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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부정의 신학 <십자가의 요한>

수도관상피정 박노열 목사............... 조회 수 3494 추천 수 0 2009.04.21 20:5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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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최근 부정의 신학 대하여 관심이 늘어가고 있음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몇분이  전화를 와서  정리해 보앗습니다.
아래는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 『어둔 밤』에서 발췌했습니다. 모두분께서 자세히 읽어 보시고 큰 유익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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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신학
십자가의 요한, 방효익 역, 어둔밤, (서울: 기쁜소식, 2005) pp. 64-81.

 

모든 신학이 다 기도와 연관되어야 하겠지만, 신비신학은 특별히 더 기도의 방식과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서 신비신학이란 어떻게 하면 영혼이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느냐 하는 방법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과 은총에 대한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심오한 체험은 물론이요 기도의 어떤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과 최종적 일치를 이루었는가에 대한 체험을 객관화시키고 일반화시켜 다른 신앙인들이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학문적 반성이다. 그러므로 신비신학을 정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께 대한 체험, 즉 신비체험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는 자세이다. 이 말은 곧 진실한 마음을 열게 하는 유일한 열쇠인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접촉(체험)에 대한 학문적 반성이 없이는 신비신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둘째로, 신비체험은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 체험이기 때문에 침묵 가운데에서나 본격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므로 부정적으로 표현 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부정신학(否定神學, Theologia apofatica)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신비신학은 기도를 통한 점진적인 영적 성숙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성숙의 정도에 따르는 단계적 변화에 대한 설명이 동반되어야 하며,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은밀한 구원적 해방 체험이기 때문에 상징을 통하여 설명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색과 논리적 명확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중적 부담이 있다.1) 십자가의 요한 작품들이야말로 바로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는 작품들이다. 부정신학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하는 데 있어서 부정적인 방법을 통하여 서술하는 신학적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저편에 계시며, 인간의 지성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언어로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으므로 긍정적 개념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부정신학의 뿌리는 "이 우주의 창조자와 아버지를 찾아내는 것은 힘든 일이거니와, 찾아낸다 하더라도 모두를 상대로 이를 설명해준다는 것도 불가능하다2)는 플라톤의 유명한 말을 즐겨 인용하던 필로3)이지만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안에 정착된다. 유스티노(150년경)는 인간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께 이름을 붙여드릴 수 없다고 했으며,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1151년)는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분이라고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부정신학적 이론을 그리스 철학자들의 논리에 의존해서 설명하고 있다.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에게 있어서도 부정신학은 에우노미우스의 그리스도론적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된 중요한 방법론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부정신학은 성 바실리오에게서 시작되어 니사의 그레고리오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설명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

 

초기교회의 교부들에게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이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며 세계도 역시 하나님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본질적인 차원에서 빚어지는 인식문제가 대두되었다. 존재론적 차이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실재가 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초월해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만 그분의 본질은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끌어들이고 있는 철학적 개념들을 살펴볼 때 신학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본질적인 불가지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 관한 인간의 언어적 표현들이 피조물에 관한 서술의 차원으로 결코 축소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아타나시오를 이어받아 카파도키아의 세교부들이 확립해 놓은 삼위일체론의 정식들에 있어서도 삼위의 일체성에 대한 정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은 삼위일체적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5) 바로 여기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저서 "모세의 한평생"(De vita Moysis)6)에서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무제한적이며 절대적으로 불가해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처음으로 체계적인 부정신학을 만들어낸 것이다.7)

 

