 그리스도와 구약시대에 민중을 섬기는 디아코노스로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된 야훼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바알의 신전의 제사장이나 종교꾼들의 작태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지나간 교회의 역사 속에서 500년전 이 지구상에 출현한 새로운 개신교인들의 출현은 가히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섬김을 향한 전적인 회귀! 구약에서 계시된 민중을 섬기는 디아코노스로서의 야훼 하나님, 신약에 이 세상에 화육하셔서 디아코노스로 사신 갈릴리 예수, 그에 이은 나눔과 섬김의 환상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체현한 초대교회의 디아코니아적 공동체의 전통을 잇는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소유한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의 사역을 할 수 있는 전권이 주어졌다는 만인사제직, 만인 섬김직의 실현과 믿음으로 새롭게 된 이들은 자신을 전혀 유보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으로 니아간다는 사실, 그 결과 우리 개신교인의 개신교인 됨은 전적으로 시중드는 자로의 실존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확인케 됩니다.
오늘 저는 오늘 오후에 천안 병천에 있는 디아코니아 자매회에 갑니다. 벌써 반 년 전부터 약속된 모임입니다. 1980년 섬김의 길을 가고자 하는 언님 몇 분이 공동체를 이루며 시작된 지 25년 되는 날입니다. 그분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분들입니다. 안병무 선생님께서 이 자매회를 설립하는데 산파역할을 하셨다 합니다.
그런데 안박사님은 독일에 계실 때 관습화된 독일 기성교회에는 실망을 느끼시고 일반 교회 아닌 디아코니아 공동체에서 희망을 찾으셨다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회에서 외면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하루 이틀 정해진 기간이 아니라 일생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 또한 이런 생활을 계속 반복해도 지치지 않고 보람을 느끼는 힘을 어디서 공급받느냐”하는 것이 그분의 관심이었다 합니다. 즉 섬김의 영성이 그분에게 핵심 화두였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박사 논문은 공자의 인 사상과 예수의 사랑을 비교한 신약학적 논문인데 중심결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한 연결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는 예수의 극단적 사랑을 실천하는 연장선 속에서 민중신학을 기초하셨습니다. 머리로 의도한 사랑은 그에게 있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섬김의 실천, 즉 자신의 생명을 내걸으며, 계산하지 않는, 어쩌면 대책 없는, 자신을 전혀 유보하지 않은, 사랑의 실천에 안박사님은 관심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25년 되는 날, 그 길을 걸어온 언님들께 마음으로부터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의도된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깊이 들어간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랑의 열매를 어디서나 어느 곳에건 풍성히 맺습니다. 독일의 디아코니아의 영웅 비헤른은 1856년 그의 디아코니아에 관한 입장을 밝힌 그의 논문에서 중요한 신학적 표현을 합니다: “인간에게 깊이 들어가, 인간의 고난에 깊이 들어가, 깊이 있는 도움을 주기 위해 먼저 하나님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실천의 동력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 전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우선 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를 비어내고 전적으로 민중의 고난에 함께하는 삶이 우리에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시중드는 이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민중들을 섬기셨던 그분이 오늘 우리 곁에 민중으로, 작은 자로 오십니다. 그리고 섬김의 영성으로 우리를 그들에게 가까이 가도록 우리를 몰고 가십니다. 또한 이 세상의 고난의 현장에서 오늘도이 세상을 섬기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동역자인 우리를 부르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부름에 응답하여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한국교회는 선교 120년의 역사를 지나면서 이곳저곳에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여러 부분, 즉 물량주의 가치관, 기복주의, 교회의 고급화, 맘모니즘, 교회지상주의, 교회의 사유화, 세습화, 권위주의적 성직자중심주의, 성장제일주의 등으로 요약되어진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한국 개신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멀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적 정체성을 상당부분 잃고 존재하는 한국교회에 대해 이제는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과연 무엇에 저항을 했고 무엇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생명까지 던져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했던가를 분명하게 할 시점에 있다고 봅니다. 말로는 개신교라 하면서 카톨릭의 성직 계급주의에 매몰되어 있고 면죄부 이상의 것을 자연스레 거래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 아닙니까? 아니 중세 이전의 카톨릭보다 더 몰이성적인 일들이 소위 프로테스탄티즘이란 간판을 내건 곳에서 자행되고 있지나 않습니까? 도대체 개신교가 도대체 개신교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6만의 교회가 있다는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신교 교회를 좀처럼 만나기 힘든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길 교회의 고민과 저항은 분명 프로테스탄트로서 자명한 성찰의 결과라 여겨집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과연 이 땅에서 개신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코자 합니다.
