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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묵상과 관상 <커닌험 & 이건>

수도관상피정 커닌 험............... 조회 수 3644 추천 수 0 2009.04.13 2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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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묵상과 관상
Lawrence S. Cunningham & Keith J. Egan, Christian Spirituality,
엄성옥 역, ?주제별 기독교 영성? (서울: 은성, 2004), pp.133~162.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눅 9:30)

예수님은 기독교의 기도의 본보기이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처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다. 그러나 기도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이 장에서는 기독교의 제자도와 제휴된 두 가지 형태의 기도, 즉 묵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의상 묵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일깨워주는 사려 깊은 기도요, 관상의 선물을 마련해줄 수도 있는 기도라고 묘사할 것이다. 관상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천부적이고 변화시켜주는 경험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수도사들과 사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거룩하라는 부름을 받는다고 주장했다.1) 성직자들만이 거룩하라는 소명을 받는다는 입증되지 않은 신화는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사랑과 거룩 안에서의 성장을 촉진한 수행(修行)들은 수도사들과 성직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는 신학자, 수녀, 사제, 수도사들에게 적합하다고 간주되었지만, 오랫동안 평신도들을 위한 묵상은 거의 장려되지 않았고,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관상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다.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초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묵상과 관상이라는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 기도는 이러한 도전에 대한 본질적인 응답이다. 기도, 특히 묵상은 하나님 탐색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사랑의 하나님은 그 사람을 한층 더 찾고 계시다"2)는 것, 그러면서도 제자도는 사람을 진지하게 하는 책임을 수반하는 진지한 소명임을 알기를 바랬다. 엘리오트(T. S. Eliot)를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은 "티 스푼으로 삶을 분배하는것"3)을 원하지 않는다. 진지한 신자들은 묵상할 방법을 찾는다. 종종 이러한 신자들은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 속에 돌입하시는 것을 경험한다. 다음과 같은 엘리오트의 시의 처음 다섯 행은 관상기도, 혹은 신비기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묘사한다고 생각되며, 나머지 행은 에이브러엄 매슬로우(Abraham Maslow)와 같은 작가들이 주목한 지고한 신비 체험과 흡사하다.

영원과 시간의 교차점을
이해하는 것은
성인들을 위한 일이다.
그것은 사랑과 열정과 사심 없음과 자기를 복종시키는
평생의 죽음 안에서 주고받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방치된 순간, 제철이 아닌 순간,
햇빛 속에서 상실된 분심,
눈에 보이지 않는 야생 식물이나 겨울철 번개
또는 폭포, 또는 매우 깊이 있게 들리기 때문에
전혀 들리지 않는 음악만 존재한다.
그러나 음악이 계속되는 한 당신은 음악이다.
이것들은 힌트와 추측에 불과하며, 힌트 뒤에는 추측이 따른다.
그 나머지는 기도, 준행, 훈련, 생각, 그리고 활동이다.
반쯤 추측되고 반쯤 이해된 선물이 성육신이다.4)

기독교인들은 묵상이 은혜를 입은 인간이 노력하여 행할 수 있는 것이며, 관상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것임을 발견했다. 그러한 탐색을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상적 연합이다. 제2차 바타칸 공의회 이후로 묵상과 관상하려는 자세를 포함하는 성숙한 영적 형성이 모든 기독교인의 소유라는 것이 인정되어 왔다. 거룩함을 향한 보편적인 소명의 인정은 수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이 관상을 행하고 경험해온 방법의 다양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 몇 년동안, 북아메리카의 제수잇들은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의 영신수련을 수도사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열심히 작업했다. 이그나티우스의 영신수련은 묵상하기를 원하면서도 끝없이 지엽적인 것들 안에 상실되지 않는 방법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20세기 전반부에 출판된 묵상서적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부족하며 현대의 일상생활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그나티우스는 복음서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지혜를 발견했다. 피정자들은 노련한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영신수련에 동조했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람들에게 묵상하며 관상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쳤다.

이처럼 묵상과 관상이 하나님을 향한 여정에 중요한 것이라고 받아들임으로써 학생들, 사업가, 노동자, 노인 등은 현대문화의 번잡함 속에서 묵상을 실천하며 관상의 은사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묵상과 관상의 회복을 목격한 이 시대에  묵상과 관상의 관계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종종 묵상은 “기독교의 보병(步兵)”이고 관상은 엘리트 기독교들만의 것으로 분리되곤 한다. 이 장에서의 목적은 묵상과 관상을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한 지속적인 여정의 일부로써 서로 창조적인 긴장 안에 보존하는 데 있다. 묵상과 관상은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기독교 영성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관상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묵상이 어떻게 준비해 주는지를 탐구해 보려한다.