하나님이 진실로 "무로부터 자유로이 우리를 창조하셨다"8)는 고백은 예수께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되시는 방식에 대해 충분히 파악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진실하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고백은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하나님께 대한 본질적 불가지성(不可知性)을 확고하게 정착시켜 놓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본질적 불가지성을 무작정 애통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도 무진장하게 위대하고 풍부하며, 충만한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로 다가옴으로써 환호할 만한 구원적 이유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고 서술할 수 있는 공식들을 확보 할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부정확하거나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 속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철저하게 성서에 바탕을 두고 이성적 지식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신비신학, 즉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신비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기타(위 디오니시오)가 또 다른 신비신학적 대안(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적 불가지성은 하나님의 본유적인 특성(무진장한   충만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단순히 인간인식 기능의 무능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9) 그래서 일찍이 유스티노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라면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어둠의 신비신학자들은 니사의 그레고리오에게서 시작되고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기타와 "무지의 구름"의 저자를 거쳐서 십자가의 요한에게 와서 꽃을 피우게 된다.10)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오리게네스11)의 주지주의와 플라톤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신비신학을 초월하여 "모세의 한평생"에서 나타나는 영적 여정을 거울삼아 이성적 지식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신비신학, 즉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고자 하는 신비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하나님은 본질(고유성)로서는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당신의 활동을 통하여 보이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과 연관된 만상을 통하여 관상할 수 있기 때문"12)라고 한다. 영혼은 알 수 없음(不可知性)이라는 어둠 속에서 당신과 연관된 만상이라는 거울에 비친 하나님을 관상한다.13) 특히 '아가서에서 말하는 신비(신비신학, 신비체험)는 바로 신비적 관상(μυοτικη θεωρ?α)을 말하는 것이라고 처음 언급했던14)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말씀"이 당신께서 현존하여 계시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시기 때문에 영혼은 어두운 밤에 "말씀"의 현존을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고 한다.15) 이런 이유에서 디오니시오가 정착시킨 부정신학이 필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니사의 그레고리오에 뿌리를 둔 전통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16)

 

디오니시오에 의하면, 하나님께 대한 지식(앎)을 서술하는 신학적 방법론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 계시 중심의 하향적 신학이라고 하는데 긍정적인 서술어들을 통하여 설명하는 신학적인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감각적인 많은 것들로부터 추출된 개념들을 하나님의 초월적인 특성들에 적용하기 위해 끌어들인 상징들을 통해 설명하는 신학적 방법(상징신학)이다.17)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적 언어들이 지니고 있는 유한한 속성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적 특성을 드러내는 상향적 신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서술어들을 통하여 설명하는 신학적인 방법이다.18)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은 교부들이 전통적으로 전개해온 신학적 서술 방법론이었으나 세 번째 방법은 프로클루스를 비롯한 신플라톤주의 자들이 내세운 학문적 서술 방법론이다.19)

 

긍정적인 방법은 상징과 비유와 개념들을 통하여 신학을 전개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실질적으로 확실하게 긍정하고 있는 진술들을 통해 얻어진 인식에 대한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서술방법을 말한다.20) 다시 말해서 상징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긍정신학이란 하나님께 대하여 언급할 때 하나님에게 어떤 사물들이나 개념들을 계속 첨부시키면서 표현하는 것이며, 우리들이 감각의 세계에서 얻어낸 비유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데 쓰도록 전환한 것들이다.21) 상징신학은 도마 사도처럼 어떤 방법으로든지 만지고 보아야 하는 것처럼 실증주의적인 서술방법으로서 논리적인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신앙생활의 초보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설명 방법이며, 기도생활에 성실한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되도록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상징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순성 때문에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과 신앙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들을 영성생활의 정상으로 데려가기 위한 기초를 놓아주는 데 매우 적합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시기에 우리는 그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선하시교, 아름다우시다. 등의 "긍정적이며 서술적인 개념들을 많이 끌어들여 첨부하는 것으로서 높고 뽀족한 산의 정상에서부터 넓고 평평한 산 아래로 내려오는 듯한 방법"22)이다 즉 삼각형처럼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가지 표현들이 첨가되는 가운데 점점 넓은 테두리를 형성하는 것과 같은 설명 방법이다.

