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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관상기도의 성서적 이해

수도관상피정 박노열 목사............... 조회 수 2873 추천 수 0 2009.03.28 21:45:10
.........
출처 :  

관상기도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관상기도는 신학적 근거가 빈약하다고 한다.
곧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아가서 이단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학적인 뒷조사를 하였나 보다.
털어서 먼지가 안나도록 하려고 노력하지만 나는 신학자가 아니라 신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목회자로서 받아 들인다.
종교개혁 때부터 버리고 온것이라 말하면 돌맹이가 날라오려나. 3단돌맹이 말이다.
그래도 나는 찾아야 겠다. 스데반과 같은 심정으로.......................

분명한 것은 주님도 그리하셨고 구약에 선지자들도 그리 했고 초대교회이후 지금까지 그리해 온 전통이 있다.
다만 자기들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마치 간첩 사살하듯 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기회에 개신교회는 자신을 되돌아 보는 영적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때는 바야호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때가 되엇다.  하나님의 은총이 부어질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받아 하나님과 하나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
사실 놀라운일도 아니다. 언제든지, 누구나 그리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신학, 철학, 욕망, 욕심, 지식 등 자신만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향하여 응시한다면
지금까지 문 앞에서 두드리고 서 계시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 오셔서 하나 되어 주신다.
믿어라 믿어라 말하지 말고 나부터 먼저 믿자.
성경의 모든 사실과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하심에 동의하고 영접하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믿음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믿음의 은총이 있어야 믿어질 것이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조용히 다가가서
마리아처럼 모든 것 그분의 발아래 내려 놓고 그분을 모셔 들이자.
누가복음 10장의 마리아 처럼 더 좋은 것을 택할 수 있길 소망한다.

그분이 나와 하나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빈공간을 만들어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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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의 성서적 이해

먼저 관상이란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

   관상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contemplation은 라틴어 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contemplatio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테오리아(θεωρ?α)로 데오레인(θεωρε?ν)에서 유래 되었다. 데오레인(θεωρε?ν)은 “의도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인 경험을 명시하는 용어를 데오로기아(θεολο??α)라고 했다. 이러한 어원적인 유추로 볼 때 관상이란 사고에 의한 분석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관련된 말이다.1)
   하나님께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어 성서는 히브리어의 da'ath를 번역하면서 gnosis(靈智)를 사용하였다.2)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 정신이 아니라 전인격을 포함하는 아주 친밀한 지식”이라는 강한 뜻을 갖는다. gnosis는 하나님의 신비적 지식이지만 결코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갖는 하나님의 지식을 뜻하기 위하여 gnosis라는 단어를 사용(고전 12:8, 고후 6:6, 8:7, 엡 3:2~12, 골 1:25~28)하였다.3) 사도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지식을 말할 때 gnosis의 동사형인 Ginosken을 사용(요 14:7, 요일 4:8, 2:3~4, 요 14:6, 등 요한복음에서 56번, 요한서신에서 26번 사용)하고 있다.4)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와 아버지와의 친밀함보다 더 인상적인 면은 없다.5) (요 5:19, 30, 14:10, 눅 6:12, 9:28~29, 막 14:36, 마 4:1, 마 14:13, 눅 22:42,)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관상의 전통은 완전하고 극히 아름답다.6)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 등은 신플라톤파에서 theoria(관상)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이것의 원뜻은 지식의 지적 시각(視角)을 뜻하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theoria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하였다. 이 기술적인 용어에다 교부들은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da'ath의 뜻을 가미하였다. 이 theoria를 확대 이해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라틴어 contemplatio(관상)으로 번역하였고 이 뜻이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왔다.7)

   우리는 관상기도를 관상생활과 구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 주는 일련의 경험을 말한다. 관상생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말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진다.

