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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 55: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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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3년 12월 28일 주일2부설교 |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잘못을 뉘우치고 새해로 가자’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집안 정리도 하고 상점에서는 재고정리도 합니다. 안 입는 옷가지나 신발 등은 구제기관에 넘기고 안 팔리는 상품은 헐값으로 세일을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죄 많은 삶을 그대로 안고 새해로 갈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새해를 위하여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미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잘못을 다 청산하고 가야만 합니다.
<본론>
1. 사랑하지 못한 삶을 회개하자
첫째로, 우리는 묵은해를 돌아보며 사랑 못하고 산 삶을 회개하고 청산하고 가야만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태산같이 진 인생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펴볼 때 우리는 죄 중에 잉태되고 죄 중에서 태어나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실상 지옥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 죄가 끄는대로 끌려 다녔었습니다.
요한1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한다고 해서
너무나 우리의 삶이 마귀에게 속해서 살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건지시려고 목숨을 내어 놓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죄의 깊은 수렁에 빠지고 죄의 어마어마한 사슬에 묶였던지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해방할 도리가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그 어마어마한 대가로 죄악의 수렁에서 죄악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님 앞에 한없이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내내 우리 섬기시고 우리를 위해서 그 목숨을 대속재물로 바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마음속에 깊이 오늘 느껴보는 시간에 이 예수님께 엄청난 빚을 받았으니 이 사랑의 빚을 느낄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빚을 지면 마음이 자나 깨나 무겁습니다. 빚을 청산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항상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의 사랑의 빚진 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늘 그 빚이 마음 속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빚을 갚으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약사 한분이 자기 교회에서 전도 유망한 한 학생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학생은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부모님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뜨시고 동생 둘을 데리고 살자니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약사가 동생 둘은 특별히 국비장학금을 받도록 하고 이 사람 청년에게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주고 대학을 졸업 맡을 때까지 모든 일절의 경비를 빌려 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이래서 이 청년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생들은 국비장학금을 받으며 별 고생 없이 학업을 5년 동안 마쳤습니다. 일류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고 난 다음 이 청년이 약사를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진 사랑의 빚은 이루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5년 동안 학비를 다 빌려 주었으니 이 제 내가 취직을 했으므로 한꺼번에 돈은 값을 수 없고 조금씩 선생님에게 대한 빚을 갚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약사가 싱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원래 내가 돈을 빌려 줄때부터 받을 생각을 안했네. 공짜로 준다면 자네의 마음에 부담이 될까 싶어서 내가 장차 갚으라고 말을 했네. 그것은 자네에게 내가 그냥 준 것일세. 그러므로 이제 이 빚은 자네와 똑같이 이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가난한 사람이 고난당할 때 도와주는 것으로 이 빚을 갚게나.”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어떻게 갚겠습니까? 예수님은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갚는단 말인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 말합니다. “내게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내게 빚을 갚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빚진 그 사랑의 빚을 우리의 이웃에 갚아야 됩니다. 이웃이라고 해서 버스타고 시골까지 내려가야 이웃이 있고 저 선교지에 가야만 이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있는 그곳이 이웃입니다. 내 남편이 이웃이요, 내 아내가 이웃이요, 내 자식이 이웃이요, 내 옆집에 있는 분이 이웃입니다.
얼마 전에 할머니 한 사람이 자동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습니다. 아주 옷도 잘 입고 귀하게 생긴 분입니다. 경찰이 그 아파트에 가서 수색을 하니까 아파트도 깨끗하고 장신구들도 비싼 장신구가 많고 도무지 자동차에 뛰어들어 자살할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서랍을 여니까 수첩이 하나 나오는데 매일매일 일기장에 일기를 적은 수첩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경찰관이 무릎을 쳤습니다. 죽은 이유를 알았습니다. 매일매일 수첩에 ‘오늘도 아무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다음 페이지를 뒤진 후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다.’ 또 페이지를 여니까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전화 한 통 걸어준 사람이 없다.’ 이 할머니는 극도의 고독 속에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들끊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닭장처럼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아무도 다정하게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 없고 아무도 전화한통 걸어주는 사람 없었습니다. 극도의 고독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는 달려오는 자동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은 것입니다. 우리 이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 곁에 있는 분이 이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바로 옆에 있는 이웃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만 잘살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항상 이웃에 대해서 마음에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관심가지고 살피면서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오늘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어 회개해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로 40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이웃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베푼 것이 곧 주님께 베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병들었을 때 방문하고 굶주렸을 때 먹여주고 갈하였을 때 마시우고 헐벗을 때 입혀주고 감옥에 갇힐 때 돌보아 준 것이 곧 예수님을 위해서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평생 도왔습니다. 신문기자가 가서 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어떻게 인도에 와서 가장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이렇게 끝까지 돌볼 수가 있었습니까? 수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가난한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의 얼굴 속에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드는 마음으로 받드니까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지 모르겠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버린 사람들의 얼굴 속에 예수님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말씀하신 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 소자 중 지극히 작은 자 한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의 모범이 되었던 성 마틴은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몸에 입고 있던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다 나누어 주고 난 후에 벌거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외투만 걸치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오다가 보니까 길거리에서 벽에 기대어 있는 벌벌 떨고 있는 노인 거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말에서 내려서. “형제여,” 하며 부르자 거지는 주름이 깊게 패인 초췌한 얼굴로 마틴을 쳐다 보았습니다. 마틴은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그 자리에서 벗어서 칼로써 반쪽을 짝 쪼갰습니다. 발가벗고 말 타고 집에 못들어 가니까 반쪽 외투를 거지에게 입혀 주고 반쪽만 몸에 걸치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까 사람들 마다 손가락질을 하고 “저 발가벗고 반쪽만 입고 가는 마틴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에 마틴이 잠을 자는데 꿈에 예수님이 천사를 데리고 계시는데 자기가 잘라 준 반쪽 외투를 입고 계시거든. 그래서 놀래서 보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천사를 보고 “얘들아, 내 이 반 쪽 입은 외투는 바로 저 마틴이 자기 외투를 잘라서 내게 입혀 준 것이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꿈에 보았던 것입니다. 이 소자 중 지극히 작은 이 한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뭐 나만 살면 되지 이웃 지킴이입니까? 내가 뭐 이웃까지 지켜야 됩니까?”
