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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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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권명수 교수
인터넷 매체 “뉴스앤조이”에서 관상기도에 대한 특집(2007. 5. 13.)에 실려진 권명수 교수의 글이다. 내용은 처음에 관상기도에 관심을 가질 때 궁금한 것에 대한 답 즉, 관상기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위한 설명이다. 탐독을 권합니다. - 고려수도원 박노열.
저자 : 권명수 (한신대 교수)
“보아라,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새번역)
요즘 인터넷 ‘뉴스앤조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상기도에 대한 논쟁은 긍정적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그간 이에 대해 있었던 오해도 정리되고 이해가 높아지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필자의 짧은 글이 이러한 논쟁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지만 평소 생각하고 가르치던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부족한 점은 다음 기회를 빌면서 말이다.
기도란?
관상기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 ‘기도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대답은 ‘하나님께 인간의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기도의 한 측면을 잘 드러내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발생한 면들을 간구하는 면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민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심야기도회, 철야기도회, 특별기도회 등 이와같은 여러 기도회들은 신자가 바라고 소망하는 내용을 주님께 간청하는 모임들이다. 이런 모임에서 말하는 기도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영역이 부각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간구에 응답하시고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측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또 다른 기도 이해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대화로서의 기도 이해는 인간과 하나님께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쌍방적인 대화를 강조한다. 신자가 하나님께 간청하는 상향식의 대화와, 이런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응답하시는 하향식 대화의 영역이 있다. 하향식 기도에서는 인간의 간구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응답을 경청과 순종하는 면이 강조된다. 첫 번째 기도 이해에서 부족한 면을 대화적 기도 이해에서 보충해준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말은 신자가 주님께 아뢰는 길과 주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길인 양자 간의 쌍방 통행적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기도를 열심히 많이 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부족한 면은 기도의 두 번째 측면인 주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청종의 부분이다. 관상기도는 이와 같은 경청과 순종의 부분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기도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제 한국교회의 상황이 경청의 기도의 경시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관상이란?
먼저 관상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 관상(觀想)이란 한자 말은 ‘마음의 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곧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히며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 영상, 정서들이 흘러들어오는 것들을 글자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은 영어로 contemplation이다. 영어 앞 단어인 con은 ‘함께’ ‘강하게’라는 뜻이고, 뒤의 temple은 ‘관찰하기로 표시된 특별한 장소’ ‘성전’ 등의 뜻이다. 이 단어의 뜻은 ‘주의를 기울여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관조하기 위한 구별된 지역이나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관상을 통해 그 대상과 일치가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러한 관상의 상태는 교회 역사상 여러 영성 전통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크게는 긍정(kataphatic) 전통과 부정(apopathic) 전통을 통해서 관상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긍정 전통에서는 언어와 이미지와 논리를 통해서 주님과의 일치된 상태를 지향한다. 성경, 큐티, 여러 가지 기도 전통, 자연 등을 들고 있다. 이 전통은 기독교 역사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부정 전통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나 이미지들을 하나님과 일치를 지향하기 보다는, 이런 것 없이 가슴으로 수동적인 상태에서 직관적으로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한다. 이 전통은 역사적으로 제도권 교회에서 그리 유력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깊은 신앙심을 갖고 주님과의 일치와 헌신을 지향하는 신자, 수도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영성 생활의 방편이 되었다. 여기에는 헤지키즘, 관상기도 등이 있다.
그래서 관상과 관상기도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 관상기도를 통해 관상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신앙심 깊은 여러 영성 전통에서 모두 자신들의 영성훈련 방법들이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관상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곧, 그들의 영성수련을 통해 관상 상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를 이야기하며 영성수련의 방법을 소개하는 수련회나 책을 읽을 때, 그들의 뿌리와 지향점, 어느 방편을 통해 관상을 지향하는지를 분별하고 따라가야 함을 밝혀둔다.
어번 홈즈는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란 책에서 기도의 현상을 크게 4가지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사색적(spepculative) 기도, 감정적(affective) 기도, 상상적(imaginative, kataphatic) 기도, 비우는(emptying, apophatic) 기도이다. 사색적 기도는 성경을 묵상, 공부, 독서를 통해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다. 감정적 기도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적 기도는 예수회의 영성 수련방법이나, 동방교회의 성화를 보며 기도하는 방법 등이 이에 속한다. 곧, 십자가위의 달려서 피를 흘리시는 주님을 상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심을 키우고 기도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비우는 기도는 주님의 현존에 머무르며 가슴으로 기도하며 직관으로 주님의 뜻을 찾고 기도하는 방식이다.