저는 먼저 개신교의 개신교됨은 여러분들의 제도 운영규칙 2조에 나오는 만인사제직을 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 당시 제자들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날 밤 공동식사로 모인 날 저녁에 생긴 일입니다. 싸움의 핵심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누가 큰 자냐 하는 헤게모니싸움이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동기에 의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예수 공동체 안에서도 있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권력지향성에 빠진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가차 없이 비판을 합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즉 예수가 원한 공동체는 이러한 큰 자, 작은 자 구분을 하고 인간위에 인간이 지배하는 틀이나 구조가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니 공동체는 이러한 원리아래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 원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한마음으로 순수하게 모여 모두 함께 지내면서 나누며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 그래서 그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큰 자 작은 자의 구분이 사라진 공동체였음을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확인 하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 공동체의 원리였던 섬김의 질서만이 지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섬기는 이가 더욱 더 섬김을 받는, 시중을 드는 이가 오히려 크다고 여김을 받는 희안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안에서는 아예 직제라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고 섬김의 원리만이 살아있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직분이 섬김을 위해 유기체적으로, 즉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로 소중하게 여김을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제도적으로 분화되면서 그 안에 말씀 선포하는 직제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직제로 분화되고, 급기야는 말씀 선포하는 직이 구원의 대리인 격으로 격상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교회의 본질에서 점차 사라지는 경향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모든 믿는 이의 사제직”이라는 원칙은 중세 캐톨릭 교회의 사제와 교회라는 제도를 통해서 구원을 향할 수 있다는 구원 전달체계의 절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의 독특성중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이 만인사제직사상에 의한 평신도들의 원시그리스도교 신앙의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500년간 개신교역사에 있어서 생생한 개신교적 신앙의 실천의 역사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바로 이 종교개혁의 명제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각성운동에 의해 다시 한번 불이 지펴진 만인사제직 사상은 변화된 상황 속에서 다시금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행동양식을 새로이 규정지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 이래 시민들의 주체적 행동이 강화되면서 당시까지 지배하고 있던 분리와 차이를 강조하는 사고에 대항한 하나의 새로운 개신교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0년 전 종교개혁 당시 만인사제직에 대한 이해가 구원의 전달체계에 대한 이의제기였다면 150년 전 제기된 만인사제직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산출에 관련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독일을 위시한 유럽은 수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으로 일관한 당시의 공룡 같은 기존교회들에 대항하여 평신도들이 문제제기를 하며 시작한 운동이 각성운동입니다. 이들은 만인사제직의 강한 자의식아래 교회 밖을 향한 선교가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내적 각성을 요구하며 “Innere Mission(내적 선교)”라는 운동을 벌여 나갑니다.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직업 현장 안에 하나님의 소명이 주어졌다는 인식 아래,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 안에 섬김을 위한 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 졌다는 자각아래 이 운동은 들불처럼 확산된 것입니다.
