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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타내셨으니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1890 추천 수 0 2009.04.17 00:02:02
.........
성경본문 : 요21:1∼14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월 25일 성찬주일 

본문 1절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 하니라"젨

첫째, `언제'는 `그후'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후'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전'이란 요한복음 20장이요, 요한복음 20장은 부활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날 저녁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다락방에 나타나셨으며, 그로부터 여드레 후 다시 다락방으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시기는 `그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디에서'는 `디베랴 바다' 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다'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데, 그 호수가 워낙 광활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호수란 말 대신 `바다'라 즐겨 불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숫가에는 로마의 디베랴 황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도시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후에' `디베랴 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본문은,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 14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것이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두 번, 그리고 갈릴리 호수에서 한 번, 도합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요,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람들 앞에 네 번째 자기를 나타내신 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저 한 번 나타나 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요구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그렇게 행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들이 이때 왜 갈릴리에 있었는지, 갈릴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규명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규명되어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현현(顯現)하신 의미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때 갈릴리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서 였습니다. 마가복음 14장 28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부활하신 뒤에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6장 7절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를 통하여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음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곧 바로 땅 끝을 향해 보내시지 않고 왜 제자들을 갈릴리로 되돌아가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란 삶의 터전이요 생존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로 그 삶의 터전, 생존의 현장에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새롭게 정립하고 새로이 시작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실존의 현장으로부터 벗어난 믿음이란 참 믿음일 수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진리 위에 그들의 가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까? 진리 안에서 먹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했습니까? 구원의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욕망의 포로 된 갈릴리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 땀흘렸습니까? 불행히도 본문 3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말았습니다. 잡은 고기로 이웃과 더불어 살기 위함이거나, 잡은 고기를 판 돈으로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전에 어부였기에 단순히 옛 삶으로 회귀 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그것이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무도 생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밤이 맞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건져 올리지 못했건만 그 실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숙고해 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유 없이 그저 물고기만을 잡으려 했습니다. 잡되 한 마리라도 더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물고기에만 집착하고 있었던지, 민망스럽게도 본문 4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그들이 왜 갈릴리로 갔습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주님을 뵈올 지 깨어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수치스럽게도 그들은 그들 앞에 주님께서 이미 나타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신 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밤을 새워 가며 추구했던 것은 물고기로 대변되는 세상의 재물, 세속적 부(富)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면서 당신 자신을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또다시 확인하므로써, 그들이 왜 갈릴리에 있는지, 갈릴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들의 생이 갈릴리에서부터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확연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는 이 본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신앙의 연륜이 아무리 길다 해도, 이 이전에 아무리 많은 체험을 했었다 할지라도,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는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경우 우리의 신앙이란 신앙이랄 것도 없이 원점에서 의미 없이 맴돌 뿐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2∼3년이나 함께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배웠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뵙기까지 했고,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지금 갈릴리에 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인식치 못했을 때, 그들의 삶은 3년전 주님을 만나기 이전으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앞에계신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한채 고기잡이에만 열중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3년전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이 지경이었다면 하물며 우리야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치 못할 때 우리가 어찌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과 구별 될 수 있으며, 어찌 세상을 밝히고 맑히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세상의 이전투구 속에 빠져, 헛되이 빈 그물만을 의미 없이 반복해 던지는 욕망의 포로 이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신이 장사 지낸바 되었던 무덤가에서 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주님의 무덤을 찾을 때 그 무덤의 의미란 절망과 탄식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절망의 밑바닥 속에서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주님을 깨달았을 때 막달라 마리아에게 무덤은 더 이상 벼랑 끝이 아니라 찬란한 새 생명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 다락방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실내에, 집안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주님을 제자들이 깨달을 때에 두려움과 망설임의 다락방은 환희와 감탄의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맹목적으로 고기잡이에 나선 갈릴리 호수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란 집밖이요 생존의 현장입니다. 그 생존의 현장에서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만났을 때, 제자들을 단순히 생계의 볼모로 잡고 있던 갈릴리는 만인 구원의 역사적인 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도, 집안에 있을 때에도, 집밖 삶의 현장에 있을 때에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절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맹목적으로 반복되는 삶의 무의미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사실을 믿고 나아가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는 참된 변화가 계속되고, 그 당연한 결과로 우리 삶의 현장의 변화가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월 첫째 수요 예배 시간에 시편 3편을 배웠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를 피하여 황급히 도망가며 지은 시입니다. 아들의 칼날을 피해 맨발로 도망하는 아비의 심정이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의 시는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대적하는 자가 어찌 이다지도 많습니까? 도처에 일어나 나를 치려는 사람들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영혼을 가리켜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하고 있사오니, 하나님이여 이것이 과연 사실입니까?"
참으로 비탄의 절규입니다. 벼랑 끝에 선 인생이요 절망의 심연에 빠진 몰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는 놀랍게도 갑자기 이렇게 반전됩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이다"