   관상기도를 번역자에 따라 침묵기도, 마음의 기도, 묵상기도, 명상기도, 듣는 기도, 집중기도, 등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토마스 키딩은 향심기도를 발전시켰다. 근대의 토마스 머튼의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주로 명상, 묵상이라 번역하였으며, 리차드 포스트의 책을 번역한 사람들은 듣는 기도, 마음의 기도, 묵상기도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 외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말하여 아직 통일된 언어는 없으나 그것은 모두 기도의 방법과 기도의 상태를 표시하는 말로 근본적으로 관상에 이르는 기도들이다. 본 글에서는 관상에 이르는 모든 기도들은 관상기도라고 하기로 한다. 역자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역자의 글 그대로 두기로 한다.

1. 히브리어 da'ath에서 유래된 용어사용 ( gnosis(靈智), Ginosken )
   바울 ; 고전 12:8, 고후 6:6, 8:7, 엡 3:2~12, 골 1:25~28,
   요한 ; 요 14:7, 요일 4:8, 2:3~4, 요 14:6, 등
          요한복음에서 56번, 요한서신에서 26번 사용.

2. 성경에 직접 사용된 용어
1). 성경에 나타난 용어 묵상(Meditation)을 성서사전을 통하여 찾아보면
    묵상의 대상 ; 시 63:5, 6, 수1:8, 시 49:3, 77:6, 10-12, 119:11, 15, 23, 27, 48, 78, 99, 148, 143:5, 145:5, 사 33:18,
   묵상의 시간 ; 왕상 18:27, 창 24:63, 시 1:2, 63:6, 77:6, 119:97, 148,
   묵상의 유익 ; 수 1:8, 시 63:5, 104:34, 119:99, .
   묵상한 자들 ; 창 24:63, 왕상 18:27, 시 39:3, 전12:9, 기타  ; 시 19:14, 104:34

2). 성경에 나타난 용어 묵상(Meditation)을 성경성구대전을 통하여 찾아보면
   묵상 ; 시 19:14, 104:34, 
   묵상하다 ; 창 24:63, 수 1:8, 왕상 18:27, 시 1:2, 39:3, 63:6, 77:6, 77:12, 시 119:15, 27, 48, 78, 99, 148, 143:5, 145:5, 전 12:9

3). 히브리어
   리차드 포스트는 그의 저서 Celebration of Discipline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성경은 묵상이라는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두 가지의 히브리어를 쓰고 있는데 그 두 단어는 성경에서 약 58회 사용되었다고 한다."고 적시한다.
   창 24:63, 시 1:2, 63:6, 119:97, 101, 102, 148

   관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그 어느 것이든지 회개와 순종을 핵심적인 특징으로 한다고 리차드 포스트8)는 말한다.
    창 24:63, 시 63:6, 119:148, 1:2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묵상 방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 24:63).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시편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 119:148). 시편의 첫 시는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복 있는 자"(시 1:2)가 되도록 격려하고 있다.
   시 119:97, 101, 102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쳤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 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 하나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97, 101, 102).

   기독교의 묵상과 동양 및 일반 세상의 묵상을 가장 잘 구분 짓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순종과 충성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이다.

3. 하나님의 임재 체험 인물
    창 24:63, 삼상 3:1~18, 왕상 19:12~13, 9~18, 시 1:2, 63:6, 119:97, 101, 102, 148, 사 6:1~8, 9~10, 렘 1:4~19, 20:9, 요 15:16,
  
사 6:9~10, 렘 1:4~19, 왕상 19:12~13, 요 15:16
   관상이라는 용어는 먼저 구약성서에서 그 용례를 찾을 수 있다. 구약에서 관상으로 초대 받은 예언자들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사야의 소명(사 6:9~10), 예레미야의 소명(렘 6:4~19), 엘리야에게 들려 왔던 작은 소리(왕상 19:12~13)는 관상으로서의 초대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요 15:16) 즉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며 보다 진보된 상태로 발전되어 간다.9)  또한 구약성서와 구약신학의 주요 테마인 '계약사상'도 결혼 관계로 묘사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사랑의 신비와 교제와 연합에 대한 법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가서는 그 둘의 연인관계와 사랑의 밀어를 고도의 상징과 뛰어난 시적 표현으로 묘사한 글로서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창 24:63
   이삭은 저녁 무렵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낙타들(리브가 일행)이 오는 것을 보았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창 24:63).

