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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평강

빌립보서 조용기............... 조회 수 1971 추천 수 0 2009.04.09 14:5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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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4:6-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3년 12월 14일 주일2부 설교(여의도순복음교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 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개인의 행복은 마음의 평안에 있습니다. 어떠한 연유에든지 마음에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폭풍우가 불어 닥치면 행복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말에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와 국가도 평안이 없이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첫 세계는 평화의 세계였습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법죄하므로 평화는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는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고 무질서와 부조화와 분열과 다툼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평화의 왕으로써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고 화해와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1. 평화의 왕 예수님

첫째로, 우리가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평화의 왕 예수님이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 예수께서 임재하시고 다스리는 그곳에야 비로소 참 평화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로 19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 불화해서는 절대로 평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운명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담이 막혀서는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을 다 가져도 마음에 평화는 결코 찾아올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 ‘풍성한 은혜’라는 저서에서 그가 이렇게 참 평안을 발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어느날 나는 내 안에 있는 사악한 마음과 더러운 허물을 발견하게 되었고 내가 하나님께 품고 있는 적대감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고 고통을 하고 있을 때에 십자가에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신다는 골로새서 1장 20절의 말씀이 강하게 뇌리를 때렸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또 사람과 화목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자 그 영혼 속에 깊은 평화를 가질 수가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는 담은 죄밖에 없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아 놓은 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죄는 우리가 스스로 회개하고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이외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악의 담을 헐어버린 능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양과 도덕이나 고행 같은 것으로써는 우리의 죄의 담을 헐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출신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고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삶에서 참 만족을 얻지 못하고 늘 죄에 대한 죄책과 불안과 공포와 불만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농촌을 산책하다가 어느 한 농부를 보니까 너무나 얼굴에 평안이 넘치고 화평한지라 그 농부를 따라서 붙잡고 “여보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얼굴에 평화가 넘쳐 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늘 기도하고 교통하므로 마음에 이런 평화를 얻고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해서 마침내 성경을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속죄제물이 된 것을 알고 자기의 죄를 예수께 맡기고 보혈로 씻음을 받고 마음에 깊은 평안을 얻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 태어나 죄 중에 사는 인간은 불안, 공포, 무질서, 부조화, 분열과 다툼 속에서 평안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는 유일한 일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결코 평안하지 않습니다. 한 가정에도 부부간에 원수 되면 평안이 없습니다. 자식도 부모와 등을 돌리면 평안이 없습니다. 화목하기 전에는 결코 평화가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 영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반목하고야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는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마귀는 이 땅에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분열을 가져오고 가정과 사회 분열을 가져오는 원흉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할 때는 마귀를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합니다. 우울하고 기도가 하기 싫고 찬송이 하기 싫습니다. ‘왜 이럴까? 왜 이럴까?’ 그러다가 ‘아~ 마귀가 와서 누르는가보다’고 회개기도하고 마귀를 대적하면 순식간에 마귀가 떠나가고 하나님의 기쁨이 샘솟듯이 넘치는 것을 거듭거듭 체험합니다.
야고보소ㅓ 4장 7절로 8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20절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불안, 가정의 평안이 없을 때 우리의 생활에 잔잔한 평화가 사라질 때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서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와서 평안을 도적질하는 도둑으로써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참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가 주인이고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지만은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이 마음속에 예수님과 자기가 공동 주인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 늘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인생이 예수님과 공동주인으로 마음의 보좌에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어떻게 섬깁니까? 예수님과 나라는 두 주인을 섬기고 살아서 마음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바울 선생은 말했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청산된 것은 새 사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이제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종이요, 시종이요, 머슴이요, 일꾼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주님과 함께 주인 노릇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길 때 마음의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주인의 자리를 자꾸 빼앗고 주인과 다투면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우리가 주인과 다툴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단호하게 내 주인으로 모시고 내 인생을 그에게 내어 맡길 때 마음에 참 평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 노교수가 어떤 젊은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젊은이는 “첫째는 건강, 둘째는 사랑이고, 셋째는 물질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재능도 있어야 되고, 권력과 명예도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노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네. 자네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없네. 마음이 평안해야 몸도 건강하고 사랑도 할 수 있고 물질도 쓸 수 있고 권력도 사용하고 명예도 의미 있는 거라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평안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 발 앞에 내 자신을 항복할 때 넘치는 평안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둘째로,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치 말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를 만나시면 언제나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내 인생을 예수께 맡기면 예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예수께 맡기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나를 책임질 리가 없지요.
