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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묵상 -토마스 머튼

수도관상피정 최용우............... 조회 수 2654 추천 수 0 2009.04.03 22: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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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묵상1)

토마스 머튼, 윤종석 역, 묵상의 능력(The Inner Experience), pp.25~60.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내안에서 나 자신만이 아니라 그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때 우리의 무는 그분의 전부가 됩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타락한 이야기는 인간이 묵상가로 창조되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낙원에서의 추방은 연합에서의 추방을 의미합니다. 플라톤 학파의 그리스 교부(敎父)들은 인류가 양성(兩性)으로 나뉜 것도 타락의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타락 기사를 보다 신중하게 적용했습니다. 인간의 내적, 영적 자아인 아담이 인간의 외적, 물질적, 실용적 자아인 하와로 인해 나쁜 길로 빠진 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통일된 묵상의 직관에서 추락하여 세상에 기반을 둔 다중적이고 복잡한 상태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마구 휘둘리고 있습니다. 객체로 가득한 세상에서 또 한 명의 유랑자가 된 것입니다. 각 객체는 인간을 현혹하여 속박할 수 있습니다. 중심이 더 이상 하나님과 자기 내면의 영적 자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제 인간은 마치 자기가 신인 양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인식해야 합니다. 일종의 반(半) 객체로서 스스로를 연구해야 하며, 그 객체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때 소외당함으로써 겪는 좌절을 보상받으려고 애쓰다 보니, 자기와 똑같은 타인들을 희생하여 자기를 흠모하고 채우려 듭니다. 우리 모두를 포로로 가둔 사랑과 증오, 갈망과 두려움, 거짓말과 변명 같은 복잡하고 고통스런 그물(網)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순간의 환각에 불과한 일시적인 것들이나 영적 차원에서 보자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것들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 내면의 참된 '얼굴'을 볼 수 없고, 영과 하나님 안에서 자기 정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용기와 믿음을 상실했습니다. 용기와 믿음이 없으면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딱하게도 자기 관찰과 자기주장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참자아에서 철저히 추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내적 자아 안에는 공격적인 자기 주장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사랑과 진리만이 실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과 자신의 내적 자아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외적인 것에서 하나님과 행복을 찾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사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하나님과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과 점점 더 멀어지고, 결국 하나님을 닮은 내면의 모습도 잃고, 하나님의 성소인 자기 집에 들어갈 자유도 잃었습니다.

우리 모두 낙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회복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고, 잃어버린 지혜를 되살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길은 하나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비유 속의 여자처럼 하나님이 친히 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신인(神人)이신 그분 안에서 인간은 인간의 자신을 잃고 하나님의 자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무한한 사랑의 모형과 증거를 남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적인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외적 자아는 소멸되고 내적 자아가 믿음으로써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을 바라며' 살아야 합니다. 영생을 맛보아야 합니다.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2)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버지의 광채요 형상이신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신 성령 안에서, 모든 실존의 근원이요 기초이신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귀환은 외적 자아가 죽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정화되고 새로워진 내적 자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 삶을 얻고 또 그분의 지혜를 배우는 종교입니다. 예수 안에서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실체의 기초이자 존재의 거점이 되는 순전한 실체의 무한한 심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의미와 모든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명과 기쁨의 가장 깊은 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잊고 자신의 영 안에서 낙원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와 연합함으로써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 즉 또 다른 그리스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숨어 계신 성령께서 기적처럼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여된 힘과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성령이시되 이름이 아버지이십니다. 아들도 성령이시되 이름이 아들이십니다. 성령의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십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데려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와 연합시키실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은밀한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취하시지 않을까요? 입에 올리기에도 황송한 그분의 이름이 곧 우리 이름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정체를 그분에게 계시 받는 순간 우리는 성령의 이름을 직접 알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으나 답할 수는 없습니다.
묵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육신 교리를 아주 세밀하게 탐구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두고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객관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개신교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론과 실체적 연합(hypostaticunion,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진리 -역주)에 담긴 세부 사항은 합리주의에서 주장하듯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의지를 지배하려고 만들어낸 권위로 똘똘 뭉친 그물이 아니었습니다. 교부 시대 신학자와 일반 그리스도인 모두 성육신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확히 정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오류가 있을 경우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신앙생활이 비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3)가 한때 정통 그리스도인들의 수를 앞지르는 거대 다수였던 아리우스(Arius)파에 맞서 예수님의 신성을 그토록 고집스레 변호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를 통해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망상일 수밖에 없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성육신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고전 15:14-15)

