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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얻게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2009 추천 수 0 2009.04.16 23: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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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0:30∼31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님의 교회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1월 18일 

요한 사도는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두 가지로 밝히고 있는 바, 그 첫 번째 목적이 본문 31절 상반 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만인을 살리시는 구원자 즉 그리스도시라는 것과, 그 분이 곧 성자 하나님 되심을 믿게 하는 것이 요한 복음 기록의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인 동시에 성자 하나님이실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지난 10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3주전, 부활하신 주님을 뵌 도마가 주님을 향하여 터트린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란 감탄의 고백을 통하여도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한번더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기술의 두 번째 목적은 31절 하반 절에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습니다.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라는 요한의 말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이 말 속에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은 다 죽은 자들이라는 대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요한의 이 전제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 살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생명을 지니고 있음의 증거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모두가 실은 죽은 자와 진배없다는 요한의 대 전제를 우리는 과연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요한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을 의미할진대, 우리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요한의 전제는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이란 관점에서 볼 때, 영원에 접목되지 아니한 생명이란 산 것 같으나 산게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인 대지로부터 뿌리째 뽑힌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 뽑힌 나무가 당장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생명의 고갈일 뿐 생명이 아니기에 결국은 말라죽어 버리고 맙니다. 영원과 단절된 모든 생명 역시 이와 같아서 죽음 이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이 요한 복음을 쓴 궁극적인 목적은, 결코 시체 이상일 수 없는 불쌍한 인간들로 하여금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복음은 문자 그대로 `복된 소식(福音)' `Good News'일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뽑힌 나무처럼 생명이 고갈되어 가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 주는 것보다 더 복된 소식은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산 것 같으나 실은 죽은 자에 불과한 인간들이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본문 31절을 다시 살펴보십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이름을 힘입음으로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는다' `힘입는다'`얻는다'는 동사는 모두 일회적인 단순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상태를 강조하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번 믿어 보다 치우는 것이 아니라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상태,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고 사는 상태 속에 있을 때, 영원한 생명의 상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계속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내 중심에 모시어 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힘입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합니까? 주님의 이름을 믿으면 이번에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의 원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의 질문으로 되돌아 가 보십시다. 산 것같으나 실은 죽은 자에 불과한 인간들이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그 분 안에서, 그 분을 힘입어, 그 분으로 인해, 육체의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내 속에 내가 영원한 생명 속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육체의 죽음에 상관없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어찌 신(神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 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구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 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 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9~11)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처럼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삼위일체 되신 성자 하나님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었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것이 빠짐없이 예수님의 것일 수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 망정 그 분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참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상태 속에 있을 때, 참되고 영원한 그 분의 생명 또한 나의 것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가 주님의 영원한 생명, 참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 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시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심을 믿을 수 없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행하셨기에 그 일로 인하여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숱한 기적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기적들은 타종교에도 다 등장하는 이야기들이기에, 그것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유일한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신다는 표적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을 사랑하사 더불어 사셨다는 것―바로 그것입니다.