바로 창세기 4장 9절에 보면 가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내가 뭐 아우 지키는 사람입니까? 왜 아벨이 어디 있는 것 날보고 묻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요한1서 3장 16절로 19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지키는 것이 결과는 나를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짓밟아 버리고 무관심한 것이 결국 나중엔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한 대부호가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늦게 나이가 들어서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너무 아들이 좋아서 금지옥엽으로 길렀습니다. 그 아들이 7살이 되었을 때 그는 특별히 주문해서 가죽으로 만든 좋은 승마복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그 아들에게 승마복을 입혀 가지고서 생일날 산책을 나갔는데 너무 너무 멋있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산책을 하고 돌아오고 난 다음 아들이 앓아 들어 누워서 시름시름 앓다가 일주일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너무나 통곡스럽고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역학조사를 해보니까 이 아들이 급성 유행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 유행병이 어떻게 들렸는가 보니까 그 옷에 병균이 드글드글 했습니다. 그 승마복에 왜 병균이 드글드글했는지 알아보니까 승마복을 만드는 가난한 바느질하는 아주머니는 어느 집 지하실에서 전염병이 걸려 죽어가는 남편을 데리고서 그 승마복을 기웠습니다. 그 일주일전에 이 부자에게 찾아와서 “우리 남편이 급성유행병에 걸려 죽어가니 제발 치료비를 좀 달라”고 그렇게 애걸복걸했어도 이 부자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아들의 승마복을 맡겨 놓았는데 그 부인이 그 양털 승마복을 만들다가 너무 떨고 괴로우니까 그 승마복을 남편에게 입혀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승마복에 남편의 병균이 잔뜩 묻었습니다. 그 승마복을 완성해서 보내니까 그 부자가 아들에게 승마복을 입히니까 그 병균이 그대로 옮아서 아들이 죽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만일 그 여자가 남편이 급성 유행병에 걸려 죽어가니 좀 도와 달라고 부자에게 사정할 때 아들에게 준 의복의 100분의 1의 돈만 주었을지라도 그 아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이웃을 무시한 것이 자기에게 어마어마한 재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이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내 것만을 챙기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한해를 보내면서 참으로 내가 몰인정하게 살았지 않았느냐 사랑 없이 이기주의로 나만 위해서 살지 않았는가 우리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새로운 마음에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이웃을 정죄한 삶을 회개하자
둘째로, 이웃을 정죄하고 산 삶을 회개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 도적과 목자가 뭐가 다릅니까? 도적은 오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만 시키지만 목자는 오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해를 살면서 이 도적과 짝을 지어서 사탄의 도구가 되어 여러분 이웃을 끊임없이 정죄하면서 살아온 죄를 회개하고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벗기고 입히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웃에게 참말 거짓말 다 보태 가지고서 자꾸 발가벗깁니다. 이웃의 명예와 이웃의 도덕적인 삶을 발가벗겨서 사람들에게 매장하려는데 우리가 다 가입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보고 손가락을 내밀면 한 손가락은 이웃을 욕하지만 세손가락은 자기를 보고 욕을 합니다. 마지막 엄지손가락은 하나님을 보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오면 우리를 참소해서 발가벗겨 놓습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했습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짓게 하여 발가벗겨 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 전에까지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누가 발가벗겼습니까?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와서 미혹하여 죄를 짓게 하고 영광의 옷을 벗겨 버리고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 뒤에 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서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겨 옷을 해 입혔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벌거벗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니까 피를 흘렸지 않습니까? 짐승의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해서 입혔는데 예수님도 이 세상에 마귀가 우리를 벗겨 놓고 할퀴어 놓은 이 인생을 입히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고 그 의의 가죽옷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로 26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마귀가 오면 발가벗깁니다. 온갖 참소를 해서 벗기는 것을 전문으로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 우리 교회 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지역장, 구역장 혹은 이웃 사람에게 항상 벗기는 일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쉬지 않고 입에서 독을 내어 뿜고 벗기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일인 것입니까? 마귀와 함께 합작하여 벗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전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피를 흘려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입히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입힙니다. 그러나 마귀는 벗깁니다. 여러분 이웃을 위해서 입히기 위해서 여러분께서 기도해 준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일년을 살면서 얼마나 벗기는 일에 여러분 함께 동참하고 입히는 일에 얼마나 인색했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면은 이웃을 할퀴고 치며 치료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강도가 달려들어 있는 것을 빼앗고 때려 그만 죽게 만들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강도 즉, 마귀가 하는 것은 때려서 할퀴어서 그만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 번 와서 좋은 일 뭐합니까? 항상 남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켜 버리려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문을 보십시오. 항상 죽이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뉴스를 보십시오. 