급기야 1848년 3월 막스와 엥겔스가 영국에서 공산당선언을 하는 바로 그해 9월 우리에게는 잘 안 알려진 인물인, 하지만 독일에서는 루터와 이 분을 개신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지칭하는, 요한 힌리히 비헤른이 교회의 날 행사에서 즉흥연설을 통해 독일 디아코니아운동의 거대한 획을 긋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동력도 바로 이 만인사제직에로의 회복과 더불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당시의 사회문제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교회에 있다고 강변하며 당시의 죽은 공룡인 교회를 향해 각성을 요구합니다. 그의 연설 중 가장 중요한 한마디는 바로 교회에 있어 사랑은 신앙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연설이 기폭제가 되어 독일 개신교는 디아코니아운동을 조직화 하게 되었고 150여년이 지난 오늘 독일의 디아코니아 기관 즉 예수님 사랑의 실천 기관은 전국에 3만 천개, 거기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이 45만 명, 그리고 하루에 100만 여명을 구체적으로 섬기고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로 개신교적 섬김 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현실화된 사건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두 번째 개신교의 개신교 됨은 사랑과 믿음의 통일성에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중요 명제인 의인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을 읽어 나가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기 때문에 그저 믿습니다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양 값싼 은혜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결과 사랑의 실천, 즉 디아코니아는 교인들의 필수과목이 아니고 선택과목이고, 심지어 목회자를 교육하는 신학교에서도 디아코니아는 아예 선택과목조차 없는 형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육의 목표가 아직도 설교나 성례전을 위한 사전교육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가지 아이러니칼한 사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디아코니아적 섬김의 목회를 하는 이들을 특수목회 한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영과 육, 두 영역을 통괄하는 목회를 하신 것을 보면 그분들의 목회가 그리 특수하거나 특별난게 아닌데, 오히려 별난 목회 한다고 취급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히려 영적인 부분만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목회가 어느 특수 영역에 국한 된 것이기에 특수 목회가 아닌가 생각듭니다. 그 결과 교회의 목회는 주로 개교회주의의 기류 속에서 독일어로 Mitgliedergemeinschaft, 즉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의 사교적 친목모임 수준으로 전락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문밖을 나서자마자 널려있는 사회문제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부분에만 초점을 둔 자명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 서문을 읽어보면 이전에 각인된 의인론이 잘못된 것임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그의 로마서 주석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신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용기, 의미, 모든 힘들을 변화시켜 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그리고 성령 안에 살게 한다. 오! 신앙은 얼마나 생명력이 있고 활동적인가. 그래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쉬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 안에 사는 이는 그가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는 이를 묻기 전에 이미 실천을 했는가와 행동 속에 항상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위에서 확인 하듯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새로워진 사람은 이웃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그 믿음은 의심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의 실천으로 몰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특히 신앙 안에서 전적인 사랑의 실천을 위해 의인론을 전개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신앙으로부터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흘러나오고, 사랑으로부터 자유하고 즐거운 생명이 흘러나와, 이웃을 향해 자신을 전혀 유보하지 않는 섬김의 행위가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더나아가 믿음이 큰 사람은 행함도 크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신교인의 개신교인 됨은 전적으로 섬기는 존재로의 실존적 전이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바로 위의 두 명제와도 연결되는 종합적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시중드는 자로 명명 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
“나는 시중드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중년의 디아콘(Diakon) 아저씨들을 독일의 디아코니아 행사 때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분들이셨는데, 얼굴에 해 맑은 웃음을 띠고 말 그대로 ‘시중드는 자’의 향기가 물씬 흘러나옴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외국인인 나를 극진히 맞이해 주었습니다. 자리를 제공하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정중하게 대접하고 친근하게 말벗으로 다가옵니다. 이천년 전 시중드는 이로 자기 자신을 명명한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를 입은 제자들의 따름 속에 오늘도 현존하고 있음을 경험한 소중한 사건이었습니다. 독일 체류 10년간 저는 수많은 디아코니아 공동체의 디아콘, 디아코니세, 디아코닌 분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의 조우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은 맑고 순수하고 기쁨이 넘치고 늘 새로워지는 섬김의 영성이었습니다.
로마의 발덴저 대학 신학과 교수 Paolo Ricca가 1992년 행한 강연에서 시중드는 자 예수에 관한 도발적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기를 신약성서 안에는 예수에 관한 많은 명칭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예수 자신이 ‘섬기는 자’,‘시중드는 자’ 라는 명칭으로 유일하면서도 명백하게 자신을 ‘규정’했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누가복음 22장 27절에서 예수는 ‘시중드는 이’로서 주님이요 스승이 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입니다. 예수 안에서 커다란 전환, 신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배의 방법과 양식이 ‘섬기는 것’, ‘시중드는 이’로 전환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중드는 이로 되는 것이 스승 되는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즉 예수에게 있어서 섬기는 것은 그의 삶의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그의 삶 존재 자체인 동시에 그의 보냄의 근거요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막10,45) 예수는 ‘섬기는 자’(Diakon, Diener)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 입니다.