디오니시오가 "거룩한 이름들에 대하여"에서 다룬 내용들처럼 이성적 신학, 즉 개념적이며 사변적인 신학은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그런 것처럼 논리적 반성의 과정을 제시해주는 것이며. 빛 속에서 살기 위하여 혹은 태양 빛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추는 사람처럼 계시된 진리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빛이 강하더라도 그것은 태양이 아니라 단지 빛일 뿐이다. 이러한 긍정 신학적 전개 방법은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신 분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지만 본질을 꿰뚫지 못함으로 인해 오히려 이해할 수 없도록 하고, 수많은 표현들이 홍수를 이루게 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단계를 지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알 수 없는 분으로 복잡하게 만들어 놓게 되는 특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23)  하나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관하여 우리가 확실하게 설명하는 많은 긍정적 진술들은 상징과 유비와 개념들을 통하여 제 아무리 많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는 내용들, 아니 오히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진술들일 뿐이다. 이렇게 긍정적인 설명들은 거룩한 속성들이나 하나님을 설명하기에는 덜 타당한 것들이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긍정적 설명들이 신성에 부합한다 할지라도 단순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오히려 복잡하게 늘어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거룩한 이름들에 대하여"라는 작품의 방법이 바로 이 방법인데, 스콜라신학과 사변적 신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거룩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실재에서부터 출발하는 상징은 어떤 부분에 가서는 매우 초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설명하는 많은 긍정적 내용들(긍정신학과 상징신학)이 우리 이해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여 있기 때문에 그 초월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긍정한 바를 부정해야 한다(부정신학), 부정적 방법의 신학을 하는 이들(모든 피조물)은 창조의 정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화(神化)의 왕관을 쓸 때까지, 즉 저편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모두'(Todo)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이 편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께 대한 숱한 설명들을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Nada)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24)

 

우리가 이해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앎이므로 존재하는 것들의 영역에만 한정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들을 초월하는 것들에 대한 설명은 지식을 뛰어 넘는 것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고, 알 수 있다. 예를 든다면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는 긍정신학의 절정이다. 우리는 성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신성의 원천이시고, 예수님과 성령께서는 신성의 소산으로서 그 씨와 꽃이며, 모든 존재를 초월하여 계시면서도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빛이시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렇게 배웠을 뿐, 또한 하나님은 존재를 초월하는 분이시기에 그분에 대한 설명을 개념적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그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신앙의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개념들을 가지고서는 궁극적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런 개념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 부정신학이다. 그래서 부정신학, 즉 하나님께 대한 앎을 추구하기에 필요한 부분적인 서술방식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지(공적 계시) 않는 한 사람은 실질적으로 그분에 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완전한 타자이시며 피조물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시다. 즉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매여 있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들에게 매이지 않으신다. 창조계는 그분의 충만함이나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 자체로 완전하시며 근본적으로 창조된 어떤 지성도 그분을 이해할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그분을 현양하는 표현이 제아무리 거창하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아니 단지 인간의 표현일 뿐이요, 근본부터가 다른 까닭에 결코 정확하거나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 자체도 부정신학에 속하게 된다.25)

 

하나님께서는 존재나 생명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어 계시므로 어떤 빛이나 이성 혹은 지성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분이시다.26)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어떤 종(種)이나 유(類)에 포함되는 분도 아니며("가르멜의 산길", III,12,1), 인간이 경험할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신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물들의 실재를 설명하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부정의 방법을 통해 진리에 오르기를 더 원한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부여하는 모든 명칭조차도 적절한 것이 못 되며, 긍정적으로 확정된 말들은 표현할 수 없는 신비에는 항상 적합하지 않으므로 오직 하나님께 대한 인식은 부정적인 방법과 닳지 않은 것(비유사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27) 하나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에 관하여 확실히 그렇다고 긍정하는 동시에 긍정한 바를 부정해야 하는 부정신학이 본래적인 전통적 신학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지식(앎)이라면 무지를 통한 지식일 수밖에 없다. 교부들이 이루어놓은 신비사상의 체계에는 독창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부정신학, 즉 신비신학의 배후에는 신플라톤주의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부정신학적 방법은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인간 인식능력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보여주시기 전에는 인간은 그분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벽한 타자'이며,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이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인간의 방법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최고 지성에서 나오는 어떤 표현을 그분께 사용해도 그런 단어들이 하나님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28) 디오니시오가 말하듯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분에 대하여 부정의 방법을 통해 말할 때에는 그분에게 가장 멀리 있는 특성을 부정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즉 그 어떤 표현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표현을 하나씩 제거해야 한다. 산 아래에서 뽀족한 정상(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긍정적 방법과 반대로 테두리를 하나씩 벗겨내야 한다.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는 것에서부터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적 방법이란 하나님은 그러한 속성을 초월해 계시기에 하나님을 사랑이나 선하심이 아니라고 부인하여도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에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고, 또 그렇게 할 때 이해가 수월하게 된다. 디오니시오의 신비신학적 논증 과정에서는 부정이 긍정보다 우월하지만 하나님과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긍정과 부정을 모두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29)