늘 영적으로 심적으로 도덕적으로 육적으로 죽이는 일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마귀가 꽉 들어찼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때려서 거의 죽어서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성경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리저리 가다가 그 상처 입은 사람을 보고 말을 타고 와서 내려서 그 상처 입은 곳에 기름과 포도주를 붙고 붕대로 처매어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4절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여러분 몇 사람이나 할퀴고 상처 입은 사람을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처매어 주고 여러분 돌보와 주었습니다. 마귀와 짝을 해서 함께 할퀴고 함께 상처 입히고 함께 죽이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동참했지만 우리가 싸매어 주고 위로의 기름을 부어 주고 품어주고 돌보아 주는 일을 과연 몇 번이나 했습니까? 그리고도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슴을 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면 이웃을 참소하고 기도해주지 않습니다. 마귀 하는 일은 밤낮 참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패가망신했습니다. 자식들 다 죽고 가산 다 잃어버리고 아내는 떠나고 몸은 문둥병이 걸려서 잿더미위에 앉아서 기왓장으로 몸을 끌고 있는 처참한 지경입니다. 거기에 욥의 친구들이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끊임없이 욥을 참소했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이 그 고난당하는 것은 죄 때문에 당한다고 욥을 공박하고 비난하고 참소했습니다. 욥은 그 친구들 때문에 그 고통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욥기 42장 7절에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참소는 아무리 친한 친구가 와서 말한 것도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참소는 하나님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참소는 마귀가 와서 하는 것입니다. 밤낮 소근거리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오셔서 한 것은 욥을 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웃이 넘어질 때에 짓밟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웃이 넘어지면 일으켜서 다시 추스려 주십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이른 아침에 새벽공기를 짓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리새 교인, 사두개 교인, 교법사, 모세의 제자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이 여자는 머리가 산발이 되고 눈은 충혈 되었습니다. 몸은 의복이 찢어지고 맨발 벗고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이 모세의 제자들은 혈기등등, 살기등등했습니다. 분노한 모습으로 손가락을 내밀면서“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자는 돌로써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 왜 여자를 죽이려고 했으면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지 왜 예수님께 끌고 나왔습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뭐라고 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젊은 자로부터 나이 많은 자까지 눈을 맞추어 보시고 난 다음 “당신들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써 이 여자를 치시오.” 그리고는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뭐를 썼다고 생각합니까? 그곳에 있는 바리새교인, 사두개인, 교법사들의 감추인 위선의 죄들을 주님이 백일천하에 기록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여자에게 돌을 치면 그 다음 그 돌을 들고 내가 너를 치겠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없는 심판은 긍휼이 없는 심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죄가 없다고 하면서 이 죄 있는 여자를 돌로 치면 그 다음 나는 그 돌을 가지고서 너를 치겠다. 너희들 죄가 이런 것 있지 않느냐? 예수님이 어깨 너머로 그리스도의 손가락이 적어 가는 글을 보고 난 다음 큰 자로부터 작은 자까지 돌을 다 버리고 모두다 뺑소니를 쳤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 양심의 스크린에 등불을 비췰 때 도망 안칠 사람이 있어요? 나는 죄 없는 사람이요. 나는 의로운 사람이요, 나는 당당한 사람이요, 나는 조금도 거리낌 없어요. 주 앞에 설사람 있어요? 모세의 제자들 소이 자기들은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율법대로 살았다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다 도망쳤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돌아보니까 다 가버리고 돌맹이만 흩어져 있습니다. “정죄하는 자 없나이다.” 예수님이 그 여자를 딱 바라보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가서 다시 죄 짓지 말아라.”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보십시오. 정죄 안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 흘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갚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지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는 마귀가 하지 예수님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의 발을 씻어주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발이 더러워졌으면 보혈로 씻어주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한 해를 살면서 이웃을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세의 제자들처럼 온갖 있는 율법, 없는 율법 다 끄집어 내놓고 남을 정죄했습니다. 자기는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망태기는 뒤로 메고 남의 망태기는 앞에 메고 앞에 있는 남의 망태기에 자꾸 없는 것, 없는 것 다 집어 놓고 욕만 하고 자기의 뒤에 멘 자기의 망태기는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죄하는 것 쉽습니다. 그러나 남을 용서하고 살리는 것 심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저런 고약하고 나쁜 놈, 왜 구약시대같이 하나님이 벼락을 때려서 벌을 내렸으면 좋겠다.” 구약시대에는 정죄하는 시대였습니다. 율법의 시대였습니다. 오늘날은 죽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이 벼락을 안 때리는 것은 오늘날은 용서의 시대인 것입니다. 사랑의 시대인 것입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정죄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용서하고 의롭게 만드는 일에 동참을 해야지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참예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3.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하자
