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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수도관상피정 헨리 나우웬............... 조회 수 3366 추천 수 0 2009.03.28 21: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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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성경으로 기도를 배우라 그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한다. 이 글을 읽고 연습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는 법을 터덕하길 바랍니다.
관상기도하시는 분들은 이미 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중에 있는 줄로 압니다만.....다시 읽고 정리하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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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말고 기도하라

 원제 : 성경으로 기도를 배우다 (시간, 장소, 방법)
 Henri J. M. Nouwen, Spiritual Direction,
윤종석 역, ?영성수업? (서울: 두란노, 2007) pp. 80-96

? 기도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고, 단순한 대화이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명상적인 경청이다.

어느 머나먼 섬에 세 명의 러시아 수사가 살고 있었다. 생전 아무도 그곳에 간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그들의 주교가 심방을 하기로 했다. 그가 도착해서 보니 수사들은 주기도문도 몰랐다. 그래서 주교는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쳐서 그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고는 자신의 목회 사역에 만족을 느끼며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배가 섬을 떠나서 다시 공해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세 은자가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실 그들은 배를 쫓아서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 와서 물었다. '사랑하는 신부님,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잊어 버렸습니다." 주교는 눈앞의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여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럼 그대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그야 그냥 이렇게 아뢰지요. '사랑하는 하나님, 저희도 셋이고, 하나님도 세 분이시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교는 그들의 거룩함과 단순성에 탄복하여 "그대들의 땅으로 돌아가 평안히 거하라"고 말했다.1)

톨스토이의 유명한 비유에 나타난 것처럼 기도를 배우는 것과 기도로 충만한 마음을 배우는 것은 다르다. 기도로 충만한 마음은 입으로 말하는 특정한 기도보다 깊고, 궁극적으로 더 중요하다. 기도는 찬양과 감사, 고백과 탄원, 간구와 중보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특정한 기도의 예로는 '주기도문'과 '예수님 기도'가 있다. 그러나 기도로 충만한 마음은 마음의 문제로, 대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 평온함, 겸손, 긍흘, 기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갈 5:22-23). 톨스토이의 이야기에서 수사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주교는 그들이 '주기도문'에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거룩함과 기도로 충만한 마음을 알아보았다.

매일의 기도와 영적으로 잘 개발된 기도로 충만한 마음이 온종일 지속되면, 사도 바울의 권고대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쓰고 있다. 바울은 끊임없는 기도를 권할 뿐만 아니라 직접 실천한다. 그리스에 있는 자신의 공동체에게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살전 2:13)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살후1:11), 로마인들에게 그는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디모데를 이런 말로 위로한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딤후 1:3).

바울 서신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그리스어 단어 둘이 있다 각각 '항상'과 '부단히'를 뜻하는 'pantote'와 'adialeiptos'이다. 이 단어들을 보면 바울에게 기도라는 것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이고, 생각의 일부가 아니라 생각 전체이며, 감정과 느낌의 일부가 아니라 그 전체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열정은 일부만 헌신하거나 조금만 드리거나 베풀기를 머뭇거릴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드리고 모든 것을 구한다.

이런 극단적 입장에서 당연히 몇 가지 어려운 의문이 생겨난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요구와 속박이 많은 이생을 어떻게 하나의 부단한 기도로써 살아낼 수 있나? 날마다 방해하는 끝없는 잡념들은 어떤가? 게다가 취침 시간, 꼭 필요한 전환의 순간들, 몇 시간만이라도 삶의 긴장과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 시간을 어떻게 끊임없는 기도로 채울 수 있나? 이런 의문들은 현실적인 것이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난감하게 해왔다.