대체 이 부활 신앙이 묵상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인간 본성을 영적 상태로 완전히 회복시켰습니다. 아울러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 신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안의 내적 자아가 성령의 힘으로 깨어나 변화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참 자아를 발견할 뿐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 계신 구주가 우리 안에 임재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측면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도 신인(神人)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살아 존재하실 수 있는 것도 신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참 인격적 자아일 뿐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신비한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성자 하나님의 창의적 자유를 부여받게 됩니다. 또 저마다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될 수 있고, 그분처럼 신성을 지닌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그분의 영적 권위와 카리스마적 능력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한 소수파 그리스도인 가운데 묵상가인 사막 교부들이 제2위의 신성과 말씀의 성육신을 믿는 신자 집단을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정통 교부들과 더불어 아타나시우스가 성 이레나이우스(Irenaeus)에게 빌려와 선포한 다음 신조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되게 하시고자 인간이 되셨다"

말씀은 아버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인류를 그분 발아래 엎드리게 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처럼 인간이 되려고, 그리고 자신의 인격 안에서 인간을 하나님께 연합시키려고 오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함으로써 곧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입니다. 하지만 단지 인간을 하나님 앞에 법률상 유리한 입장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을 하나님으로 승격·변화·변모시키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인간 안에 계시되고, 모든 인간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성경 곳곳에 이 놀라운 이야기가 명확히 기술되어 있음에도 그리스도인은 물론 신학자들도 대부분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실체적 연합, 곧 신인이요 말씀의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는 신비는 가장 혁명적이고 실존적인 실체의 진리였을 뿐 아니라 모든 존재와 모든 역사의 핵심 진리였습니다. 이는 다른 모든 것의 의미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습니다. 인간,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 안에서 인간의 활동, 역사, 세계, 우주 전체 등의 내적, 영적 의미가 그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인격이신 예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따라서 말 그대로 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생각과 행동, 무엇보다 존재 자체에 신성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 안에서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한 한 인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성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서도 의식과 존재는 초월적이고 신적 차원에 계십니다. 그분의 의식과 존재는 하나님의 의식이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는 우리의 모든 표현력과 상상력을 초월하여 존재하시지만, 신인 것 못지않게 진정한 인간이십니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는 분열이 없습니다. 지상 생활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사이에는 조금도 균열이 없었습니다. 물론 두 속성은 구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우리 몸과 영혼이 우리 안에서 완전히 하나이듯 그분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입니다.

기독교 묵상 신학을 바로 이해하는 첫걸음은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똑같이 중요한 인간 자신 안의 연합을 전제로 합니다. 영혼과 몸은 선악의 원리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악한 물질적 원리의 지배에서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육신 또한 영혼만큼이나 우리 자신입니다. 몸과 영혼이 따로 떨어져서는 온전한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분의 육체적인 생명과 존재와 행동은 그분 영혼의 생각과 뜻만큼이나 그분 자신이었고, 또 신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갈릴리 길을 걸으신 예수는 허구 인간도 아니었고, 참 인간으로서 잠깐 신(神)을 대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을 걸으신 인간은 친히 하나님이셨습니다.

증거자 성 막시무스(Maximus)4)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로 표현 못할 수태의 순간 우리의 모든 속성을 친히 입으신 초(超)본질적 말씀에서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 아닌 모습이란 전무했다.‥‥ 이런 지식은 증명할 수 없고 이해를 초월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높이는 자들의 믿음으로만 지각된다. (Ambigua, Patrologia Graeca, 91. 1053)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의 신비에는 성경의 수수께끼와 상징들의 모든 의미, 이해할 수 있는 가시적 창조물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 십자가와 무덤의 신비를 아는 자는 만물의 이치(로고스)를 안다. 부활의 숨은 의미를 터득한 자는 하나님이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을 안다. (Centuriae Gnosticae, Patrologia Graeca, 90.1108)