독자들이 예상했다시피, 필자가 말하는 관상기도는 비우는 기도인 부정 전통의 기도를 말하고 있다. 외관상으로는 동양의 명상 전통과 별로 구별이 되지 않아서 오해를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전통에 익숙한 상상적, 사색적 전통의 기도를 해온 신자들이 비우는 스타일의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부정적 태도와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기도 전통도 1세기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관상기도란 용어에 대해 다뤄보기로 한다. 한국영성치유연구소 소장인 이만홍은 관상기도를 묵상(?想)기도라고 부른다. 관상이란 용어가 ‘동양 종교적’ 어감이 있기에 이를 배제하기 위하여 개혁주의 교회에 친숙해서이다. 또한 관상기도를 침묵기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는 입으로 소리내어 간구하거나, 마음속으로도 주님께 간구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고,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주님께 가슴의 마음 문을 여는 행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상기도를 ‘명상’기도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눈을 감고 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토마스 키딩은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에서 이 기도를 향심기도로 표현한다. 향심기도란 영어의 centering prayer를 번역할 말로서, 어떤 사람은 ‘집중기도,’ ‘구심기도’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 말은 인간 존재의 중심에 계시는 그분을 지향하는 기도, 중심을 지향하는 기도라고 해서 말하는 의미이다. 감신대의 영성수련 담당교수인 권희순은 키딩이 말하는 기도를 ‘센터링 침묵기도’로 옮기고 키딩의 관상기도 입문서의 동일한 책 제목을 <센터링 침묵기도>로 붙여 출판했다. 인간 존재의 중심에 계시는 그분을 향해서 침묵으로 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다. 무슨 말로 표명하든 이 기도는 전통적으로 행해져 온 인간의 의지와 논리를 사용하던 기도와는 다른 형태의 기도이다. 그런 인간적 노력을 하지 않고 오직 마음(heart)으로 주님을 향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위와같은 여러 이름으로 말하고 있으나, 우리에게 적절한 어휘를 현재적으로 발견할 수 없기에,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관상기도’란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래서 필자가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관상기도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지향하고 마음을 비워 수동적 자세로 하는 기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간청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아무런 노력없이 주님의 품안에 머물러 있어 ‘하나님 안에서의 쉼’이다. 이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찾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맛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내 존재의 근원에 계신 분과의 일치를 통해 그분과 템포를 같이 하려고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개인적 어떤 내용에 관심하기 보다는 자신을 비우고, 그분께 주의(attention)를 기울이며 그분의 뜻을 향하여 그래서 그분의 뜻에게로 일치를 지향하는 기도이다. 인간의 마음을 비워 주님께서 인간에게 임하시어 그분이 활동하시도록 하여, 그분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관상기도와 일반 기도와의 차이점
필자는 위에서 다룬 내용을 아빌라의 데레사가 경험적으로 고백한 기도의 7궁방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분류한다.
1) 구송(口誦) 기도(vocal prayer). 간청하는 기도, 우리들이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소망을 주님께 아뢰든지 간에 말로 주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말한다.
2) 명상기도(meditation). 기독교 신자들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경건생활로 행하는 큐티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만약 큐티가 끝나고 나서 침묵 가운데 하나님 속에 편히 쉼을 갖는 시간을 갖는 관상기도를 한다면 큐티의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신자는 놀라운 말씀의 능력과 생명력 있게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이 안정되고 활기찬 생명력을 담보할 수 없다. 여기에 내것화(owning)하는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머리의 영역의 기도를 안한 것보다는 훨씬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meditation을 ‘묵상’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meditation은 명상, contemplation은 관상이란 번역어가 자리잡아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두 기도는 기도자의 능동적으로 임하느냐 수동적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기도는 인간의 간구와 청원의 성격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사귐의 기도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을 진정으로 경청하는 단계의 기도는 관상기도라고 할 수 있다.