 

부정적인 방법의 논리는 하나님께 여러 가지의 완전성을 아무리 많이 부여한다 해도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한 모든 정의들은 피조물들을 통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잘못된 지식들이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탁월한 신비들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30)을 알게 되며, "모든 지성적 작용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31)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지식을 부정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 물론 긍정적인 방법에 의한 서술. 즉 긍정적인 용어들은 물론이요 부정적인 용어들조차도 하나님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표현하기에는 부정적인 방법,무지의 방법을 통한 서술이 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신앙과 신비의 어둠 안에서만 인간에게 이해되고, 인간과 만나주시는 분이므로 항상 알려지지 않는 분이시다. 그래서 "부정신학으로 나아가는 길은 자기 자신의 정화를 끝낸 연후에 자연의 만상을 통한 관상, 즉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관상하는 경지에까지 이미 올라와 있는 영혼이라야 들어설  수 있는 길이다."32) 또한 "부정신학은 영혼과 하나님의 은밀하고 감춰진 관계에 대한 문제이며, 하나님 안으로 향한 영혼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33) 다시 말해서"부정의 길은 어둠, 고통, 침묵, 해방, 심지어는 무(無)의 길이다. 없음이다. 이 모든 것들은 침묵을 경험하는 기도요, 언어적인, 구술적인 그리고 상상 속의 이미지들을 비워 내는 기도요, 해방시키는 기도요, 고통을 감내하는 기도이다."34)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요한이 "어둔밤'과 "가르멜의 산길"에서 서술한 내용이다. 신비신학자들은 부정신학을 말하면서 관상기도와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사랑으로만 알 수 있으며,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만 그분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고, 이 사랑이 표현되고 체험되는 통로가 바로 기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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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방효익, "날개 하나로는 날 수 없다" 성바오로, 1998. 55-56: 방효익, "십자가의 성 요한: 영혼의 노래에 수용된 혼인적 상징의 이유와 근거", 193-200; Daniel de rablo, "Amor y conorimiento en la vida mistica", Universidad ponticia de Salamanca, Madrid, 1979. 41-90.
2) 플라톤?박종철·김영균(공동역주), "티마이오스". 서광사, 2000. 78(28c).
3) "필로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며 다만 그 업적을 통하여 인간이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부정신학은 그 원조가 누구냐 하는 주장이 각양각색인 점을 보면 확실히 잘못 태어난 자식인 것 같다. 하지만 필로야말로 부정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을 만하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알 도리가 없으며 하나님의 본질(고유성)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련을 맺을 때에 한해서 인간이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서 필로는,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후대에 가서 크게 발전된 바 있는) 한 가지 구별을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활동, 즉 활력과의 구별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알 수가 없으나 그분의 활동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같은 구별은 '출애굽기'에서 스스로를 원래 계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신 존재자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능과의 구별 개념으로 흔히 표현되고 있다"(앤드루 라우스, 배성옥(역). "서양 신비사상의 기원", 분도출판사, 2001, 44-45) 참조. 디오게네스 알렌. 정재현(역).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7. 37-112.
4) 참조: Vladimir Lossky,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New York 1974, 18-23, 13-35.
5) 참조: 요셉 라찡거, 장익(역),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분도출판사. 1974. 130; 버나드 맥긴. 존 마이엔도르프. 장 레끌레르끄(편집). 유해룡 외 3인(공역)."기독교 영성 I" 은성, 1997 427-476. 삼위일체에 관한 격언은 다음과 같다: "기본 속성들은 다섯 개. 관계들은 네 개. 위격들은 세 개, 발출들은 둘이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증명은 아무것도 없고. 이것이 성삼위일치이다" (G. 하센휫틀. 심상태(역), "하나님: 과학시대를 위한 신론 입문" 성바오로. 1983, 264).
6) 참조. 아달베르 함만, 이연학·최원오(역), "교부들의 길". 분도출판사, 2002, 166-167.
7) 참조: 니사의 그레고리오. 최익철(역), "모세의 한평생" 가톨릭다이제스트. 1993, II. 236-239; 버나드 맥긴, 방성규·엄성옥(역), "서방기독교 신비주의의 역사", 은성, 2000, 225.
8) 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179-298항