성육신 이후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창조된 속성 위에 ‘자연적 질서’가 덧입혀졌을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속성 자체가 초자연적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령으로 내면에 임재하고 활동하시는 모든 사람 안에는 더 이상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이 없습니다. 자신 안에 거하시는 예수의 은혜에 따라 사는 사람은 이 경우 또 하나의 예수로, 하나님의 아들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육신의 효력과 기적을 자신의 삶에 적용합니다. 성 막시무스의 말에 따르면 "언제나 하나님은 합당한 자들 안에서 친히 인간이 되려 하십니다."(Quuaestiones ad Thalassium, Patrologia Graca, 90.321)

그러나 분명히 그리스 교부들은 그것이 우리의 평소 생활보다 한 차원 높고 고결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씻김 받고 해방된 삶, 초자연적 묵상으로 깨우침을 얻은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는 우리 영혼과 몸을 점령하셨고, 세례를 통해 신성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금욕과 사랑, 묵상을 통해 계발되지 않는다면 예수의 신성은 깊이 잠든 채 숨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변화되는 과정을 삶 속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말씀이 인간수준으로 '낮아지기' 위해 그 신성과 초월적으로 귀한 신분을 '스스로 비우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처럼 되려면 인간적인 모습을 스스로 버려야 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취하신 우리의 인간적인 부분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취하시지 않은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부분은 신성을 부여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이란 무엇인가요? 외적·자기 중심적 갈망에 집중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자기주장과 탐욕과 정욕, 내면의 참 자아에 피해를 입히는 피상적 ·허구적 자아의 생존 및 영존(永存)욕구 등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져' '새 사람 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 18)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비록 묵상이라는 단어가 이런 특정 의미로 언급되지는 않아도 신약성경 어디에서나 묵상이 빛어내는 심오한 그림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영적으로 접촉함으로써 속사람이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접촉 첫 단계에서 '보이지 않는' 실체를 대면하게 되고,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봄으로써 우리의 생명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 닮기, 곧 '아들 됨'을 통해 가능합니다. 또 예수를 우리의 내적 자아, 곧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성령이 함께함으로써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새 생명과 자비와 신의 사랑이 충만히 넘쳐흐릅니다. 아울러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삶의 신비로움을 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의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기독교의 묵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이 근본 개념은 나중에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묵상에 반드시 동참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묵상은 실체적 연합인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에 영적으로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예수의 영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교리이기도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4-16)

넓게 보면 우리의 내적 자아에 존재하는 이 '성령의 증거' 가 곧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적 묵상'입니다.
묵상의 삶은 영혼 깊은 데서 성령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서에서 묵상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본문 몇 곳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이며, 또 성경에 쓰인 대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결국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요10:30, 36~38)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6)……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25)……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26)……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42)……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4)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55)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58) (요 8:12~5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요 14:6~10)

이 말씀들은 지난 20세기 동안 아주 명백한 의미로 동일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음으로써 기독교적 묵상이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아득한 천국에 계신 그분과 우리 사이에 생긴 간격을 어떻게 메울 수 있겠습니까? 답은 아버지께서 주신 복음이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가 되어 주며, 예수께서 우리 세상 속에 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자연에 내재하시지만 거기서 나아가 세상의 구주, 구속자, 사랑으로서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요지는 그분의 우주 안에서 그분과 접촉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어떻게 영접할 수 있을까요?

그는 믿음을 답으로 내놓았습니다. 권위에 복종하는 형식적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세상에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우리 자아 전체와 삶 전체를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헌신은 보이지 않는 인격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은 그 선물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말씀과 우리 마음, 영, 삶의 연합은 성령으로 효력을 발합니다.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유언인 최후의 만찬 강화에5) 명백히 나타납니다. 첫째, 주님의 육체적 임재와 새롭고 더욱 친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임재를 구분합니다. 전자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제자들과 거하시는 동안 그들과 친숙해졌던 임재이고, 후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그분 나라를 세우실 때 취하신 임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3)……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 16:7, 13~14)

이 말씀은 요한일서를 덧붙여 설명하면 완성됩니다.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요일 2:20, 27)