기도와 삶은 하나의 기독교적인 도전-가능하면 완전하게 하나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이 지닌 두가지 측면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묵상과 관상은 기도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라는 부름을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묵상과 관상을 엄격하게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 묵상과 관상의 전통 안에는 현대 기독교인을 위한 어떠한 지혜가 포함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옛 전통

유대교의 묵상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라고 말한다.

여호수아서에서도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라고 촉구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

 여호와의 법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였고, 묵상은 그 율법 안에 계시된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묵상"이라는 단어는 haga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이다. haga는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것인데, 그것은 암송하는 사람에게 율법 / 단어를 보다 완전히 현존하게 만들어 준다. 암송하는 육체적인 행동은 그 단어의 적용을 촉진한다. 유대 인의 삶에서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활동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거나 묵상하는(haga)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추상적인 행동이 아니라 전인적인 행동, 즉 하나님의 말씀의 암송을 통해 하나님께 매료되는 행동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시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 심령이 궁구하기를"(시 77:6)

유대교의 묵상은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와 하나님의 축복 받기를 원하는 갈망을 기억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 143:5-6; 시 77:11-12도 보라).

haga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억하고 회고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그 메시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동방의 종교에서 만다라나 거룩한 주문을 외우는 것과 흡사하다.5) "haga는 이슬람교에서 계속하여 신의 이름들을 암송하는 관습인 dhikr와 비슷하다."6) dhikr는 신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위대한 종교들이 실천하는 이러한 관습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안내한다. 사람들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시와 사랑에 완전히 복종한다. 복종은 이슬람의 기도와 묵상의 전통의 일부이다.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에 hαgamelete로 변역되었는데, 그것은 묵상이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강조했다. 묵상은 존재의 중심인 마음속으로 내려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 아래서 보다 완전히 살 수 있게 해준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네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시 49:3). melete는 묵상을 형식적인 절차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라틴어 성경은 haga/meletemeditatio라고 번역했다. 이 라틴어는 묵상을 배우가 대사를 외우는 것이나 군인의 군사 훈련과 같은 훈련이나 실천으로 묘사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거나 묵상하는 것은 hagamelete의 전통을 계승한 관습이었다. 모든 종교는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관습을 요구한다. 종교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묵상은 공동체로 하여금 삶의 근원이요 중심이신 하나님을 계속 의식하게 해주며 예수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 길을 걸어가게 해주는 관습이다.

 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서방 교회에서 사용된 라틴어 성경 벌게이트로 말미암아 '묵상'은 서방에서 널리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게다가 묵상은 수도원운동의 중심적 활동이 되었다. 수도사들과 수녀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고자 하지만, 묵상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초기 수도원 운동

3세기말부터 사람들은 이집트와 팔레스틴의 사막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존 카시안(John  Cassian)은 사막에서 생활한 수도사들의 기도 생활을 생생히 묘사했다. 그는 이것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관상에 의해서, 그리고 사랑의 불에 의해서 형성되었으며, 이 사랑 안에서 녹아내린 정신은 하나님께 대해 마치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듯이 거리낌 없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말한다"고 기록했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이 불의 기도"는 수도사가 관상의 은사를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실천하는 묵상의 실천, 덕 안에서의 성장, 단순한 삶 속에서 발생했다."7) 그러나 사막에서의 묵상이 오늘날의 내적 사고와 기도의 실천과 완전히 동등한 것이 아니다. 사막의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정규적으로 공적인 모임에 참석했고 자기들의 수실에서 성경 말씀을 암송했다. 묵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암송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것은 수도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현존하게 해 주는 구두 훈련이었다. 사부 암모에스(Abba Ammoes)는 "…우리는 사부 아킬레스를 만나러 갔다가 그분이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창 46:3)는 말씀을 묵상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분은 오랫동안 그렇게 묵상하셨다"8)고 말했다.

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것과 수실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의 중요한 요소였다. "어느 형제가 사부 푀멘에게 '수실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했다. 푀멘은 '수실에서 산다는 것은 손노동을 하는 것,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침묵, 묵상 등을 의미합니다' 라고 대답했다."9) 묵상은 수실을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장소로 유지해 주었다.

