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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고 믿는자들

요한복음 나무............... 조회 수 3805 추천 수 0 2009.03.23 15: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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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0:24∼29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1998년 1월 4일(주님의교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동료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던 도마, 설령 주님께서 정말 부활하셨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노라 단언하던 도마, 그러나 그 도마는 자신을 친히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직접 뵙는 순간 그저 감탄의 고백만을 터트릴 뿐이었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는 다른 말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진위 여부를 달리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주님을 다시 뵙는 순간, 그 분의 그윽한 눈동자와 다정한 음성에 포근히 감싸이는 순간, 그 분이야말로 부활하신 주님이시오 하나님 되심을 믿고 고백치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인간의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던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도마의 고백은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그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본문 29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도마를 꾸짖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이것은 꾸중이 아니라 주님께서 도마를 깨우쳐 주시기 위한 깊은 사랑의 권면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 과정에서 빠져 있지만, 원문은 주님께서 다정스레 도마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단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는 것은 결코 맹목적 신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고작 맹신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66권이나 되는 이 방대한 계시의 말씀― 성경말씀을 주셨을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이 기껏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면, 임마누엘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친히 오시어 당신 자신을 직접 계시해 보여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려 1천 5백여년에 걸쳐 기록된 방대한 계시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당신을 보여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결코 맹신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이 맹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참된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본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이 땅에서 3년동안 함께 거하시는 동안 예수님의 하나님 되시는 표적을 얼마나 많이 보여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죽음도 능히 이기실 참생명 되심을 얼마나 자주 보여 주셨습니까? 그 모든 것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 인지 한 것만을 믿으려 하면 우리의 믿음은 보잘 것 없는 우리 자신을 절대로 뛰어 넘을 수 없고, 유한한 우리 안에 갇힌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참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유한한 눈으로 본고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 것을 토대로 하여 지금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본고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믿음―그 믿음만이 나를 뛰어 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 속에 거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1월 1일 0시 신년 예배 시간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를 이사야 43장 18절∼21절에 바탕 하여 `새 일을 행하리라'로 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로니아로 끌려가 포로생활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곧 나타낼 것이라"(사 43:19a)

하나님께서는 이미 새 일을 다 행하여 놓으셨다고 과거형으로 말씀치 않으셨습니다. 지금 새 일을 행하고 계신다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제 앞으로 새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행하실 그 새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사43:19b)