이렇듯 성령은 우리에게 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선물(Domum Dei altissimi)입니다. 성 도마의 말대로 그분은 진정 우리의 소유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자신의 영이 되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적·신적 자아가 되며, 성령의 임재로  감화 받음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로 행동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그분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변화됩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서신서에 분명히 나타난 대로 성령은 초자연적 질서 속에서 사랑하시고 활동하시는 인격적 원동력입니다. 그 힘이 우리에게 임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관상의 삶은 인간적 기술과 훈련이 아니라, 영혼 깊은 데서 성령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관상가의 본분은 자기 삶에서 천하고 시시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려면 겸손과 순종, 자기 불신, 분별력을 훈련해야 하며, 무엇보다 믿음을 꾸준히 훈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모든 회심자들이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대로 살기를 바랐습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 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7, 10~12)

이것은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 관상에 관한 증거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내적 자아의 증거를 통해서만 자신을 알듯이 하나님도 당신 영의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영 덕분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실체와 임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은 우리의 내적 자아와 긴밀히 연합되어 있으며,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존재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로 만듭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위 성경 본문을 비인격적 의미로만 대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성령은 먼저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이어서 교회로 전해졌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잘못된 교리와 도덕관념으로부터 교회를, 그리고 특히 사도들의 계승자를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은 교회 각 개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각자의 초자연적 운명으로 이끄시며, 눈을 열어 자기 삶 속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의 신비를 보게 하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 강화에서 구주는 계속 한 주제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 안에 성령으로 사시려고 세상의 육신을 거두어 그들을 떠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어떤 추억이나 귀감으로 남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사들을 통해 그저 멀리서 그들을 인도하고 통치하실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충분히 모든 자연 세계를 무한히 초월하실 수 있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성육신으로 메워졌고, 우리 안에서는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메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임재하십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생생히 임재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적 자아에 성령이 임재 하셨으니, 외적이고 이기적이며 허구적인 자아에 대한 집착만 벗어버리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발견이란 바로 영적 체험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신 성령은 이런분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 14:26)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요14:21, 2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지식과 사랑은 복 있는 자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복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영생이란 아버지께서 보내신 주님과 말씀 안에서 우리를 아버지와 연합시키시는 성령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보내심' 또는 사명으로 집중됩니다. 묵상은 아들과 성령의 사명을 의식적·체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생명으로만이 아니라 빛으로 보내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안에 '영접된' 말씀을  충만히 아는 지식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타자(他者)'로, 신(神) '당신'으로 알고 우리 영의 모든 존재가 그분을 향하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내면의 '나'와 긴밀하게 연합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보다 더 참으로 우리의 자아가 되십니다.

관상하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성삼위일체와 말씀의 성육신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예수를 아는 긴밀한 지식에서 무한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관상가의 기쁨은 온전한 연합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요 17:22~23)

 이 숭고한 삶의 씨앗은 세례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심겨집니다. 하지만 결실을 거두려면 씨앗이 자라고 발육해야 합니다. 자기 몸 안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품고 살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전혀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자기 정체를 모릅니다. 자신과 자신의 참된 존엄성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안타깝게도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 성격이 폭력과 기교, 정욕과 탐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영혼에 심겨진 관상과 거룩함의 씨앗은 그저 잠만 잘 뿐입니다. 싹을 틔우지 못하니 자랄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화(聖火)의 은혜가 그들 영혼에 깃들어 있기는 하나, 그것이 흘러 넘쳐 그들의 기능과 지식과 의지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영혼들에게 자신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 양쪽에 발을 디디고 서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 자아 안에서만 편안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더 깊은 내면은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영혼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두면서도, 생각과 갈망은 환각과 욕망을 좇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한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비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에 눈을 뜨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들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관상의 선물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단, 받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주어지지만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거부될 것입니다. 성 토머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요한복음(14장) 말씀을 주해하면서 둘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관상은 사람이 '세상'에 속하는 만큼 비례하여 거부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이신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대로 "동일 주제 안에 두 반대 명제가 동시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성령과 그분의 사랑을 받고자 자신을 준비하려면 세상이 내놓는 야망과 외적인 활동, 일시적 관심사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세상적인 것들을 비우지 않는 한 영적인 것들을 분별하거나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퀴나스는,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알고자 갈망하지 않으므로 성령 또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을 시시한 것들로 채우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갈망은 관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갈망 없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 선물들을 절대 받지 못합니다. 아퀴나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실제로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다만 얼마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연합을 갈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소외된 인간, 외적 활동과 일시적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그리스도인은 관상을 갈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관상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발견하는 길은 체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선하신 분임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아퀴나스는 세속적인 자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미각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환자의 혀가 진미의 맛을 모르듯이 ‥‥ 세상의 타락에 감염된 영혼도 천국이 주는 기쁨의 맛을 모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성스러운 인생관과 세속적 인생관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이라는 단어는 너무 애매합니다. 단지 우리 주변이나 창조된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우주는 악하지 않고 선합니다. 그러니까 나쁜 의미의 세상은 분명 우주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일부 기독교 신플라톤주의 저작에서 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에쿨룸(saeculum)이란 일시적인 것, 변하고 순환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기독교에 스며든 플라톤 학파와 영지주의 영향 탓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타락한 천사들('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우주를 운행한다고 설파했습니다. '세속적'이라는  형용사는 '세상'과 '세기(世紀)'를 동시에 뜻하는 라틴어 사에쿨룸에서 왔습니다. 어원은 불확실하나 아마도 '바퀴'를 뜻하는 헬라어 쿠클론(kuklon)과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사이클(cycle)'도 거기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세속적인 것이란 무한히 반복되는 사이클로 빙빙 도는 것입니다. 세속의 지평은 구태의연하게 끝없이 되풀이 합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4~6)‥‥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9). (전 1:4-9)