끊임없이 기도하려는 갈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19세기 어느 러시아 농부의 경우다. 그는 부단히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이곳 저곳의 은자들을 찾아다니며 답을 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만난 어떤 성자가 그에게 예수님 기도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농부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날마다 몇 천 번씩 말하라고 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 기도는 서서히 그의 호흡과 맥박과 하나가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성경책, Philokalia (동방 기독교의 신비 저작모음집으로 필로갈리아는 은성에서 번역 출판되어 있다), 약간의 빵과 소금을 배낭에 넣어가지고 러시아 전역을 주유하면서 끊임없는 기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2)

우리는 19세기의 러시아 농부나 순례자는 아니지만,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할 것인가'라는 단순한 순례자의 추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다. 나는 1세기 전의 광활하고 고요한 러시아 초원의 정황이 아니라 안식을 모르는 현대 서구 사회의 정황에서 그 질문에 답하고 싶다. 끊임없는 기도의 실천은 세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우리의 모든 필요와 요청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다음에 우리의 끊임없는 상념을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대화로 전환시킨다. 마지막으로 묵상과 명상적 삶이라는 매일의 훈련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운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

첫째, 기도란 우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1~2). 이것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기도다.

우리 안에는 두려움과 고민이 아주 많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생생하게 유유히 떠다니는 정체 모를 갖가지 불안.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기도를 막는 주된 장애물이 아닐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자기 속의 그 거대한 두려움의 저수지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바쁜 세상이 얼마든지 내주는 많은 잡념들로 달아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두려움에 직면하고,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분의 임재 안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끌어들일 수 있다.

우리는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부분만 하나님께 내보이는 성향이 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기 원하지만, 동시에 내면생활의 작은 한 모퉁이를 내 것으로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다. 숨어서 은밀한 생각을 즐길 수 있는 곳, 나만의 꿈을 꿀 수 있는 곳, 내 정신적 작품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그런 곳을 가지고 싶어 한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의 대화에 가지고 갈 생각을 잘 고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우리를 그토록 인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지나가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수용하실 수 있을지 걱정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내 가증한 생각과 잔인한 공상과 이상한 꿈을 받아들이실 수 있을까? 하나님은 내 유치한 충동과 교만한 착각과 머릿속의 허황한 모래성을 소화하실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생각의 커다란 부분을 하나님께 감추어두면, 우리는 알고서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을 길로 가게 된다. 바로 영적인 검열의 길이다.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을 포함하여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모든 공상, 근심, 원한, 어지러운 생각들을 삭제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생각을 감추고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할 때, 우리는 정서적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서 증오와 절망에 떨어지기 쉽다. 그보다는 욥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고통과 분노를 하나님께 쏟아놓고 응답을 요구하는 편이 훨씬 낫다.

몇 년 전에 피에르 울프 (Pierre Wolff)는 검열 없는 기도에 관하여 좋은 책을 썼다. 제목은 「하나님을 미워해도 되나? (May I hate God?인데, 우리의 영적 씨름의 정곡을 찌른 책이다. 표현하지 못한 많은 두려움, 회의, 불안, 원망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분노와 증오는 우리를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키지만, 오히려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는 관문이 될 수도 있다.

부정적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종교와 세상의 터부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분노와 원망을 기도로 하나님께 직접 표현함으로써만 우리는 완전한 사랑과 자유를 알 수 있다. 우리의 두려움, 거부당한 마음, 증오, 원통함 등의 이야기를 쏟아놓아야만 치유의 희망이 가능해진다.3)

시편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르짖음과 고뇌가 가득한데,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거침없이 드러내고 쏟아놓으며 구원을 청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 1-2).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1-2).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 1)4)

 이런 시편 내용으로 기도한 옛 선조들처럼 우리도 자신의 떨리는 자아 전체를 감히 하나님께 더 보여드릴수록, 온전한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우리의 생각을 정결케 하고 우리의 증오를 치유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중심적 독백에서 친밀한 대화로

둘째, 독백이 대화로 옮겨가면 기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의 단순하고 친밀한 대화가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라는 시편을 가지고 기도하면, 때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 다 잘될 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들려온다. 때로 밤중에 내가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는 하나님의 응답이 들려온다. 그리고 외롭고 사랑받지 못하는 듯한 내 심정을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7:2)라고 안심시켜주시는 것이 종종 느껴진다.

기도하고 나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하루 종일 품고 살려고 한다. 말씀을 매개로 한 기도는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는 분과 함께 나누는 영적 대화가 된다.