삼상 3:1~18
   늙은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린 소년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도록 도와주었다(삼상 3:1-18). ".... 여호와께서 이 아이(사무엘)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삼상 3:8~9)

왕상 19:9~18
   엘리야는 광야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며 "여호와의 세미한 음성"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왕상 19:9-18).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왕상 19:12~13)

   시 119:97, 101, 102, 148, 63:6, 1:2
   시편기자들의 외침을 보라.

   기독교의 묵상과 동양 및 일반 세상의 묵상을 가장 잘 구분 짓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순종과 충성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이다.

   사 6:1~8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를 보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사 6:1-8).

    렘 20:9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는"(렘 20:9) 경험을 하였다.

   이 외에도 증인들은 허다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4.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건의 형식
      성서 속에 등장하는 관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용어의 제한된 의미를 떠나 하나님 임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침묵 속에서의 체험적 지식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할 때, 성서는 그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일치할 수 있는 많은 내용을 시사한다.
   요 17:26, 요일 4:2~3,
   바울 : 행 9:1~19, 갈 1:17, 고전 12:8, 고후 12:2,
   요한 : 요 4:7, 14:7, 요일 4:8, 23

    요 17:26, 요일 4:2~3
    신약의 사도행전이나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등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초월이라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건의 형식 속에서 기록하고 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로 너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라"(요 17:26),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등의 내용들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말해 줄뿐 아니라 기독교 관상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 계시된 것을 통해 신비로 넘어감'10)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상에 대한 명백한 모습은 바울 서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관상이라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말할 때 헬라어 "그노니스"(Gnosis)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11) 이러한 지식은 이성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12)

    행 9장, 갈 1:17, 고전 12:8, 고후 8:7, 12:2, 골 1:25-28
    사도바울은 이 지식이 관상 활동의 결실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과 소명(행 9:1~19), 그 후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모든 것을 떠나 기도에 전념했으며(갈 1:17), 3층천의 비밀을 체득한 것은(고후 12:2) 관상으로서의 초대를 보여주는 것이다.13) 바울 서신에서 'Gnosis'라는 용어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특유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고전 12:8, 고후 8:7, 골 1:25-28) 바울에 의하면 이 지식은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높은 경지를 뜻한다.14)

   요 4:7, 14:7, 요일 4:8, 23
   또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의 지식을 말할 때 "Gnosis'의 동사형인 'Gnosken'을 요한복음에서 56번, 요한서신에서 26번사용하고 있다.15)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내 아버지를 알았고 또 보았다.(요 4:7) 사도요한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요일 4:8)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친교를 맺는 것이다.(요 14:7) 그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요일 4:23), 하나님과의 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16)

   성서에서 말하는 관상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신비체험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지식은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체험적지식이다. 그것은 이성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사귐와 교제와 만남의 체험적인 지식이다.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은 관상에 대한 조직적인 훈련이나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전하고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후대 선지자들에 의해서 관상을 상징적인 표현을 빌어서 설명하려 했고, 그 여정도 체계적으로 제시하려 했다.

5. 내용상 침묵하여 묵상함
   사 30:15, 시 34:8, 46:10, 62:1, 잠 4:23, 마 5:3, 8,

   사 30:15
    유진 피터슨은 ??????관상적 목회자??????란 책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주의 종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조용히 "잠잠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사 30:15)

   관상기도는 조용히 있으면서 몸과 마음을 잠잠히 하여 주님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주님으로부터 생명과 힘과 능력이 전해오기 때문이ek.

    시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는 말씀이 우리를 관상기도로 초청하고 있다.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 간청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여야만 할일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나를 온전히 아시는 선한 분임을 체험적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관상기도는 우리의 이성으로 행하는 의지적 활동도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단순히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사랑하고 행복을 누리는 수동적 자세가 더 필요하다.

