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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3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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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1998년 1월 11일(주님의교회)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미 사망한 위인에 대하여는 가능한 한 모든 자료들을 빠짐없이 수집하려 합니다. 당사자가 이미 죽어 버린 관계로, 그 이외에는 그를 정확하게 파악할 길이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톨스토이나 토스토에프스키의 기념관 같은 것입니다. 그 곳에는 작가의 원고에서부터 심지어는 사용하던 잡동사니 물건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하여 수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집된 그 모든 자료를 통해 이미 사망한 톨스토이나 토스토에프스키의 진면목을 유추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만약 어떤 위대한 인물이 지금 살아 있고, 그 위인이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차별없이 누구나 만나 주는 자라면,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려 애를 쓸 까닭이 없습니다. 직접 만나 보면 됩니다.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를 찾아가 만나도록 소개하면 족합니다. 단지 이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왜 그 위인을 만나 보아야 하는지, 왜 그 위인을 소개하려 하는지 그 목적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목적을 수긍한 자가 위인을 찾아가기만 하면, 그가 위인에 관한 수만 가지의 자료를 통해 듣고 보는 것보다 그 위인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위인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요,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30∼31a)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자신이 요한복음에 기록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이 요한복음에 사용한 자료보다 월등 많은 자료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전함에 있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 목격한 모든 것, 갖고 있는 모든 자료를 다 활용치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숱한 자료 중에서 상당한 부분을 추려 낸 결과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 구절인 21장 25절에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 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갖고 있는 모든 자료들을 다 활용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추리고 추린 극히 일부분의 자료만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요한의 이 자기 설명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요한에게 있어 예수님은 이미 사망한, 죽어 버린 위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요한에게 예수님이란 존재가 사자(死者)에 불과했더라면, 요한은 요한복음을 사망한 예수님의 기념관 혹은 박물관으로 삼아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자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진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그 길을 선택치 않았다는 것은, 요한에게 있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돌아가 버리신 분이 아니라, 무덤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시어 지금 살아 계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그 분은 비서실을 통하여 사람들의 면담 요청을 일단 차단한 뒤에 선별적으로 응해 주는 분이 아니라, 그 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만나 주시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자료를 빠짐없이 다 전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살아 계신 그 분을 사람들이 만날 수 있도록 소개하는 것으로, 왜 그 분을 만나야 하는지 그 목적을 밝혀 주는 것만으로 족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자신의 설명보다, 살아 계신 주님을 직접 뵙는 것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익함을 바로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 31절을 통하여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첫째 지금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즉 만인의 구원자 되심을 소개하여 믿게 하려 함이요, 둘째는 지금 살아 계신 주님을 뵙고 그 분을 힘입어 참 생명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그 분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 속의 위인이 아니라, 그 분은 지금 살아 계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함은 기념관 속에 진열된 예수님의 화석이나 박물관 속에 전시된 예수님의 우상을 감상하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을 묵상해야 할 이유는 지금 살아 계신 주님,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살아계신 그분으로부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생명과 진리 안에서 나를 날로 새롭게 빚어 주실 수 있는 분은, 과거의 화석이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계셔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그 분 뿐입니다. 그 분 안에서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음은, 그 분은 영원토록 `지금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아 와 그분께 예배 드릴 수 있음도 그 분이 지금 살아 계심으로 인함입니다. 3주전에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참된 믿음은 이것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 합니다"
또 베드로후서 1장 20절∼21절 역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해석은 마음대로 해석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령에 이끌려 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이든 그는 단지 영감을 받은 도구에 불과 할 뿐이요,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알고 또 믿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아침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요한이 본문 31절을 통하여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보면 `기록되어 졌다'고 수동태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기록되어 졌음을 의미하기 위해 수동태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치 자기 자신이 요한복음이란 기록의 주체인 것처럼 요한 자신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요한은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임의대로 쓰여질 수 없기에 인간이 내가 기록했다고 표현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사도 요한이, 자신이 갖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방대한 분량 중에서 여기에 나타난 자료만으로 요한복음을 엮은 주체가 마치 자신인 것처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란 표현을 어떻게 성경 속에서 감히 하고 있을까요? 과연 요한은 요한복음을 자신의 저작물로 착각하였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렇기에 성경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영감과 그 영감의 말씀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해야만 할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내게 당신의 영감과 말씀을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 주셔도, 그 영감과 말씀 앞에 나의 의지가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으면 거기에 그 어떤 의미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적어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친정 부모님에 대하여 재정적인 책임을 지어야 할 이유가 없는 성도님이 있습니다. 그 분의 형제들은 모든 면에서 그 분보다 부모님을 모실 더 좋은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 중 그 누구도 부모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여건이 여의치 않는 그 성도님만 부모에 대한 책임감을 통감하면서, 그 책임감과 자신의 현실 그리고 형제에 대한 원망 사이에서 괴로워 하다가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통하여 역사 하는 분이십니다. 상대적으로 훨씬 좋은 조건속에 있는 형제들이 친정 부모에게 소홀히 하고 있는 상황속에서, 내가 친정부모를 책임져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다면, 그 생각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님이 친정 부모를 모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십시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물론 있겠지만, 그러나 그 명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결과를 선하게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형제 중 상대적으로 가장 열악한 조건에 처해 있는 그 성도님만이 유독 친정 부모에 대한 책임감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부터 비롯된 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분의 의지가 그 생각을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 분은 다른 형제와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영감의 말씀을 특별히 그 분의 심령 속에 심어 주신 하나님의 뜻은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당연히 깊은 생각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의지를 다해 실천하는 행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천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실은 망상과 잡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다. 