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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수도원을: 참 平和를 위하여

이사야 나무............... 조회 수 1846 추천 수 0 2009.04.17 15:19:31
.........
성경본문 : 사11:6-8 
설교자 : 한완상 교수 
참고 : 2007.12.30 새길교회 주일설교 

창세기 1:29-30, 마태복음 26:51-52, 이사야 11:6-8

 

1.멋지게 져야

지난 11월 28일 나는 대한 적십자 총재로서 제네바에서 일본 적십자 총재를 위시해서 일곱명의 일본 대표들을 만찬에 초대한적이 있다. 제네바에서는 적십자 연맹 총회와 국제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두 나라 인도주의 운동간에 우의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한 방안을 서로 논의했다. 그 때 우리 측 국제 부장이 양 적십자간 축구 시합을 정기적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좋다고 하면서 은근히 그들의 수적 우세를 과시했다. 4만 6천명을 거느리고 있는 일본 적십자사를 그 10분의 1밖에 안되는 한국적십자가 당해낼수 있겠는지를 염려하는듯 했다. 이 때 나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우리 두 팀이 열심히 싸우되, 지는 팀에게 상을 주기로 합시다.”

이 제의가 뜻밖인 듯 일본 대표들은 의아해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더 설명을 부쳤다.
“우리가 귀측에 우아하게 지기로 결심하고, 귀측에서도 우리에게 멋있게 질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침묵이 흘렀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함께 승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말에 모두가 유쾌하게 웃었다. 내친 김에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렇게 서로 지면서 결국 함께 이기는 것이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 아닌가요. 그래야 참 평화가 저절로 생기지 않겠습니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것을 인도주의 정신이라고 말했으나,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정신이야 말로 바로 역사적 예수께서 온 몸으로 실천하셨던 정신임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렇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야 말로 우아하게 지면서 마침내 모두 함께 이길 수 있는 길을 보여 준 운동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같은 새로운 삶, 곧 멋있게 짐으로써 함께 이기는 새로운 삶의 가치를 오늘의 기독교 지도층이 가장 몰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에서나 구미에서나 크게 다를 바 없는 듯 하여 더욱 나를 답답하게 하고 슬프게 했다.

그 까닭은 오늘의 기독교가 오랫동안 힘에 의한 승리, 그 승리에 의한 평화를 숭배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나 한국에서 교회 지도자의 주류가 승리주의 가치를 기독교 본연의 가치로 믿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의 힘있는 교회, 힘을 통한 승리와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교회는 역사적 예수 운동의 원래 의도와는 안타깝게도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교회 열심히 다니는 교인일수록 그만큼 예수의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마치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삶인양 착각하는 것 같다.

하기야 성서도 이 문제에 대한 언급에 있어 일관성이 부족한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이랫다 저랬다 하는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제 평화가 어느 시기보다 절박하게 우리들의 문제로 느껴지는 오늘의 상황에서 이 문제를 새롭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절대로 전쟁이 또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국민적 합의로 모아지고 있는 오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우리 민족에게 특히 한국 교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2.성서의 두 가지 다른 대응

창세기를 보면 창조에 대해 두 가지 다른 설명이 있다. 육일간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는 하나님께서 쉬셨다.(이것을 Priest story라고 한다.) P설화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우리가 오늘 주목해야할 점은 하나님이 인간과 동물에게 먹거리로 채소와 나무열매를 주셨다는 메시지다.(창 1:29-30) 원래 인간과 동물이 채식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음식 먹는 것과 피흘림은 처음부터 아예 상관 없는 일이었다. 이같은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좋다고 하셨고, 나아가 아주 좋다고 감탄까지 하셨다.

그런데 창세기 2장 5절부터 또 다른 설명이 있다. 이것은 J설화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창조되는 이야기, 부부로 만나는 이야기, 그러다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이야기, 그리고 최초의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 등이 이어져 나온다. 가인의 농경 생활은 처음부터 폭력으로 얼룩진다. 땅을 갈아 농사짓고 사는 인간 삶의 방식에서 문명이 창출 된다. 문명은 제국의 건설을 통해 더욱 그 영역을 넓혀 간다. 이 확장을 도우는 힘은 곧 폭력의 힘이다. 칼의 힘이다. 타락 이후 인간만이 이 폭력으로 같은 종(種)을 대규모로 쳐 죽인다. 동물은 육식으로 변해도, 동종(同種)을 잡아먹거나 죽이지 않는다. 결코 대랑학살을 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같은 인간을 대량 학살한다. 이같은 성향을 크로산(Crossan)교수는 문명의 정상성(normalcy)라고 했다.(God & Empire, 2007) 이같은 폭력이 정상으로 인식 되었다면 그 문명과 제국의 비극적 폭력 현실에 대해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어떻게 대응 했는가?

