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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있느냐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2294 추천 수 0 2009.04.17 00:03:19
.........
성경본문 : 요21:1∼14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2월 8일 

에덴 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셨던 금단의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짓고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가 수반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동산 숲 속에 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질식할 것 같은 공포와 후회의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습니다. 동산의 정적을 깨트리고 아담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펴졌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시각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실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 구태여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일 시험을 치루어야 할 아들이 오락실에서 정신없이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 어머니가 아들을 향해 `너 지금 어디 있니?'하고 말했다면, 그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소재를 알지 못함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는 아들의 잘못을 일깨워 주려는 역설적 강조법입니다. 따라서 `너 지금 어디 있니?'란 말의 참뜻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네가 지금 있어야 될 곳은 오락실이 아니잖니?'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네 공부방이지 않니?'`네가 지금 할 일은 오락이 아니라 시험 준비하는 것 아니니?'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똑같습니다.
`아담아!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죄와 어둠의 나락 속이 아니잖니?' `네가 거할 곳은 빛 가운데요 하나님 존전이잖니?' `더 이상 흑암의 공포 속에서 떨지 말고 지금 당장 나오렴!'

죄를 짓고서도 무엇이 죄였는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왜 두려운지, 숲 속에 숨어 있으면서도 무슨 까닭으로 숨어야 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죄의 무게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숲 속 어둠으로부터 빛 가운데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수 있었습니다.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침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렇다면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바로 내게 있어서, 그 질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지금 지켜야 할 자리를 바로 지키고 있음으로 인한 칭찬의 의미이겠습니까? 아니면 있어서는 안될 곳에 거함으로 인한 질책의 의미이겠습니까?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은 갈릴리로 되돌아갔건만, 그러나 갈릴리에 도착한 그들은 주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조차 망각한 채 그들은 단지 그들의 필요에 의해, 그들의 욕구를 쫓아, 모두 갈릴리 바다를 향해 고기잡이에 나서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땀 흘리며 그물을 던지는 그 바닷가에 주님께서 나타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 중 단 한사람도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도 없이 그물을 던졌건만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지금 무엇이 잘못 되어 있는지를 한 번 짚어 보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빈 그물만을 기계적으로 반복해 던질 뿐이었고,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은 여전히 빈손이었을 따름입니다. 마침내 뭍에 서 계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을 본문 5절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것 역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하나님의 질문과 똑같은 의미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고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른 분별력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에게 분별력이 있니?' `분별력이 있다면 지금은 욕구에 사로잡혀 이런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니?' `너희들이 나를 등진 채 밤새워 수고한 대가로 얻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니?

제자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없나이다.'

주님의 질문 앞에서야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헛수고 하였음을 그제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그들은 욕구에 사로잡힌 자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허망한 공허함 뿐임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입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 서기 전까지는, 진리의 말씀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기 전까지는, 욕망에 눈먼 인간의 헛된 행진은 결코 멈추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의하지 않고서는, 허망한 헛수고를 헛수고로 바르게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오늘 아침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이 질문 속에서 우리는 방대한 성경 가운데 유독 본문에서만 유일회적으로 사용된 두 단어에 유의해야만 합니다.

첫째, `고기'란 단어입니다. 물고기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ikthus로써 신약 성경에 나타난 물고기는 원문에 모두 이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딱 한군데 예외가 있으니, 바로 본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 ikthus가 아니라 prosphag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성경 중 본문에서 주님에 의해 단 한 번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원래 물고기란 의미가 아니라 식탁 위에 올려지는 진미, 즉 진귀한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참뜻을 살리면 주님의 질문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얘들아!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었느냐?'
주석을 가하면 더 깊은 의미를 포착하게 됩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진리인 나를 등져서는 아무리 수고하여도 결코 귀한 것을 얻을 수 없단다.