3)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 이 말은 ‘하나님 안에서 쉼’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주님과의 일치(communion, 친교, 합일)를 지향한다. 관상 기도를 크게 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능동적(active) 관상기도는 신자인 우리가 시간을 들여서 의지력으로 주님께 나아와 기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관상기도를 한다고 할 때 이 단계의 관상기도를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의지적으로 주님께 지향하며 침묵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부적(infused) 관상기도이다. 첫째의 능동적 관상기도를 꾸준히 행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기도자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영혼이 깊숙이 들어가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다. 또는 나는 아무런 노력이 없이 주님을 바라고 있기만 했는데도 은혜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상태를 말한다. 곧 수동적인 기도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말한다.
성 프랜시스가 하루는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혈색이 않좋던 그의 모습이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되어 은혜 가운데 있는 모습을 시중드는 수도사가 멀리서 바라보고 놀랐다고 한다. 프랜시스 성인은 한 시간정도 기도했겠지 하고 기도를 끝내고 나오면서, 옆에서 기다리던 수도사에게 “얼마나 기도했나?”라고 물어보니 “4시간 기도하셨습니다”라고 답하는 경우와 같다.
이와같은 기도의 단계와 종류를 구분해 다루는 것은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실제의 기도생활에는 위 3기도가 뒤섞이며 일어나고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은 관상기도를 한다고 침묵 가운데 있으면서도, 외부적으로는 소리내어 말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간구기도를 하고 있을 때가 있다. 또는 특정 대상에 대해 사고하며 성찰하는 명상기도를 할 수 있다.
이와같이 관상기도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경험있는 적절한 지도자에게 안내와 훈련을 받아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관상기도와 관련된 몇 권의 서적을 읽고 기도를 실천할 때에 어려움이 있다.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면 초기에는 열심히 얼마간은 기도할 수 있겠지만,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게 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 기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이 있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산의 동굴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열왕기 상 19: 1-18).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관상적 목회자>란 책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언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시편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 시편 46: 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여기서 ‘가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 “be silent"로서, 침묵 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첫 구절인 마태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 요한복음 14:10, 14장 20절, 17장 2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가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자가 마음을 비워 주님을 모셔들이고 그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6-8절은 관상기도 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데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는 구절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서 조용히 침묵가운데 마음을 비워드리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관상기도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고 관상기도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지면관계상 중요한 구절 몇을 찾아보았다. 이상과 같은 본문을 보듯이 관상기도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부르짖어 아뢰는 간구기도를 강조하는 성경이 있고, 다른 곳에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관상기도를 권면하는 부분도 있다.
렉시오 디비나와 관상기도
1세기 초부터 기독교신자들은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성독)을 하며 신앙생활을 해왔다. 당시에는 지금같이 성경이 인쇄되지 않아서 흔치 않았기에, 회당에 비치된 성경말씀을 듣기만 했다. 그래서 이들은 1) 말씀을 듣고(Lectio), 2) 이 말씀을 명상하고(meditatio), 3) 이 말씀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고(oratio), 4) 말씀과 주님의 현존 안에서 쉼(contemplatio)의 4단계를 거치는 영성생활을 거쳤다고 관상기도를 대중화시킨 토마스 키딩은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신자들이 많이 하는 큐티를 하고, 나중에 침묵 가운데 머물러 말씀의 능력과 주님의 현존 속에 머물러 말씀의 능력이 머리에서 가슴판에 새겨지는 시간을 갖는다면 참으로 생명력 있고 생수가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의 관상의 단계를 실천하기 위해 관상기도 훈련을 하고, 이를 위해 관상기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매우 강력한 기도이다. 이 기도를 어느 정도 해본 신자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침묵 기도의 힘은 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기도 방법들을 경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로 드리는 기도를 폐지될 수도 없고, 폐지되서도 안된다. 인간은 언어를 매개로 모든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언어적 기도의 힘을 밑에서부터 바쳐 줄 침묵 속에서 우러나오는, 존재의 근원에 접촉으로 나오는 에너지가 받쳐주는 기도는 매우 힘이 있다. 필자가 바라기는 간구하는 기도를 20분 하고서,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경청의 기도를 20분 정도 하는 대화로서의 기도가 균형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제 많은 분들이 이 기도에 관심 갖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신자들의 기도와 영적 성숙이 트기 시작했음을 보는 것 같아 기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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