이 생의 모든 실존은 변하고 반복됩니다. 그것만으로 세속적 실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늘 새로워 보이지만 실은 매번 똑같은 '사이클'에 완전히 자신을 맡길 때 인생은 세속화됩니다. 세속적 삶은 새로움과 변화라는 환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환각은 우리를 자신의 무(無)에 대한 묵상이라는 원점으로 자꾸 다시 데려다 놓습니다. 세속적 삶은 온갖 새로운 일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삶입니다. 세속적 희망은 아낄수록 우리를 더 실망시킵니다. 실망이 커질수록 우리는 이전보다 더 거창한 새 희망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를 저버립니다. 결국 헤어나려다 허탕만 친 그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망도 없고 사업도 없고 전환도 없고 연구도 없이 완전히 편안한 상태보다 인간에게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럴 때 인간은 자신의 무, 자신의 허위, 자신의 부족, 자신의 의존성, 자신의 약함, 자신의 공허를 느낀다. (「수상록」131)

세속 세상은 파스칼이 말한 '전환(우리의 고뇌를 달래주는 마취 기능이 무엇보다 우선인 활동)'에 매달립니다. 모든 사회에는 '세속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세속 세상은  순수하게 자기를 벗어나는 정도에서 만족할 줄 모릅니다. 갈수록 사회는 불의와 악, 심지어 범죄를 추구하면서까지 만족을 구합니다. 하지만 이는 아무리 수위를 높여 간다 해도 절대 채워질 수 없는 중독과 같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무익한 사업이 번창합니다. 생산업자들은 원자재 확보를 위해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 뒤에는 허무주의와 절망이 남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집니다. 그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지만 결국 맹목적인 전체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이제 우리 세상은 '전환'을 위하여 자체 폭발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원자(原子)시대는 세속주의가 성취한 최고의 경지입니다. 즉, 세속주의의 참 뿌리는 불경(不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과 속은 두 종류의 의존을 보여줍니다. 세속 세상은 전환될 상태와 자기 무에서 벗어날 상태에 의존합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고, 증식에 의존하며 그러고는 그것을 '채우는' 척합니다. 따라서 세속 세상은 인간의 자유를 높이는 척하지만 실은 인간이 자기 의존 대상의 노예가 되는 세상입니다. 세속 세상에서는 인간 자체가 소외되어 인격이 아니라 '물건' 이 됩니다. 자기 밖에 있는 자기보다 낮은 것에 의해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끝없이 커져만 가는 자신의 필요, 초조, 불만, 불안,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죄책감에 지배당합니다.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다 결국 더 큰 허위에 빠집니다.    반면 성스러운 사회의 인간은 자기보다 낮거나, 자기 밖에 있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실 때에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上)만이 아니라 우리 안(內)에도 계신 까닭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해방시켜 안에서부터 그분과 연합하도록 키우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바깥의 피조물에 의존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피조물을 사용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피조물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성스러운 사회는 천국 말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성(天城)은 이 지상에서도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희생적 사랑이나 자비와 긍휼, 거룩한 이타적 동정으로 연합된 사람들이 형성하는 사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은 쾌락이나 만족을 버림으로써 '전환' 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 결과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여력이 생기고, 그들의 도움으로 타인들도 자유를 얻고 자기 내면의 진리를 구하여 지상에서 제 운명을 다할 수 있게 됩니다.