9) "모든 개념적인 것들의 최상의 원인은 결코 개념적이지 않다. 상승적 단계에 이제 첨가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원인은 영혼도 총명함도 아니며. 영상이나 표현이나 이성이나 지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말도 아니고 지성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원인에 대하여 말을 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숫자도, 질서도, 광대함도, 초라함도, 같음도, 유사함도, 차이도 아닙니다. 움직임도 아니고, 멈춤도 아니며, 쉼도 아닙니다.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권력도 아닙니다. 빛도 아니며, 사는 것도. 생명도 아닙니다. 주체도 아니고, 영원함도. 시간도 아닙니다.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인식도. 진리도 아닙니다. 왕국도. 지혜도, 하나도, 일치도 아닙니다. 거룩함도, 좋음도,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영도 아닙니다. 아들이 됨도, 부성도 아니며. 우리만이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있는 것들의 무엇도 아니고, 없는 것들의 무엇도 아닙니다. 아무도 원인이 그렇다고 알지 못하고. 원인이 누구를 안다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이유도. 이름도. 지각도 없습니다. 어둠도. 빛도 아니며, 잘못도, 진리도 아닙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최고의 원인보다 하급의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혹은 부정할 때에 아무것도 거기에 첨가하거나 제외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완전한 것에. 그리고 있는 그대로 그렇게 유일한 원인에게 긍정을 첨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한계를 벗어났고 절대적으로 단순한 분의 초월성 앞에 모든 부정은 초라하기만 합니다. 아무것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디오니시오, "신비신학에 대하여", 5장).
10) 참조: AA. VV., "Experiencia y pensamiento en San Juan de la Cruz", EDE, Madrid   1990, 97-99: "기독교 영성 I" 131-137: "Dictionnaire de Spiritualite", VX, 509-511.
11) "오리게네스에게 있어서 영혼은 점점 더 밝아오는 길을 추구하는 반면에(영혼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눈앞의 어둠은 사라져버린다) 니사의 그레고리오에게서는 영혼이 점점 더 깊어지는(캄캄해지는) 어둠으로 나아간다. 이 점에 있어서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필로 사이에 유사성이 드러나는 바, 두 사람 다 오리게네스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불가지성에 관하여 근본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거룩한(신적) 어둠으로 들어간다는 그의 사상에 더욱 풍부한 내용을 담아줄 수 있었던 점으로 보아 필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된다"(앤드루 라우스, 앞의 책, 132)
12) 니사의 그레고리오, "De Beatitudinibus. Oratio", VI: PG 44, 1269A.
13) 참조. 니사의 그레고리모 "모세의 한평생", II, 162-163: Id.. "De Beatitudinibus Oratio" VI: PG 44. 1270-1271; Id., "아가서 주해", XI: FG44. 1000-1. 14) 참조: 니사의 그레고리오. "아가서 주해", I: PG 44,765A: Louis Buyer, "Mysterion. Du mystere a la mystique", O.E.I.L., Paris 1906,227-229.
15) "신부는 거룩한 밤(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다. '신랑'은 이 거룩한 밤에 찾아오지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분이 어떻게 밤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본성으로 모습을 감추고 계시며 손에 화실하게 잡히지는 않으면서도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께서 현존하여 계시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시기 때문이다"(니사의 그레고리오, "아가서 주해". XI: PG 44. 1001B-C)
16) 참조: 니사의 그레고리오, "모세의 한평생", 196-2l6: 마크 A. 매킨토쉬, 정연복(역). "신비주의 신학". 다산글방 2000. l02-103.
17) 참조: 앤드루 라우스. "앞의 책", 258.
18)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알려져 있다. 지식을 통해서는 물론이요 무지를 통해서도 알려진다. 그분께 대한 지식은 이성학문, 접촉, 감각, 의견 생각. 이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 가능하다). 한편 절대로 알 수 없으며, 말로 담을 수 없고, 이름을 통한 정의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아니며 그들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모든 것들의 모든 것이며 모든 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들에 모든 것을 드러내셨으나 어떤 것이라고 하면서 그분을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디오니시오, "거룩한 이름들에 대하여" 7. 3)
19) 46) 참조. 전광식. "신플라톤주의의 역사", 서광사, 2002, 129-130.
20) "긍정적인 방식은 긍정에서 시자하며. 인간의 속성을 빌려 하나님을 서술하되 거기에다 무한한 능력을 가미하여 들어 높이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요, 빛이요 생명이요, 능력이요. 권능이요. 신비요. 그 밖의 긍정적인 내용이 부여될 수 있는 모든 것이시다. 이 같은 속성들은 인간의 이해 능력 일체를 철저하게 초월하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의미와 신적인 의미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이 있으며 차이는 질적이라기보다 양적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 성서적 시각이요, 비록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비난의 여지는 있지만 그런 여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우리네 미덕과 기품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이 보호막이 되어 차단해 주고 있다"("무지의 구름", 14-l5).