셋째로, 우리가 청산하고 가야 될 일은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36절로 39절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 주님 밖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성수주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부모님 초상을 주일날 치뤄야 하기 때문에 성수주일 할 수 없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합니까? 부모 초상 치루는 것이 중요합니까? 주님을 내놓고 보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날은 주일입니다. 예수님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주여 내 아버지가 세상을 떴으니 장사를 지내고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었습니다. 공경해야지요. 그러나 주 안에서 공경해야 됩니다. 주님보다 먼저 세우면 안됩니다. 자식사랑 좋지요. 자식사랑 안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성경에는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 아무데도 없어요. 천륜적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부모를 사랑하라는 말은 수차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자식을 사랑해야지 주님을 제켜놓고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내사랑, 해야죠. 아내는 내 몸이니까 사랑해야지요. 그러나 아내사랑 때문에 십일조도 떼먹고, 주일날도 아내 따라 놀러 나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을 부차적인 생각으로 한다면 아내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사랑. 좋지요. 친구 사랑해야죠. 그러나 주님보다 친구가 앞설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도 큰일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명예를 위해서, 지위를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쾌락을 위해서, 물질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거나 주님을 헌신짝같이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했으며
디모데후서 3장 4절에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는 시대가 온다고 말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와 쾌락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선생은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따라갔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 포커스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생활도, 사회생활도, 직장생활도, 사업할 때도 언제나 마음의 중심이 예수님께 잡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흔들리면 절대로 안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이 내 마음에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마음에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인데 세상이 주인이면 세상이 시키는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인이면 예수님이 시키는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세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께 포커스를 맞추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우상 숭배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나 쾌락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 중심을 흐트려서는 결코 안됩니다.
15세기 이태리가 낳은 유명한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42살 때의 일입니다. 밀라노의 로드비치 공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모습을 그려 달라고 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열심을 다해서 데생을 했습니다. 예수님 중심에 모시고 오른편에 여섯 명, 왼편에 여섯 명의 제자들이 앉도록 하고 그는 또한 아주 예수님이 잔을 주신 그 은잔을 조밀하고도 아름답게 그려서 예수님 손에 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의 사랑하는 친구를 청해 가지고서 그 그림을 품평해 달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와서 막 눈이 휘둥그래지는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예수님 모습도 오른편, 왼쪽 여섯, 여섯 제자 열두제자의 모습도 너무나 살아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손에 들고 있는 은잔이 이렇게 아름답고 섬세할 수 있는가! 이 그림을 보니 은잔이 이렇게 돋보일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이 샛노래지더니 붓을 들어 그림에 쫘~악 쫙 그어 버렸습니다. 친구가 “이렇게 좋은 그림을 그렇게 줄을 긋다니. 이사람 돌았냐? 왜 그러냐?” 그는 하는 말이 “온 우주 만물 중에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지 되는데 내가 그린 그림에 은잔이 중심이 되면 안된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봐야지 예수님의 손에 든 은잔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이 그림은 실패작이라고..” 맞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애를 들여다볼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안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셔야 돼요. 우리가 칭찬받고 우리가 영광을 받고 우리가 높임을 받으면 우리는 실패작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온 세상 다 준대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 심사, 행동, 우리의 삶 전체 모든 일에 모든 것에 예수님께서 중심이 되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밖에는 귀한 분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굽니까?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고 죄로써 쓰레기더미에 내던져 버린 거름 무더기에서 주님께서 몸찢고 피 흘려 값 주고 사주셔서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의 모든 존재는 주님의 소유물이요,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요, 창조주요, 왕이요, 주인이요, 우린 주님만 섬기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결코 우상숭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론>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두드러진 사랑실천 안한 죄, 이웃을 정죄한 죄, 우상숭배한 죄. 이 세 가지 죄악을 다 벗어 버리고 주님의 손을 잡고 새해를 향하여 나아가야만 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누더기 옷을 벗어 버리고 목욕을 하고 새해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은
환영을 받지만 구린내 나는 썩은 누더기 옷을 그대로 걸치고
온 몸에 때를 잔뜩 덮어쓰고 새해를 향하는 사람은 새해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옵니다.