이미 말했듯이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사회라 해도 어느 정도는 세속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이 살아 있는 이 땅에서 온전한 천성을 이룩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로는 성스러운 세계의 상징적 표현이 인간의 손을 거치면서 의미가 혼탁해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성만찬에 임할 때 하나님의 성육신한 말씀과 신비한 접촉을 구하기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기 불안을 덜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장 성스러운 실체들도 이런 식으로 격이 떨어져, 성스러운 특성을 전부 잃지는 않으면서도 세속적 '전환' 의 쳇바퀴에 끼일 수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참으로 성스러운 태도는 혼자 남았을 때 우리를 공격해 오는 무(無)의 의식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와 어둠 속으로 담대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무를 그분의 성전으로 바꾸셨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의 빛이 우리의 어둠 속에 숨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스러운 태도란 자신의 내적 공허함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경과 경외하는 마음과 신비감을 품고서 그 속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내면생활의 가장 중요한 발견입니다. 외적 자아는 자기 너머와 자기 위의 세계를 두려워하여 물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적 자아의 공허하고 어두운 듯한 모습을 겁냅니다. '전환'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 안의 가장 참되고 직접적이고 진정한 부분을 외면한다는 사실입니다. 삶과 경험 자체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환에서 빠져나와 외적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직접적인 인생 경험에 맞대면하려면 큰 용기와 영적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로(성 토머스는 이것을 두려움의 선물 또는 성스러운 외경이라 했다) 자신의 내적 자아를 진공 상태가 아닌 무한한 심연으로, 비움(空)이 아닌 가득 채움(滿)으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를 두려워하고, 불안과 빈곤, 권태를 두려워하는 한, 곧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한 이와 같은 시각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안에서 나 자신만이 아니라 그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때 우리의 무는 그분의 전부가 됩니다. 이는 소통과 겸손에 의해 해방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재능이나 통찰력이 아닌 사랑과 신뢰로 자신을 쏟아내며 슬픔을 경험해야만 가능합니다.

성스러운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태도는 본질상 묵상적이며, 세속적 태도는 본질상 활동적입니다. 사랑에 기초한 성스러운 활동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활동도 묵상을 지향하는 한에서만 성스럽다는 것입니다.

인생관이 세속적인 사람은 언뜻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미워합니다. 그는 자기와 함께 또는 자기 곁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해 자기를 미워합니다.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먼저 내면의 외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의 외로움과 빈곤에 저항하다 그만 교만해지고 맙니다.

교만이란 외적 자아가 외적 자아에만 고착되어 자아의 다른 요소들을 모두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요소들의 책임까지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허해 보이고 불확실하며 대체로 어두움과 무지의 특성을 지닌 내적 자아를 거부하는 것도 그에 포함됩니다. 이렇듯 교만은 거짓되고 교활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날조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이 환상을 지키기 위해 수고를 쏟아 붓는데, 그 과정에서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된 노력은 우리 존재를 소진시키고 파괴할 뿐입니다.

성스러운 태도와 내적 자아의 수용 사이에는 미묘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무지한 자아를 수용하다 보면 우리 내면의 신성한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성스러운 외경은 환각이 아니라 영적 에너지가 우리 안에서 움직인다는 표식입니다. 우리 안의 내적 자아가 하나님의 초월적·비가시적 능력으로 화해하고 재결합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겸손, 즉 우리가 거부하고 무시해 왔던 내면의 모든 것을 온전히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내적 자아는 죄를 인정함으로써 정화됩니다. 내적 자아가 죄의 온상이어서가 아니라 외적 자아가 우리의 죄와 내면성을 동시에 부인하여 똑같은 어둠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적 자아에 빛이 들면 죄가 표면에 떠오르면서 슬픔의 시간을 거치고 죄책감을 통감함으로써 청산됩니다.