여기에 혼란이 온다. 두가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에 대응한다. 첫째는 노아식 대응이다. 최후심판으로 큰 물난리를 통해 인간과 그 문명을 징벌한다. 여기에 무섭게 진노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이같은 하나님의 모습은 보복신의 전형이다. 악인을 지옥으로 보내는 보복의 신이다.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를 집행하는 신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의 모습의 일단을 우리는 지금도 보게 된다. 보복적 정의이 이름으로 이라크에 미군을 대거 파견한 부시 대통령의 다급한 모습에서 슬프게도 그것을 확인한다. 아마도 최근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는 도킨스(R. Dowkins)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혹독하게 비판받고 있는 신이 바로 진노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일 것이다. 문명과 제국의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하는 폭력적 신이 바로 그의 비판의 과녁이었다.

둘째로 구약 성서는 아브라함 식 대응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서술해주고 있다. 그것은 악한 문명을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신의 대청소 작업이 아니라 희년을 선포하고 그 실천을 요청하시는 인내 깊은 신이다. 최후의 재난이나 전쟁 (아마도 아마겟돈 전쟁 같은 것)을 통해서 무서운 심판을 내리는 신이 아니라 나눔의 정의, 곧 배분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를 통해 문명과 제국을 변화시켜가는 하나님을 부각시킨다. 이같은 나눔의 정의를 그리워하는 꿈은 여러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나타난다. 대표적인 비전이 이사야의 꿈이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이사야의 비전에서는 육식동물인 사자가 채식동물인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산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확실히 창조 질서의 원 상태가 회복되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좋다>고 감탄했던 바로 그 평화의 원래 상태가 회복된 모습이다. 피흘림 없이 서로 평화 공존하는 흐뭇한 광경이 돋보인다. 서로 양보해서 이기는 우아함과 멋이 넘쳐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폭력적 문명과 제국의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은 어떤 것일까?

3.예수의 급진성의 참 뜻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당시 로마 문명과 로마 제국의 상황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참으로 새로운 너무나 새로운 대안운동(對案運動)이요, 그러기에 그것은 제국의 지도층에게는 충격적인 운동이었다. 예수 운동은 또한 토착 유대종교지도층에게도 그 새로움으로 인하여 충격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외세와 내세의 지도층은 대체로 예수 운동의 도전적 위험을 보면서도 그 참 뜻을 보지 못했고 그 메시지의 소리는 들었어도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보고도 겉모습만 보았지 그 참 의도와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했고, 듣고도 겉소리만 들었지 그 메시지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헌데 정말 지금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천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 지도층이 아직도 예수 운동의 참 뜻, 예수의 원래 의도, 그 원초적 정열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예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제국과 문명이 갖는 폭력의 정당성을 기독교 틀 속에 수용하고 있다. 승리주의 가치를 오히려 숭배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먼저 로마 제국의 상황에서 예수 운동이 준 충격은 무엇인가? 예수 당시 로마에는 황제권이 강화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곧 신이었다. 신적 존재에 인간이 붙일 수 있는 모든 거창한 호칭을 황제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주님>, <메시아>, <왕>, <신의 아들>등. 황제의 권한은 그만큼 절대화되었다. 그러기에 황제와 로마의 왕국 이외 다른 왕국을 선포하는 것은 가장 불경한 짓이요, 국가 반역 행위로 정죄되었다. 사회적 금기일 뿐만 아니라 법적 반역 행위요, 반 국가 범죄행위였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갈릴리 예수는 감히 하나님 왕국(Kingdom of God)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로마 당국에서 보면 그의 운동은 바로 불순한 반제국, 반국가, 반체제 운동으로 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로마 제국 당국은 예수 운동이 갖는 급진적 반 로마체제의 성격에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운동의 참 뜻은 이해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예수 운동과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다. 세례 요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그러나 예수 운동은 달랐다.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의 운동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그리고 그 운동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제자들과 함께 펼쳐보였다. 그것이 바로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열린 식탁 공동체 프로그램이요, 다른 하나는 무료 치유 프로그램이다. 이 두 프로그램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 펼쳤으며 절망했던 당시 민중들이 또한 즐겁게,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운동은 확산되기 시작했다. 요한은 세례를 통해 그의 회개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것은 독점식(top-down) 운동이었다. 그만이 세례를 베풀 수 있었고, 세례 집행 권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거나 이양하지 않았다. 반면에 크로산 교수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예수는 그의 운동을 제자들에게 위임 시켰다. 열린 밥상 공동체와 치유 공동체를 펼쳐가는 권위를 제자들과 나눠 가졌다. 또 그것을 위임하기도 했다. 일종의 지점 운영권을 나눠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기에 예수 운동은 중심이 없어도 번져 나갈 수 있었다. 바로 이런 특징 때문에 예수 운동은 요한의 그것보다 더 위험스럽고 급진적인 것으로 인식 될 수 있었다. 로마 당국도 그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실제로 요한이 처형된 뒤에는 그의 세례 운동은 동력을 잃어 버렸다.