   시 46:10
    시편에서 언급한 관상기도 말씀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여기서 "가만히 있어"란 말은 침묵 가운데 있어 주 여호와가 하나님 되심을 체험적으로 경험하라는 유명한 구절이다. 침묵 가운데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주님이 하나님 되심을 동의하는 것이 믿는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시 62:1) 이 말씀이 잠잠히 침묵하여 하나님만 바라는 관상기도(침묵기도)를 권장하고 있다. 관상기도는 미련하고 나약한 인간의 짧은 지혜로 이런 저런 것을 간구하기보다, 전지전능하시고 기도하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의 이루심을 신뢰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

    신약성경에도 관련구절은 많이 있다.

    마 5:3, 8
    산상수훈의 첫 부분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상태이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어떤 생각, 계획, 욕심 등으로 가득 채워져 부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섭리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 마음을 비우는 가난한 빈 마음이라야 내제하신 성령 하나님의 향기로 가득 채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마 5:8)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온갖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나온다. 그럼으로 성도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야 한다.(잠 4:23)

6. 성령의 역사
    요 16:7, 13~14,  롬 8:26, 고전 2:7, 14, 10~12, 3:16, 요일 2:20, 27,

   요 16:7, 13~14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3)……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7, 13~14)

   이 말씀은 요한일서를 덧붙여 설명하면 완성됩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요일 2:20, 27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요일 2:20, 27)

   이렇듯 성령은 우리에게 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선물(Domum Dei altissimi)이다. 그분은 진정 우리의 소유이다. 성령께서 우리 자신의 영이 되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성령은 우리의 영적·신적 자아가 되며, 성령의 임재로  감화 받음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로 행동한다. 그분을 통하여, 그분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변화된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서신서에 분명히 나타난 대로 성령은 초자연적 질서 속에서 사랑하시고 활동하시는 인격적 원동력이다. 그 힘이 우리에게 임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관상의 삶은 인간적 기술과 훈련이 아니라, 영혼 깊은 데서 성령을 이루어가는 삶이다. 관상가의 본분은 자기 삶에서 천하고 시시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겸손과 순종, 자기 불신, 분별력을 훈련해야 하며, 무엇보다 믿음을 꾸준히 훈련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모든 회심자들이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대로 살기를 바랐다.

    고전 2:7, 10~12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 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7, 10~12)

   이것은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 관상에 관한 증거이다. 인간이 자신의 내적 자아의 증거를 통해서만 자신을 알듯이 하나님도 당신 영의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신다. 하나님의 영 덕분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실체와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이렇듯 성령은 우리의 내적 자아와 긴밀히 연합되어 있으며,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존재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로 만든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이다. 위 성경 본문을 비인격적 의미로만 대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성령은 먼저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이어서 교회로 전해졌다. 이는 성령께서 잘못된 교리와 도덕관념으로부터 교회를, 그리고 특히 사도들의 계승자를 지키신다는 뜻이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은 교회 각 개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각자의 초자연적 운명으로 이끄시며, 눈을 열어 자기 삶 속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의 신비를 보게 하신다.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 강화에서 구주는 계속 한 주제를 말씀하신다. 제자들 안에 성령으로 사시려고 세상의 육신을 거두어 그들을 떠나신다는 내용이었다. 예수께서 단지 어떤 추억이나 귀감으로 남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천사들을 통해 그저 멀리서 그들을 인도하고 통치하실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라면 충분히 모든 자연 세계를 무한히 초월하실 수 있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성육신으로 메워졌고, 우리 안에서는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메워졌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임재 하신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생생히 임재 하신다. 우리 각자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적 자아에 성령이 임재 하셨으니, 외적이고 이기적이며 허구적인 자아에 대한 집착만 벗어버리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발견이란 바로 영적 체험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신 성령은 이런 분이시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경이 말한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 말씀이 관상기도 하는 우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성도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때라할지라도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사랑으로 성도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동의하는 행위이다. 곧 우리의 헛된 욕심과 잔꾀를 부리기보다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께서 직접 하나님께 기도해주시기를 간청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상기도는 침묵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개인주의적 정적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내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성도의 일체성을 증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기 위해 침묵 가운데 우리의 몸과 영혼을 비워드리는 것이다.