이렇듯 '성스러운' 시각을 지닌 사람은 자기를 미워할 필요가 없으며, 외롭게 남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외로움 안에서 평안하고, 또 그것을 통해 하나님 임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외로움에서 벗어나 타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타인을 대할 때 상대의 죄를 생각하며 정죄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상대 이면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인 순수한 내적 자아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스러운 시각을 지닌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고, 또 타인이 그들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도울 줄 압니다. 그들의 두려움도 일부 덜어주고, 또 그들 자신을 잘 참아내도록 도와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내면이 평온해지고 자기 빈곤의 심연 속에서 하나님을 볼 줄 알게 됩니다.

영적 생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두운 곳에 숨은 자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자기 안의 모든 악과 동일시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활동의 악한 성장과 영혼의 선한 터를 구별하는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또 그 터에서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잘 닦아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스러운 태도란 내적자아를 인식할 때 우리 안에 생겨나는 신비 앞에서 경외하고 침묵할 줄 아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무지 안에서 침묵하면서 희망과 기대 등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실체와 삶 자체의 흐름입니다. 이렇듯 성스러운 태도는 실체가 어떤 형태로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깊이 존중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세속적 태도는 실체를 철저히 멸시합니다. 세속적 사고는 자신의 조잡한 틀을 오히려 실체에 강요하려 듭니다. 세속적 인간은 편견과 선입견과 한계에 묶여서 살아갑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편견으로부터 이상적으로 자유로우며, 삶의 새로운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합니다. 굳이 '이상적'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믿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외적 자아 안에 군림하는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이며, 새로운 로고스에 대한 선입견입니다. 전혀 영적이지 않은 데다 전적으로 외적 자아에 얽매인 채 관습과 편견에 휘둘리는 경직된 신앙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잘 순종하고 유순한지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뜻과 실천적으로 연합하는 것이야말로 관상적 인식에 꼭 필요한 단계임을 밝히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15~16, 21)

이어 예수님은 완벽한 최종 시험, 참사랑의 증거를 덧붙이셨습니다. 관상가와 세상에 속한 사람, 성도와 그저 그런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결정적 요건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 14:23~24)

하나님 뜻에 전폭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영적 세계를 맛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사랑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성 토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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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마스 머튼, 윤종석 역, 묵상의 능력(The Inner Experience), (서울, 두란노, 2006.) pp. 25~60.
묵상은 번역자가 묵상이라 번역하였으나 앞부분은 묵상이 옳으나 중간 뒷부분은 관상이라 함이 옳다. 중간 이하는 관상이라 수정하기로 한다

2) 머튼이 요한복음 17:3을 풀어쓴 것이다.
3) 성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 373 사망)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를 대항하여 니케아회의를 강하게 옹호했다.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아리우스 교파 반박 강론(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등의 명저서가 있다.
4) 증거자 성 막시우스(St. Maximus the Confessor, dir 580~662)는 칼세톤 회의의 가르침을 옹호하고 발전시킨 비잔틴 신학자였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특히 동방의 수도원 진영에서 추앙되었다.
5) 묵상의 능력에 『관상이란 무엇인가?』 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관상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성구들이다. 그리고 이글 들은 머튼의 저서 『명상이란 무엇인가?』에서 가져 왔으며 『명상의 씨』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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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100가지,50가지 좋은 머리를 만드는 100가지 방법 최용우 2009-04-14 2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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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 100가지,50가지 100살 까지 건강하게 사는 100가지 방법 최용우 2009-04-14 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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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 100가지,50가지 日本人이 본 韓國人의 특징 100가지 최용우 2009-04-14 2709
1434 100가지,50가지 나의 장점 100가지 최용우 2009-04-14 4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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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 100가지,50가지 스트레스를 푸는 100가지 방법 최용우 2009-04-14 3781
1430 100가지,50가지 식욕을 줄이는 100가지 방법 최용우 2009-04-14 2773
1429 100가지,50가지 아이를 사랑하는 100가지 방법 최용우 2009-04-14 2574
1428 수도관상피정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함 ; 신비가들의 길 (커밍험) 최용우 2009-04-13 3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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