그런데 예수 운동이 갖는 충격적 과격성을 좀 더 이해하려면, 그 운동이 펼쳐졌던 당시 갈릴리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적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갈릴리는 당시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가 관할 했다. 물론 로마 당국의 허락 하에 일종의 위임 통치를 하고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교활한 통치자였다. 예수께서도 그를 간교한 동물인 여우같은 존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는 로마에게 교활하게 아첨하여 그의 지배권을 연장.강화하려 했다. 마침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였다.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호수를 황제의 이름을 따라 티베리야 호수로 부르게 했다. 나아가 갈릴리 지역에 로마식 도시(티베리아), 일종의 혁신 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이같은 건설 공사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비용이 드는 만큼 세금 징수를 강화해야 했다. 갈릴리 지역 주민들, 특히 어부들의 어깨는 무겁기만 했다. 그렇기에 로마의 가혹한 조세정책, 강제적 세금 징수 행위에 대한 갈릴리 민중의 반 로마 정서는 뜨거워 지고 있었다. 그것이 폭발의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였다. 그만큼 폭력 저항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바로 그같은 상황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발동이 걸렸던 것이다.

예수 운동의 과격성은 이같은 당시 민중의 반로마 정서에서 찾을 수도 있겠으나, 정말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폭력적 저항을 근원적으로 거부했다는데서 더 뜻깊게 찾아야 한다. 로마에 대한 폭력 저항 정서가 팽배했던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는 그 폭력 저항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했던 사실에 우리는 새삼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고 예수가 그러한 저항에 뛰어든 사람들을 모조리 공개적으로 비난했거나 배척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뜨거운 민족 해방 열망을, 그것의 소중함을 그는 깊이 이해한 것 같다. 로마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 갖는 의미를 그가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같은 열정을 가슴 깊이 품고 예수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그는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젤롯당원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폭력 제국에 대해 꼭 폭력으로 저항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예수께서도 고민한 흔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칼을 마련하라고 당부하신 적이 있다.(눅 22:36) 또 제자들 가운데 시카리파도 있어 로마 제국에 대해 무력 항쟁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듯 하다. 그렇기에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무력 항쟁을 단호히 거부하셨던 예수로서는 무력저항주의자들로부터 언젠가는 배반당할 위험성을 항상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 제자의 배신은 일종의 운명인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운명을 우아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단호하게 무력과 폭력 사용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폭력 정권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활성화시켜 평화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제거한다고 확신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 운동의 급진성은 폭력 저항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런 저항을 단호하게 거부하셨을 뿐 아니라 비폭력적 대안을 몸으로 실천했다는대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적이고, 역사적 감동이 끊임 없이 솟아 나온다 하겠다.

4.예수 대안의 감동

예수 대안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겪으셨던 예수의 고뇌를 우리가 실존적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볼 필요가 있다. 그의 기도와 그 후에 곧 펼쳐지는 체포 현장 속으로 깊숙이 우리 자신이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피땀흘리며 고투하셨는데, 그것은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벌어지는 긴장 속에서 나오는 실존적 고투였다. 그가 결국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결단을 내렸는데, 여기 <내 뜻> 속에는 그의 일부 과격 제자의 뜻, 곧 무력 저항의 뜻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그같은 고투는 단순한 자기 욕망과 하나님의 뜻 사이의 긴장만은 아닌 듯 하다. 당시 절대 다수 민중이 열망했던 민족 해방은 그 나름대로 정당성과 호소력을 지닌 공공적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무력 저항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로마의 억압과 착취가 처절했기에 가슴에 비수를 품고 다니면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예수 제자들 속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겠는가? 이렇게 심정적으로 그들 열망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그들의 폭력 수단 선택만은 끝까지 변호할 수 없었으리라. 그같은 예수의 고뇌를 우리는 오늘의 처지에서 역지사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그의 기도 속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은 어떤 경우에도 보복적 폭력 저항은 안된다는 그의 <아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의 충정이라 하겠다. 참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수단 선택, 그러나 고통스러운 수단 선택의 결단이라 하겠다.