바울의 가르침대로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이 쉬지 않고 하나님만 생각하거나 의식적으로 그분께 말한다는 의미라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딴 생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생각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산다는 뜻이다. 하나님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내는 것은 영적인 삶에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 즉 멋진 생각, 흥한 생각, 고상한 생각, 저질적인 생각, 교만한 생각, 창피한 생각, 슬픈 생각, 기쁜 생각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이루어지고 표현될 수 있을 때에만 기도는 끊임없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이렇듯 끊임없는 생각이 끊임없는 기도로 바뀔 때 우리는 자기중심적 독백에서 하나님 중심의 대화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의 모든 생각을 대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은 우리의 생각이 무슨 내용인가라기 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누구에게 내어놓는가가 된다.    우리가 더 이상 생각을 혼자만 품고 있지 않고 과감히 말로 표현하고 고백하고 나누고 대화에 가져간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어떻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창피한 생각이든 유쾌한 생각이든 그것을 고립 상태에서 끄집어내서 하나님과의 대화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끌어들이면, 당장 그 순간부터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일단 그 모험을 감행하여 수용을 경험하면, 우리의 생각들 자체가 새로운 질(質)을 받아서 기도로 변화된다.

그러므로 기도란 내성이 아니다. 기도는 안을 보지 않고 바깥을 본다. 내성은 자칫 우리로 하여금 내면을 살펴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정신과정을 분석하는 미로에 빠뜨리고, 그래서 무력한 염려와 자기 몰입과 절망으로 이끌기 쉽다. 기도란 바깥을 향하여 우리를 끊임없는 대화로 부르시는 그분께 정성스레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묵상은 물론 공상이나 밤중의 꿈까지 포함하여 모든 생각을 사랑의 아버지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보시고 긍휼로 반응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말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 마음과 뜻을 하나도 숨김없이 아신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시편기자와 함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5)

기도는 말없는 경청이다

끝으로 셋째, 근본적으로 기도란 하나님의 영께 말없이 보조를 맞춘 채 감사와 명상으로 표현되는, 열린 마음의 자세다. 기도는 단지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거나(분명 거기서 시작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 임재 안의 명상으로 이어지는 말없는 경청이다. 감사의 자세와 명상의 영을 가꾸면 특정한 기도들이 기도로 충만한 마음으로 자랄 수 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노라면 도중에 어디선가 내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독백이며 일방적인 일이다. 설령 기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대화가 되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더 깊은 임재를 갈망하게 된다. 사실 기도란 하나님과 함께 느끼고 말하고 생각하고 대화하는 것 이상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든 그렇지 않든 조용히 듣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기도란 주로 경청과 기다림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 겸손한 정신, 고요한 영의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의 생각을 가슴으로 내려가게 하여,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선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서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한 가지 길은 예수님 기도를 가지고 묵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8장에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보면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세리의 단순한 기도가 나오는데, 그것이 동방 정교 전통에서 예수님기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 예수여,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단순한 문구를 아주 천천히 반복하노라면, 묵상의 질을 띠면서 영혼에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준다. 이 말은 우리 호흡의 일부, 전 존재 양식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예수님 기도의 아름다운 점은 우리의 일 속으로까지 기도를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차를 운전할 때나, 책상에 앉아 공부할 때나, 심지어 음식을 먹거나 잠들 때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특정한 기도들은 기도로 충만한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의 질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더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들리거나 경험되기를 원치 않으시는 침묵의 하나님이 아님을 우리는 점차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종해야만 주목해주시는 저항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설득해야만 좋은 일을 해주시는 소극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많으신" 긍흘의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다. 그분은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치유가 가능하도록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요컨대 기도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고, 단순한 대화이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명상적인 경청이다. 일단 이런 측면들을 배우면 기도로 충만한 마음이 매일의 실천이 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대로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다.(살전 5:17)

기도를 배우고 훈련하기

기도는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학습과 훈련을 요하는 일이다. 특정한 기도를 말로 할 때도 그렇고, 지속적인 태도인 기도로 충만한 마음에 거할 때도 그렇다. 기도를 배울 때에는 일정한 시간, 특별한 장소, 단일한 초점을 떼어놓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한 시간

우리의 기도 시간은 오전일 수도 있고, 한낮일 수도 있고, 밤중일 수도 있다. 한 시간일 수도 있고, 반시간일 수도 있고, 10분일 수도 있다. 하루 한 번일 수도 있고 여러 번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루 중의 일정한 시간을 하나님과 단둘이서 기도하는 시간으로 떼어놓는 것이다.