또한 묵상은 은수사들과 수도사들의 의식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면서 위협적으로 존재하는 귀신들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나는 한 형제가 수실에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수실 밖에는 귀신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형제가 묵상하고 있는 동안에는 귀신들이 들어가지 못했지만, 형제가 묵상을 중단하자마자 귀신들이 수실에 들어가서 그와 승강이를 했다.10)

이러한 사막 거주자들의 삶의 계획과 묵상의 핵심은 성경이었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선적으로 성경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되었다." 반추되고 묵상되는 성경이 사막에서의 수도적 실존의 바탕이었다.11)

서방에서 베네딕트의 『규칙』(Rule)은 일상생활의 방법을 세 갈래로 구분하여 묘사한다: 공적인 기도, 손노동, 그리고 영적독서(lectio divina). 성무일과를 암송하는 동안, 그리고 수도사가 성경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 독서를 하는 동안에 묵상이 이루어진다.12) 잔 레크레르크(Jean Leclercq)의 표현을 빌자면, 묵상은 "말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며, 영적 독서에 필요한 보완물, 영적 독서와 거의 대등한 것이다"13) 묵상은 방법이나 과정이 아니라 공적인 기도나 여가 시간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이다. 베네딕트의 규칙 52장에 이러한 기도의 정신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일이 끝나면 모든 이들은 완전한 침묵 가운데 물러날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을 가질 것이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기도하기를 원하는 형제가 있으면, 다른 형제는 무례한 행동으로 그를 방해하지 말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시간에라도 어떤 사람이 가만히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혼자 들어가 기도할 것이며, 소리를 내어서 하지 말고 눈물과 진심에서 우러난 헌신을 가지고 할 것이다.14)

예수님은 말을 많이 하는 기도에 대해 경고하셨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베네딕트도 비슷한 충고를 했다.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의 순수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들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나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15)

묵상 기도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함으로써 주님의 현존에 고요히 집중하면서 주 앞에 거하는 기회이다. 그러나 묵상은 말없는 주의집중을 향하는 경향을 지니며, 이 말 없는 주의집중은 하나님에 대한 관상이 될 수 있다. 초대 교회와 중세 시대에는 묵상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묵상은 예배의 흐름 안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관상은 세례의 개화(開花)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묵상과 관상은 성례전적인 사건들, 즉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은총의 순간들이다.

 1세기말 경에 기록된 『바나바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는 묵상이 수도 생활의 일반적인 측면이 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많은 요소들을 간단히 표현했다. 그 서신에서는  레위기(레 11:3)와 신명기(신 14:6)의 본문에 대해 주석하면서 그 말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마음속으로 자기가 받은 모든 말씀의 취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 여호와의 율법을 암송하며 지키는 사람들, 묵상이 즐거운 것임을 아는 사람들-실제로 여호와의 말씀을 숙고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구하라.16)

그러므로 묵상은 주님의 말씀을 구하는 것, 마음속으로 숙고하는 것, 암송, 반추, 곱씹는 것, 즐겁게 참여하는 것이다. 12세기에 활동한 베네딕트 수도사 페깡의 존(John of Fecamp)은 수도원운동이 초창기부터 내세운 바 묵상에 대한 확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묵상하지 않고서는 마음의 깨끗함에 이를 수 없다."17)

중세 수도원운동

12세기에 클레르보의 수도원장이었던 버나드는 베네딕트의 규칙의 정신, 특히 영적 독서를 회복시킨 시토회의 중요한 지도자이다. 버나드는 영적 독서를 소홀히 할 때에 수도원운동이 방치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묵상과 관상을 존중하지 않을 때마다 수도생활은 그 열정을 상실한다. 버나드의 견해에 의하면, 이 묵상, 또는 영적 독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성령의 포도주 창고였다. 버나드는 자기가 지도하는 모든 수도사들에게 이 포도주 창고에 들어가라고 촉구했다. 그곳은 양들이 헤엄치고 코끼리들이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은 수도적 환경에서의 묵상은 성경적이고, 단순하고, 정서적이고, 관상을 지향하는 것이 었다.

종교 개혁 이후에는 묵상이 종교 생활의 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수도사들은 영적 독서와 묵상의 전통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 시간을 할애하여 묵상을 실천하지는 않았다. 12세기 수도원 운동은 많은 새로운 사고 방식으로 이어지는 스콜라적 혁명을 초래한 경향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묵상과 방법

11세기말과 12세기에 묵상은 논리와 질서와 방법에 관심을 가진 초기 스콜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은 사태의 진전은 사람들을 감화하고 가르치며 기도의 본보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기도문과 묵상집을 저술한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의 삶과 저술에 분명히 나타난다. 안셀름의 묵상집에는 과거의 기도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신학적 탐구 정신이 들어 있다.18) 이 유명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묵상집 Proslogin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형제들의 간곡한 요청 때문에 나는 신앙의 의미에 관한 묵상의 본보기로서 짤막한 책을 출판했다…"19) 그러나, 모든 수도적 묵상이 그렇듯이, 안셀름의 묵상집은 사람들을 "하나님에 대한 관상"으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지녔다."20) 안셀름은 그의 영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기도로 Proslogion을 마친다:

진리의 하나님,
내 기쁨이 충만하도록 받기를 요청합니다.
한편, 내 정신이 그것을 묵상하며.
내 입으로 그것을 말하며
내 마음으로 그것을 사랑하며
내 입으로 그것을 전파하며
내 영혼으로 그것을 갈망하게 하며
내 존재 전체가 그것을 갈망하여
마침내 나로 하여금 삼위일체요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신
내 주님의 기쁨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아멘

안셀름은 그의 기도문과 묵상문들을 통해서, 묵상은 관상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고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묵상 방법들의 발달은 파리에 소재한 성 빅톨 수도원의 스콜라주의 저자인 휴(Hugh)와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뚜렷해졌다. 성 빅톨 수도원의 휴는 생각하고 기도하는 단계들을 구분했다. 그는 "이성적인 영혼에게는 세 가지 통찰력이 있다: 생각 하는것, 묵상, 관상."21) 휴는 하나님에 대한 관상을 지향하면서 공부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사람들을 지적했다.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이래로 서방의 수도사들은 자기들의 생활방식의 목표는 하나님을 보는 것, 즉 관상이라고 주장했다. 16세기에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는 "나는 하나님을 보기위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22) 라고 쓰면서 이 전통의 능력을 훌륭히 표현했다.

12세기에는 수도적인 편지들이 풍부했다. 그 중에서 카르투지오 회의 귀고 2세가 친구 거바스(GeHase)에게 쓴 편지인 『수도사들의 사다리』(The Ladder of Monks)는 중세 시대에 가장 유명한 글들 중 하나였다. 이 작은 논문에서는 하나님께 이르는 사다리의 가로장이나 단계들-읽기,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을 요약하여 언급한다. 읽기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이요, 묵상은 말씀을 숨은 뜻을 찾는 것이요, 기도는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요, 관상은 "정신이 어느 정도 하나님을 향해 들려 올려져서 영원한 감미를 맛볼 때에" 발생한다.

이 짧은 편지는 널리 보급되었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가는 여정에 대한 손쉽고 간단하면서도 체계적인 견해를 후대의 전통에 제공했다. 12세기 수도사들의 개성주의의 전형인 귀고는 그의 편지를 다음과 같이 끝냈다:

형제 거바스여,만일 하늘로부터 이 사다리의 가장 높은 가로장에 오르는 은사가 주어진다면, 그 때에 나를 기억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드려진 휘장이 걷힐 때에, 나도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23)

그로부터 4세기 후에, 스페인의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도 여전히 귀고의 기도의 사다리의 지혜를 가지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읽으면서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묵상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두드리십시오. 그리하면 관상 중에 당신에게 열릴 것입니다."24) 귀고의 편지는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로서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지혜가 된다.

토머스 아퀴나스,
중세시대 말기와 종교개혁

12세기 이후, 특히 14, 15세기에 묵상에 관한 문헌들은 한층 더 조직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토머스 아퀴나스는 묵상과 관상이 다양한 지적 ·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임을 알았다. 중세 시대에 얼마 동안은 "관상 생활"이라는 표현은 수도생활, 즉 종교적 관상을 지향하는 생활방식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도미니크 수도사인 토머스 아퀴나스는 수도원운동에서 하나의 중요한 변혁의 일부였다. 아퀴나스와 다른 수도사들은 복음전도를 전통적인 수도원운동에 결합시켰다. 목회사역은 안정되게 살라는 수도적 소명에 부수되는 것이었다. 비판가들은 이와 같은 수도사들의 쇄신은 성 프랜시스와 성 도미니크가 수도원운동에 사역을 결합하기 이전의 수도원 운동을 묘사하는 방법이었던 바 관상생활의 이상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겼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예수님의 사역을 본보기로 인용하면서 형제들의 사역을 정당화했다. 또 토머스는 형제들이 복음 전도에 참여하는 것의 근거로서 도미니크수도회의 헌장에 포함된 말을 인용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헌장, 그리고 토머스는 "관상의 열매를 형제들과 나누는 것"25)이 자기들의 소명이라고 여겼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관상을 지향하는 영성, 관상적 영성을 발달시켰다.26)