맨발로 정신없이 도망가면서 이제 방금 전까지 `나의 대적이 어찌 이다지도 많으냐'고 울부짖던 다윗에게 어찌 이와 같은 대 반전이 일어 날수 있었습니까? 그 해답은 한가지―지금 비록 패장이 되어 도망가지만, 그러나 이 순간에도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증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은 시편 3편 3절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깨어 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붙들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깨달음입니까? 자신은 그저 곤하게 곯아 떨어져 잤을 뿐인데 아침에 일어나 새 날을 맞이하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저주하셨다면 어제 밤 잠자리에서 이미 호흡이 끊어져 버렸어야 했을 터인데, 잠자는 동안 자신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아니하였음에도 오늘 심장과 오장육부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더 큰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다윗은 도망갈 망정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정변의 모든 결과를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패역한 아들 압살롬에게 마음속으로부터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마침내 왕좌를 되찾은 다윗에게 있어서 그 정변은 결과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남은 여생을 더더욱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도록 이끌어 준 촉진제가 된 셈이었습니다. 다윗이 3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된 신앙의 표상으로 존경받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결과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가 오늘 새날을 맞아 호흡하고 있겠습니까?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제 밤에도 우리의 심장과 오장육부가 살아 움직였다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견고히 붙들고 계심의 증거가 아닙니까? 주님께서 잠든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쳐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이 시간 이 곳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성령의 빛으로 우리의 영혼을 비추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우리가 오늘 아침에도 우리의 입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살아 있는 우리 자신들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제가 있다면 주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서 보이지 않으심이 아니라, 이미 당신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믿음 없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참된 믿음은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이 사실을 믿는다면 작금 우리에게 주어진 경제 위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이 사태의 결과를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 맡기고,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릇된 우리 삶의 자세를 바로 가다듬는 자들이 되십시다. 이 현실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그때 이 위기야말로 이 민족을 새롭게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 온 국민이 합심하여 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보다 큰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된다고 할지라도, 갈릴리 호수를 향해 언젠가는 헤어지고 말 헛된 그물을 반복해서 던지는 삶의 무의미성과 무가치성으로 부터 탈피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삶의 참된 가치와 의미는, 머지않아 공동묘지 속에 드러눕게 될 우리 속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신 주님,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안에만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요, 이것을 알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내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집안에서 잠자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 나를 견고히 붙들어 주고 계셨습니다. 내가 생존의 현장에서 땀흘리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아니 전혀 깨달으려 하지 않았기에, 우리의 삶은 텅빈 갈릴리를 향해 빈 그물만을 던지는 삶의 무의미성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어 우리의 영혼을 쳐 이곳으로 인도하시사,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다시 확인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늘 의식함으로 상황에 따라 일회일비하지 않는 의연한 구도자가 되게 하옵시고, 날이 갈수록 더더욱 주님의 뜻에 우리의 삶을 일치시켜 가는 참된 진리의 증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게 하옵시고, 작금 우리에게 닥친 경제 위기가 이 민족으로 하여금 참되고 의로운 민족으로 거듭나게 하는 은총의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이 경제위기로 인하여 오히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안에서 이 시대를 밝히는 영원한 진리의 등불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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