여타 종교의 신들은 예외 없이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부터 격리되면 될수록 그 신은 더 지고하고 더 지엄한 신으로 숭상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 분은 신의 자리에서 내려오시어 우리 가운데에 와 주셨습니다. 신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로서 였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사 우리와 더불어 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사,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계시는 분이심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므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와 영원히 더불어 사시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그 분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산유수와 같이 쏟아 내고 거룩하기 그지없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인간과 더불어 살기를 거절하고 심산 계곡 속에 자신을 고고하게 격리시키는 분이었더라면, 그 분은 인류의 성현 일수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심히 기뻐하셨던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사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갈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즐거이 노래 부르며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 안에 계셨을 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사시는 그리스도, 창녀나 거지와 같이 가장 쓸모 없는 인간들과 더욱 더불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매, 우리가 주님의 참되고 영원하신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이제 자명해 졌습니다. 그것은 보다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되, 사랑하며 섬기면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영원불변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르는 영원한 생명이란 이 땅에서부터 더불어 사는 힘, 더불어 섬기면서 사는 능력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바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와 더불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결여된 것이 있다면 `더불어 사는 능력'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고 복받아 나만 잘되기를 바라는 식의 기복 신앙에 젖어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나와 관련 없고 나와 다른 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섬기며 살려 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죽은 뒤에나 얻는 것으로 제한하여 잘못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이란 더불어 사는 영원한 힘, 더불어 사는 영원한 능력임을 일깨워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와 교인의 수는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그 수적 증가가 이 사회의 질적 변화를 초래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본질에서 이탈한 양적 팽창이 그 자체의 모순과 문제를 끝없이 야기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한국의 법학자가 독일 연수시 독일 법학자로부터 독일 판례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공동으로 생활비를 부담하는 맞벌이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50만원의 수입에서 20만원을, 남편은 100만원의 수입에서 20만원을 각각 생활비로 부담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뭔가 공평치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수입의 40%를 생활비로 내어놓는데 비해, 남편은 고작 수입의 20%만을 부담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비록 절대적인 금액은 20만원으로 동일하다 할지라도 수입 비율로 따지자면, 아내인 자기가 남편의 두배를 부담하는 셈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 역시 수입의 40%를 부담해 줄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주말에 외출한다던가 주중에 외식할 경우의 경비는 전액 자기가 지불하므로, 자기 역시 실제로는 수입의 40% 정도를 가정을 위해 사용하는 셈이라는 이유로 아내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아내는 할 수 없이 남편이 생활비를 더 부담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아내의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남편에게 보다 많은 생활비를 지불할 것을 명령하는 판례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다 들은 한국의 법학자가 독일 교수에게 `그렇게 하고도 그들이 부부로 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야기를 듣는 우리 모두의 질문일것입니다.부부지간에 그런 소송을 대법원까지 벌리고서도 부부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 감정으로는 수용될수 없는 일입니다. 독일 교수의 대답은 놀랍게도 이러했습니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 둘이 안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려고 소송했는데 왜 살지 않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더 잘 살기 위해 법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헤어지기 위해 똑같은 법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으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더불어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보다 더 잘 더불어 살게 해주는 윤활유가 됩니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것이 바른 생명의 삶인 줄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 무엇이든 결별의 동기요 수단이요 도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절약과 절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비단 이때가 아니더라도 절약과 절제란 우리가 늘 지켜야 할 미덕이기에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단 한가지,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절약하고 절제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경제 위기에서 나혼로 살아남기 위함이라면, 적어도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른 자세일수가 없습니다. 그런 이기심으로는 설령이 위기를 극복한다 할지라도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야기되고 말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경제 위기 속에서 절약하고 절제해야 할 이유는, 경제 위기이기 때문에, 이 경제 위기 속에서 더 많은 자들과 섬기며 사랑하며 더불어 살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 백성에게 왜 매일 기업의 도산과 실직자가 속출하는 경제 위기를 주셨습니까? 그 동안 이 백성이 모두 이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더불어 사는 생명을 상실했기에, 이제 더불어 사는 참 생명의 사람으로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데레사 수녀의 지적처럼, 사람이란 많은 것을 소유할수록 더불어 살기가 더 어렵습니다. 소유가 많아질수록 자칫 인간이란 소유를 위한 도구에 불과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소유에서 벗어날수록, 소유로부터 자유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더불어 살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 왔습니까? 얼마나 나만을 위해 살아 왔습니까? 그런 자기 중심적 이기심으로 이 사회가 더불어 사는 바른 공동체가 될 턱이 없지 않습니까? 오늘 이 사회가 모든 면에 걸쳐 철저하게 부실 사회가 되어 있음은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했던 우리 모두가 공범이었던 결과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경제적 위기를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로 알아이제부터 더불어 사는 법을 익히고 배워야 겠습니다.

제 자신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우리 집에는 매일 아침이면 우유가 배달됩니다. 아이들이 성장한 뒤론 우유를 잘 마시려 하지 않습니다. 대게 남은 것은 아내와 제가 마셔야 합니다. 저는 우유를 먹고 자란 세대가 아니기에 우유마시는 일이 전혀 달갑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경제 위기가 닥친 지금이야말로 우유를 끊을 적기입니다. 그러나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저보다 더 어려울 우유배달원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야구르트도 끊지 못합니다. 야구르트 아주머니의 어려운 생계를 차마 더 어렵게 만들 수 없는 탓입니다. 시장 모퉁이에 있는 오뎅 아주머니의 수레 앞을 지날 때면 오뎅 한 두꼬치는 사먹어야 합니다.

제 나이의 남자가 길거리에서 오뎅 사먹는 모습을 이제껏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먹어야만 합니다. 그 아주머니가 몇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연고입니다. 가끔 아내를 따라 시장엘 가면 야채 장사 아주머니가 아내를 불러 오늘은 무슨 야채가 많이 남았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 야채를 사 드려야 합니다. 오늘 당장 필요가 없더라도, 사서 냉장고 안에 넣어 둘 망정 사드려야 합니다. 그 아주머니는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분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이상은 제 삶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절약과 절제를 생활화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 삼아 한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보다 못한 처지에 있어 보이는 더 많은 자들과 더불어 살기 위함입니다. 절약과 절제 없이는 더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당장 불필요할 수도 있는 것들을 마다치 못하는 것은 사치나 낭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 으로서의 의무요 책임이라 믿고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여 절약하고 절제하십시다. 그러나 더 많은 자들과 더불어 살기 위하여 절제하고 절약하십시다. 나의 절약과 절제가 가장 약하고 연약한 자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추악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인색함일 뿐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절약과 절제는 아닙니다. 정말 가련한 자들과 한사람들이라도 더 많이 더불어 살기 위해 절약하고 절제할 때, 작금의 경제적 위기야말로 이 나라를 바른 생명의 공동체로 일구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 될 것입니다.
참된 생명은 더불어 사는 힘이요, 영원한 생명은 함께 사는 능력입니다.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고 익히고 행하므로, 이 경제적 위기를 우리나라가 바른 생명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의 기회로 활용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어려울수록 정의롭게 살아야 함은, 부정과 부패란 더불어 사는 사회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기 때문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자들과 더불어 살게 하시기 위한 도구들임을 망각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란 더불어 사는 힘이요 능력임을 깨달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우리의 삶으로, 우리가 참된 생명의 사람임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 증명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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