7. 듣기와 순종하기
    묵상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이다. 아주 간단하다. 묵상에는 어떤 숨은 비결도, 비밀스러운 주문도, 정신 운동도, 환각적인 초월의식도 없다. 다만 위대하신 우주의 하나님, 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와 교제(교통)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에덴에서부터 교통하시든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지금까지도 손을 내밀어 거역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찾으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우리의 할일은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듣고 순종하는 것뿐이다.
   출 33:11, 20:19, 신 18:15-18, 마 17:5, 눅 10:41~42, 요 1:21, 4:19~25, 5:19, 30, 6:14, 7:37~40, 10:4, 14:10, 16:13, 행 1:1, 3:22, 7:37, 살전 5:17, 히 1:1~13, 3:7~8, 12:25,

  출 33:11, 20:19, 신 18:15-18
   모세는 여러번 흔들리고 주저앉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 실제로 성경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출 33:11)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는 친밀한 관계, 교제의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친밀함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조금 배우고 나서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이렇게 하여 그들은 위험부담 없이 종교적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세를 선두로 하는 선지자와 사사 반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현재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신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발길이었다.

   행 1:1, 3:22, 7:37

   마 17:5, 요 1:21, 4:19-25, 6:14, 7:37-40, 히 1:1-13, 3:7-8, 12:25
    누가는 그가 기록한 두번째 책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없음에도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 후에도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계속하셨다고 시사한다(행 1:1). 베드로와 스데반은 둘 다 예수님이 신명기 18:15에 있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고 지적한다. 모세는 말하는 자이고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었다(행 3:22, 7:37, 신명기 18:15-18, 마태복음 17:5, 요한복음 1:21, 4:19-25, 6:14, 7:37-40, 히브리서 1:1-13, 3:7-8, 12:25).17)

8.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사역 가운데서도 "한적한 곳(마 4:1-11, 14:23, 17:1-9, 26:36-46, 막 1:35, 6:31, 눅 5:16, 6:12)"으로 물러가는 습관이 있으셨다(마 14:13).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있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한적한 곳에 계실 때 무슨 일을 하셨을까?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셨다. 그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대화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마 4:1, 14:13, 23, 17:5(1-9), 26:36(36-46), 막 1:35, 6:31, 눅 5:16, 6:12,
   요 5:19, 30, 10:4, 14:6~10, 20, 27, 16:13, 8장, 9장, 10장, 15장, 계 3:20,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이며, 또 성경에 쓰인 대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결국 죽임을 당하셨다.

   요한복음 10:30, 36~3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요10:30, 36~38)

   요한복음 8:12~58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6)……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25)……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26)……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42)……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4)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55)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58) (요 8:12~58)

  요한복음 14:6~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 (요 14:6~10)

   이 말씀들은 지난 20세기 동안 아주 명백한 의미로 동일하게 해석되어 왔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음으로써 기독교적 묵상이 시작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아득한 천국에 계신 그분과 우리 사이에 생긴 간격을 어떻게 메울 수 있겠습니까? 답은 아버지께서 주신 복음이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가 되어 주며, 예수께서 우리 세상 속에 내재하신다는 것이다. 첫째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자연에 내재하시지만 거기서 나아가 세상의 구주, 구속자, 사랑으로서 살아 움직이고 계신다. 그렇다면 요지는 그분의 우주 안에서 그분과 접촉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어떻게 영접할 수 있을까?