두 번째로 유의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사용하신 `얘들아'란 단어 paidion입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어린아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이미 성인이 된 제자들을 부르는데 사용되기에는 전혀 적합치 않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본문 이외에 이 단어가 성인에게 호격으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 역시 이제껏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릴리 바다에서만은 제자들을 딱한 번 `어린아이들아!'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한 채 단지 허망한 바다를 향해 헛수고만을, 그것도 밤을 새워 가며 열심으로 헛수고하는 제자들이 주님 눈에는 어린아이―철없는 아이와 같이 비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이 철부지들아! 그처럼 철없이 살아서는 귀한 것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철부지 아이들입니까? 아니면 분별력을 지닌 성인들입니까? 무엇인가 잡으려고 그처럼 기를 쓰고 있는 우리 손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귀한 것들입니까? 아니면 허망한 공허함입니까?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헛수고를 헛수고 인줄 알지 못한 채 헛되이 반복하는 철부지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때 모 보일러 회사의 `효자 광고'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습니다. 시골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 댁에 기름 보일러를 설치해 드려, 부모님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나실 수 있도록 해 드리는 효자가 되자는 캠페인성 광고였습니다. 그 광고 이후 시골 지역에서 해당 보일러의 판매량이 급증했던 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보일러를 설치해 드린 도시 자식들은 시골 사람들로부터 효자란 칭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IMF구제금융 이후 사정이 돌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 모르고 치솟는 기름 값을 부담할 능력이 없는 시골의 많은 부모님들이 보일러를 가동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추위에 덜덜 떨며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효도하려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엄청난 불효가 된 것입니다. 어느 자식이 이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오늘 내가 옳다고 행한 선택의 의미가 내일 어떻게 변할는지 조차 알지 못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양 어처구니없이 착각하며 살아가는 우리야말로 주님 보시기에 철부지들 아니겠습니까?

현 대통령의 차남이 개인 휴대 통신(PCS)사업자 선정 의혹과 관련하여 또 다시 구설수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국민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단 5년간만 위임한 권력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양 오인하며 철없이 살다가 귀한 젊음을 스스로 망친 그 젊은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발견케 됩니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권세―그것도 남의 권세에 업혀 호가호위하면서 허망한 것을 쫓던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철부지들이 아니었습니까?

옛 국제 그룹 총수였던 양정모 회장이 `신한종금'의 소유권을 놓고 사돈간에 벌였던 법정 공방은 결국 양측 모두의 패배로 끝났음이 보도되었습니다. 그의 사돈은 횡령죄로 실형을 선고 받은 반면, 양 회장이 되찾으려 했던 신한종금 주식 1백 24만주는, 부실 종금사에 대한 정부의 폐쇄 조치로 인하여 쓰레기 조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쓰레기 조각을 놓고, 체면이고 자식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그토록 처절하게 다툰 셈이 되었습니다. 어찌 그것을 80년이나 살아온 노인들의 사려 깊은 행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노인에게서 역시 우리의 모습을 발견케 됩니다. 죽은 뒤에 죽은 우리에게 결코 휴지 조각 이상일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천륜도 인륜도 다 버린 채 매일 처절한 이전 투구를 벌이고 있는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영락없는 철부지 아이들이 아니겠습니까?