내 아버지이시여,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버리는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되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타당화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사랑 못하고 사는 죄를 회개하게 도와주시고 남을 정죄하고 산죄를 회개하게
도와주시고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모든 죄에서 벗어나서 우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잘못을 뉘우치고 새해로 가자’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집안 정리도 하고 상점에서는 재고정리도 합니다. 안 입는 옷가지나 신발 등은 구제기관에 넘기고 안 팔리는 상품은 헐값으로 세일을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죄 많은 삶을 그대로 안고 새해로 갈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새해를 위하여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미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잘못을 다 청산하고 가야만 합니다.
<본론>
1. 사랑하지 못한 삶을 회개하자
첫째로, 우리는 묵은해를 돌아보며 사랑 못하고 산 삶을 회개하고 청산하고 가야만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태산같이 진 인생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펴볼 때 우리는 죄 중에 잉태되고 죄 중에서 태어나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실상 지옥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 죄가 끄는대로 끌려 다녔었습니다.
요한1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한다고 해서
너무나 우리의 삶이 마귀에게 속해서 살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건지시려고 목숨을 내어 놓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죄의 깊은 수렁에 빠지고 죄의 어마어마한 사슬에 묶였던지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해방할 도리가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그 어마어마한 대가로 죄악의 수렁에서 죄악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님 앞에 한없이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내내 우리 섬기시고 우리를 위해서 그 목숨을 대속재물로 바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마음속에 깊이 오늘 느껴보는 시간에 이 예수님께 엄청난 빚을 받았으니 이 사랑의 빚을 느낄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빚을 지면 마음이 자나 깨나 무겁습니다. 빚을 청산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항상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의 사랑의 빚진 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늘 그 빚이 마음 속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빚을 갚으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약사 한분이 자기 교회에서 전도 유망한 한 학생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학생은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부모님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뜨시고 동생 둘을 데리고 살자니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약사가 동생 둘은 특별히 국비장학금을 받도록 하고 이 사람 청년에게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주고 대학을 졸업 맡을 때까지 모든 일절의 경비를 빌려 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이래서 이 청년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생들은 국비장학금을 받으며 별 고생 없이 학업을 5년 동안 마쳤습니다. 일류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고 난 다음 이 청년이 약사를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진 사랑의 빚은 이루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5년 동안 학비를 다 빌려 주었으니 이 제 내가 취직을 했으므로 한꺼번에 돈은 값을 수 없고 조금씩 선생님에게 대한 빚을 갚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약사가 싱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원래 내가 돈을 빌려 줄때부터 받을 생각을 안했네. 공짜로 준다면 자네의 마음에 부담이 될까 싶어서 내가 장차 갚으라고 말을 했네. 그것은 자네에게 내가 그냥 준 것일세. 그러므로 이제 이 빚은 자네와 똑같이 이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가난한 사람이 고난당할 때 도와주는 것으로 이 빚을 갚게나.”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어떻게 갚겠습니까? 예수님은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갚는단 말인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 말합니다. “내게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내게 빚을 갚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빚진 그 사랑의 빚을 우리의 이웃에 갚아야 됩니다. 이웃이라고 해서 버스타고 시골까지 내려가야 이웃이 있고 저 선교지에 가야만 이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있는 그곳이 이웃입니다. 내 남편이 이웃이요, 내 아내가 이웃이요, 내 자식이 이웃이요, 내 옆집에 있는 분이 이웃입니다.
얼마 전에 할머니 한 사람이 자동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습니다. 아주 옷도 잘 입고 귀하게 생긴 분입니다. 경찰이 그 아파트에 가서 수색을 하니까 아파트도 깨끗하고 장신구들도 비싼 장신구가 많고 도무지 자동차에 뛰어들어 자살할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서랍을 여니까 수첩이 하나 나오는데 매일매일 일기장에 일기를 적은 수첩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경찰관이 무릎을 쳤습니다. 죽은 이유를 알았습니다. 매일매일 수첩에 ‘오늘도 아무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다음 페이지를 뒤진 후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다.’ 또 페이지를 여니까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전화 한 통 걸어준 사람이 없다.’ 이 할머니는 극도의 고독 속에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들끊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닭장처럼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아무도 다정하게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 없고 아무도 전화한통 걸어주는 사람 없었습니다. 극도의 고독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는 달려오는 자동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은 것입니다. 우리 이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 곁에 있는 분이 이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바로 옆에 있는 이웃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만 잘살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항상 이웃에 대해서 마음에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관심가지고 살피면서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오늘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어 회개해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로 40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이웃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베푼 것이 곧 주님께 베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병들었을 때 방문하고 굶주렸을 때 먹여주고 갈하였을 때 마시우고 헐벗을 때 입혀주고 감옥에 갇힐 때 돌보아 준 것이 곧 예수님을 위해서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평생 도왔습니다. 신문기자가 가서 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어떻게 인도에 와서 가장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이렇게 끝까지 돌볼 수가 있었습니까? 수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가난한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의 얼굴 속에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드는 마음으로 받드니까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지 모르겠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버린 사람들의 얼굴 속에 예수님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말씀하신 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 소자 중 지극히 작은 자 한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의 모범이 되었던 성 마틴은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몸에 입고 있던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다 나누어 주고 난 후에 벌거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외투만 걸치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오다가 보니까 길거리에서 벽에 기대어 있는 벌벌 떨고 있는 노인 거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말에서 내려서. “형제여,” 하며 부르자 거지는 주름이 깊게 패인 초췌한 얼굴로 마틴을 쳐다 보았습니다. 마틴은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그 자리에서 벗어서 칼로써 반쪽을 짝 쪼갰습니다. 발가벗고 말 타고 집에 못들어 가니까 반쪽 외투를 거지에게 입혀 주고 반쪽만 몸에 걸치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까 사람들 마다 손가락질을 하고 “저 발가벗고 반쪽만 입고 가는 마틴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에 마틴이 잠을 자는데 꿈에 예수님이 천사를 데리고 계시는데 자기가 잘라 준 반쪽 외투를 입고 계시거든. 그래서 놀래서 보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천사를 보고 “얘들아, 내 이 반 쪽 입은 외투는 바로 저 마틴이 자기 외투를 잘라서 내게 입혀 준 것이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꿈에 보았던 것입니다. 이 소자 중 지극히 작은 이 한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뭐 나만 살면 되지 이웃 지킴이입니까? 내가 뭐 이웃까지 지켜야 됩니까?”