중세 시대 말에는 묵상이 한층 더 체계화되었고, 묵상의 과정에 여러 단계가 추가되었다. 이 시대에는 예수님을 본받는 것으로 이어지는 묵상이 강조되었다. 이 시대의 표준적인 저서는 토머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atation of Christ)인데, 이 책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는 것을 우리의 주된 학문으로 삼자" 특히, 묵상의 내용으로써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이 강조되었다. 중세 시대 말에, 특히 인쇄술의 도래 이후로 묵상 안내서와 표준적인 묵상문들을 수록한 서적들이 증가했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중세 시대 후기의 묵상의 외관상 복잡한 특성에 대해 반대했다. 개신교인들과 많은 카톨릭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보다 단순하게 읽고 성경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묵상에 대한 이러한 반작용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수세기 동안 개신교교파들이 관상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었던 데 있다. 왜냐하면 충실한 묵상은 관상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신교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집중을 표현하는 나름의 어휘들을 발달시켰다.

스페인 신비가들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의 영적 신비적 경험들은 토대로 하여 1548년에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영신수련』은 수련자를 일련의 묵상과 관상에 포함시킨다. 이그나티우스는 묵상과 관상이라는 용어를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이 수련은 피정자로 하여금 죄와 타협하고,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제롬 나달(Jerome Nadal)은 자기의 친구인 이그나티우스를 "행동하는 관상자'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그나티우스를 행동과 관상이라는 그릇된 이분법을 극복한 모범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인간의 능력은 관상 안에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관상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묘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능력을 소유하며, 삶의 상황은 어떤 행동을 통해서든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요구한다. 행동과 관상은 결국 하나의 실체 안에 결합된다."27)

이그나티우스의 영신수련에서 사용되는 묵상과 관상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함축적 의미들을 보다 더 의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영신수련』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말에 이그나티우스의 추종자들이 육성한 묵상의 단계들은 수련을 행하는 많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존 돈(John Donne)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약 40년 전에 루이스 마르츠(Louis Martz) 교수는 묵상과 시(詩)의 결합에 주목했다.28)

마르츠의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참된 시의 묵상적 특성에 주목하며 자신의 내적 자아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가르치는 시의 능력을 인식하며, 기도에 더욱 집중하며,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소리를 내거나 말없이 시를 읽는 것은 묵상을 위한 탁월한 준비이며, 종종 그 자체로 기도가 된다.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의 묵상은 신비한 관상을 지향했다. 테레사는 수녀들에게 적극적인 침잠의 기도(prayer of recollection)라는 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어거스틴에게서 배운 진리, 즉 하나님 이 내면에 계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저술한 『완덕의 길』28-29장에서 이 기도에 대해 묘사했다.29) 이 기도는 하루 중에 종종 믿음 안에서 하나의 신비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삶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테레사는 이처럼 규칙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 및 자기 인식과 이탈은 관상이나 하나님의 신비한 현존에 이를 수 있게 해준다고 여겼다.30)

테레사는 묵상에서 얻어지는 행복을 contentos라는 스페인어로 묘사했고, 신비 기도와 천부적인 관상은 gustos(영적 기쁨)라고 묘사했다. 테레사는 관상, 신비기도, 또는 인간의 노력과 평범한 은혜에 의해 획득된다고 여기는 묵상으로 인해 영적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영적 기쁨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느끼고 누립니다‥‥ 예수님,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차이점을 분별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는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없습니다. 주께서 그 일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31)

테레사는 기도에서 예수의 인성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강조했다. 그 시대의 일부 영적 작가들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테레사는 기도할 때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는 경향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32)

테레사의 동역자인 십자가의 요한도 묵상보다는 관상을 묘사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다. 십자가의 요한은 "신적인 주제들에 대한 추론적인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사랑과 지식의 획득"이라고 보았다. 그는 "묵상의 정신"이 관상의 선구자라고 간주한다.33) 그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에 있었다.

하나님은 초심자들을 이 열등한 사랑의 방식에서 끌어내어 보다 높은 거룩한 사랑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데 사용되는 감각의 부적절하고 어렵고 저급한 활동과 추론적인 묵상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보다 풍성하고 불완전한 것들로부터  자유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할 수 있게 되는 영의 활동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다.34)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은 묵상은 우리가 행할 수있는 것이며 관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라고 보았다. 십자가의 요한은 시적(詩的) 통찰력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관상 사역의 시작을 어두운 밤,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되기 위해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밤이라고 묘사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초심자(영적인 길에서 묵상을 실천하는 사람)의 상태에서 끌어내어 숙달된 사람(관상자)의 상태에 두기 시작할 때, 이러한 상태를 통과함으로써 완전한 상태, 즉 영혼과 하나님의 신적인 연합의 상태에 이르게 하려 하실 때에 영혼은 어두운 밤에 들어가기 시작한다.35)

십자가의 요한은 적극적인 묵상에서 관상으로의 이동을 상징으로 분명히 표현했다: 더 이상 묵상할 수 없고 영성생활에서 만족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식 안에 홀로 머물기를"36) 원한다.