마태복음 11장 28절로 29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살지 말고 예수님께 드려야 돼요. 내 인생 내가 살겠다면 나는 과거의 짐, 현재의 짐, 미래의 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를 다 내가 짊어지고 끌고 가야 돼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니까. 그런데 내 인생을 주님 발 앞에 던져 버리고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내 인생을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시고 나의 모든 삶에 무거운 짐과 모든 일을 주님이 맡아 주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사람이 걱정하는 실제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걱정을 많이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날 확률이 40% 이미 지나간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걱정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걱정은 겨우 4%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릴리 풍파와 같은 풍파가 회오리치고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 풍파 가운데 인생이란 적은 배를 타고 경량에 부딪히기 위해서 이제는 좌절과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나요? 예수님을 깨워야 되는 것입니다. 운명과 환경은 예수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그 물을 퍼내고 바다를 잠잠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우리 손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밤이 다가오는 것,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어요. 폭풍우를 우리 손으로 막을 수 있어요? 우리가 가는 길 막힌 강과 바다를 우리가 메울 수가 있어요? 우리가 건너야 될 태산절벽을 없앨 수가 있나요? 운명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운명을 좌우할 예수님은 우리가 깨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 38절로 39절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를 깨우면 우리의 운명의 거친 풍파를 예수님이 잠잠케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는 잠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4장 40절로 41절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바람을 잠잠하게 하고 파도를 잠잠하게 할 수 있을까?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 없는 것을 꾸짖었습니다. “너희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 예수께서는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풍랑 속에 침몰하려고 하는 나라는 인생의 일엽편주(一葉片舟)에서 내 힘으로 배를 저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깨워 일으키십시오. 우리의 회개하고 자복하고 철야하고 금식하고 부르짖어 결사적인 기도로써 간절한 기도로써 주님을 찾으면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한 불쌍한 과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재판관에게 나가서 내 원수에 대한 원수를 갚아 달라고 그는 목메어 간절히 매달려 부르짖었습니다. 한동안 응답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그 불의한 재판관이 말하기를 “이 여자가 가주 와서 나를 괴롭히므로 내가 응답 해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말씀했다고 했습니다.
7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풍랑을 만났을 때는 마음에 평안이 오기 전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중지하지 마십시오.
1912년 4월 어느 주일 밤이었습니다. 한 미국인 부인이 죽음에 사로잡혀 도저히 히득거리고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그만 잠자기를 일어나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기도는 안나오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사업을 하고 난 편이 타이타닉 호를 타고 오는데 남편 위해서 기도가 나오는데 자기 생각에 어리석게 보입니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이 만든 세계 최대의 여객으로써 타이타닉 호에 탄 사람은 아예 보증수표 같은데 내가 왜 남편을 위해서 기도할까? 그러나 남편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생겨서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저녘에부터 기도한 것이 시벽 5시까지 계속해서 몸부림치며 남편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는데 5시쯤 되니까 마음이 편안해 잤습니다. 바로 그가 기도하는 그 시간에 타이타닉 호는 거대한 얼음산에 부딪혀서 난파되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 남편은 가라앉는 배에 매달려 있다가 배가 물속으로 들어갈 때 “여보~ 잘 계세요. 이 지상에서는 당신하고 이제는 하직합니다. 하나 가라앉았는데 누가 밑에서 확 밀어 주는 것 같아서 물속에서 확 올라오니까 마침 손에 잡히는 것이 앞에 있는 고무보트라... 그 고무보트를 잡고서 기어올라 탔는데 팔에 찬 시계를 보니까 아침 5시야. 그 부인의 쉬지 않고 부르짖는 기도가 그를 구출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평안이 다가올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중간에 하다가 말면 안돼요. 기도는 싸움입니다. 운명과 환경에 대한 싸움을 하고 있는데 중간에 그치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까? 평강이 내 마음속에 다가올 때까지 이 미국 부인처럼 계속해서 부르짖어 기도하면 승리는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평강

셋째로,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릴리 호수의 평화는 자연적인 것이 아닌 기적적인 것입니다. 갈릴리에 풍파가 불어온 것이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 진 것은 기적적인 것이었지 우연히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강은 기적적인 평안입니다. 도저히 나의 인간으로 계산할 때 내 현재의 일이나 환경이나. 미래나 모든 것이 평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기적적인 평화가 와서 내 마음을 점령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군대가 둘러싸듯이 평화가 나를 둘러 진 쳐 버리고 불안할래야 불안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수양으로 닦은 평안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처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에는 군대가 와서 우리를 지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양과 도덕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변화되어야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주님이 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고 가시밭을 지나면서도 환경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마음에 평화가 다가와서 점령해 버리는 것입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생활하는 것은 먼저 마음에 일어난 것이 환경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에 일어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너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들어오고 나면 환경에 평화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로 17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가 와서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서 평안이 마음에서부터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변해야 편안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화로 말미암아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모든 염려와 공포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내가 이번 일본에서 집회 할 때 한 사업가가 내게 아주 근심어린 얼굴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사업상 어려움에 처해서 일본 검찰에 조사를 받고 잘못하면 구속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보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안 통할 수는 없어요. 