바로 창세기 4장 9절에 보면 가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내가 뭐 아우 지키는 사람입니까? 왜 아벨이 어디 있는 것 날보고 묻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요한1서 3장 16절로 19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지키는 것이 결과는 나를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짓밟아 버리고 무관심한 것이 결국 나중엔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한 대부호가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늦게 나이가 들어서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너무 아들이 좋아서 금지옥엽으로 길렀습니다. 그 아들이 7살이 되었을 때 그는 특별히 주문해서 가죽으로 만든 좋은 승마복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그 아들에게 승마복을 입혀 가지고서 생일날 산책을 나갔는데 너무 너무 멋있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산책을 하고 돌아오고 난 다음 아들이 앓아 들어 누워서 시름시름 앓다가 일주일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너무나 통곡스럽고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역학조사를 해보니까 이 아들이 급성 유행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 유행병이 어떻게 들렸는가 보니까 그 옷에 병균이 드글드글 했습니다. 그 승마복에 왜 병균이 드글드글했는지 알아보니까 승마복을 만드는 가난한 바느질하는 아주머니는 어느 집 지하실에서 전염병이 걸려 죽어가는 남편을 데리고서 그 승마복을 기웠습니다. 그 일주일전에 이 부자에게 찾아와서 “우리 남편이 급성유행병에 걸려 죽어가니 제발 치료비를 좀 달라”고 그렇게 애걸복걸했어도 이 부자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아들의 승마복을 맡겨 놓았는데 그 부인이 그 양털 승마복을 만들다가 너무 떨고 괴로우니까 그 승마복을 남편에게 입혀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승마복에 남편의 병균이 잔뜩 묻었습니다. 그 승마복을 완성해서 보내니까 그 부자가 아들에게 승마복을 입히니까 그 병균이 그대로 옮아서 아들이 죽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만일 그 여자가 남편이 급성 유행병에 걸려 죽어가니 좀 도와 달라고 부자에게 사정할 때 아들에게 준 의복의 100분의 1의 돈만 주었을지라도 그 아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이웃을 무시한 것이 자기에게 어마어마한 재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이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내 것만을 챙기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한해를 보내면서 참으로 내가 몰인정하게 살았지 않았느냐 사랑 없이 이기주의로 나만 위해서 살지 않았는가 우리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새로운 마음에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이웃을 정죄한 삶을 회개하자
둘째로, 이웃을 정죄하고 산 삶을 회개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 도적과 목자가 뭐가 다릅니까? 도적은 오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만 시키지만 목자는 오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해를 살면서 이 도적과 짝을 지어서 사탄의 도구가 되어 여러분 이웃을 끊임없이 정죄하면서 살아온 죄를 회개하고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벗기고 입히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웃에게 참말 거짓말 다 보태 가지고서 자꾸 발가벗깁니다. 이웃의 명예와 이웃의 도덕적인 삶을 발가벗겨서 사람들에게 매장하려는데 우리가 다 가입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보고 손가락을 내밀면 한 손가락은 이웃을 욕하지만 세손가락은 자기를 보고 욕을 합니다. 마지막 엄지손가락은 하나님을 보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오면 우리를 참소해서 발가벗겨 놓습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했습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짓게 하여 발가벗겨 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 전에까지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누가 발가벗겼습니까?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와서 미혹하여 죄를 짓게 하고 영광의 옷을 벗겨 버리고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 뒤에 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서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겨 옷을 해 입혔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벌거벗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니까 피를 흘렸지 않습니까? 짐승의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해서 입혔는데 예수님도 이 세상에 마귀가 우리를 벗겨 놓고 할퀴어 놓은 이 인생을 입히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고 그 의의 가죽옷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로 26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마귀가 오면 발가벗깁니다. 온갖 참소를 해서 벗기는 것을 전문으로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 우리 교회 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지역장, 구역장 혹은 이웃 사람에게 항상 벗기는 일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쉬지 않고 입에서 독을 내어 뿜고 벗기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일인 것입니까? 마귀와 함께 합작하여 벗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전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피를 흘려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입히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입힙니다. 그러나 마귀는 벗깁니다. 여러분 이웃을 위해서 입히기 위해서 여러분께서 기도해 준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일년을 살면서 얼마나 벗기는 일에 여러분 함께 동참하고 입히는 일에 얼마나 인색했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면은 이웃을 할퀴고 치며 치료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강도가 달려들어 있는 것을 빼앗고 때려 그만 죽게 만들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강도 즉, 마귀가 하는 것은 때려서 할퀴어서 그만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 번 와서 좋은 일 뭐합니까? 항상 남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켜 버리려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문을 보십시오. 항상 죽이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뉴스를 보십시오. 