십자가의 요한의 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초점을 둔 집중의 본보기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지은 세 편의 주요한 시들은37) 실제로 그의 신비 체험을 다룬 것이다. 과거에는 영적 보고(寶庫)인 요한의 시는 무시하고 그의 주석에게만 관심을 기울였었다.38) 요한의 시는 우리를 보다 관상적이 되도록 준비해 주는 묵상의 자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시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묵상 지도는 지나치게 상세하게 이루어졌다. 종종 성경적인 내용이 부족했고, 묵상과 예배가 그다지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종교적 쇄신으로 말미암아 묵상과 관상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 책 앞부분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신비주의의 태도변화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그것이 하나의 신비 체험인 관상, 즉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지만 성찬과 세례의 정체성 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육성되는 경험으로서의 관상에 적용된다.

이제는 묵상과 관상을 엘리트들만의 은밀한 경험이라고 볼 수 없다. 묵상과 관상을 이러한 엘리트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트라피스트 수도사인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다. 머튼은 관상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관상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원자력의 시대에 관상생활, 또는 기도, 독거, 침묵, 묵상의 생활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고 질문했다.39) 머튼은 기독교인들에게 묵상과 관상의 유산을 지키라고 경고 했으며, 묵상과 관상은 필연적으로 정의와 평화의 사역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자신의 삶에 의해서 보여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초월명상과 같은 명상 기법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해왔다. 그러한 기법들은 치료의 효과가 있고 고요히 기도하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기독교의 묵상은 그러한 기법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행동,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의 일부로서 수행되는 종교적 훈련이다. 그것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은 항상 관상의 은사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

관상적 기질의 계발

묵상을 실천하려면 경청하는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삶과 정신이 소란하고 산만한 사람은 묵상 기도를 실천하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의 문화는 시끄럽고 떠들썩하고 지나치게 기진맥진해져 있다. 그것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하는 기독교적 양심의 내면의 음성을 몰아낼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이 꿈속에서 하나님에게 구한 것-경청하는(지혜로운) 마음(왕상 3:9)-을 발달시킬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향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월리엄 맥나마라(William Mcnamara)는 관상은 "실재자를 오랫동안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맥나마라의 관상은 경청하는 자세,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에 개방하라고 명령하는 관상생활이다. 우리 사회에는 기도하거나 묵상하거나 관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들이 있다. 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소음과 번잡함과 분심이 있다. 기도에는 단순. 고요한 시간, 어렵게 얻은 침묵과 독거의 순간에 기꺼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를 기르는 어머니, 학교의 과제와 직업과 사회생활 등과 씨름하는 학생, 또는 가난에 시달리는 노숙자들은 이러한 순간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했듯이, 우리 중에는 야생마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잠잠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정규적인 시간을 확보하려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은 그 구원하시는 현존에 주의를 집중하라고 손짓하신다. 묵상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주의를 집중하여 경험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의 책임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자유해져야 한다. 날마다 잠시라도 고요히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삶의 한 장면에 초점을 두고,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조용히 경청할 수도 있다.40)

집중기도

토머스 키팅(Thomas Keating), 베이질 페닝턴(Basil Pennington), 존 메인(John Main)처럼 토머스 머튼의 영향을 받은 영적 작가들은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향심기도향(向心祈禱)라고 알려진 것을 옹호했다. 두 눈을 감고, '예수' 와 같은 거룩한 단어를 고요히 암송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현존 안에 끌려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 분심(分心)이 되면, 그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전에 몇 분 동안 고요한 순간을 소유한다.41) 집중기도는 하나의 기법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보다 분명히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이다.