작년 가을 임영수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하여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영국의 다이애나비와 에집트 재벌의 아들 도드가 비명횡사 했던 `뽕달마'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처럼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터널이기에, 그 터널은 길고 어둡고 게다가 속이 휘어져 있어 대형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위험지역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터널이 아니었습니다. 위에 교량이 있기에 그 아래로 차량 통행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반 지하 차도였습니다. 지하 차도에 들어서는 순간 맞은편 끝이 보일 정도로 곧고 짧은 차도였습니다. 대형 사고가 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점이었습니다. 그 차도가 개통된 이래 그 속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전한 도로 위에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어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사고 지점의 지하 차도 벽과 중앙 교각에는 그들이 탔던 차가 좌충우돌하면서 긁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죽음의 자국 위에서, 순식간에 몰아 닥친 죽음 앞에서 내뱉았을 다이애나비와 도드의 외마디 비명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무엇이라도 움켜쥐기 위해 허공에서 부르르 떨었을 그들의 빈손만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불현 듯 엄습한 죽음 앞에서 부르짖는 우리 자신의 비명 소리, 허공 속에서 떨고 있는 우리 자신의 빈손을 듣고 또 보았습니다. 죽음이 코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과 동시에 아무런 쓸모없는 허망한 부귀영화만을 움켜쥐려 발버둥치다가 철저하게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될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주님 보시기에 한심한 철부지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공허한 그물을 헛되이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오늘 아침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이 철부지들아! 너희 손에 무슨 귀한 것이 있느냐?'

쿠바의 바닷가에 늙은 어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갔으나 어이 된 영문인지 한 마리의 고기도 건져 올리지를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열흘, 스무날이 너머 무려 여든 사흘이나 지났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빈손이었습니다. 마침내 84일째가 되는 날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되는 거대한 청새치(marlin)를 만나 사흘 밤낮에 걸친 사투 끝에 간신히 포획하기에 이릅니다. 그 정도의 크기라면 지난 세달 동안 공친 것을 벌충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늙은 어부는 황홀한 만족감으로 집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늙은 어부는 뜻하지 아니한 상어 떼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떼와 사투를 벌리지만, 그러나 해안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이라곤 앙상한 뼈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쓰레기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결국 늙은 어부는 쓰레기 조각을 위해 무려 90여일이나 허비했던 것입니다. 1953년 소설 부문 플리쳐상 수상작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쫓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쫓으려다 허망하게 빈손이 되어 버린 늙은 어부의 두손―84여일 동안은 쉬임없이 낚시를 던지느라, 사흘은 낚시줄을 잡고 밤낮으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느라, 그 이후에는 상어 떼들의 공격을 물리치느라 지칠 대로 지치고 찢어질 대로 찢어져 상처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늙은 어부의 공허하고 서글픈 두 손 - 그 손이야말로 바로 우리들의 손 아닙니까?

이 시간 우리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다. 얼마나 지쳐 있습니까? 우리 욕망의 발톱에 할 키우고 쫒겨 온통 상처투성이요 피투성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귀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들어 있다면 결코 나의 관속에 가져갈 수 없는 미래의 쓰레기 조각에 불과한 것들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끝나 버린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철부지처럼 살아온 우리를 포기치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시어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고백하십시다.
`없습니다. 주님! 우리 손안에 정작 귀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고작 미래의 쓰레기 조각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내밀어, 이미 우리를 향해 내밀고 계신 주님의 손을 붙잡는 자들이 되십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붙잡을 때에만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손이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붙잡을 때에만 공허한 우리의 손안에 참되고 영원한 것, 정녕 귀중한 것이 담겨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의 손이 회복되고 우리의 손이 주님의 것으로 채워질 때 우리의 인생도, 우리에 의해 이 세상도, 비로소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의 손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지금 우리 손안에 무슨 귀한 것이 들어 있는지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철부지처럼 살았던 우리가 우리의 손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찢어질대로 찢어져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손을 주님 앞에 내밉니다.
밤낮으로 수고하였음에도 텅 빈 우리의 손을 주님 앞에 폅니다. 있는 것이라곤 고작 미래의 쓰레기 조각뿐인 우리의 손을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주님의 자비로우신 손으로, 능력의 손으로, 가련한 우리의 두 손을 잡아 주소서.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손을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옵소서.
공허한 우리의 손을 주님의 진리로, 주님의 생명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영원한 주님의 귀한 것들로 가득 채워 주소서.
주님 안에서 치유되고, 주님의 귀한 것으로 채워진 우리의 손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살리는, 주님에게 붙잡힌 주님의 손이 되게 하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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