  그는 믿음을 답으로 내놓았다. 권위에 복종하는 형식적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진정한 믿음은 세상에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우리 자아 전체와 삶 전체를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헌신은 보이지 않는 인격을 향한 사랑이다. 나아가 우리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은 그 선물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말씀과 우리 마음, 영, 삶의 연합은 성령으로 효력을 발한다.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유언인 최후의 만찬 강화에18) 명백히 나타난다. 첫째, 주님의 육체적 임재와 새롭고 더욱 친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임재를 구분한다. 전자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제자들과 거하시는 동안 그들과 친숙해졌던 임재이고, 후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그분 나라를 세우실 때 취하신 임재이다.

   요 5:19, 30, 10:4, 14:10, 16:13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그 나라의 삶이 어떠한가를 본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속자와 왕으로 알게 하는 살아 있는 교제를 확립해 주셨는데, 그것은 모든 일에 그의 말씀을 듣고 항상 그를 순종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듣고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내가 아무것도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요 5:3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목자이며 자기 양은 그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다(요 10:4), 예수님은 보혜사, 즉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진리의 성령께서 오실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다(요 16:13).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 14:26)

    요한복음 14:21, 23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요14:21, 2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지식과 사랑은 복 있는 자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복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영생이란 아버지께서 보내신 주님과 말씀 안에서 우리를 아버지와 연합시키시는 성령을 영접하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보내심' 또는 사명으로 집중됩니다. 묵상은 아들과 성령의 사명을 의식적·체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생명으로만이 아니라 빛으로 보내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안에 '영접된' 말씀을  충만히 아는 지식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이다. 우리는 그분을 '타자(他者)'로, 신(神) '당신'으로 알고 우리 영의 모든 존재가 그분을 향하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내면의 '나'와 긴밀하게 연합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보다 더 참으로 우리의 자아가 되신다.

   관상하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성삼위일체와 말씀의 성육신을 분명히 깨닫는다. 예수를 아는 긴밀한 지식에서 무한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관상가의 기쁨은 온전한 연합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요 17:22~23)

   이 숭고한 삶의 씨앗은 세례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심겨진다. 하지만 결실을 거두려면 씨앗이 자라고 발육해야 한다. 자기 몸 안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품고 살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전혀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자기 정체를 모fms다. 자신과 자신의 참된 존엄성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안타깝게도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에만 급급하다. 그리고 문제는 그 성격이 폭력과 기교, 정욕과 탐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영혼에 심겨진 관상과 거룩함의 씨앗은 그저 잠만 잘 뿐이다. 싹을 틔우지 못하니 자랄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성화(聖火)의 은혜가 그들 영혼에 깃들어 있기는 하나, 그것이 흘러 넘쳐 그들의 기능과 지식과 의지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영혼들에게 자신을 보이지 않으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 양쪽에 발을 디디고 서 있다. 그들은 외적 자아 안에서만 편안하다. 그래서 자신의 더 깊은 내면은 구하지 않는다. 자기 영혼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두면서도, 생각과 갈망은 환각과 욕망을 좇느라 여념이 없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한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비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에 눈을 뜨지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들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관상의 선물로 성령을 약속하셨다. 단, 받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주어지지만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거부될 것이다. 성 토머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요한복음(14장) 말씀을 주해하면서 둘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관상은 사람이 '세상'에 속하는 만큼 비례하여 거부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자들을 나타낸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이신 성령을 받지 못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대로 "동일 주제 안에 두 반대 명제가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듯이 말이다.

   사람이 성령과 그분의 사랑을 받고자 자신을 준비하려면 세상이 내놓는 야망과 외적인 활동, 일시적 관심사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한다. 세상적인 것들을 비우지 않는 한 영적인 것들을 분별하거나 깨달을 수 없다.