21) "추측컨대 당신은 이 책(의 내용)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시된 '신학개론'과 '거룩한 이름들에 대하여'에서 다룬 것들이 '상징신학'에서 다룬 것처럼 매우 폭넓은 내용이었다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높이 날면 날수록 지성적인 것은 갈수록 점점 단순하게 표현되므로 적은 수의 말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지성이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는 저 어둠으로 우리가 들어가고. 거기에(어둠) 도달하게 된다면 말문이 막히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침묵 안에,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머물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책(신비신학을 제외한 저서)들에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서 추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려오는 좁은 길은 상념(개념)들이 홍수를 지게 했고. 한 단계를 지날수록 (개념들이) 더욱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가장 낮은 바닥에서부터 정상으로 올라가는데 더욱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말이 필요 없게 됩니다.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면 완전한 침묵이 감돌게 됩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과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긍정적인 방법으로 출발하던 당신에게는 부정의 방법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한다는(알게 된다는) 것이 이상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무런 긍정으로도 이르지 못하게 되는 어떤 사람(인격)에 대해 긍정적인 확인을 할 때에는 그분에게 가까이 있는 것 안에서 우리들의 긍정을 기초로 삼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부정을 초월하는 분에 대하여 부정의 방법을 통해 말을 할 때에는 그분에게 가장 멀리 있는 특성을 부정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기나 돌이 아니라 생명이고 선이시라는 사실을 긍정하기가 더욱 편하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름이 붙여졌고 이해된 존재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며. 취하거나 화가 난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습니까?"(디오니시오. "신비신학에 대하여". 3장)
22) 방효익 "날개 하나로는 날 수 없다". 90.
23) 참조: 디오니시오, "신비신학에 대하여". 2장.
24) 참조: 십자가의 요한, "가르멜의 산길" I.4,3; II,7.5; II,29. 5:Id. "사랑의 산 불꽃". 1,32; Id.. "Dichos de Luz y Amor", 127; Federico Ruiz, "Mistico y Maestro San Juan de la Cruzr", EDE, Madrid 1986, 84-87.
25) 참조: "무지의 구름", 15: 요셉 라징거, "앞의 책", 129-130.
26) 참조: 디오니시오, "천상적 계급에 대하여", 2,3.
27) 참조: 디오니시오, "거룩한 이름들에 대하여" 2,4; 13,3, "천상적 계급에 대하여". 2.3. "지각할 수 있는 실재를 초월하는 원인은 절대로 지각적인 것이 아니다. 보편적 원인은 창조된 모든 것 위에 있다고 우리는 말했습니다. 본질이 없는 것이 아니며 생명이나 이성이나 지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나 형태나 질이나 양, 그리고 무게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도 있지 않으며 시각도 촉각도 그 보편적 원인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감각들도 느끼거나 도달하지 못합니다. 무질서나 지상의 고통들로부터 오는 동요를 겪지도 않습니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예견할 수 있는 동의들도 그 보편적 원인을 바꾸어놓지 못합니다. 빛이 필요 없으며, 변화나 타락이나 몰락을 체험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존재도 첨가되지 않고. 가지지도 않으며, 감각들의 주도권 아래에 있는 어떤 것도 지니지 않습니다"("신비신학에 대하여", 4장)
28) 참조: "무지의 구름", 14-15. "하나님은 영(zero)이시다"라는 긍정신학적 명제는 비유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 아니시다"라는 부정신학적 명제도 역시 신비적으로는 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이라는 기준에서 아흔 아흡은 백이 아니기에 아흔 아흡이 아무리 백에 근접해도 아흔 아홉을 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아흔 아홉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참조: 버나드 맥긴.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의 역사" 277-275: 디오니시오, "신비신학에 대하여", 5장; 방효익, '날개 하나로는 날 수 없다" 92-93)
29) 참조: 디오니시오. "거룩한 이름들에 대하여". 2. 1-4.
30) 디오니시오스, "천상적 계급에 대하여", 1.3.
31) 디오니시오스, "거룩한 이름들에 대하여", 2.7.
32) 앤드루 라우스, "앞의 책", 251.
33) 앤드루 라우스, "앞의 책", 255.
34) M. 폭스/R. 쉘드레이크, 이정배(역), "창조, 어둠, 그리고 영혼에 관한 대화". 동명사, 1999. 172.
35) 참조: "무지의 구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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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신학은 무엇이며, 부정의 신학은 무엇인가?