늘 영적으로 심적으로 도덕적으로 육적으로 죽이는 일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마귀가 꽉 들어찼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때려서 거의 죽어서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성경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리저리 가다가 그 상처 입은 사람을 보고 말을 타고 와서 내려서 그 상처 입은 곳에 기름과 포도주를 붙고 붕대로 처매어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4절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여러분 몇 사람이나 할퀴고 상처 입은 사람을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처매어 주고 여러분 돌보와 주었습니다. 마귀와 짝을 해서 함께 할퀴고 함께 상처 입히고 함께 죽이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동참했지만 우리가 싸매어 주고 위로의 기름을 부어 주고 품어주고 돌보아 주는 일을 과연 몇 번이나 했습니까? 그리고도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슴을 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면 이웃을 참소하고 기도해주지 않습니다. 마귀 하는 일은 밤낮 참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패가망신했습니다. 자식들 다 죽고 가산 다 잃어버리고 아내는 떠나고 몸은 문둥병이 걸려서 잿더미위에 앉아서 기왓장으로 몸을 끌고 있는 처참한 지경입니다. 거기에 욥의 친구들이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끊임없이 욥을 참소했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이 그 고난당하는 것은 죄 때문에 당한다고 욥을 공박하고 비난하고 참소했습니다. 욥은 그 친구들 때문에 그 고통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욥기 42장 7절에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참소는 아무리 친한 친구가 와서 말한 것도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참소는 하나님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참소는 마귀가 와서 하는 것입니다. 밤낮 소근거리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오셔서 한 것은 욥을 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웃이 넘어질 때에 짓밟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웃이 넘어지면 일으켜서 다시 추스려 주십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이른 아침에 새벽공기를 짓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리새 교인, 사두개 교인, 교법사, 모세의 제자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이 여자는 머리가 산발이 되고 눈은 충혈 되었습니다. 몸은 의복이 찢어지고 맨발 벗고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이 모세의 제자들은 혈기등등, 살기등등했습니다. 분노한 모습으로 손가락을 내밀면서“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자는 돌로써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 왜 여자를 죽이려고 했으면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지 왜 예수님께 끌고 나왔습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뭐라고 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젊은 자로부터 나이 많은 자까지 눈을 맞추어 보시고 난 다음 “당신들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써 이 여자를 치시오.” 그리고는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뭐를 썼다고 생각합니까? 그곳에 있는 바리새교인, 사두개인, 교법사들의 감추인 위선의 죄들을 주님이 백일천하에 기록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여자에게 돌을 치면 그 다음 그 돌을 들고 내가 너를 치겠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없는 심판은 긍휼이 없는 심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죄가 없다고 하면서 이 죄 있는 여자를 돌로 치면 그 다음 나는 그 돌을 가지고서 너를 치겠다. 너희들 죄가 이런 것 있지 않느냐? 예수님이 어깨 너머로 그리스도의 손가락이 적어 가는 글을 보고 난 다음 큰 자로부터 작은 자까지 돌을 다 버리고 모두다 뺑소니를 쳤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 양심의 스크린에 등불을 비췰 때 도망 안칠 사람이 있어요? 나는 죄 없는 사람이요. 나는 의로운 사람이요, 나는 당당한 사람이요, 나는 조금도 거리낌 없어요. 주 앞에 설사람 있어요? 모세의 제자들 소이 자기들은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율법대로 살았다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다 도망쳤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돌아보니까 다 가버리고 돌맹이만 흩어져 있습니다. “정죄하는 자 없나이다.” 예수님이 그 여자를 딱 바라보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가서 다시 죄 짓지 말아라.”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보십시오. 정죄 안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 흘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갚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지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는 마귀가 하지 예수님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의 발을 씻어주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발이 더러워졌으면 보혈로 씻어주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한 해를 살면서 이웃을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세의 제자들처럼 온갖 있는 율법, 없는 율법 다 끄집어 내놓고 남을 정죄했습니다. 자기는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망태기는 뒤로 메고 남의 망태기는 앞에 메고 앞에 있는 남의 망태기에 자꾸 없는 것, 없는 것 다 집어 놓고 욕만 하고 자기의 뒤에 멘 자기의 망태기는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죄하는 것 쉽습니다. 그러나 남을 용서하고 살리는 것 심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저런 고약하고 나쁜 놈, 왜 구약시대같이 하나님이 벼락을 때려서 벌을 내렸으면 좋겠다.” 구약시대에는 정죄하는 시대였습니다. 율법의 시대였습니다. 오늘날은 죽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이 벼락을 안 때리는 것은 오늘날은 용서의 시대인 것입니다. 사랑의 시대인 것입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정죄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용서하고 의롭게 만드는 일에 동참을 해야지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참예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3.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하자