삶의 여러 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현존에 집중함으로써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법과 대인관계와 하는 일이 변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중심이요 근원이요 운명으로써 보다 직접적으로 알려진다. 이와 같이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례전적인 현존에 대해 민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중세 시대의 독수도자들은 피조 세계와 동물의 왕국을 향한 애정을 계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성례전적 환경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신비 체험의 판단 기준으로서 옹호한 기준은 모든 묵상과 관상을 시험하는 기준이다: 이웃 사랑의 성장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식이다.42) 테레사는 이웃 사랑이 묵상의 결과라고 여겼다: "묵상을 통해서 진리가 당신의 마음속에 거하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이웃을 향해 소유해야 하는 사랑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43) 이것은 초대 교회의 지혜를 고쳐서 표현할 것에 불과하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묵상은 성직자와 수도사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를 위한 것이다. 거룩은 보편적 인 소명이며. 모든 사람에게는 거룩에 이르는 수단이 필요하다. 묵상은 모든 신자들의 장자권이며, 모든 사람은 관상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관상은 이 세상에서는 아니라도 다음 세상에서의 우리의 운명이다. 묵상은 궁극적으로 무엇이라고 묘사할 수 없는 관상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 십자가의 요한은 관상을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유입"44)이라고 묘사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끊임없이 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방법들은 모든 묵상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한 방법은 묵상하는 사람과 그의 인격에 적합해야 하지만, 방법이 묵상의 목표는 아니다. 묵상의 목표는 사랑으로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묵상과 관상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져 온 한 가지 방법은 홀로, 또는 사람들과 함께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유대인들의 마음에서 솟아난 이 고대의 찬송들은 분노와 두려움에서부터 기쁨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초대 시대부터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시편을 암송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시편은 수도사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해주었다. 많은 평신도들은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암송함으로써 시편을 비롯한 기도문들을 통해 자기들의 영성생활을 형성하며, 기도하면서 교회와 접촉을 유지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기독교의 묵상에서는 정신만이 아니라 전인이 하나님을 찾는데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항상 감정들, 가장 심오한 인간의 느낌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갈망들을 일깨웠다. 안타깝게도, 마치 지성이 하나님을 찾는 일에 개입된 유일한 능력인 듯이, 묵상은 종종 정신적인 기도라고 불려왔다.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 일에 전인이 개입된다. 규칙적인 묵상은 기독교인의 성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기인식을 촉진한다. 자기 인식은 죄와 연약함을 인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사 및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요일 4:19). 하나님께서 관상이라고 불리는 현존의 은사를 가지고 인간들에게 보다 깊이 들어오실 때에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행하는 묵상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현존이 존중되고 경험되는 보다 관상적인 교회로 인도한다. 관상자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만 성취될 수 있는 인간적인 상황을 되도록 완전히 포용하는 사람들이므로, 관상적인 교회 역시 보다 완전히 인간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보다 인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과정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묵상, 그리고 관상의 은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도전에 주목하는 데 사용되는 수단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관상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간 공동체 안에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과제