요한에 의하여 요한복음이 쓰여질 때 그는 이미 백발 노인이었습니다. 어찌 그의 눈인들 어두워지지 않았겠습니까? 어찌 기동력이 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 출신이었던 그는 일평생 한 번도 정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문장 수업을 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어휘력이 풍부할 리도 없었고 표현력이 탁월할 리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부족하기만 한 요한에게 신비롭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이 임했니다. 그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을 백발 노인 요한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 내려 하였을 때 그의 진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과 그 영적인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컴퓨터의 자판이나 프린터 같은 비인격적 기계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감성 그리고 지성과 이성을 도구로 쓰시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표현하기 위하여 요한이 겪어야만 했을 진통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저의 경험으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로은 깨달음을 제게 내려 주십니다. 마치 온 대지를 적시는 이슬처럼 듬뿍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깨달음을, 보잘 것 없는 저의 지식과 표현력을 동원하여 한편의 설교로 가다듬기 위해서는 매주 토요일 저의 진액을 쏟아야만 합니다. 오죽하면 설교를 준비하는 매주 토요일은 어김없이 만 2kg의 체중이 빠졌다가 주일이 지나서야 다시 회복되곤 하는 일이 십년동안이나 반복되고 있겠습니까? 겨우 짧디 짧은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이 정도라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요한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적절한 인간의 말로 기록키 위하여 겪어야만 했을 진통은 몇 천배 몇 만배 더 컸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백발의 늙은 요한이 너무나 힘이 들어 요한복음 기록하기를 포기했더라면, 다른 이름의 복음은 몰라도 적어도 요한복음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며, 요한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백발노인의 진통을 마다치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의 말씀들을 의지를 다해 실천적으로 기록으로 남겼기에, 오늘도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지금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을 소개받고 만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본문 속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생명의 말씀 앞에 우리의 전 존재를 드려 응답하는 우리의 의지, 생각 속에 내재된 의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화되고 실천화되고 있는 의지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천화되는 우리의 의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그 능력을 드러내며, 행동화되는 우리의 의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결실되고 성취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행인이 외진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건만 그들은 모두 못 본척 피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짐승처럼 업수이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는 순간, 자기의 돈을 써가며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주님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한 제자가 즉석에서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만점이라고 칭찬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답을 맞춘 제자에게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 37)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믿음은 정답을 맞추는데 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답대로 행하는 실천적 의지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래 전, 몇 분의 성도님들이 모임을 결성하여 선행을 베풀기로 하고 모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그 모임의 이름을 주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라회'로 지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철학적 사유를 위한 모임의 회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말씀을 의지를 다해 실천하는 `하라회'의 회원이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거의 모든 말씀이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실천적 의지 없이 믿음이 존재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마 7:21)
한마디로 천국은 `사유회' 회원들의 것이 아니라, `하라회' 회원들을 위한 곳이란 의미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동해안 어부들은 `개딱이'를 행합니다. `개딱이'란 바닷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바닷가 바위를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해안 바닷가의 겨울 날씨는 여간 춥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운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개딱이를 그처럼 행하는 이유는 한가지, 개딱이를 해야만 그 바로 깨끗한 바위에 봄이 되면 싱싱한 미역이 들어 붙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곳 사람들이 개딱이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개딱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봄이 와도 미역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개딱이의 가치는 사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실천, 실천적 의지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새로이 다가온 1998년도가 정녕 새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작금의 경제 위기가 진정 전화위복의 발판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나라가 정말 의롭고 바른 나라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개딱이의 필요성을 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개딱이를 이제 행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개딱이를 실천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영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준행하는 의지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우리 모두가 이처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라회' 회원이 될 때, 개딱이를 실천하는 동해안 어부들에게 머지 않은 봄날 싱그러운 미역을 내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앞날을 하나님의 새일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그 증거를 보여 달라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사람에게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백발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의 말씀을 요한이 홀로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 의지를 다해 기록하기를 마다치 않았을 때, 2천년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 있는 `요한복음'을 보라고 말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기념관 속의 화석이나 박물관 속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지금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 이 백성에게 작금의 경제적 한파를 주셨음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개딱이를 행하게 해 주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딱이의 유익을 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진리의 개딱이를 실천하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IMF 위기를 맞이하여 희생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감수해야 할 희생을 내가 먼저 행하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정답을 찾기만 하는 `사유회' 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행동하는 `하라회' 회원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믿음이란 관념이 아니라 의지적 실천이요, 실천적 의지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사도 요한처럼 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행동으로 응답하는 자들이 되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새 일, 하나님의 새 역사가 펼쳐지게 하옵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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