셋째로, 우리가 청산하고 가야 될 일은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36절로 39절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 주님 밖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성수주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부모님 초상을 주일날 치뤄야 하기 때문에 성수주일 할 수 없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합니까? 부모 초상 치루는 것이 중요합니까? 주님을 내놓고 보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날은 주일입니다. 예수님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주여 내 아버지가 세상을 떴으니 장사를 지내고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었습니다. 공경해야지요. 그러나 주 안에서 공경해야 됩니다. 주님보다 먼저 세우면 안됩니다. 자식사랑 좋지요. 자식사랑 안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성경에는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 아무데도 없어요. 천륜적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부모를 사랑하라는 말은 수차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자식을 사랑해야지 주님을 제켜놓고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내사랑, 해야죠. 아내는 내 몸이니까 사랑해야지요. 그러나 아내사랑 때문에 십일조도 떼먹고, 주일날도 아내 따라 놀러 나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을 부차적인 생각으로 한다면 아내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사랑. 좋지요. 친구 사랑해야죠. 그러나 주님보다 친구가 앞설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도 큰일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명예를 위해서, 지위를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쾌락을 위해서, 물질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거나 주님을 헌신짝같이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했으며
디모데후서 3장 4절에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는 시대가 온다고 말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와 쾌락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선생은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따라갔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 포커스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생활도, 사회생활도, 직장생활도, 사업할 때도 언제나 마음의 중심이 예수님께 잡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흔들리면 절대로 안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이 내 마음에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마음에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인데 세상이 주인이면 세상이 시키는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인이면 예수님이 시키는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세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께 포커스를 맞추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우상 숭배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나 쾌락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 중심을 흐트려서는 결코 안됩니다.
15세기 이태리가 낳은 유명한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42살 때의 일입니다. 밀라노의 로드비치 공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모습을 그려 달라고 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열심을 다해서 데생을 했습니다. 예수님 중심에 모시고 오른편에 여섯 명, 왼편에 여섯 명의 제자들이 앉도록 하고 그는 또한 아주 예수님이 잔을 주신 그 은잔을 조밀하고도 아름답게 그려서 예수님 손에 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의 사랑하는 친구를 청해 가지고서 그 그림을 품평해 달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와서 막 눈이 휘둥그래지는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예수님 모습도 오른편, 왼쪽 여섯, 여섯 제자 열두제자의 모습도 너무나 살아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손에 들고 있는 은잔이 이렇게 아름답고 섬세할 수 있는가! 이 그림을 보니 은잔이 이렇게 돋보일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이 샛노래지더니 붓을 들어 그림에 쫘~악 쫙 그어 버렸습니다. 친구가 “이렇게 좋은 그림을 그렇게 줄을 긋다니. 이사람 돌았냐? 왜 그러냐?” 그는 하는 말이 “온 우주 만물 중에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지 되는데 내가 그린 그림에 은잔이 중심이 되면 안된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봐야지 예수님의 손에 든 은잔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이 그림은 실패작이라고..” 맞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애를 들여다볼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안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셔야 돼요. 우리가 칭찬받고 우리가 영광을 받고 우리가 높임을 받으면 우리는 실패작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온 세상 다 준대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 심사, 행동, 우리의 삶 전체 모든 일에 모든 것에 예수님께서 중심이 되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밖에는 귀한 분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굽니까?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고 죄로써 쓰레기더미에 내던져 버린 거름 무더기에서 주님께서 몸찢고 피 흘려 값 주고 사주셔서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의 모든 존재는 주님의 소유물이요,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요, 창조주요, 왕이요, 주인이요, 우린 주님만 섬기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결코 우상숭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론>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두드러진 사랑실천 안한 죄, 이웃을 정죄한 죄, 우상숭배한 죄. 이 세 가지 죄악을 다 벗어 버리고 주님의 손을 잡고 새해를 향하여 나아가야만 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누더기 옷을 벗어 버리고 목욕을 하고 새해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은
환영을 받지만 구린내 나는 썩은 누더기 옷을 그대로 걸치고
온 몸에 때를 잔뜩 덮어쓰고 새해를 향하는 사람은 새해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옵니다.
내 아버지이시여,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버리는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되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타당화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사랑 못하고 사는 죄를 회개하게 도와주시고 남을 정죄하고 산죄를 회개하게
도와주시고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모든 죄에서 벗어나서 우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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