 문제는 '기도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언제 기도할 것인가'이다. 출근하기 전인가? 한낮의 휴식 시간인가? 밤에 잠들기 전인가? 예수님도 그러셨듯이(막 1:35 참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루 중에 기도를 위하여 떼어놓기 가장 좋은 시간은 새벽이다. 그것이 현실성이 없다면 다른 낮 시간을 할애하면 된다. 온전히 하나님께 주목할 수 있는 시간이라야 한다. 낮에 언제라도 30분 정도 기도하는 것이 전혀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아침이나 밤에 30분간 기도하거나 낮에 10분간 기도하거나 저녁식사 전후에 짤막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과 하나님 안의 우리 삶이 기도의 삶임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특별한 장소

일단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떼어놓았으면 우리는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자유로이 따를 수 있다. 시간만 아니라 장소도 기도에 중요하다. 시편으로 기도하거나 말씀을 묵상하거나 주의 영광을 명상할 특별한 장소를 고르라. 예수님은 종종 일부러 산에 오르거나 동산에 들어가거나 광야로 떠나거나 수상의 배 안에서 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셨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에 있을 때에 특별한 기도처를 찾아서 강둑을 따라갔다(행 16:13). 야외이든 실내이든, 어디든 당신이 가장 편한 데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리를 찾아 기도하고  묵상하라.

 당신의 집에 따로 기도실로 쓸 만한 특별한 방이 있다면 이상적이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이미지들로 그 방을 장식하면, 촛불을 켜거나 혹 향을 사르면, 그곳에 더 자주 가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하면 할수록 점점 더 기도의 정기와 힘이 그곳에 가득해질 것이다. 그런 곳에서라면 잠시 세상을 뒤로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푹 잠기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분의 방이 없다면, '기도 벽장'이나 방 한 모퉁이를 찾아 제대(祭臺)를 두거나 아니면 특별한 기도용 의자를 지정하는 것도 좋다. 그것도 불가능하거든 안전하게 느껴지고 자꾸 가고 싶어지는 교회나 채플에 가보도록 하라. 기도란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꾸준한 고독의 기도를 위하여 특정한 시간과 특별한 장소를 정해두는 것이 가장 좋다.

하나의 초점

기도 시간에 기도 장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간단히 답해서 그냥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분으로 하여금 당신을 보시고 만지시고 말씀하시게 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믿으라. 당신의 심령이 원하는 방식대로 말하라. 그리고 듣는 법을 배우라. 주님의 임재 안에 있으려고 떼어놓은 시간, 하나님을 그 시간의 단일한 초점으로 삼으라.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 간단한 답으로 부족하다. 복잡하게도 우리는 고독에 들어가는 순간 너무 피곤하거나 따분한 자신을 보게 된다. 물론 몸이 잔뜩 지쳐 있다면 기도할 수 없다. 그럴 때는 낮잠을 자는 것이 가장 영적인 일이다. 따분하면 그 시간이 공허하고 무익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쁜 나날 중에 기도로 '무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기도란 어떤 사람이나 일로 바쁜 대신 하나님으로 바쁜 것이 아니다. 기도란 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무익한' 시간이다. 내가 하나님께 아주 무익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내 통제 소관이 아니라서 그렇다. 내 기도에서 무엇이든 유익한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열매가 많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기도하려고 떼어놓는 시간은 내 소관이지만 결과는 내 소관이 아니다.

맑은 정신으로 일단 기도할 준비가 되었으면, 이제 할 일은 초점을 찾는 것이다. 그날의 복음서 본문을 읽든지, 시편으로 찬양을 부르든지, 성경구절 하나를 골라서 천천히 읽으라.