인생을 살면 적고 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게 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할 때 다가오는 마음의 불안, 초조, 좌절, 절망, 고통은 아무도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꼭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는 목자시오. 우리는 양이기 때문에 목자가 결코 양을 사망의 골짜기에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만은 목자를 바라보십시오.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사망을 생명으로 음침함을 광명으로 변화시키고 그의 지팡이로 건져 주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처서 보호하여 주십니다. 이 예수를 붙잡으면 그 불안, 초조, 절망, 고통, 번뇌에서 해방되고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장식품이 아닙니다. 무슨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목자로써 우리가 크고 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 때에 같이 하십니다. 지팡이와 막대기 없는 목자 보셨습니까? 지팡이와 막대기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어느 곳에 가도 양을 인도하는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우리에 다가올 때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오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우리를 건져 내고 막대기는 원수를 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께 의지하면 흑암은 광명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불안과 고통은 평안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마른 우물에 빠져 발가벗고 고통하고 벌벌 떠는 요셉보고 우리가 이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답니다. 형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벌거벗겨서 지금 메마른 우물 속에 던져서 고독하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이대로 형들이 떠나면 여기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데 합동하여 유익이 된다면 요셉이 뭐라고 했습니까? “정말 믿어도 될까요?” 그러나 결국에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13년 후에는 모든 것이 합동하고 유익을 이루어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주를 사랑하고 주를 의지하고 주로 목자로 삼은 사람은 종국적으로 주님은 모든 것이 합동하여 유익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평화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한 청년이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겨서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비행기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다 위를 통과할 때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막 비행기 밖의 창에서 비가 창대같이 때리고 “다다다다닥”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비행기는 좌우로 막 기우뚱거리고 올라갔다 떨어졌다. 청년은 처음 비행기를 타니까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함을 치고 스튜어디스를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 죽지요? 이제 우리 죽지요?” 스튜어디스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지금은 폭풍우를 뚫고 가지만은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서 얼마 있지 않으면 성층권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 일반 기후를 뛰어 넘어서 그 위에 성층권이 있습니다. 성층권은 언제나 온도가 똑같고 기후의 흐름이 편안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갈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얼마 있지 않다가 비행기는 점점 고도를 높여서 구름을 뚫고 햇빛이 쨍쨍 보이는 성층권으로 들어가니까 스튜어디스가 말한대로 편안하고 고요하게 비행기가 순항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우리 마음에 성층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만지는 이 세계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이 다가오고 환란과 슬픔이 다가오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이 성층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익 있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되면 그곳에는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날개타고 날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우리를 영적인 성층권에 들어가서 평안이 날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면

넷째로,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면 어떤 폭풍우도 겁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내 운명과 환경에 어떻게 거친 폭풍우가 와도 마음에 평화가 그를 능히 이기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17살 먹은 초립동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장수 골리앗 앞에 나갈 때 그가 떨었나요? 사울도 떨고 이스라엘 백성 모든 군인들이 삼발 사발 떨었을 때 다윗은 마음이 담담했습니다. 그는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골리앗을 향해서 오늘 야웨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내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웨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웨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 시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야웨 하나님을 알고 마음에 평안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담대함을 잃은 것은 평화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하고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여러분 운명과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병이 들은 사람도 기도원에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 다음 마음에 평화가 넘쳐나면 암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떠한 병도 두려워하지 않고 할렐루야 고함을 치고 나았다고 고함치고 내려오는데 대게 다 나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평화가 있으면 마음에 담대해 지지요. 