   아퀴나스는,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알고자 갈망하지 않으므로 성령 또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을 시시한 것들로 채우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갈망은 관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갈망 없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 선물들을 절대 받지 못한다. 아퀴나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실제로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다만 얼마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연합을 갈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소외된 인간, 외적 활동과 일시적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그리스도인은 관상을 갈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관상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발견하는 길은 체험밖에 없다. 우리는 주님이 선하신 분임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

   아퀴나스는 세속적인 자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미각을 잃었다고 말한다. "환자의 혀가 진미의 맛을 모르듯이 ‥‥ 세상의 타락에 감염된 영혼도 천국이 주는 기쁨의 맛을 모릅니다."

    사도행전 8장, 9장, 10장, 15장,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부활하셔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은 성령을 통해서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빌립을 인도하여 새로이 미전도 지역에 가게 하시고(행 8장), 자신의 메시아 됨을 바울에게 보이시고(행 9장), 베드로에게 그의 유대 민족주의를 가르치시고(행 10장), 교회를 인도하여 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다(행 15장). 우리가 거듭거듭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기초로 사는 법을 배우는 모습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묵상에 대한 성경의 토대이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는 것은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잠잠히 하고 침묵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주께로 집중하는 의미한다. 이 처럼 누구든지 마음의 빗장 문을 열어젖히고 주님을 초대하면 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할일은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지금까지 우리가 주장하든 모든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주님을 내 안에 모셔드리는 초청이다. 침묵기도 곧 관상기도이다.

9. 자주 인용하는 성구들
    계 3:20, 살전 5:17, 마 5:8, 막 1:35, 눅 10:41~42, 요 14:20, 23, 시 116:9, 46:10, 27:14, 33:20, 37:7, 62:1, 5, 131:2,
    계 3:20,  : 마음문을 열면
    살전 5:17,  : 쉬지말고 기도하라
     마 5:8,     :  마음이 청결한 자 하나님을 볼 것
     마 11:29,   : 주께서 원하시는 멍애 - 마음의 쉼
     막 1:35,    :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더니
     눅 10:41~42, : 마리아는 더 좋은 것을 택함
     요 14:20,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요 14:23,   :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시 116:9,   : 여호와 앞에서 행하리로다
     시 46:10, 27:14, 33:20, 37:7, 62:1, 5, 62:1, 131:2, : 주님 안에서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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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 수련?,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9), pp,90~91.
2) Tomas Keating, 하나님과의 친밀, 엄무광 역 (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98), P. 50.
3) T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 가톨릭출판사, 2003 ), P.35.
4) 이덕근, ?관상기도의전통과 마음의 기도?,  신학전망 52호, (1981. 봄) p. 114.
5) 리차드 포스트,  박조앤 역, ?생수의 강?,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9), p. 22.
6) ibid p. 24
7) T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3 ), P. 36.
8) Richard Foster, Celebration of Disciplne, ?권달천, 황을호 역, 영적훈련과 성장?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6), p. 32.
9) 66) 류병일, 『그리스도교 관상에서 움직임에 대한 고찰」 (신학과 사상 6호, 1991.12), 116쪽
10) 류병일,「그리스도교 관상과 기만」,(서울 : 카톨릭대학신학부, 1986), 113쪽
11) 류병일, ?위의 책?, 114쪽
12) 게르하르트 킷텔 외편, 『신양성서 신학 사전』 ,번역위원회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91), 157쪽
13) 유병일, 『위의 책」 , 114쪽
14) 이덕근, 「관상기도의 전통과 마음의 기도』 , (신학전망, 52호. 1981), 114쪽
15) James Dunn, 「신양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 김득중, 이광훈 공역, (서울 : 나단출판사, 1988), 469쪽.
16) 이덕근, 「위의 책?, 114쪽
17) 신명기 18:15-18, 마태복음 17:5, 요한복음 1:21, 4:19-25, 6:14, 7:37-40, 히브리서 1:1-13, 3:7-8, 12:25을 보라.
18) 묵상의 능력에 "관상이란 무엇인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관상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성구들이다. 그리고 이글 들은 머튼의 저서 "명상이란 무엇인가?"에서 가져 왔으며 "명상의 씨"로 전개된다.
묵상을 통하여 명상 곧 관상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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