지나간 기독교역사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많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걸어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콘스탄틴 대제 이후 지배자로서의 기독교의 역할이라든지 십자군 운동아래서 폭력을 정당화한 신앙운동이라든지,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 안에서도 거룩한 전쟁을 정당화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민중들을 학살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러한 정치지도자나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한목소리로 모두 자신들이 섬기는 자라고 기염을 토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섬기는 자다. 하지만 지배하는 자로...”. 하지만 이는 자신을 시중드는 자로 명명한 예수 그리스도와 구약시대에 민중을 섬기는 디아코노스로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된 야훼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바알의 신전의 제사장이나 종교꾼들의 작태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지나간 교회의 역사 속에서 500년전 이 지구상에 출현한 새로운 개신교인들의 출현은 가히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섬김을 향한 전적인 회귀! 구약에서 계시된 민중을 섬기는 디아코노스로서의 야훼 하나님, 신약에 이 세상에 화육하셔서 디아코노스로 사신 갈릴리 예수, 그에 이은 나눔과 섬김의 환상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체현한 초대교회의 디아코니아적 공동체의 전통을 잇는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소유한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의 사역을 할 수 있는 전권이 주어졌다는 만인사제직, 만인 섬김직의 실현과 믿음으로 새롭게 된 이들은 자신을 전혀 유보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으로 니아간다는 사실, 그 결과 우리 개신교인의 개신교인 됨은 전적으로 시중드는 자로의 실존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확인케 됩니다.
오늘 저는 오늘 오후에 천안 병천에 있는 디아코니아 자매회에 갑니다. 벌써 반 년 전부터 약속된 모임입니다. 1980년 섬김의 길을 가고자 하는 언님 몇 분이 공동체를 이루며 시작된 지 25년 되는 날입니다. 그분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분들입니다. 안병무 선생님께서 이 자매회를 설립하는데 산파역할을 하셨다 합니다.
그런데 안박사님은 독일에 계실 때 관습화된 독일 기성교회에는 실망을 느끼시고 일반 교회 아닌 디아코니아 공동체에서 희망을 찾으셨다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회에서 외면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하루 이틀 정해진 기간이 아니라 일생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 또한 이런 생활을 계속 반복해도 지치지 않고 보람을 느끼는 힘을 어디서 공급받느냐”하는 것이 그분의 관심이었다 합니다. 즉 섬김의 영성이 그분에게 핵심 화두였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박사 논문은 공자의 인 사상과 예수의 사랑을 비교한 신약학적 논문인데 중심결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한 연결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는 예수의 극단적 사랑을 실천하는 연장선 속에서 민중신학을 기초하셨습니다. 머리로 의도한 사랑은 그에게 있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섬김의 실천, 즉 자신의 생명을 내걸으며, 계산하지 않는, 어쩌면 대책 없는, 자신을 전혀 유보하지 않은, 사랑의 실천에 안박사님은 관심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25년 되는 날, 그 길을 걸어온 언님들께 마음으로부터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의도된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깊이 들어간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랑의 열매를 어디서나 어느 곳에건 풍성히 맺습니다. 독일의 디아코니아의 영웅 비헤른은 1856년 그의 디아코니아에 관한 입장을 밝힌 그의 논문에서 중요한 신학적 표현을 합니다: “인간에게 깊이 들어가, 인간의 고난에 깊이 들어가, 깊이 있는 도움을 주기 위해 먼저 하나님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실천의 동력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 전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우선 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를 비어내고 전적으로 민중의 고난에 함께하는 삶이 우리에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시중드는 이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민중들을 섬기셨던 그분이 오늘 우리 곁에 민중으로, 작은 자로 오십니다. 그리고 섬김의 영성으로 우리를 그들에게 가까이 가도록 우리를 몰고 가십니다. 또한 이 세상의 고난의 현장에서 오늘도이 세상을 섬기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동역자인 우리를 부르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부름에 응답하여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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