이스라엘 광야의 특징은 나무 한그루 풀한포기는 물론이요 전혀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끝도 없이 펼쳐진 광야 한가운데에서는 방향의 식별을 가능케 해줄 표식이 전무합니다. 사막의 특징은 생명인 물이 없는 것입니다. 물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그 곳은 이미 사막일 수가 없습니다. 광야나 사막이나 모두 죽음의 상징인 것은 그 곳에 있어야 할 길과 물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의 광야 속에 길을 내실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사망의 사막 속에 강물을 터트릴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죽음의 곳을 생명의 진원지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이미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들은 터트리셨다거나 터트리고 계시다는 결과에 대한 통보가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지금 당장 볼 때에 광야는 여전히 길없는 광야일 뿐이요, 사막은 단지 물없는 사막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십니까? 길 없는 광야에서 지금 보이지 않는 길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를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없는 광야에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 강―그러나 이제 곧 터지게 될 강을 믿음의 눈으로 확인할 것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광야에 이미 나 있는 길과 흐르고 있는 강을 보고 거기에 길과 강이 있음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일 뿐이요, 반면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와 사막일 따름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지금 존재치 않는 길과 강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근거하여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허망한 망상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비록 지금은 없지만 반드시 있을 것을 내다보는 것이 바른 믿음이요 나를 너머설 수 있는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솔길 하나 보이지 않는 광야에 길들을 내시며, 물한방울 얻을 수 없는 사막에 강물을 터트리실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새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습니까? 이미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새일에 대한 약속을 믿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필요한 은혜로 채워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욕망과 죄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바벨로니아로까지 끌고 가시어 하나님을 바라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만으로도 지금 광야에 없는 길을, 지금 사막에 존재치 않는 강물을 넉넉하게 볼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본 고로 본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토대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음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광야와 같은 그들의 영혼에 구원의 길을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 사막과 같은 그들의 심령 속에 생명의 강물을 터트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새 일 중에 가장 큰 새일인 이땅에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본고로 본 것만을 믿으려 했다면 결코 있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은 되어 진 것에 대한 사실 확인이 아닙니다. 믿음은 약속의 말씀안에서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금년 6월 셋째주 우리 교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주일, 저는 오래 전부터 약속 드렸던 대로, 주님의 교회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주님의 교회일 수 있도록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많은 교우님들께서 그 이후에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새 목사님을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해 오셨습니다. 그 결과 6월 넷째 주부터 21세기를 향한 새세대의 첫장을 새로이 열어 줄 목사님이 누구인지 이 시간 여러분들께 밝힐 수 있도록 오묘하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95년초부터 저의 퇴임에 대비하여 후임자를 미리 선정해 줄 것을 당회에 부탁드렸습니다. 2년여에 걸친 장로님들의 장고와 기도 끝에 98년 봄 제가 몇 분을 당회에 천거하고 그 중에서 당회가 한 분을 결정키로 하였습니다. 제가 몇 분을 천거할 때 제 나름대로 정한 몇 가지 원칙 중 제가 가장 중시했던 것은, 저의 후임자는 학력·경력·영성·인품 등 모든 면에 걸쳐 저와는 비교가 안될 훌륭한 분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훨씬 훌륭한 분이 오시어 주님의 교회가 더 큰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보다 주님께서 이 교회 주인 되심의 더 좋은 증거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분을 천거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당회가 섭외를 시작했을 즈음에, 영락교회 임영수 목사님께서 그 교회 담임 목사직을 맡은지 10년만에 뜻한바 있어 영락교회를 자진 사임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천거했던 분 중에 영락교회 임영수 목사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임목사님께서 영락교회 담임목사로 재임 중이셨기 때문에, 장로교회 중 세계에서 가장 큰 영락교회의 현직 담임 목사님을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우리 교회가 모시려 한다는 것이 어쩐지 그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되어 우리 당회로서는 그 분을 섭외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임목사님께서 영락교회를 사임하신 만큼 사정은 달라진 셈이었습니다. 당회에서는 임목사님을 모시기로 의견을 모우고 7월말 권오승 장로님과 제가 임목사님께서 당시 체류 중이시던 독일로 임목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영락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봉사시 임목사님을 1년동안 모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분과의 만남은 제게는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제 신앙의 잘못된 부분들이 교정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그 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 이런 모습의 저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독일에서 개인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임목사님은 10년 전의 임목사님이 아니셨습니다.