 

본 글은 위 디나시우스의 전집에서 발췌한 글(p215~)이다.

 

나는 [신학적 진술] (Theological Representations)에서 긍정의 신학에 적절한 개념들을 다루었다.( * 주 : 이 가상의, 도는 유실된 논문은 "하나님의 이름들"로 요약되어 있다) 거룩하고 선한 본성이 하나요 셋이라고 언급되는 의미, 어찌하여 그것의 특징이 아버지의 신분과 이들의 신분이라고 단전되는지, 성령신학의 의미, 선함에 대한 이와 같은 핵심이 되는 빛들이 실체가 없고 나눌 수 없는 선으로부터 어덯게 나오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이렇게 발아해 나오면서 그 안에,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있는 영원한 기초와 분리되지 않을 수 있는지 등을 다루었습니다(* 주 : 빛과 발아하는 식물은 성령과 아들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나는 개별적인 존재를 초월하시는 예수께서 어떻게 참된 인성을 가진 존재가 되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신학적 진술]에서는 성경의 다른 계시들도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들"에서는  어던 의미에서 하나님이 선, 지존자, 생명, 지혜, 능력, 그밖에 하나됨을 나타내는 개념적인 이름들과 관련된 것들로 묘사되는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상징신학]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 하나님 고유의 형태와 상징과 도구들,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들, 그리고 하나님이 지니신 장신구들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노염, 슬픔, 분노, 하나님이 취하셨다고 묘사되는 경위, 하나님의 맹세와 저주, 주무심과 걸으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 진술들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를 다루었습니다. 당신은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풍부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알아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진술]과 하나님에게 알맞은 이름들에 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상징 신학]에서 말할 수 있는 것보다 간닺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로 오를수록, 우리의 단어들은 우리가 형성할 수 잇는 개념들로 한정됩니다. 이제 우리는 지성을 초월하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면서, 우리 자신에게 단어들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말을 못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전에 저술한 책들에서는 가장 존귀한 범주에서부터 가장 ㅂ;천한 범주로 내려가면서 논증하면서, 각각의 단계를 내려갈 때마다 계속 증가하는 개념들을 받아 들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낮은 것에서 초자연적인 것으로 올라가면서 논증하는데, 논증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말을 더덤게 됩니다. 그리하여 논증이 정점에 달하면 완전히 침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논증은 마침내 무어라 묘사할 수 없는 분과 하나가 될 것이기 대문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주장을 포함하는 방법을 가지고 가장 고귀한 범주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은 의아해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긍정적인 주장을 초월하는 것을 긍정할 때에는 그것과 매우 비슷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하며, 그렇게 하면서 모든 것이 의존하는 대상을 긍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부인을 초월하는 것을 부인할 때에는, 우리가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와 아주 다른 특성들을 부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기나 돌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생명과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더 접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게 말과 생각에 속한 용어들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술취함과 진노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습니까?  -박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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