훌륭한 영적 전통이라면 어디에나 마찬가지지만, 기도나 명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일한 집중점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초점은 '예수'라는 이름일 수 있다. 또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하는 예수님 기도일 수도 있다. 떨칠 수 없는 어떤 이미지나 강력한 단어나 성경의 문구 등 뭔가 당신의 주목을 사로잡는 것일 수 있다. 기도의 초점을 하나로 모으는 취지는, 생각을 해방시켜서 마음으로 묵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명상하게 하는 데에 있다.

잡념과 싸우는 방법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다 보면 우리의 내면생활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깨닫게 된다. 갑자기 온갖 산만한 생각, 감정, 공상이 표면에 떠오른다. 이내 우리는 껑충대는 원숭이들이 득실거리는 바나나 나무가 된 심정이다. 우리의 머릿속은 써야 할 편지, 걸어야할 전화들, 지켜야 할 저녁 약속, 써야 할 기사, 깨우쳐야 할 통찰, 가고 싶은 곳들, 근심과 염려 등 온갖 할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 놀라지 말라. 과객들에게 늘 열려 있던 집의 문을 갑자기 닫아걸고는 다시는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잡념과 싸우는 방법은 그것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촛불 하나만 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게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으면 서서히 고요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연습을 통해서 당신은 잡념을 인정하고, 일부러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도로 돌려보내고, 자신의 주목적인 기도로 돌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니 잡념이 기도를 방해하거든 한 번 웃어주고 그냥 지나가게 두고 정해둔 초점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시편 말씀을 되뇌거나 복음서의 교훈을 다시 읽거나 명상의 이미지로 되돌아가거나 정해둔 단어를 계속 묵상하라,

결국 당신이 입이나 마음으로 읊는 말씀들, 응시하고 꿰뚫어보는 이미지들, 기도할 때 드는 기분들이 당신에게 점점 더 매력 적으로 느껴지고 머잖아 당신은 자신의 영적 의식 속에 슬쩍 끼어들려고 하는 많은 '의무'와 '당위'보다 그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고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에는 당신의 내면생활을 변화시켜 그곳에 하나님이 즐거이 거하실 집을 마련하는 능력이 있다

성실한 기도를 삶의 일부로 삼으라

중요한 것은 기도에 성실히 임하는 것이다. 기도를 일상생활의 훈련으로 삼고 계속 힘쓰라. 기도의 일정한 시간과 특별한 장소와 단일한 초점을 정하면, 서서히 따분함과 잡념이 줄어들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루 종일 기도와 감사의 태도 안에 거하는 것이 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 바울의 말이 그런 뜻이다. 기도를 "꼭 필요한 것 한 가지"(눅 10:42)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뜻이다.

당신이 이미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음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실 것을 믿고서, 계속하여 기도를 당신의 삶의 일부로 삼기 바란다. 그런 당신에게 나누고 싶은 기도가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을 저의 자애로운 형제로 알게 하소서. 아무것도, 저의 가장 악한 죄까지도 제게 허물하지 않으시고 푸근한 품으로 저를 감싸주시기 원하시는 분으로 알게 하소서. 주님을 저의 주인 되지 못하게 하는 제 많은 두려움, 의혹, 회의를 제하여 주소서. 주님의 임재의 빛 앞에 벌거벗고 연약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주소서. 주님의 헤아릴 수없는 자비를 믿고서,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음성을 들을 자세로 그리하게 하소서. 아멘.



1) 톨스토이의 비유는 나우웬의 The Road to Daybreak: A Spiritual Journey (1988), p. 50.에 인용되었다. (?새벽으로 가는 길?, 성바오로 출판사) 2) R. M. French 번역 The Way od a Pilgrim (Sebury Press, 1965)을 참조하라 (?순례자의 길?, 은성)
3) Pierre Wolff, May I Hate God? (Paulist Press, 1979)
4) Psalms : A New Translation: Singing Version, Joseph Gelineau 번역 (Paulist Press, 1966)
5) Psalms : A New Translation: Singing Version, Joseph Gelineau 번역 (Paulist Press,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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