파사 왕 다리오 때 다니엘이 모함을 받아서 사자굴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가 왕의 명령대로 한 달 동안 아무 신에게 절하거나 기도하지 말고 왕에게만 기도하고 절했으면 감옥에 들어갈 필요 없습니다. 그 명령을 알고서도 그는 마음에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다니엘은 평안이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나는 주님께 다 맡겼다. 그 마음에 평안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집에서 동편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만군의 야웨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소하는 자들에게 잡혀서 사자굴 속에 들어갔지만은 조금도 마음속에 평화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평화가 넘쳤든지 감히 사자들도 다니엘에게 범접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사자들이 덤비지 넘치는 평화가 그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사자도 덤벼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다가 예상치 않던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가 요동치고 흔들렸고 이 놀란 아내는 얼굴이 창백하게 되었습니다. 벌벌~ 그런데 남편은 걸상에 앉아서 책을 턱 읽고 편안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여보 여보~ 배가 지금 바람에 요동하고 파도가 쳐서 뒤집힐 지경인데 어떻게 당신은 두려워하지도 않고 이렇게 평안할 수 있소? 당신 좀 돌았지 않소?” 그러니까 남편이 자기 가방을 열더니만 이만한 칼을 끄집어 내 가지고 부인 가슴에다가 탁 겨눕니다. 부인이 칼을 왜 겨눠? “내가 이 칼을 휘두르면 당신 이 자리에서 죽을 수 있어. 겁 나오 겁이 안 나오?” 부인이 웃으면서 “겁 하나도 안나.” “왜 내가 칼을 들고 있는데 겁이 안나요?” “당신이 강도 같으면 내가 겁을 내지만 내 남편이기 때문에 칼을 아무리 겨누어도 절대로 안찌를 것을 알기 때문에 겁이 안 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웃으면서 그 칼을 가방에 넣으면서 “여보~ 이 폭풍우는 주님 손에 있어. 강도의 손에 있으면 우리가 떨어야 돼. 마귀의 손에 있으면 우리가 떨어야 돼. 우리의 인생은 주님께 맡겼으니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는 것이요. 그러므로 주님의 손에 있는 이 폭풍우가 아무리 휘저어도 우리는 겁내지 않는 것은 우리 주님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안 죽을 거요. 그러므로 편안하세요. 폭풍우 보지 말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세요.” 정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일어나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손에 안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장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면 아버지가 운명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박살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마음에 평안을 가지면 믿음이 그때 넘쳐나요. 믿음이란 불안한 가운데 믿음이 안 생깁니다. 평안이 있는 사람에게 믿음이 생겨요. 여러분 아브라함이 어떻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려가서 재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평안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평안과 확신 때문에 아들을 죽여 놔도 하나님을 살릴 것을 알고 아들을 묶어서 죽이려고 달려든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평안과 확신이 없었으면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평안이 강한 믿음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평안이 있는 자에게는 걱정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믿는 자에게는 죽으나 사나 겁날 것이 없습니다.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당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세계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세계를 예비해 놓은 것을 알았은즉 좋은데 가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두려울 것 없어요. 바울선생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봤다 내려오신 분입니다.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나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왔다고 그랬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오고 난 다음부터는 항상 하늘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차라리 이 몸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로마에 갈 때마다 바울선생이 순교한 곳에 가봅니다. 거기에 바울선생을 목을 벤 나무가 그대로 있고 바울선생이 목이 떨어져서 통통통 뛴 곳마다 샘물이 솟아났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나는 그때마다 마음에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바울선생에게 좋고 기쁜 날이었을까? 로마 사람들은 바울을 사형에 처하니까 그에게 가장 비극적인 날이라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좋아했을까? 왜냐, 그가 원수의 도끼날에 목이 잘릴 때 그는 그 몸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하나님 품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로 21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보석 중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이 평화는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주님밖에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를 가지고 이 평안은 얻을 수가 결코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명령입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왜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없으면 내 인생 내가 살면은 근심도 하고 두려워해야지요. 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못 짊어질 때 내가 일을 못할 때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지요. 그러나 내 인생 주님께 맡겨 버렸을 때 주님이 나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주님은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을 우리 다같이 함께 소리 내어 읽으십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 풍파 그치지 않습니다.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모든 면에 풍파가 잠잠할 때가 있고 거센 폭풍우로 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우리 마음속에는 평화의 성층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므로 우리에게 절대로 세상 풍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평화의 성층권이 있으므로 그 평화 가운데 주님과 함께 사는 우리들이 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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