게다가 그 때 겟세마네의 상황은 문자 그대로 예수에게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긴박했던 순간이었다. 제자들은 깨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스승의 실존적 고뇌와 고투를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졸거나 잠들어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 느끼셨을 외로움을 생각해보라. 게다가 상황은 정말 절박하게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 체포 작전에 투입된 제국의 졸개들이 예수 앞에 나타났다. 아마도 제자들은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달아나기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수제자는 달랐다. 그는 이미 칼을 깊숙이 지니고 있었다. 그는 스승의 안전 보장을 위해 용감하게 그 칼을 뽑아 졸개 하나의 귀를 내리 쳤다. 베드로는 당시 오늘의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의 열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때 예수께서 보여준 단호한 태도는 우리를 새롭게 놀라게 한다. 그것은 예수의 대안이 무엇이며, 그의 원초적 의도가 무엇이며, 예수 운동의 과녁이 무엇인지 감동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명령했다.(마 26:52)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곶아라. 칼을 쓰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큰칼에 작은 칼이, 제국의 칼에 식민지의 칼이 저항해봐야, 칼은 마침내 모두를 망하게 한다는 선언은 바로 하나님의 선언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러기에 칼 사용을 근원적으로 배제해야 마침내 성공할 수 있는 운동이다. <마침내>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인내와 고충이 따르더라도 말이다. 인류 역사는 이같은 예수의 평화 선언, 비폭력 저항 선언을 뒷받침해준다. 제국은 그 칼 사용의 빈도와 그 비용의 증가에 따라 자기 속에 자멸의 씨앗을 끊임 없이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씨앗이 자라 폭력의 제도가 강해지는 듯 했으나, 마침내 그 칼의 비용으로 스스로 몰락하게 되고 만다. 이것이 제국 흥망의 역사이지 않은가 하여튼 예수께서는 칼의 멸망론을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에게 가슴시리도록 절박하게 설득해주셨다. 만약 예수께서 칼의 유용론을 수용하셨다고 가정해보면, 이렇게 베드로를 칭찬하고 독려하지 않았을까?

“베드로야 너야말로 나의 수제자 답구나. 칼을 뽑은 김에 마르고의 다른 쪽 귀도 잘라내버려라. 아니, 그의 심장에 너의 보복의 칼을 깊숙이 곶아라. 그것이 우리 운동의 안보에도 민족 해방에도 필요하다. 참으로 너는 용기 있는 우리 운동의 전사요, 나의 수제자로구나.”

그런데 예수님은 정 반대로 베드로를 단호하게 꾸짖었다. 떨어진 귀를 다시 마르고에게 붙여주시고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모든 칼 유용론자를 나무라신 셈이다. 흔히들 강자들은 자기 칼이야 말로 정의의 칼이라고 뽐내며 약자를 괴롭히고 죽였다. 약자들은 자기들의 칼이야 말로 진실로 강자의 횡포와 폭력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고 강변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부시 대통령의 목소리와 오사마 빈 라덴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칼 쓰는 일에 있어서 그 칼이 강자의 칼이냐, 약자의 칼이냐를 가려 묻지 않으셨다. 칼 쓰는 자는 그 칼로 모두 망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셨다. 강자 칼 쓰기를 합리화 해주는 십자가 전쟁이나, 약자 칼 쓰기를 정당화 시켜주는 지하드 <거룩한 전쟁>모두를 예수는 거부하셨다. 그런데 오늘 21세기에 와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회교 근본주의 신자들은 지하드를, 열광적으로 부추기고 실천하고 있으니, 2000년 전 예수님의 겟세마네 선언은 지금에 더욱 적절한 말씀으로 가슴에 다가 온다.