그 분은 단순한 목회자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어 보는 선지자요 사상가의 경지에 올라 있었습니다. 권장로님과 저는 그 분께 우리 교회에 와 주실 것을 정중히 부탁드리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한 달후에 그 분으로 부터의 연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강단을 떠나 삶의 현장에서 헌신코자 영락교회를 사임하셨던 만큼, 년말에 귀국하면 음성 나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여수 애양원에서 당분간 봉사키로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당회는 재시도를 해보기로 하고 97년 9월초 김도묵 장로님과 제가 독일로 임목사님을 재차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이든 애양원 봉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기다릴 터인즉, 그 후에 우리 교회로 와 주십사고 다시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한 달후 다시 `불가'라는 통첩이 왔습니다. 그러나 포기치 않고 10월말 마지막으로 당시 임목사님이 채류중이시던 프랑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담임 목사님으로 오시지 않아도 좋으니, 제가 퇴임한 후 1년 동안 주일낮 설교만 해 주실 것을 부탁 드렸습니다. 그런 부탁을 드린 이유는 세가지 였습니다. 첫째 그 분이 1년 동안 주일 낮 설교만 해 주셔도, 제가 지난 10년동안 밤낮으로 설교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교우 여러분들께서 얻고 깨우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21세기를 앞둔 이 전환기에, 목회자의 야망이나 사심에 사로잡힘 없이 미래에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바르게 예견하고 제시해 줄 수 있는 목사님은 한국에서는 그 분이 거의 유일하다는 믿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둘째 임목사님께서 1년 동안 설교를 해 주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마음을 감동시켜 얼마든지 담임 목사직을 맡게 해 주실 수도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처럼 훌륭한 분이 설교를 맡으시다가 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담임목사가 되어 주신다면 그보다 더 은혜로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셋째로 하나님의 뜻이, 그 분이 1년동안 설교를 해 주시는 것만으로 그친다 할지라도, 그 기간동안 우리 장로님들이 적합한 후임 목사님을 청빙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임목사님께 그 같은 제의를 드린 후 당회원들은 매일 릴레이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 드렸습니다. 그 결과 지난 12월 초 빠리의 임목사님으로부터 우리의 제의를 수락하시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12월 중순에 귀국하여 애양원 봉사를 시작하신 임목사님을 12월 말 서울에서 뵈었을 때, 놀랍게도 그 분은 올 6월 넷째 주일부터 주일낮 설교뿐만 아니라 수요예배까지 담당하실 마음을 굳히고 계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께서는 6월 넷째주부터, 영락교회라는 관습과 틀에 구애 받을 것 없는 자유하는 임영수 목사님을 통해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총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영락교회는 장로교회 중 세계 최대의 세계적인 교회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영락교회의 1/10에 불과합니다. 그 분이 영락교회를 사임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무섭게 그 분을 모시기 위해 많은 교회와 기관들이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처럼 미미한 교회가 세계 최대의 교회에서 10년동안 하나님의 훈련을 거친 이 시대 최고의 목회자를 1년 동안 모실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새 일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면 그 분이 주일 설교, 수요예배 설교를 행하시는 1년 내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시사 새로운 담임 목사님으로 세워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담임목사가 교체되면 교회에는 동요가 있기 마련입니다. 기존 목사의 퇴임이 발표되면 신임 목사가 부임하여 자리를 잡을 때까지 교회의 부흥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저의 퇴임이 발표되었지만 우리 교회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저의 퇴임 이후 어떤 분이 오실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부흥이 정체되거나 퇴보하기는 커녕 매주일 새신자의 등록이 끊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여러분들께서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분을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실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저의 퇴임으로 예전보다 훨씬 더 은혜스러울 주님의 교회모습을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교회는 저의 퇴임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이미 크나큰 동요 속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목사님이 오실는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자체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건만 늘어나는 교인 수에 알맞게 YMCA 강당으로, 정신여고 소강당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 필요한 때 필요한 은혜로 채워 주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정신여고 강당을 건축케 하시는 놀라운 섭리―그렇게 보여 주신 은혜만으로도 훨씬 더 훌륭하신 목사님을 만나게 될 것임을 충분히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그 경이로운 믿음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1년간이란 단서가 붙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설령 1년간 만이라 할지라도 이 시대 최고의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하게 되었음은, 여러분들의 그와 같은 경이로운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경이로운 믿음을 여러분의 삶의 전반에 걸쳐 확장 시켜 가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가 가장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게 될 것을 믿기에 충분했다면, 그 은혜는 여러분들의 가정과 일터와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을 믿기에 충분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광야 한 가운데에 떨어져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광야로 인해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구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길을 믿음으로 보고 기뻐하십시오. 그 길만이 참된 길입니다. 여러분이 사막 한 가운데에 버려져 있다 할지라도 작열하는 태양만으로 인하여 괴로워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 곧 그 곳에서 터질 강물을 믿음으로 보고 소망을 가지십시오. 거기에만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경제를광야로 사막으로 이끌어 가셨다면 우리를 광야와 사막속에 버려두시시기 위함이 아니라 거기를 통하여만 이 민족이 나아가야 할 참된 길, 얻어야 할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임을 기억하십시오.

본고로 본 것만을 사실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보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보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향하여 펼치시는 하나님의 새 일속에 거하는 진정한 새해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기도드리겠습니다.
새로이 어떤 목사님이 오실지 우리 가운데 이무도 몰랐지만,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위에 서서 하나님께서 더 좋은 분을 보내어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믿고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이 시대 최고의 목회자를 보내어 주시고 그 분으로 하여금 21세기를 향한 첫세대의 첫장을 열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 믿음이 우리 교회 안에만 국한되게 마옵시고 교회 밖 우리 삶의 현장에까지 확산되게 해 주시옵소서. 지금 우리의 삶이 광야에 처해 있다면 그 광야 속에 하나님께서 이제 곧 뚫으실 길을 믿음으로 보게 하시고, 지금 우리의 생이 사막가운데 떨어져 있다면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터트릴 강물을 확인케 하옵소서. 이와같은 믿음으로 주어진 오늘의 어려운 현실을 능히 극복케 하옵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펼치는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케 하시사 이 해가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새해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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