1) 이삼 일 동안 매일 10-15분 동안 집중기도를 실천하라. 마친 후의 느낌이 어떠한가? 집중기도를 마치고 나서 하루를 보낼 때에 어떤 차이점이 느껴지는가? 규칙적으로 집중기도를 실천하는 것의 효과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이 장이나 다른 곳에서 묵상에 대한 정의나 묘사, 당신의 삶과 친구들의 삶에 유익하고 실질적이라고 생각되는 정의를 찾아 보라
3) 관상에 대해 기술해 보라.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관상에 대한 욕구를 감지하는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보다 관상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4) 우리 문화 안에서 현대인의 묵상과 관상을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요인들을 열거해 보라.
5) 자신이 처한 소란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묵상을 실천하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주고 싶은 충고를 열거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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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Call of the Whole Church to Holiness,"  Dogmatic Constitution on the church, chapter 5.
2) The Living Flame of Live 3.28, the Collected Works of Saint John of the Cress rev. ed., trans. Kieran Kavanaugh and Otilio Rodriguez(Washington, DC: Institute of Carmelite Studies) 684.
3) T.S., Eliot,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grock," The Complete Poems and Plays, 1909-1950 (New York: Harcourt, Brace and World,1962).
4) T S. Eliot, "The Dru Salvages" lines 200-215, The Complete poems and Plays.
5) Laurence Freeman, "Meditation,"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648-51.
6) Annemarie Schimmel, Mystical Dimensions of Islam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15) 167 and passim.
7) John Cassian, Conferences, trans. Colrn Luibheid (New York: PaulistPress, 1985) 111,117.
8) The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 trans. Benedicta Ward (Kalamazoo: Cistercian Publications, 1975) 29.
9) Ibid. 190.
10) The Wisdom of the Desert Fathers; The "Aphothegmata paturm' (The Anonymous Series), trans.    Benedicts Ward (Oxford: SLG Press, 1975) 63 (n. 235).
11) Douglas Burton-Christie, The Word in the Desert: Scripture and the Quest for Holiness in Early Christian Monasticism (New York: OxfordUniversity Press, 1993) chapters 2,4 and passim.
12) The Rule of S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with Notes, ed. Timothy Fry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81) 203,267,446-48.
13) Jean Leclercq, The love of Learning and the Desire for God, 2nd ed. trans. Catharine Misrahi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74) 21.
14) The Rule of St. Benedict, chapter 52.
15) Ibid., chapter 20.
16) The Epistle of Barnabas 10, Early Christian Writings; The Apostolic Fathers, trans. Maxwell Staniforth (Baltimore: Penguin,1968) 208.
17) Cf. Bemard McGuinn. The Growth of Mysticism (New York: Crossroad,1994) 135.
18) Bernard McGinn은 묵상을 하나의 방법으로 전화시킨 또 한 사람의 수도원 작가로 John of Fecamp를 지적 한다: Growth of Mysticism 136.
19) The Prayers and Meditations of St. Anselm, trans. Benedicta Ward(Baltimore: Penguin,1973) 238.
20) Ibid. 239.
21) Commentary of Ecclesiastes, quoted in McGinn, The Growth of Mysticism 375.
22) The Book of Her Life 29.8, The Collected Woeks of St. Teresa of Avila, trans, Kieran Kavanaugh and Otilio Rodriguez (Washington DC : Institute of Carmelite Studies, 1976) 191.
23) Guigo II, The Ladder of Monks: A Letter on the Contemplative Life and Twelve Medetations, trans. Edmund Colledge and James Walsh (Garden City: Doubleday, 1978) 82,99.
24) The Sayings of Light and Love 158, The Collected Works of St. John of the Cross 97.
25) Summa Theologiae II, II, 88.6.
26) Walter Principe, Thomas Aquinas Spirituality (Toronto: Pontifical Institute of Medieval Studies, 1984) 27
27) "Little Gidding," Four Quartets: "Amd the fire and the rose at one."
28) Louis L. Martz, The Poetry of Meditation (Garden City: Doubleday, 1954) and The Meditation Poem(Garden City: Doubleday, 1963).
29) The Way of Perfection chapters 28-29, The Collected Works of St. Teresa of Avila, Vol. 2, trans. Kieran Kavanaugh and Otilo Rodriguez(Washington, DC: Institute of Carmelite Studies, 1980).
30) Teresa of Avila, The Interior Castle, Dwelling Place 1-3, The Collected works of St. Teresa of Avila: see Keith J. Egan, "The Foundations of Mystical Prayer: Teresa of Jesus," Peaceweavers, Vol. 2 of Medieval Religious Women, ed. L. T. Shank and J. A. Nickels (Kalamazoo: Cistercian Publications, 1987) 330-44.
31) The Interior Castle 4.1.4,  The Collected Works of St. Telesa of Avila 318.
32) The Book of Her Life, chapter 22, The Collected Works of St. Telesa of Avila.
33) Ascent of Mount Carmel 2.14.2, The Collected Works of St. John of the Cross 191.
34) The Dark Night 8.3, The Collected Works of St. John of the Cross 376.
35) The Dark Night 1.1.1, The Collected Works of St. John of the Cross 361.
36) The Ascent of Mount Carmel 2.13 and The Dark Night 1.9, he Collected Works of St. John of the Cross
37) "The Dark Night," "The Spiritual Canticle" and "The Living Flame of Love ."
38) Keith J. Egan, "A Mystic's Poetry: John of the Cross," forthcoming in collection of lectures delivered by various persons at Trinity College, Dublin, October-November 1994.
39) "Contemplation in World of Action," Thomas Merton: Spiriual Master, ed. Lawrence S. Cunninghain (New York: Paulist Press, 1992) 369.
40) Walter Burghardt, "Contemplation: A Long Loving Look at the Real," Church (Winter 1989) 14-18.
41) Thomas Keating, "Centering Prayer,"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138-139.
42) The Interior Castle 5.3.8-9, 12,  The Collected Works of St. Teresa of Avila 351,353.
43) The Way of Perfaction 20.4, The Collected Works of St. Teresa of Avila 115,
44) The Dark of Night 1.10.6, The Collected Works of St. John of the Cross 382.

편집자 주/ 소개하기에 부끄럽지 않는 좋은 글입니다. 알기쉽고 이해하기 쉽고 상당히 보편적입니다. 다만 집중기도 부분에서 수용할 수 없도록 너무 잘 못된 부분이 있어 몇자 수정했습니다.  왼만 한것은 조금 차이가 있어도 그들의 각각의 주장을 일거 들을 수 있는 훈련도 되어야 합니다. 그 판단력을 키울 수 있도록 묵상하시고 관상하십시오. 주의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박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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