예수님의 대안이 우리에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감동을 주는 것은 말로 그같은 선언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칼 사용을 단호하게 거부하시면서도 로마 칼에 의해 조용히 그러나 당당하게 죽는 길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칼의 세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처참하게 당하시면서 게다가 온갖 수치와 모욕을 감수하시면서도 무서우리만치 조용하고 당당하게 처형당하는 길로 나아가셨다. 바로 거기에 감동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예수의 선택, 바로 그 패배의 선택의 깊은 뜻을 그 때나 지금이나 제국과 문명의 지도층과 종교지도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오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아예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승리주의에 취해있다. 승리주의 신앙과 신학으로 교인들을 오도 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역사를 지켜 보면 아무도 시저를, 아우구스티누스를, 티베리우스를 경배하지 않는다. 누가 지금 가야바를, 헤롯왕을 우러러 보고 있겠는가? 역사는 문명과 제국이 그 폭력의 힘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했음을 증언해 주고 있는데도 오늘의 한국 교회 지도층은 예수 운동의 의도를, 예수의 대안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5.맺으며

크로산 교수는 그의 최신작 <하나님과 제국: 로마에 저항하는 예수, 그 때와 지금, 2007>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문명과 제국이 폭력을 가속화 시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도 본질적으로 폭력 지향적인가?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왜? 그는 아일렌드 서쪽 바다에 있는 작은 외딴 섬 절벽에 세워진 수도원을 어렵게 찾아가면서 인간 본성 속에 있는 희망의 빛을 본다. 문명과 제국의 폭력이 기승을 부릴 때도 인간은 그 문명과 아주 동떨어진 외딴섬이나 사막 한 가운데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곳에서 인간들은 문명의 폭력이 빚은 온갖 추한 죄악을 회개한다. 그리고 탐욕과 독선이 만들어낸 온갖 잘못을 깊이 뉘우친다. 그러면서 그 문명의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대안을 모색한다. 이같은 수도원적인 뉘우침과 대안 모색을 통해 인류는 창조의 원상태로 나아갈 수 있음에 주목한다. 그곳에서 피흘림 없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펼쳐짐을 꿈꾼다. 그곳에서 사자가 풀을 뜯어 먹으며 암소와 양들과 친구로 지내는 꿈을 꾼다. 그곳에서는 사자가 송아지에게 지려하고, 송아지는 사자새끼와 함께 딩굴며 놀려 한다. 서로 지려 하면서 함께 평화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모습이야말로 사랑과 정의의 창조주로 하여금 <좋구나>,<참으로 좋구나> 를 연발하게 했던 평화의 힘이 아니겠나! 그런데 하나님을 감탄케한 바로 그 평화가 우리 주위에는 없다. 한반도에는 아직도 없다. 그런데 교회에도 아예 없다. 큰 교회일수록 더욱 없다. 왜? 기를 쓰고 서로 이기려 하기 때문이다. 서로 승리주의에 도취해 힘으로라도, 그것이 돈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사회 명예의 힘이든, 교인 수의 힘이든, 그 힘으로라도 이기려 하기 때문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란 뜻이 무엇인가? 서로 우아하게 지는 것을 보람있게 생각하고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아닌가. 예수님의 주옥같은 산상수훈에 있는 말씀중 가장 빛나는 말씀으로 나는 팔복에 있는 평화 선언이라고 믿는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요.”
이것을 오늘의 상황에서 풀어보면 이런 뜻이 아니겠나
"서로 우아하게 지려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들이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요.”
갈릴리 호수가 어느 언덕 위에서 선포하셨던 역사적 예수님의 이 역사적 메시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신 첫 인사 말씀으로 이어짐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요 20:19-21)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 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역사적 예수의 운동도 하나님의 평화 만들기 운동이었고 그것은 우아하고 멋지게 지려는 결단에거 마침내 아름답게 펼쳐지고 번지게 되는 운동이다. 비록 강팍한 제국의 칼 앞에서는 처절한 패배와 죽음을 겪에 된다 하더라도 마침내 부활의 능력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운동이다. 지금 우리가 서로에게 당당하게 그리고 멋있게 지려 할 때 비로소 흐뭇한 승리를 함께 맛보면서 참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서로에게 알려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오히려 그 반대의 길도 나아갈 때 우리는 다시 되돌아 오는 용기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 우리에게는 반환점이 필요하다. 되돌아 오는 길을 알려주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수도원이 아니겠나. 그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 없이 패배자 예수를 만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승리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거룩한 마당, 바로 그것이 우리 속에 있는 수도원이 아니겠나. 그 수도원이 고도의 절벽에만, 적막한 사막 한 가운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잃어버려 방황하는 삭막해진 우리 실존 속 한가운데도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라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그 축복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게 되길 바란다. 이 음성을 듣고 폭력을 정상적인 것으로 제도화 하는 문명과 제국의 삶을 대체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우리는 세워나가야 한다. 그것은 서로 은혜롭게, 우아하게 지려 함으로 함께 승리하며 평화를 만드는 새로운 문화, 곧 예수의 문화일 것이다. 서로 지려고 애쓰는 아름다운 공동체, 바로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아닌가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댓글 '1'

보아스

2009.04.19 14:23:1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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